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방법 2001-12-13 21:04:26 read : 190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10월 7일
골 3:15-17
내 입맛은 그냥 있지 않은가?
신앙이 좋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다니니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한 번은 거리에 나가서 고기 한 근을 사 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고기를 손에서 놓쳐 버렸습니다. 때마침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다가 고기를 물고 달아납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개는 사라졌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감사합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묻기를 무슨 감사한 일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 하는 말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의 입맛은 그냥 있지 않은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입맛이 없으면 별로 감사한 일이 못됩니다. 환경이나 여건이 때로는 삶의 내용이 너무 빈곤하고 열악할 지라도 생각과 사고가, 아니 믿음의 자세가 건강하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캄캄한 밤에도 별을 보고 감사합니다. 검은 구름 위의 무지개를 보고 감사합니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보고 감사합니다.
"감사하라"고 명령한 이유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감사의 내용이 먼저 있고 따라서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사가 나오면 될텐데 왜 성경의 여기저기에서는 감사를 명령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감동될 때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예배에도 참석해야 그것이 진정한 기도요, 찬송이요,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에 감동도 없이 신앙적 행위를 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육체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아무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하여도 우리의 육체가 가져다 주는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100%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의 거듭난 속 사람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나의 육체에 근거한 생각이 조장합니다. 사단은 바로 그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추구하는 하나님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합니다.
세상의 여러 권력을 통해서 위협하기도 하고, 주변의 친인척을 통해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사회에서 "왕따" 당하게도 하고...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런 종류의 공격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결단을 부추깁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공격들은 굉장히 초보적이고 단순하기만 합니다. 보다 고차원적인 전략은 바로 우회전술입니다. 신앙인을 가장하고 우리에게 그럴 듯한 신앙적 이론으로 다가서면서 회유하는 전략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위선자 전략"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파고듭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죄가 있었던 사람에게는 자꾸 그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고 완전하지 못한 우리의 삶을 파헤치며 "네가 어떤 놈인데..."하면서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그래도 잘 안 먹히는 자에게 사용하는 것이 "자발성 이론" 전술입니다. 신앙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낙담 될 때가 있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출석하다보면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신앙 생활이 사라지고 신앙 생활이 하나의 문화와 습관의 관성으로 진행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때를 틈타 사단의 가장 고차원적이고도 효과적인 "자발성 이론" 전술을 펼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음 속에 진정한 신앙이 없이 그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올바른 신앙적 태도는 없이 율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한 선지자의 글들을 예로 들면서 마음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위선"이요 "죄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단 진정한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모든 신앙적 활동을 중단하라고 제시합니다.
신앙 생활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폭력적인 박해는 평소 좀 거칠고 모난 성격의 소유자들을 통해서나 부도덕한 권력집단을 통해 시행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이러한 "자발성 이론"으로 충고와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위의 성격 좋고 인간성 좋은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나옵니다. 함께 신앙 생활을 하진 않지만 마음씨 좋게 협조해 주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교회를 오래 다녀서 꽤 신실한 크리스챤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아니면 내 마음 속에서부터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유혹은 거절하기도 쉽지 않고 또 때로는 자신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흑백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애매한 회색지대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 고차원적인 사단의 전략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단의 전략입니다. 오히려 굉장히 기도하기 싫고, 찬양도 하기 싫고, 기도회도 가기 싫은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때라는 것을 생각하며 경건의 훈련에 임하는 자세로 우리의 몸을 복종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생활은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뜻, 지켜야 할 의무사항
혹시 마음에 그러한 생각이 들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라는 것을 상기하며 오히려 그분의 은혜주심을 기대하십시오. 이러한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챤에게 "감사"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사항입니다(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다시 말하면 마음이 없을 때 신앙적 행위를 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위선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따라서 "감사"는 사망에서 자유케 되고 참 생명을 맛보게 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감사"는 그러한 구원의 역사를 잊지 않게 만들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 역동적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수단(방법)도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 엔진에 연료가 들어가 불이 탈 때는 엔진을 움직이고 그 힘으로 차를 움직이고 밧데리를 충전시키지만 정지되어 있는 엔진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밧데리의 전력을 이용해 시동모터를 돌리고 강제로 엔진을 회전시키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밧데리 마저 다 소모가 되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밀어서라도 엔진을 회전 시켜야 시동이 걸립니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감정과 외부로 드러나는 감사의 표현은 이러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불이 붙어 신앙생활 할 때는 그 힘으로 움직이고 감사한 생활을 하지만 그 불이 꺼졌을 때는 마치 밧데리로, 또는 강제로 밀어야 엔진이 돌아가고 연료가 공급되어 불이 붙듯이 때로는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사와 기쁨과 기도의 생활을 할 때 다시 불이 붙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고백하고 찬양하는 행위와 감사의 내용 자체와는 상호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때로는 답답하여 기도도 하기도 싫고 찬양하기도 싫지만 마음을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어 감사의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생각은 해 보기도 전에 "그래도 안 돼, 별수 없어"의 생각을 집어넣지만 믿음으로 "감사하라"는 명령을 실천할 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는데 감사를 해야만 되는 것은 동기가 불순한 수사관의 "강요에 의한 자백"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혐의를 벗지 못하는 사람에게 정확한 사실을 짚어주고 확인시키는 것은 "강요된 자백"이 아니라 "사실의 확인"입니다. 감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마음 속에서 우러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을 벌려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하는 것을 통해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펼치신 구원의 역사를 확인시켜 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언어
어느 교회 목회자 사모님이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신학대학의 학장님을 만났습니다.“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목사님은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학장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노트를 한 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사모님이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 내려간 것은 목사님이 방을 나서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러자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나 자신의 활기찬 생활을 위해서, 타인에게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된 손길을 맞잡기 위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수단(방법)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마음 속으로 되 뇌이면 될까요 ? 여러분은 누군가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저 상대방이 나의 이 마음을 알아 줄 것을 기다리면서 가만히 감사하는 마음만 되 뇌이고 있으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할까요? 상대방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를 떠나서 가만히 앉아 있자니 도대체 성에 차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이 감사한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하고 상대로부터도 나의 감사를 받아들인다는 의사를 확인하고픈 게 인간의 심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들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한 마음을 받으시지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를 위해서, 또 앞에서 언급한대로 "감사함"의 교육적인 기능을 위해 "감사"할 것을 명령하심과 아울러 구체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 곳곳에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선물 전달"이라는 수단을 이용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전달하기 편리하고 받는 사람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기 위해서 "돈"이 물건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 "돈"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게 감사의 표현이냐 아니면 뇌물이냐를 놓고 씨름을 합니다. 정치인들도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에 대해 "정치후원금"이냐 청탁을 위한 "뇌물"이냐를 놓고 법과 여론 사이에서 씨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권력을 잡으면 "후원금"이 되고 권력을 잡지 못하면 "뇌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일텐데..... 이런 문화가 교회 안에까지 파고 들어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일도 "돈"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고 은근히(때로는 아예 직접적으로) 부추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돈"도 감사를 표현하는 중요하고 요긴하고 편리한 방법이요 수단이지만 "감사"를 표현하는 유일하고 전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가뜩이나 돈 없어 힘들고 어렵고 서러운 경우까지 있는데 하나님께 "감사"마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15절에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감사하고(17절) .....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4:2)고 구체적으로 "감사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되는 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말씀을 마음에 담는 행위"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함을 나타내는 첫 번째 행위로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말씀을 소유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유익이 있겠지만, 그 이전에 "말씀을 풍성히 거하게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나에게 은혜를 베푼 은인에 대한 감사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말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고 딴청 부려놓고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지.."하며 선물을 한다면 상대방이 기뻐할까요? 오히려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러냐고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신중히 듣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물질적 표현보다도 상대방을 더욱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해놓고 잊어버린 말을 상대방이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고마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흐뭇하고 기쁩니까? 목화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과 감사의 대상은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말씀의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맙시다. 그 노력으로 내가 얼마나 엄청난 신학적인 지식을 쌓고,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얼마나 탁월한 성경 교사가 되는 가 하는 것은 둘째입니다. 그러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다릅니다. 어느 정도의 지식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내 마음에 풍성히 담아 놓겠다고 하는 마음과 행동, 그 자체가 감사의 표현입니다.
풍성히 거하는 말씀의 효과
말씀을 내 안에 담아 놓으려는 행위 그 자체가 감사함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담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올바른 감사를 표현하는 출발이자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분이 기뻐하는 감사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의 표현을 위해서는 먼저 그분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알기 위해선 먼저 그분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가 아닌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풍성히 거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양적인 차원에서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고, 질적인 면에서 올바로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열심만 있고 말씀이 없는 경우
신앙인 중 정말 위험한 경우는 열심만 있고 말씀이 없는 경우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자의 열심을 기쁘게 보시긴 하겠지만 지식 없는 열정은 너무나 많은 것을 허비하도록 만듭니다.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정은 많은 시행착오를 가져오게 되고 정작 힘쓰고 열정이 필요한 때와 장소에서는 지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서 수많은 깃발과 구호 속에 주먹 불끈 쥐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외쳐 대지만 정작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될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인지를 몰라서 무얼 해야 될지 모르는 크리스챤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다 보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인은 신앙인 인데 다변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인의 윤리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결과만 초래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 됩니다. 이 말씀을 마음 속에 풍성히 담은 자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 남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꼭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하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롬12장) 각자가 몸담은 세계(전문 분야, 직장, 가정, 학교...)에 필요한 "기독인의 윤리"를 세우고 "감사하는 자의 행동 지침"을 연구해야 될텐데 그저 "감사하자!"고 외쳐만 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 한 구절을 들어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내 마음속에 녹아 풀어져서 하나의 삶의 철학이 되어야 하고 기독교적인 가치관, 세계관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관점(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딱지 갖다 부치는 집달리 차원의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마치 헌법 재판소의 판사처럼, 대법원의 대 법관처럼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법에 저촉되는 여부가 없는지를 분석 판단하는 여유와 권위를 갖고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수많은 회색지대가 있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상황 윤리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토론 앞에 속수 무책이 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법칙만이 변함 없는 원칙이라는 것을 선포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에 제한되어 효력을 나타내는 굳어져 있는 구 시대의 도덕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어찌 생생한 감사의 표현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한다면 이 시대에도 유효한 가르침과 권면이 계속 될 수 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도 꼭 필요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생각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디에 우선권을 두는가? "풍성한 말씀"이 없이는 그럭저럭 지내는 종교인은 될지 몰라도 결코 감사가 우러나오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크리스챤이 될 수 없습니다.
감사와 염려는 엇갈릴 수 있다
언제나 감사와 염려는 엇갈리는 것입니다. 한쪽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보면 걱정 투성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사입니다. 그래서 아주 좋은 여건에서도 원망 불평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남 보기에는 처참할 정도의 생을 살지만 감사하며 살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영어에서 "띵크(Think)", "땡크(Thank)"라는 말은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생각한다, 감사한다, 그 뿌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무엇부터 생각하느냐, 무엇을 먼저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느 각도에서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환경이 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달라져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 겸손한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사랑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어떤 여건에서도 감사,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우연한 일이나 사건이 아닙니다. 감사는 체질이 되고 성품이 되어야 됩니다. 오랜 동안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오래 가면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체질적으로 감사를 할 줄을 모르고 고마웠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줄 모른다면 큰 약점입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그저 고맙다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체질이 되고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큰 일을 당해도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돌발적으로 이런 위대한 감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는 만족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만족 없는 감사가 있다면 그건 조건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던 헌금을 하던 봉사를 하던 이것은 절대로 대가성이 되어서는 안되고 무조건적이어야 합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위탁하면서 "지금 저는 주님 앞으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종말적인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착한 이발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신부가 이발소에 왔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이발을 잘 해준 다음에 "그저 하나님께 봉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발료는 내지 마시고 그냥 가시지요. 저도 하나님의 일 좀 하고 싶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 신부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가서 생각하니 너무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편으로 기도문 책을, 교회에서 쓰는 기도문 책을 몇 권 우편으로 보냈고 이발사는 이것을 감사하게 잘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경찰이 와서 이발을 하게 되는데 경찰이 이발을 다 하고 나서 돈 내려고 하니까 "내지 마십시오. 저도 지역 사회에 봉사한 셈치고 좋은 일 한 번 하고싶습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돌아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어 편지 한 장과 도너츠 몇 개 봉투에 넣어서 그 문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 다음 날에는 국회의원이 왔어요. 또 이발을 다 해 드린 다음에 "저도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발료는 안 내셔도 되겠습니다" 하고 보냈더니 그 다음 날 보니까 국회의원들이 그 문 앞에 줄을 서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웃자고 만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마운 일이 있을 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은혜를 당연히 입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는 고맙지만 이러한 은혜를 입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부족하고 허물 많고 감사하고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는 당연하지. 나는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혜택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 고 생각하는 잘못된 인격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깊이 생각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의의 세계, 믿음의 세계를 생각하고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또 받게 될 은혜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생각하십시다. 세상을 보면 원망이 생기고 이웃을 보면 불평이나 짜증이 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면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감사가 성품화되고 생활화되고 일상화 될 때, 우리는 많은 시험을 넉넉히 이길 뿐만 아니라 앞으로 엄청난 시험이 닥쳐와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일년 동안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감사할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감사하는 방법을 믿음 안에서 새롭게 확인하여 풍족한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