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에 있는 남편,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남편, 죽어서 나올지 살아서 나올지를 모르는 남편을 무작정 기다리면서 쓴 지금은 대통령의 부인이 되신 이희호 여사의 글 가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월말이 되니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는데 아직 쓰시지 않으셨는지요. 쓰신 후도 우리 손에 닿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릴 겁니다. 한 달에 한 번의 면회와 단 한 장의 편지를 기다리는 심정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이 제한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그 누구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서 실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희망을 가지고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여사가 쓴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책에서 기다림의 아픔을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결과는 정말 큰 것이었습니다.
기다림은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데니스 레인은 그의 저서 「아브라함과 그의 하나님」에서 '기다리고 신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가!'라고 토로하였습니다. 무작정으로, 기한도 모른 체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고 기다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타당한 보상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 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기다림의 하나님이시니 그를 믿고 그에게서 복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역시 기다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은 범죄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열린 가슴으로 돌아오는 죄인을 영접할 따뜻한 품을 가지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고 이사야 49장 15절에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기다리고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기다리는 마음은 또한 실수한 사람에게 계속 기회를 주는 마음입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리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을 때마다 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기다리마 하고 참는 마음이 곧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기다리다가 자기 몸이 상할지라도, 기다리다가 자기가 죽을 지라도,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철저히 자신이 손해를 보며, 전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죄인이 되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다 자기의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사실 아들을 내어 주셨다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내주기까지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베들레헴 말구유는 하나님의 기다림의 희생이 시작되는 자리였고 결과적으로 갈보리는 기다림의 언덕입니다. 그러기에 골고다는 기다리는 하나님의 인내의 언덕이며 십자가는 기다림의 결정입니다. 자기를 죽여서까지 인과 인을 이룩하시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하나님을 우리는 기다림의 결정인 십자가 위에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만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기다리는 자들에게 큰 은혜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일컫는 것으로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들, 인내하며 앙모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시를 써서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이해인 시인의 글 가운데도 기다림에 대하여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이제 우리는
기다림의 은혜를
새롭게 고마워합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배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더 크고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에 더 기다리고 필요하다면 생명을 걸고라도 기다려야 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일하기를 배우라. 또한 기다릴 줄 알아라'라고 한 롱 펠로우(Longfellow)의 충고대로 씨를 뿌리고 참는 자만이 좋은 것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뿌린 씨앗의 발아가 늦다고 땅을 자주 파 보거나 새싹이 자라지 않는다고 잡아 다녀 뽑는다면 아무런 열매도 거두기 어려울 것입니다.
윌리암 말스톤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 명을 상대로 해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에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기다리고, 좀더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좀더 좋은 세월을 기다리고, 좀더 발전되기를 기다리고……. 무엇인가 꾸준히 기다리는데 그 많은 세월들을, 또 그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다림이 있는 자들에게 진정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4주간을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기다릴 대(待)자와 내릴 강(降)자를 써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이 기간 동안 성도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대강절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아기 예수의 탄생 즉 초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 지금 우리에게로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셋째, 세상 끝날 심판 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의 기원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뱀을 통하여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와와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함으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 죄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시작입니다. 죄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죄는 인간에게 해산과 땀 흘리는 고통을 비롯하여 질병과 가난과 온갖 불행을 안겨 주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범죄한 모든 인류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입니다. 부산행 기차를 타면 부산에 가게 되고 목포행 기차를 타면 목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 모든 인류는 지옥행 기차를 타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그런 운명입니다. 죄의 끝은 파멸이고 지옥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런 모든 죄의 문제와 지옥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지식이요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위대한 교육자로서 보내셨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은 구세주를 위대한 과학자로서 보내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은 메시아를 위대한 경제학자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으로 아기 예수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 예수를 기다리며 영접하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저 베들레헴에만 오시고 만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영접하는 것이 바로 대강절의 의미입니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11장 2∼5절에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소경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되고 문둥병자가 치료가 되어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를 믿는 자들 가운데서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147편 3절에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하여 마음이 상한 자도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5장 5절, 6절에서는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하여 물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 물이 솟아나듯이 생명이 없고 삶의 소망이 없는 곳에서 생명의 역사와 희망의 역사가 일어나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바로 "그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란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여 이미 사람으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지금의 어른들이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했던 놀이가 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쉬는 시간에 땅 빼0앗기 놀이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깨진 옹기조작을 세 번 튕겨서 돌아오면 자기 땅이 되는 그런 놀이도 있었습니다. 자기 땅을 만들어 가는데 더 많이 자기 땅으로 만들려고 손가락이 찢어지도록 재어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잘 놀다가 늘 싸움으로 번집니다. 그러나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땡, 땡, 땡" 울리면 싸우던 아이들은 모두 손을 훌훌 털고 그토록 힘들여 빼앗은 땅을 다 팽개치고 교실로 들어갑니다. 놀이를 할 때는 남의 땅을 밟기만 해도 야단이지만 종이 울리고 나면 그 땅을 밟고 흩으러 놓아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땅 네 땅하며 싸웁니다. 그러나 주께서 천사자의 호령과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이 세상의 모든 수고는 그치게 되어 있습니다.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렸고 성령의 강림을 기다렸고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도 자세히 보면 기다린다는 내용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에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러 오시는 날을 기다리고 부활할 것을 기다리고 영원히 살 것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늘 "마라나타"로 인사하며 그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사모한다는 것이요 기다림은 앙모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고 앙모하는 자들은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여 기다리는 자, 앙망하는 자, 기다리며 인내하는 자들에게 이런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약속된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