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강원도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논에는 그런 대로 물이 고여있었고 모들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밭작물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한 농부가 트럭에다 물통을 싣고 와서 밭에다 물을 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이러다간 국가적인 큰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하늘이 매 마르고 땅이 말랐다는 어느 신문의 제호처럼 정말 온 나라가 가뭄으로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열흘 안에 비가 오지 않으면 금년 농사는 크게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특히 북에서는 더욱 심각합니다. 천년 안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가뭄이라고 하여 왕 가뭄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정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걱정과 근심이란 이렇게 되어져야 할 일이 제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분명 곡식을 심었으면 잘 자라 풍성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자라지 못하고 열매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바로 걱정과 근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되어질 일이 제 때에 되어지지 않을 때 염려와 근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도가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신앙 생활의 규범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특히 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령이 근심하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건강하고 충만한 신앙 생활을 원하는 성도는 어떤 일이 성령으로 근심하게 하는 일인지를 분별하여 오히려 성령이 기뻐하실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삶의 지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짓을 버려라, 분을 품지 말라,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구제하기에 힘써라, 말조심해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악의를 버려라, 서로 용서하라 등 주옥같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함께 깊이 생각하며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말씀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택하였습니다.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근심하실 정도가 된다면 신앙적으로 상당한 문제점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씀도 중요하고 소홀히 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오늘은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 여러분들의 심령에 성령이 오셔서 근심하게 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라고 하여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일하시며 사람들이 진리를 따르도록 돕는 일에 힘쓰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신 것도 바로 성령이 진리의 영이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성도가 진리를 떠나 거짓되고 허망한 것을 따르며 위선적이며 사기인 행동을 보이게 된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버리고 세상이나, 재물, 또는 인간을 의지하고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도 진리를 버린 행동이 됩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 바로 살기를 원하셔서 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성도가 진리를 떠나 거짓되고 허망한 것을 추구하거나 허위에 빠진다면 성령은 크게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믿음의 영입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믿고 의지하도록 역사하는 영이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는 말씀에 보면 믿음의 마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오시게 되면 의심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믿음의 마음으로 바뀌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여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시인하고 받아드리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믿음의 영이기에 그가 오시는 곳에서는 언제나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삶에서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영이신 성령의 지도와 인도하심을 거절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스럽고 믿지 못하겠고 불안하고 걱정하는 것은 뭐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신과 의심을 몰아 내고 믿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은 은총의 영입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지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가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자비와 용서를 깨닫게 하고 받아드리게 하는 은총의 영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거칠고 어렵고 사악하고 은혜롭지 못하고 용서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은 뭐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에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김으로 용서와 자비의 영이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형벌까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았는데 또 잘못을 저질렀으니 더 이상 용서는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여 은혜의 역사를 축소시키거나 부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은총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만 용서하시는 은혜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은혜입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언제나 용서를 주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이런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하는 영적 어리석음이 바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곳에 계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여 죄 있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얻게 되면 그 심령에 성령이 임재하시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영이기에 거룩하게 구별된 심령에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거룩하고 구별된 영이십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깨끗치 못하고 더럽고 추악하게 산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더럽고 추한 것, 생활에서 더럽고 추한 것, 생각이나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 더럽고 추한 것 등 모든 추악한 것이 바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더럽고 추한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여러 가지 더러운 죄들 가운데는 진심으로 드리지 않는 기도, 마음에도 없는 헌금을 하는 것,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봉사하는 것, 추악한 생각이나 욕망, 더러운 대화와 호색, 분노, 거짓, 악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언행이나 심사에서 이런 추한 것들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들입니다.
이제까지는 소극적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었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가 있음을 성경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이 죄는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성령 훼방 죄는 적극적으로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언행심사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일컫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라고 하여 성령 훼방이 무서운 죄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둘째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로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있습니다. 불신자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것을 전도 받았을 때 권고와 감동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편견이나 자존심을 내세워 거역함으로 범하는 죄입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분명히 알면서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듣고 깨닫고 찔리면 회개하고 돌이켜 믿음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오히려 강퍅하게 행동하고 성령의 역사를 거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은혜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사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역사하시는데도 완악하여 오히려 들으려 하지 않고 귀를 막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에 던져졌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완악함을 인하여 그 씨앗이 그대로 남아 있다가 사탄에게 빼앗겨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길가와 같습니다. 굳어져 전혀 씨가 심겨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저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렇게 완악한 자를 불쌍히 여겨 구원시키고자 지금도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그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할 시간을 가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소홀히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할 것을 모르는 우리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구할 것을 대신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린다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우리 심령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피어오르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결단하고 행동함으로 성령의 불을 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그가 돌보는 성도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서기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거룩한 자극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매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여 타오르는 불에 물을 붓듯이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9절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앙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건강하고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성령이 기뻐하시도록 진리 안에 바로 섭시다. 풍성하신 은혜를 의심하지 말고 확고한 믿음에 서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삽시다. 성령을 훼방하거나 거스르지 맙시다.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쓰며 다시는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여 소멸하지 맙시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고 오히려 기뻐하실만한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