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0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으면 나머지 99사람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100사람 가운데 한 사람 있을 때 그분이 매일 성경 말씀을 읽으면 나머지 99명은 성경 읽는 그 사람을 통해서 작은 예수를 본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분은 교회에 잘 다니시는 분은 아닌데 그 분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 우리 아내가 권사 임직하기 위해 성경을 밤늦은 시간까지 읽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성스럽고 거룩한지 모르겠어요."하나님 말씀을 읽는 모습은 성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라고 일컫습니다. 책 중의 책인 성경이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므로 이르는 말입니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면 성경책이야말로 사람을 만드는 책입니다 숱한 사람들의 삶이 성경을 만났기에 변화되었습니다. 성경을 만나지 못하였더라면 평생을 그늘에서 불행하게 살다 마쳤을 사람들이 성경을 만났기에 변화되어 맑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의 경우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일생이 바로 성경이 얼마나 큰 변화를 사람에게 일으킬 수 있느냐 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녀는 20대 좋은 나이에 결핵과 척추카리에느에 걸려 병상에 누워 살아야 했던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성경을 만남으로 삶에 서광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성경을 만난 것입니다. 성경을 만남으로 자신이 변하게 된 일을 그녀 자신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쳐주는 책이다. 내가 성경과 마주친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마주친 것이기도 하다. 성경이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책이 되고 나서 비로소 나의 삶의 목표는 정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전해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작업도 이 일의 연장일 뿐이다. 그 때 이래 오늘날까지 나는 나름대로 성경에 바탕을 두고 계속 글을 써왔다."
미우라 아야코는 고난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되 성공과 출세를 좇는 수단으로 믿는 경향이 많은 시대에 그녀의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그녀가 애송하였다는 작자미상의 시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 이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은 행복입니다. 필립 반 보슈란 철학자는 행복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란 책 중에서 "인간의 모든 삶은 행복이란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행복과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행복관은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이요, 또한 인생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연령에 따라 변화되기도 합니다.
한 섬에 다섯 명의 남자 20대, 30대, 40대, 50대 남자가 표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두 명의 여자가 바로 가까운 섬에 표류하였습니다. 그러자 20대의 남자는 수영해서 가자 서두르고, 30대 남자는 배를 만들어서 가자 하고, 40대 남자는 조금 있으면 여자들이 올 것이라고 하고, 50대 남자는 여기서도 잘 보이는데 미쳤냐고 왜 거길 가느냐고 하였다고 합니다. 인생의 참 행복은 참으로 여러 가지입니다.
행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HAPPINESS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의미는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happening)을 나타날 때 사용됩니다. 이런 것들은 요행, 횡재로 주어지는 것들로 쉽게 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는 BLESSING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피(blood)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피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한 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복과 기쁨의 개념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할머니의 유언장
신앙 좋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먼 친척을 찾아가서 자신을 부탁했지만 그 친척은 그 할머니를 맡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번에는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을 찾아갔습니다. 자기를 맡아 달라고 하면서, "내 비록 나이는 많지만 결코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죽음을 아름답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 드렸고 주님은 나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아무도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혼 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듣고 맘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부부는 어머니처럼 그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장담처럼 여생을 평온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날도 다른 날처럼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기척이 없어서 젊은 부부가 방에 들어가 보니 주무시듯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도 나를 맞아 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를 맞아 주었고, 내가 믿는 예수를 믿어 주었으며, 나의 신앙과 기도를 믿어 주어서 나와 함께 살아 주고 베풀어 준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오" 라고 말한 뒤에 그가 가졌던 깜짝 놀랄 만한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면서,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가장 잘 관리할 사람들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이 재물을 써 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었답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 지를 바로 알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 지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1).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태초로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도 계셨고 그때도 계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옛날에 계셨던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이심을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태초부터 있는"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영원 전부터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니 무엇이 염려될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생명의 말씀"이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시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에 말씀을 통하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권능을 행하시고 복 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경건하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통하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나타내신 바 된 분입니다(2).
말이 무엇입니까? 말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의 표현입니다. 말은 또한 그 인격의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고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과 뜻을 보여주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그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친히 사람으로 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셨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그분은 참으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아무리 몹쓸 죄인이라도 그분은 받아 주셔서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무리 무가치한 사람이라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도 복되게 해주십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영접하여 믿고 의지만 한다면 그의 놀라우신 은혜와 위로와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한 것은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시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지만 말씀을 믿음으로 대할 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게 되고 회개가 터져 나오고 위로를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며 축복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노라 하면서도 말씀을 들으면서도 전혀 그분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 문을 열지 않아서 그렇고,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모두 마음 문을 열고 믿음으로 그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요한 등 모든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교제했었습니다(1, 2)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 요한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육신으로 그분을 직접 대면하고 함께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직접 겪어 보고 체험했던 그들은 도무지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빛과 사랑과 생명의 주이십니다. 우리는 그를 믿습니다. 결국 빛, 사랑, 생명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빛이요 사랑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 길을 가는 것이 외롭더라도, 아무리 그 길이 고달프더라도, 아무리 그 길이 인기가 없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랑의 화신이 되어, 생명의 보존자가 되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과 사랑과 생명의 저자이신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그의 교훈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함은 마땅할 것입니다.
생명은 소망이지만 죽음은 절망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시간 생명이 끊어지면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맙니다.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없고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극과 극을 말해줍니다. 백년 안에 사는 우리의 육적인 생명도 이렇게 중요합니다.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첫째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절에 보면 서두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말씀으로 잠자는 영혼을 깨우칩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립니다. 말씀으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습니다<2절>.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육적인 생명을 떠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인생은 육적인 생명의 문제가 다는 아닙니다. 죽음의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철학이나, 어떤 사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가는 자들은 절망의 문이 앞에 가로막혀 있어도 그 빗장을 열어제치고 죽음의 다리를 능히 건너 생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영적인 자긍심입니다.
물론 믿는 자들이 윤리적으로도 탁월하고 예의바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것보다 "영적인 생명이 있느냐?"하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진정한 시금석이 됩니다. 윤리적으로 흠이 있어도 영적인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존경할만한데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고 영적인 생명이 없이 주님을 등지고 살면 불쌍한 인생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등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 스스로 득도하려 하고, 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체험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두셨을까요? 주의 복음을 잘 간수해서 후대에게 물려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의 육적인 생명을 먼저 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뿐 아니라 요한 일서, 요한 이서, 요한 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의 생명이 끝나면 천상의 생명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한은 생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요한이 표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생명의 말씀이시라면, 이 생명은 나타나질 때에만 인간이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감춰진 비밀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명을 스스로 나타내셨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나타내셨습니다. 내 마음을 열기만 하면 구체적으로 내 삶에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이 섬겼던 주님을 이런 모습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으로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생명의 관계가 있어서 내 영혼이 살고 이 생명이 충만하고 확산되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이 생명의 샘물이 고갈되어 있다면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생명의 권능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이요 주님의 소원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요한이 증거합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전함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믿는 즐거움과 예수 믿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 생명을 아직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교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3절).
"사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살아 있을 때 교제가 가능합니다. 죽어 있으면 교제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교제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빚어서 만들어 세워놓은 말 못하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미래를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잠자는 하나님, 죽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우리 영혼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교제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사귐"이라는 단어가 베드로후서1:4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참여"라는 단어가 본문의 "사귐"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공통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주님과 교제할 수 있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 나누는 영암교회 모든 교우들이 함께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한다고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해도 안목이 다르고 문화와 가치관이 다를 때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생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믿음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고백할 수 있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안방 문까지 열어 놓으시고 나와 더불어 격이 없는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을 좀더 풍성히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목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주님과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 피조물의 영광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관심을 갖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관심은 그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것은 내가 장미에 들인 시간 때문이야" 여러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집시다. 그리고 그 관심이 구체화되도록 시간을 투자합시다. 이제부터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서로 인사합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기쁨에 대하여 말씀합니다(4절).
생명이 있기에 교제가 가능하고, 교제가 있어야 기쁨 충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눌 때 우리 속에 기쁨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15:11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6:24에는 주님께 기도하는 자들에게 응답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 때문에 생기는 기쁨입니다. "교제"가 외롭고 고독한 삶에 대한 주님의 처방이라면, "기쁨"은 공허하고 무가치한 삶에 대한 처방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 때문에,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기쁨을 상실하고 허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16:11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의 외적인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른 것 강조하지 않고 주님의 생명과 주님과의 끈기 있고 은혜로운 사귐과 그 사귐을 통한 기쁨 충만의 열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새벽에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기쁨 충만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이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영적으로 도전할 수가 있습니다.
권면하고 새 생명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영암교회는 주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교회, 주안에서 끊임없는 사귐이 있는 교회, 예수 믿는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인간의 인생에는 죽음과 저주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방향도 목적도 사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동물처럼 살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고 동물처럼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양심과 영이 깨우침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서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증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여진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여시고 예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여러분의 심령에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과 인생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어두움과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은 사라지고 하늘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 흘려 세우신 교회의 참된 구성원이 아닌 그저 주일이 되면 종교적인 인간 본능을 만족시키는 정도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허락되어 있는 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갖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서 여전히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 있고, 기쁨과 소망이 허락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초조와 공포와 두려움과 실망으로 가득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참된 기쁨과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마음에 수심이 가득할 것입니다. 괴롭고 답답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인터넷시대라고 하는데, 인터넷을 즐기면서 요즘은 신문구독이 잘 안되고 책이 잘 안 팔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읽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이것은 심각한 영적 위기일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인격적인 생명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에 그 만남의 시간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로얄제리는 잘 아시는 대로 벌의 유충 중에 여왕이 될 벌이 먹고 자라는 것으로 다른 어떤 것 보다 고 단백질과 특이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어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보통 벌과 여왕벌의 차이점은 먹이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벌의 유충도 로얄제리를 먹이로 섭취하게 하면 여왕벌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란 완전히 다른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배우고 깨달아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특성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말씀은 우리들에게 로얄제리와 같아서 먹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만들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생명의 말씀되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쁨하며 그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에게 성경 읽기표를 한 장씩 나누어 드렸습니다. 유용하게 잘 사용하기를 바라며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