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그에게 제사드리는 것을 너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것을 낱낱이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12장 7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라고 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너무 감사하여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을 기억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8절에 보면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하여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단 쌓기를 힘썼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단을 쌓은 것 하나 하나를 눈 여겨보셨고 기억하셨음을 성경에 기록하여 후대 사람들까지 알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단을 쌓는 자란 예배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기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은 찾으시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드리기를 좋아하고 예배를 즐거워하며 늘 예배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좋아하시고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특히 5절에서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라고 하여 성도들을 모으라고 하시면서 그 성도들은 바로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도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택하였다는 말씀과도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된 성도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들,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들은 예배하기를 힘써야 하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 드리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첫째, 예배란 히브리어로 야레( ) 그리고 헬라어로 세보마이( )입니다. 이 단어들은 "경외하다", "존경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 1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이 예배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예배란 히브리어로 샤하( ) 그리고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8장 6절을 보면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라고 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 그 앞에 엎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예배란 히브리어 아바드( ) 그리고 헬라어로 라트레이아( )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여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 종처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리기 위하여 섬기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학자 윌리암 템풀은 말하기를 "예배란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반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인간은 반항합니다. 신에게 반항하고 정의에 반항하고 질서에 반항하고 평화에 반항하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선생님에게 반항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에게 까지 반항하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이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굴복하는 마음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만 반면에 하나님께 항거하기를 좋아하는 마귀는 예배를 아주 싫어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배를 기뻐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은혜 받은 마음이지만 만약 예배를 싫어하고 예배를 거절한다면 마귀가 지배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 판단하여 예배를 기뻐하는 은혜를 아는 귀한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학자 프랭클린 시글러는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사람들의 정성어린 응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자연을 우리에게 주시고 가정을 우리에게 주시고 자녀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 세상에서 이처럼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의 은총을 뺄 수 없습니다. 모든 인류는 지옥으로 가는 죽음의 열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깨닫고 보니 너무 큰 은혜요 헤아릴 수 없는 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여 이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특권입니다. 아무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비밀을 발견한 자, 하나님께 선택된 성도만이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1998년 7월에 경상도 어느 지역에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금 광맥을 발견했습니다. 순금 7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3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금을 찾고 못했습니다. 정말로 금을 찾을 것인 지, 아니면 헛된 물거품으로 끝날지 그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해서 그 금광을 캐는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금광의 비밀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미친 짓이라고 하지만 자기들은 비밀을 발견했으니까 그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을 발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최고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금광의 비밀! 아닙니다. 권력의 비밀! 아닙니다. 건강의 비밀! 아닙니다.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값있는 비밀이 될 수는 있지만 최고의 비밀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비밀은 천국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천국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발견한 자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시편 50편 5절에 보면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모으라고 하셨습니까? 제사로 언약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제사 드리기 위해 모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로 언약한 백성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도는 예배로 언약한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하는 일이 예배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4장 10절을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라고 하여 천국에서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한 것은 그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 6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선민을 삼으신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영적 회복을 경험합니다. 고통과 환난과 아픔이 많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몸이 지치고 마음이 지칩니다. 여러 가지 일속에서 마음이 상처를 입고 영혼이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고 영혼의 상처가 치료되고 쉬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건강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게 됩니다.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되고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위로를 얻습니다. 예배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예배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배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존 헉스터불은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대화이며 만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창조자이십니다. 구원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십니다. 치료자가 되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분을 만난다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예배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속에 해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 치료가 있고 예배 속에 영혼이 쉴 수 있는 영혼의 안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 난 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셋째 예배를 통해 누리는 또 하나의 복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듣고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많은 문제 중에 하나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상황이 어렵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 병들었다. 자녀가 말을 안듣는다. 사는게 바쁘다. 여러 가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가지 이유,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밧데리가 약해지면 기계는 돌지 않습니다. 똑같은 기계지만 밧데리가 약하면 기계는 돌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모든 게 안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들음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라고 하여 예배에서 설교를 듣지 않고서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 2장을 보시면 엘리 가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너무 경홀히 여겼습니다. 구약의 예언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당시의 형식화된 예배에 대해 주로 비판을 하면서 사무엘 상 15장 22절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여 예배의 형식주의에 대하여 비판하였습니다.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이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한 것도 예배의 핵심이 바로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찢어진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영으로 예배드려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예배라고 합니다. 성령님의 주관하심과 인도하심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가 신령한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충북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수요일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성도가 오지 않았습니다. 모인 몇 안되는 성도들을 데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마친 후에도 비가 너무 많이 와 가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당 문이 열리며 십여리 밖에 사는 할머니가 오셨습니다. 놀란 한 젊은이가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인데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답을 하였습니다. '지난 추석에 서울에 살고 있는 막내딸이 오질 못했었지. 얼마나 섭섭했던지 지금도 섭섭해. 하나님 아버지도 내가 안 오면 섭섭하시거든 그래서 왔지!' 옳은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은 섭섭해하십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예배를 즐거워하며, 예배에서 은혜 받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