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4월 30일 (수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에 김우준 목사 청빙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명성교회에서               빗속에서도 울려 퍼진 부활의 기쁨 / 지구촌교회 제4대 담임 후보에 한인 목회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 '무장공비→ 목사' 김신조 별세 / 이재명 지지율 1위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국회 앞 25만 인파 “3.1정신으로 체제 전쟁 승리” /인사만 잘 해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수십만 시민들 모여 “탄핵 반대” “자유 수호/ 이만희 교주로부터 수년간 성폭행 피해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말씀을 대할 때
    2001-12-13 21:07:45   read : 184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10월 28일
    계 22:18-19





    우리 인간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아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도 그가 알고 있는 정도가 너무 제한적이고 삶의 이치와 세상의 이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전혀 없습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한계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을 아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 회퍼는 "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 내일은 저런 인간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의 대상인 약자가 나는 아닌가?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그의 시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또한 바르트는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내 운명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성서 신학자인 오토 파이퍼 교수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하는 말씀이 "자네들 그 종교 개혁을 마틴 루터가 일으킨 줄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일세" 라고 말하니까 학생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게 아니면 누가 한 거냐? 도대체 그럼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루터가 그 갈라디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말씀이 그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그 사람을 폭발시켜서 루터는 그 진리를 전파하지 않고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네." 종교개혁은 루터가 한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한 것이라고 아주 신중하고도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이 주는 진리, 이 생명력이 그를 사로잡아서 마침내 종교개혁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가 나를 잡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종교개혁의 노래




    독일 아이스레벤 성당에서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는데 문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늘지만 고운 음성이었습니다. 지휘자가 이상히 여겨 연습을 중단하고 문을 열어보았는데 열두 세 살쯤 된 소년이었습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성가대원이 되고 싶어 지휘자 선생님이 들어 주셨으면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성가대는 모두 어른들뿐인데 네가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 예수님이 써주시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마틴 루터입니다." 이렇게 해서 소년 루터는 아이스레벤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었고, 소년의 노래는 전 세계를 뒤엎는 종교 개혁의 노래로 이어졌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수성에서 출발한다.




    지식과 권력은 쉽게 야합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도 이 법칙 아닌 법칙은 통했습니다. 중세 사제들이 신자 위에 쉽게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성경을 독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코이네’(koine) 헬라어 성경도, "불가타’(vulgate) 라틴어 성경도 처음에는 말 그대로 "보통 말’성경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로 옮긴 성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헬라 세계나 로마 제국의 판도를 넘어서면서, 그리고 교회의 질서에 위계가 뚜렷해지면서 이제 라틴어는 소수의 교육받은 사제와 귀족 계급의 말글이 되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은 사제들의 성경이 되었으며, 그 말로 진행되는 예전에서도 사제는 회중 위에 군림했습니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합니다. 교회의 역사에서도 역시 그랬습니다. 권력이 되어버린 교회는 썩었으며, 소수 사제의 손에서 성경은 비밀스런 책이 되었으며, 사제의 독단에 복음은 가려졌습니다. 성경은 은폐되고 교권은 횡행했습니다. 부패한 교회에 맞서 개혁을 부르짖은 이들이 성경을 토박이말로 옮기는 일을 같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성도들에게 헛된 권위를 행사하며 복음을 가리는 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신 새벽, 존 위클리프는 썩어빠진 사제에 맞서 싸우며 영어로 성경을 옮겼습니다. 토박이 말 영어로 설교를 하는 이들을 세워 두루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게 했습니다. 진가는 언제나 대적자가 더 잘 알아보는 법. 로마 교회는 위클리프 성경을 불태웠으며 이미 죽어 묻힌 위클리프의 뼈를 파내 다시 불태웠습니다. 그 위력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샛별’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수성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종교 개혁은 시작이요 원동력입니다. 중세 어려운 헬라어 라틴어 성경은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성경 번역이 하나님 말씀을 모든 백성들에게 다가가게 했던 것입니다.




    계절이 달라지면 옷을 갈아입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거스르면 춥기만 하고 자신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옷을 바꿔 입는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에 따라서 형식이라는 옷은 갈아입어야 합니다. 옷을 바꿔 입는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듯이 형식을 바꾸는 것은 내용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루터는 낡은 형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개혁은 무엇이며 보전은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개혁이란 옛적으로 돌아가는 것.




    예레미야는 애가에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옛적 같게 하는 것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내용, 탈색된 본질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개혁이란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성경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옛적에 가지고 있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실패했을 때에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고 바울은 다메섹을 늘 회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돌아가는 옛적이 있어야 합니다.




    개혁이란 율법에서 은혜로 돌아서는 것.




    예수님은 금식 논쟁에서 혼인잔치 비유, 생베조각의 비유, 새 포도주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바리새적이 되고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필요하지만 율법주의는 반 은혜적입니다. 형식이 필요하지만 형식주의는 반 복음적입니다. 바리새는 구별되게 살려는 좋은 의미의 종파였지만 율법에 얽매이니까 사랑도 은혜도 없이 율법만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 되고 외식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율법적인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고 자신도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개혁은 이런 율법을 벗어나서 은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개혁이란 헌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는 것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일파가 아니라 완성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완성하지 못한 진리를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완성합니다. 내용과 형식을 다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대를 새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새 부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새 포도주를 보존하기 위한 필연적 방법입니다. 형식의 개혁이란 복음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새 포도주는 원칙적으로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것이고, 새 부대는 시간을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는 것입니다. 개혁과 보존을 조화하여 복음을 슬기롭게 전합시다.




    새 천년 종교개혁의 의미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개혁운동이 복음의 재발견, 참다운 복음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물론 기독교의 역사는 개혁의 역사였고, 그 개혁의 원동력과 출발은 복음의 재발견에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세속화와 타락이 있을 때마다 말씀을 통한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고 그 결과 삶 속에서 개혁과 변혁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중심 사상 즉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 말해주듯 종교개혁의 진정한 힘과 원동력은 복음의 재발견에 있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재발견했을 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며,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결코 옛 시대와의 단절을 모토로 자신들의 신앙을 개진하고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본질을 재발견하여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 결과 개신교는 불과 수십 년 만에 유럽 전역에서 가장 큰 중심 세력으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재발견할 때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영적 각성은 도덕적 갱신과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져 교회가 사회를 정화하고 선도하는 중심세력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교회 지도자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그 화려한 성장도 유럽교회들처럼 하나의 과거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10월 31일은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는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붙여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날입니다. 모든 세계 개신교 신자들이 이날을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날로 축하하고 기념하면서 현대문명 속에 세속화 되어 가는 교회의 갱신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개혁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종지부를 찍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 잡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연속성을 갖습니다. 만약 루터의 종교개혁이 개혁의 역사에서 한 시대의 개혁으로만 그쳤다면 그 개혁은 생명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의 날로 기념하는 것은 루터의 개혁운동을 골동품 진열장에 보관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현실에서 재해석하여 계속적인 개혁의 역사를 이루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루터가 주장한 개혁의 3가지 원칙을 기본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3대 원칙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로 특징지어집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수성에서 출발합니다.




    이 종교개혁의 3대 원칙은 옛날의 케케묵은 원칙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 : 31)라고 한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삶 속에서 개혁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루터가 남긴 한마디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개혁의 큰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목숨을 내걸고 개혁에 힘썼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세속화의 물결, 물질과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교회는 과감한 개혁으로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 년 동안 주일을 지키면서 어느 주일이 더 중하고 어느 주일은 덜 중한 그러한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 개신교회에 있어서 개혁교회의 뜻을 끊임없이 되새길 수 있는 종교개혁주일이 갖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타락으로 중세기 교회는 암흑시대를 걸었으나,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혁교회가 생김으로써 교회는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속 속에 있는 교회는 한 번으로 끝나지 말고 계속해서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만약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개혁을 외면한다면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서 밖에 버리어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의 정신에 입각해서 우리도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리스도 예수, 생명의 말씀인 성경과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얻은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를 함으로써 진정한 개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완전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순교적 신앙으로 대처한 결정적인 힘도 바로 성경 절대신앙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경절대신앙을 유지하고 계승해야 합니다. 선교의 원동력이 바로 성경 절대신앙을 파수하고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진리(성경)를 지키는 일에 진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그 자체로 보존해야 합니다.




    감동’이라는 권력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권력이동’이라는 책에서 문명사의 전개과정에 따라 권력이 물리적 세계로부터 경제적 세계로, 다시 지식의 세계로 이동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토플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한 가지 중대한 권력이 이 세상에 있는데, 세상이 제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권력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감동’이라는 권력입니다. 감동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동만큼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동을 주는 일은 완력이나 돈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감동에 이르기 위해서는‘진실’만이 가장 큰 자원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다 부차적입니다. 여러분!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언제 감동의 세계 속으로 흠뻑 빠져든 기억이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거칠고 차가워서 감동이라는 말조차 꺼내는 것이 어색한 듯합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감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대할 때 감동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며, 감동을 가지고 자신이 변화되고 감동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경고를 통해서 본서의 내용이 자신의 상상이나 꿈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임을 밝힐 뿐만 아니라 예언의 말씀의 권위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본서 이외에 어떠한 것이라도 더할 경우에 대해 진술합니다. 이것은 본서의 예언의 말씀이 더 이상 가감할 것이 없는 완전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요한은 말씀에 "더한 자들"에게 모든 재앙이 "더하여질 것"이라는 수사학적인 비교를 통해 완전한 본서의 예언을 변절시키기 위해 더하는 자들에게 내릴 심판의 엄중함을 경고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본문은 앞 절과는 대조적으로 완전한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는 경우에 대한 묘사입니다. 본문 역시 완전한 예언의 말씀을 "제하는 자"에게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하는 축복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수사학적인 비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은 구속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축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동으로 받을 때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는 최대의 축복된 의식입니다




    오늘은 세례식이 있는 날인데, 세례란 무엇입니까? 캘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새로운 생명의 삶을 출발하는 것이다."




    이 세례식에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인치는 도구가 무엇입니까? 바로 물입니다. 물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요, 깨끗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사람이 죄를 씻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기본적으로 의인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이 좀더 의로워진 후에 세례를 받겠다고 합니다. 생각은 훌륭하지만 얼마나 우리가 의로워져야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맞겠습니까?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의로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받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례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을 위해 헌신을 다짐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는 죽고 이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산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한 새로운 삶의 출발은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려면 죽어야 하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세례식은 주님과의 결혼식 의미도 있지만 옛 사람의 장례식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주님과의 결혼은 좋아하면서 자기를 장사지내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동시에 신앙 생활도 잘 해보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을 멋있게 시작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 발은 교회에 또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양다리 신앙생활을 하니까 예배가 주는 감격이나 새로운 삶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하나님 믿을 겁니다"라고 외칠 준비가 되었습니까? 짧게 살든지, 길게 살든지 상관없이 항상 굵게 사시고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믿기는 하지만 적당히 타협하고 믿는 것을 적절하게 숨기며 살면 결과가 좋을까요?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 빼놓고는 믿지 않는 사람과 비슷하게 산다면 축복 받을까요?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 교회에서는 믿는 척하고, 사람 앞에서는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믿지 않는 척하고 사는 그런 흔들리는 모습을 우리는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세례 받는 분들은 새로운 결단을 통해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고, 이미 세례 받은 분들도 덤으로 사는 인생임을 알고 더욱 헌신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우리의 삶에서 부활해야 할 것
    바람직한 교회(2)
    바람직한 교회(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영향력 있는 사람
    감사는 믿음의 열매
    감사를 찾아서 하자
    내가 감사하고 높이리이다
    우리 속에서 씨앗을 보신다
    생명의 잠재력
    자유하셨습니까?
    인간의 한계 앞에 선 하나님의 할 일
    새 포도주의 기쁨을 새 부대에
    누가 내 삶의 주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과 쉼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