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5월 03일 (토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에 김우준 목사 청빙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명성교회에서               빗속에서도 울려 퍼진 부활의 기쁨 / 지구촌교회 제4대 담임 후보에 한인 목회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 '무장공비→ 목사' 김신조 별세 / 이재명 지지율 1위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국회 앞 25만 인파 “3.1정신으로 체제 전쟁 승리” /인사만 잘 해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수십만 시민들 모여 “탄핵 반대” “자유 수호/ 이만희 교주로부터 수년간 성폭행 피해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세상을 사는 방법
    2001-12-13 21:11:07   read : 183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년 11월 25일
    엡 2:1-7





    오래 전에 노르웨이의 탐험가인 "난센"이라는 사람은 북극의 바다의 깊이를 측량해 보기 위해 아주 긴 밧줄을 구해 바다 속에 넣고, 어느 정도에서 밧줄이 밑바닥에 닿는지 알아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준비한 밧줄은 바다 밑에 닿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 다음 날에는 더 길게, 또 다음 날에도 전 날보다 더 길게 여러 번 시도하여 보았지만 북극 바다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바다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북극해가 매우 깊었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우리의 좁은 머리로는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깨닫는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고, 깨닫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넓고 크고 깊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랑해주어도 사랑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사랑에 굶주려 살게 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 중에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은 아버지가 언제 나를 사랑해준 적이 있느냐고 대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의 사람들처럼 사랑을 잘 표현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깊은 사랑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한국의 부모님들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속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자녀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 중에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좋은 것인지 깨닫지 못해서 기쁨이 없고 감사하는 마음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행복할까요? 많이 가진 사람입니까? 많이 배운 사람입니까? 남들이 생각할 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을 느끼는 만큼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조건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통계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은 필리핀 사람이고,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일본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각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깊이 깨닫고 느낄 때, 진정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십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느끼며 사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일생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갖 사건들이 전개됩니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마다의 그 일생은 별로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아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크기와 내용을 비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행복의 질량은 같은 것입니다. 유복한 집에 태어나서 남 보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도 알고 보면 평생 죽도록 고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객관적으로 볼 때에 남이 측은하게 여기는 대상이 될 만큼 여러모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달리 행복해하고, 성공감을 만끽하면서 생을 살아갑니다. 확실히 행복이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행복의 질량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같은 것입니다. 행, 불행은 그의 세계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생각하고 사느냐 하는 가치관. 세계관, 목적, 여기에 행과 불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행과 운명을 믿는 운명 중심적인 세계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적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큰 힘 앞에 우리의 무력함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여나 잘되지 않을까 하는 요행만을 바랍니다. 그리고 운명으로 돌립니다. 이렇게 모든 것에 기회만 바라고, 요행만 바라고, 사행심만 가지고 있는 사람. 마치 화투장을 쥐고 있는 도박꾼처럼 삶을 운명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깡통을 들고 다니면서 하루하루 구걸로 먹고사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행여나 내게도 좋은 날이 있을까 하여 복권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복권을 주머니에 넣자니 옷은 갈가리 찢어진 넝마요, 집에 두자니 누워 잘 데도 없는 터이라 달리 둘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척하니 깡통에 붙여서 달랑달랑 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복권이 1등에 당첨된 것입니다. 거지는 너무 너무 좋아서 어깨춤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강가에 나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이제 나도 깡통 신세 다 면했다" 그리고는 그 깡통을 강물에 휙 내던져버렸습니다. 그 순간 깡통에 복권을 붙였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복권이고 당첨이고 간에 다 사라진 것입니다. 거지는 바닥에 침을 한번 뱉고는 털래 털래 다시 구걸하러 가면서 이렇게 투덜거립니다."거지 팔자 어디 가겠어?" 이렇게 운명에 맡기고 사는 사람은 영원히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율법주의"라고 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은 보상이요, 보수요, 노력의 대가로 얻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아주 합리적이요 지성적이요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무엇이 되었다고 해서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렇게 안될 때에는 절망합니다. 노력의 대가, 곧 노력해서 산다는 것만이 옳은 얘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지 못할 뿐더러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세 번째는 은혜를 알고,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은혜 중심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요, 은혜 안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은혜가 먼저 있고, 은혜 안에 내 수고도 있습니다. 내 땀흘림도 거기에 있고, 내 모든 노력도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은혜 안에서 결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중심의 세계관입니다.




    여러분! 먼저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로 살고, 은혜 안에 내가 존재합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은혜 됨을 믿어야 합니다. 은혜는 믿음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있고야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가장 큰 은혜, 근본적인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을 돌이켜보니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절)"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은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은혜에 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될 때에만 은혜가 됩니다.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은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으로라야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수용하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만 겸손케 되고, 자기 됨을 알게 되고,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고, 은혜의 그 깊고 넓은 뜻을 알게 됩니다.




    이미 우리는 은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누리고 있는 은혜의 은혜 됨을 모르기에 여전히 불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제아무리 어떻게 해보려 해도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우리에게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믿어지는 것, 깨달아지는 것, 감격하는 것, 이 자체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선물이란 원래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이라는 것은 그 속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물질로만 받으면 뇌물입니다. 문제는 그 선물에 담겨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 사랑을 깨닫고 수용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선물이 선물되는 것입니다. 주는 자도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는 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받을 때에만 선물이 선물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물의 의미를 모르면 그것은 뇌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을 때에는 겸손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뜻을 모르고, 그 사랑을 수요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랑은 본래 어떤 보수나 보상이나 대가가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세 사람의 의사가 여관에 투숙하였습니다. 여관 주인 앞에서 세 의사는 자기의 의술을 자랑했는데, 주인이 믿지를 않자 세 의사는 주인에게 접시를 가져다 줄 것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자기의 눈을, 다른 한 의사는 자기의 손을, 마지막 의사는 심장을 접시 위에 올려놓고 주인과 내일 다시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내기를 하였습니다. 여관 주인은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의 눈과, 전날 사형 당한 도둑의 손과, 돼지의 심장으로 각각 의사들의 것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음날 세 의사는 각각 자기의 것을 찾아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기에 이긴 대가로 여관 주인에게 음식을 대접받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한 의사가 갑자기 남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람 미쳤나? 도둑질이라도 할 셈인가?” 그러자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야? 내 손이 말을 안 듣는데, 어째서 남의 주머니에 들어가려고 할까?”라고 도둑의 손을 단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눈을 바꿔 낀 의사가 “이거 어째 세상이 이렇게 변해 버렸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심술궂은 얼굴들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셈이지?” 이때 다른 한 의사가 “야 이것 참 멋진 풀장인데, 한 번 미역이나 감고 가자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친구 의사가 말릴 겨를도 없이 구정물에 몸을 뒹굴렸습니다. 돼지의 심장을 붙인 의사였습니다. “그림” 형제의 동화입니다. 습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삽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미 죽었던 자들입니 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로마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편지를 쓰게 하셨고 이 편지는 에베소교회에 전해졌습니다. 바로 이 에베소교회가 오늘의 우리 교회입니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훌륭한 동역자들이 함께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전도한 교회입니다. 많은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승리한 교회요,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며 훈계하여 건실히 세워진 교회요, 참으로 모범 되고 좋은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보낸 바 있지만 또 다시 편지를 보내서 전에 편지를 통해서 가르친 교훈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또 다시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며,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해야 한다고 실천 윤리를 강조합니다.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구원받기 전 과거의 나의 모습이요, 4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구원받은 현재의 나의 모습이요, 10절 말씀은 구원받은 결과로서의 나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우리 교회 안에 속하여 있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를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여러 곳에서 찾으려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에는 사랑에서 문제의 해결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문제, 고통, 괴로움,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하는 청소년의 문제, 노인 문제 등 모든 가정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근원은 바로 잘못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났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한 보고에 의하면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는 자라면서 병들지 않고 건강하며 성년이 되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평생을 건강하게 산다고 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고 질병을 없게 하고 힘과 용기를 주며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고 자유함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또한 사랑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슬기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도와주십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늘 함께 하십니다. 환란이나 시험 중에도 함께 하시고, 밤이나 낮이나 어떤 위험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광야 같은 이 험한 세상을 걸어갈 때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사랑은 영원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큰사랑의 능력이 우리 인간의 삶을 영원토록 승리하게 해줍니다.




    구원 얻은(예수로 영접한 자) 지금 현재의 나의 모습


    본문 4절에서 6절까지 말씀은 죄 아래 놓여있던 인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풍성한 긍휼”과 “지극한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십니다(요일 4:8).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이 사랑은 변함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지으신 만물을 변함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 대한 진노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화목제로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10절). 또한 죄에 대한 진노의 매를 그 아들 예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크신 사랑입니까? 사랑은 동정보다 진합니다. 동정은 가슴에 갇혀 있을 수 있으나 사랑은 실천적인 자비로 분출됩니다. 사랑은 그 대상과 더불어 공동보조를 취합니다. 사랑은 그 대상이 올바르게 될 때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리셨습니다.




    둘째로 우리를 일으키시는 사랑이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난 후에도 계속되는 고난과 시험으로 인하여 넘어졌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일으켜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혀 갔을 때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으시고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사랑이십니다.




    은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7절 말씀에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값없이 주시는“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햇빛도 공짜로 주셨고, 물도 공짜로 주셨고, 산소도 공짜로 주셨듯이 은혜도 공짜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결과(예수를 영접한 후)로서의 나의 모습


    본문 10절 말씀에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위는 결코 구원의 원인은 아닙니다. 오직 구원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생활은 선한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즉, 구원의 결과로서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기쁨과 감격으로 선한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성장합니다.




    우리가 불행과 행복을 말할 때 힘들다는 것이 반드시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편하다는 것이 반드시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편한 삶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땀흘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노력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멍에를 무조건 팽개칠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워주신 멍에는 벗는 것보다 겸허하게 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한번 세상에 태어나면 믿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누구든지 눈물과 땀을 흘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우울해집니다. 그것이 심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이처럼 대개가 어려운 순간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면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임시적인 수법은 짧은 안심을 줄지는 몰라도 결국 우울증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그래서 치료가 더 어려워집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을 바꾸면 우울증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인 위안을 줄뿐입니다. 환경의 변화가 그 사람의 사고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또 우울증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여인이 결혼을 네 번 했는데 가장 좋았던 남편은 첫 번째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네 남자와 사는 동안 우울증을 겪고 난 후 드디어 결론을 내렸습니다. "문제는 남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생각이 변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고 나를 존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환경이 좋은 상태에서 보다 열악한 상태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누구나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많습니다. 그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울증은 "정신감기"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만큼 누구나 쉽게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우울증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무가치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권태감과 패배감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합니까? 그렇게 질문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고 합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대답입니다. 우리 중에 이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을 너무 막연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는 것은 기막힌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힘들고 피곤할 때 이 문구를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사는 하늘의 존재, 누구누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았다고 착각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진단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자마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람이라면 비록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변두리 인생으로 초라하게 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늘에 앉아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자는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훨씬 적게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남 보다 앞서서 뛰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그 무엇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늘에 앉아 세상을 사는 사람은 삶의 자세부터 다릅니다. 지나치게 세상을 바라보는 자에게 찾아오는 징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안과 공포입니다. 자기가 하늘에 앉아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자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자기의 형편이 아무리 볼품 없다 할지라도 비교의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늘에 앉아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날마다 느끼고 인식하는 사람은 상처입고 피곤할 때 그렇게 쉽게 피곤하거나 상처입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에 매 달리십시오.




    그리스도인은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어부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 실수하여 물에 빠지면 큰일납니다. 헤엄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배를 타고 세상을 유유히 돌아다니면서 일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배가 전복되어 세상에 빠지는 날에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처럼 헤엄을 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빠지면 물에 허우적거리다가 빠져죽기 알맞은 사람들이 우리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합니다. 물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를 젓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헤엄치는 방법은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요즈음 성도들은 배를 젓는 방법보다 헤엄치는 방법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경건 생활, 즉 배 젓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과 적당히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즉 헤엄치는 방법에 더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혼합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세상과 별거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법은 동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이 우리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쪽을 원하실까요? 물으나마나 세상 사람이 우리처럼 되는 동거방법을 원하실 것입니다. 항상 정신 바짝 차리고 세상에서 하늘의 존재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함부로 살면 놀라운 은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엉터리로 살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놀라운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아름다운 교회의 성도는 놀라운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입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우리의 삶에서 부활해야 할 것
    바람직한 교회(2)
    바람직한 교회(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영향력 있는 사람
    감사는 믿음의 열매
    감사를 찾아서 하자
    내가 감사하고 높이리이다
    우리 속에서 씨앗을 보신다
    생명의 잠재력
    자유하셨습니까?
    인간의 한계 앞에 선 하나님의 할 일
    새 포도주의 기쁨을 새 부대에
    누가 내 삶의 주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과 쉼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