모진 어려움과 눈물의 고통을 통해 얻어진 빵은 그 가치가 소중합니다. 질병으로 고통 당하며 신음하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소생했을 때 그 건강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아가던 사람이 사랑과 인정과 존경을 받을 때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자유를 잃고 고통 당하며 신음하던 사람이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그 자유의 가치는 얼마나 큰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자유로운 세상을 향해
나는 새였다. 슬픈 음악을 노래하는....
나는 새였다. 항상 지루한 말을 반복하는.....
나는 새였다. 나는 새였다. 날지도 못하는 떨어진 날개를 가진...
나는 새였다. 날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는 새였다. 나는 자유를 잃고 방황하는....
나는 새였다. 오 하나님! 나는 이제 날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인간을 참 인간 되게 하고 최고의 가치와 행복을 갖게 합니다. 비록 가진 것이 많고 위치가 높다 할지라도 그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자유가 많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그 넉넉함의 자유가 있습니다. 지식과 학문을 쌓은 사람도 그만큼 지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 힘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가 많습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경이 주는 자유가 큽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누리는 자유는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평안과 참된 안식을 제공하게 되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데 이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상실한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원받는다"는 말과 "자유를 얻는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풀어준다",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묶인 모든 결박들로부터 자유를 누리도록 풀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결박으로부터 풀려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성으로 하나님과 자유로운 관계, 천지만물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최고의 행복이며 최대의 영광이 됩니다.
자유로운 존재는 창조의 형상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자유인의 찬양, 자유인의 행복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축제요, 예배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행복을 얻습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돈을 벌어도 돈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권세를 얻거나, 명예를 얻거나, 세상에서 그 어떤 것을 얻든지 그것을 얻고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고, 그것에 매이면 복이 되지 못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했습니다. "쉰다"는 말은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쉬지 못합니다. 근심은 우리 마음을 결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쉼과 평화를 얻을 때 자유인이 됩니다.
어느 탐험가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어서 새장에 가두어 가지고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장에서 계속 푸덕푸덕 푸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은 새장 문이 열렸습니다. 새는 망망한 대해 한 가운데로 도망하는데 성공했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을 높이높이 날아올랐고 새장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이 사람은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와서 날개의 힘이 지쳐 가지고 그 갑판 위에 그냥 툭 떨어져서 쓰러지는 겁니다.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고 물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이 배를 향해서 다시 돌아온 겁니다. 온 힘을 다해서 간신히 돌아와서 갑판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어 담아서 다시 새장에 집어넣었습니다. 더 이상 이 새장은 그들에게 감옥이 아니었고 이제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새장에 있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목마름
여러분 참 자유가 무엇입니까? 알면 자유이지만 모르면 필연입니다. 알면 은총이지만 모르면 숙명입니다. 내가 처한 처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이것을 알면 그 어느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자유가 있고 거기에 행복도 있습니다. 푸른 창공을 날아간다고 해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 자유의 의미,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해 왔던 것은 "자유"였습니다. 자유를 염원하던 사람들은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자유를 가로막는 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 진리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며 때로는 일생을 다 바쳐서 도(道)에 이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떤 비밀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으며 그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지적(知的) 자각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생명을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자유를 추구했는데 이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면,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죄악의 요소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진정한 하나님의 자유를 그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자기 얼굴에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보이기가 두려워 얼굴에 너울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 시대의 이야기로 끌어들입니다. "오늘날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완고해져서 그 마음의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의 너울은 마음의 너울로 비약됩니다. 모세의 너울은 자기의 영광을 지키려는 허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으로 법을 삼는 사람들도 말씀을 읽고 깨닫지만 사실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이것은 흔히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포함하는 누구나 해당되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알게 되었고 깨달았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이것은 모세의 얼굴에 남아있는 너울과 같은 여전한 허세입니다. 그냥 그런 양하고 사는 껍데기, 너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너울을 뒤집어쓰고 자기를 가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로 돌아갈 때,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너울은 완전히 제거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행위가 무엇을 말하는가? 너울을 사이에 두고 누리는 허세, 모든 차별과 모든 정죄함을 벗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정죄함을 벗어버리는 것이 "영"이고 그 영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이 길은 우리를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18절).
우리가 사는 천체는 수만, 수억 년 간 정해진 괘도를 돌면서 안정된 길을 간다고 하지만 그 하나하나를 볼 때는 안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과 그것에 반발해서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부지런히 달아나는 원심력의 힘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맹렬한 속도로 끌어 다니고 맹렬한 속도로 달아나는 힘이 조화를 이루며 수 만 수억 년을 정해진 괘도를 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정, 조화, 평화라고 하는 것들도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대립되고 모순되는 힘의 각축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세어져 균형이 상실되면 긴장과 각축도 사라지지만 따라서 안정과 평화도 끝장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위선의 너울을 쓰고 있을 때 참과 거짓의 구분이 분명하고, 바른 것과 아닌 것의 구분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너울을 벗어 던질 때, 우리의 진실한 모습 안에 서게 될 때, 참은 거짓을 포용하고, 거짓은 참 속에 녹아 들어가는 큰 어울림이 있게 됩니다.
인간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
본질적으로 인간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은 외형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기인됩니다. 인간을 노예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은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파멸시키는 "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부패와 불의한 행동에는 항상 죄가 그 원인이 되며,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실로 죄의 세력은 그 영향력이 광대하여 사람의 지·정·의 모든 면에서 인간을 얽어매고 종국에는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더 지능적으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적 사슬인 이 죄의 세력에 매여 있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현대인의 병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무의식과 무감각입니다. 잡혀가는 사람들 가운데 죄에 대해서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19세기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을 치유하지 않고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세력이 우리를 끌고 가면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의해 끌려가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
그러면 우리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느끼는 자유에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사상적 자유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유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런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 자유"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자유는 다름 아닌 바로 죄로부터의 해방으로 주시는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모든 죄의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는 참 자유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누리는 참 자유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요 8:35)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자유와의 관계를 한 가문(家門)에 매인 종과 상속권을 가진 아들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칭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죄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참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자유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할 것입니다. 한편 본문은 "참 자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인류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5: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죄 문제를 우리 주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참 자유를 주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며 참된 자유를 주십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과연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내 생의 의미를 바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물질, 환경,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수건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또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도 없고, 이성과 감성의지가 다 병들었기 때문에 결코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 영이 자유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께 얽매일 때 비로소 자유한 것이다"라고 자유의 역설을 말합니다. 여러분, 사랑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진리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하나님의 은총에 사로잡힐 때 거기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사랑이요, 용서요, 희생이요, 겸손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고 그 영이 있는 곳에 오로지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참 자유를 알고, 참 자유를 지키고, 그 자유 안에서 참으로 주의 은혜를 감사할 때 생명력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다시 광복절을 맞이했지만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해방의 날을 맞이하기까지 건너야 할 강이 허다합니다.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어느 세월의 포구에 닻을 내릴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다시 남의 종이 되지 않으려면 주님의 종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노예가 되어야 진정한 해방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참된 믿음으로만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회개하지 아니한 죄가 있어서 우리는 자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참 자유의 뜻을 모르기에 그 자유를 지켜가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시고 온전한 자유를 누릴뿐더러 많은 속박에서 시달리는 우리의 귀한 주의 백성들을 자유케 할 수 있는 주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영에 온전히 사로잡히고 충만함을 입어서 온전한 자유인으로서의 생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믿음을 소유하여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시고 이 민족에게 참된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