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의 모습 2001-12-11 22:22:17 read : 171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데살로니가전서 1:1-10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라고 세웠습니다. 다같이 표어를 크게 복창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 우리가 이 비전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각오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소서!' 우리가 이 일에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크게 복창해 보겠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소서!"
지도자의 요건을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 비전이, 우리교회 표어가 간단하게 나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역자들과 제가 많은 고민을 해서 이 표어를 정했습니다. 이 표어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느라 아마 제 머리카락이 몇 올은 없어졌을 거예요. 무엇을 이 새해에 표어를 세우고,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비전을 어떻게 심어줄까 고민했습니다. 표어를 정했다고, 비전을 정했다고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의 자격 두 번째는 심어준 비전을 사람들이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저는 배웠습니다. 저는 요사이 이 일을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비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 주님의 비전을 우리 교회가 이룰 수 있겠는가를 고민합니다. 비전을 이루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각자의 머리와 마음속에, 우리가 품은 그 비전을 비쥬얼라이즈(Visualize) 하는 거예요. 그 비전을 우리 마음에 품고, 머리에 새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우리의 모든 학습 활동에, 하는 일에 이용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테니스를 배울 때, 코치가 처음에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라켓과 그립은 어떻게 잡고, 스텝은 어떻게 밟아야 되고, 볼이 오면 백스윙을 한 다음에 포핸드를 친다고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이가 설명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 설명을 철저히 이해한다고 해서 잘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가장 잘 가르치는 코치는, 자기가 설명한 그 테니스의 원리들을 학생(선수)의 머리 속에 비쥬얼라이즈, 즉 그림으로 심어주는 거예요.
우리 광진이가 7살 때 테니스를 가르쳤습니다. 개인 레슨을 받는데 코치가 나이가 60세 정도 된 할머니예요. 할머니 코치가 뭘 얼마나 가르칠까 생각했는데, 제 실망한 눈빛을 알아챘는지 그 분이 자기 소개를 합니다. 자기가 바로, 그 옛날 여성 테니스계를 15년 간 휩쓸었던 나브라틸로바를 가르쳤던 코치라고 해요. 제가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안심하고 맡겼어요. 그 아이를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제가 그 코치에게 물었어요. "당신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주력하는 것이 뭐냐,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저에게 딱 한 단어를 얘기했어요. "비쥬얼라이즈(Visualize)!" 계속해서라고 "비쥬얼라이즈(Visualize)!" 설명을 해 달라고 했더니, 머리 속으로 테니스를 어떻게 치는가를 늘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리라는 거예요. 내가 테니스를 잘 칠 수 있다. 포핸드를 친다고 하면 포핸드 하는 그림을 날마다 그리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그리면 사람이 달라져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골프 레슨을 좀 받았는데, 두달 정도 되니까 어느 날 설교를 하는데 성도들의 머리가 다 공으로 보였습니다. 당구를 배워 보세요. 당구를 배우면서 밥상을 받으면 밥그릇의 각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죠? 이게 비쥬얼라이즈(Visualize)예요.
우리가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쥬얼라이즈(Visualize)가 필요합니다. 이 비전을 마음에 품는 거예요. "주여! 내가 어떻게 동역자가 되겠습니까? 동역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저는 우리가 이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라는, 영안 교회 2001년의 우리의 이 표어, 비전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지난 몇 주 동안 성경과 씨름했습니다. "하나님! 이 첫 주에, 제가 이 비전을 이루는 방법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비쥬얼라이즈(Visualize) 시켜야 되겠는데, 그림을 그려줘야 되겠는데, 어떤 본문으로 어떻게 설교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한 교회가 저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놀랍게도, 신약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Example, 본이 되고, 패턴이 되는 교회라고 소개한 교회가 없는데, 오직 한 교회만 하나님께서 "이 교회가 세상의 모든 교회 가운데 패턴이요, 너희가 본받아야 할 교회"라고 소개해 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이 공부하고 연구할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제가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연구하면서 굉장한 충격 몇 가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바울 서신서를 읽을 때 (우리가 1년이 넘도록 사도행전을 공부했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서는 퍼즐처럼 맞아 들어가요. 오늘 이 데살로니가전서를 누가 만약 공부한다고 한다면, 사도행전 17장을 반드시 공부하셔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기간에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는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거기에 적혀 있습니다. 오늘 제가 사도행전 17장과 데살로니가전서 전체를 공부하면서 받은 충격 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보낸 기간이 너무나도 짧았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그는 세 안식일을 그곳에서 보냈어요.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4주 동안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4주 동안 데살로니가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수많은 큰 무리가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얘기합니다. 그저 한 종류의 사람들만 돌아온 게 아니고, 헬라의 많은 귀부인들과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4주간 그곳에 머물고 그 데살로니가를 떠난 이후, 이제 이 서신서를 적은 기간까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1년도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햇병아리 같은 이 교회가 얼마나 부흥을 했던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올바른 방향으로 자라나갔던지,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며 사도 바울은 그들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패턴, 본받아야할 본이 되었노라. 세계의 어떤 교회가 있다면 너희 교회를 본받아야 하며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의 본이 되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참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1년도 되지 않은 이 교회가, 그 당시 모든 세계에 있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그 당시에는 이 지역밖에 교회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교회라고, 하나님은 이 교회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연구하며 궁금증에 사로잡혔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년도 되지 않은 교회인데 도대체 그 교회는 어떤 기술을 사용했단 말인가? 어떤 종류의 사역을 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들의 모임은 어땠을까? 철야를 했는가? 새벽기도를 했는가? 부흥회를 했을까? 예배를 강조했을까? 아니면 소그룹을 강조했을까? 성경공부를 강조했는가? 저는 수많은 궁금증이 생겨서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지난 몇 주 동안 연구하고 또 연구했습니다.
그들이 성경 공부를 했다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책으로 공부했단 말인가? 모세 오경인가? 선지서인가? 지혜서인가? 무엇을 공부했기에, 무엇을 했기에 이 교회가 이렇게 영향력 있는 교회로 변화되었단 말인가? 그 연구를 통해 제가 발견한 것은, 성경은 그들이 사용한 프로그램과 사역의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어요. 만일 프로그램이 중요했다면, 기술이 중요했다면, 하나님은 그 비결을 가르쳐 주셨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신 이유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교회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대부흥을 이루고, 수많은 교회의 모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명백한 이유 몇 가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아침에 우리 교회가 주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원리 몇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우리 교회가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2001년 한해에, 주의 비전에 동역자로 세워달라는 이 기도대로 하나님의 비전에 동역자가 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대한 첫 번째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주님의 비전에 동역하는 교회가 되기 원한다면, 당신이 주님의 동역자가 되기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으라!
1.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으라
데살로니가 교회가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시 말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의 비전을 이루는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소개해 주십니다. 4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얼마나 큰 축복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5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어떻게 임했다고 말씀합니까? 말씀이 들려올 때 그들은 그것을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읽을 때, 그들은 그것을 토의할(discussion) 논제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들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단순한 말에 그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그 말씀을 받았다고 증언하십니다. 전하는 자도 그러했고 받는 자도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의 지진이 일어났던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의 비전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음성을 듣고 계시나요? 예배에 나와서 주의 말씀을, 설교 말씀을 들을 때, 큰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가십니까? 오늘날 현대 교회의 문제가 있다면 수많은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 이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확신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차 적어지고 있다고 하는 비극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까? 먼저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주문하십니다. 이 새해 첫 벽두에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태도가 우리 신앙 생활에 얼마나 중요하셨던지, 마태복음 13장이라고 하는 한 장에 큰 구절들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그 씨뿌리는 비유에 네 가지 밭이 등장하죠. 첫 번째는 길가, 두 번째는 돌짝, 세 번째는 가시밭, 마지막 옥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비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 보시면 그 포인트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밭, 똑같은 말씀이 네 가지 밭에 떨어졌는데, 그 열매가 무엇에 따라 좌우되죠? 밭에 따라 좌우됩니다.
어떤 밭인가에 따라 열매가 좌우되었어요. 여러분 이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왜요? 여기에 뿌려진 씨가 어떤 씨예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죠? 바위도 깨는 방망이 같은 말씀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태울 수 있는 불과 같은 말씀이요,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관절과 골수와 우리의 혼과 영과 마음의 생각까지 다 감찰하시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의 마음 밭에 와서는 맥도 추지 못하고,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이게 가능합니까? 예! 주님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왜입니까? 우리의 마음 밭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능력이 있어서일까요? 아니에요.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한가지 독특한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지예요. 선택의 권리예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만드실 때, 로보트와 같이 우리를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중에 가장 독특한 특권 중에 하나가 취사선택(取捨選擇)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오늘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전파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길가의 밭이 있는가 하면, 돌짝밭이 있는가 하면, 가시밭들이 있어서 받지 않는 자들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 밭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인생의 앞길을 좌우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큰 성령의 능력과 확신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예!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많은 환난 가운데서"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받았던 환난들이 도대체 어떤 것들입니까?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여러 가지 환난을 얘기하지마는 그 중에 대표적인 것 한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모든 유대인들과 주위의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모함했는지 아십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저들은 반공법에 해당하는 간첩죄를 지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극(史劇)을 보면 다른 죄는 다 용서해도 반역죄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정부도 그랬어요. 세계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반역죄는 철저하게 다스렸어요. 그래서 삼족(三族)을 멸하고 구족(九族)을 멸하지 않았습니까? 반역죄는 십자가 처형을 반드시 시켰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자,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저들이 가이사에게 반역을 꽤하고 있다"고 모함했던 거예요. 여러분, 이 모함이 보통 모함입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무엇을 얘기합니까? 그러한 모함과 수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고 누가 당신을 그렇게 핍박합디까? 그러나 그들은 그 핍박 가운데 주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영안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환경 탓하지 마십시다. 건강 탓하지 마시고, 시부모 탓하지 마시고, 날씨 탓하지 마시고, 내 사업 때문에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사업 탓하지 마시고, 내 고민거리를 탓하지 마시고, 내 환경을 탓하지 마시고, 2001년 한해 하나님의 도를 전심으로, 기쁨으로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비전에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받아야 합니다. 오늘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주의 동역자가 되기 위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라
2절, 3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오늘 여기에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등장하죠? 우리가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성경 단락 가운데 중요한 단어를 발견하지 못해요. 특히 목사님들이 그런 실수를 많이 해요. 왜요? 우리 마음속에 이미 중요한 단어가 다 각인되어 있어요. 데살로니가 1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아마 집사 이상 되시는 분들은 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얘기할 거예요. 그러나 초신자들에게 물으면 성경을 다르게 봐요. 우리가 얼핏 보면,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오늘 사도 바울의 강조점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있지 않았어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왜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는가? 그 짧은 시간에 대부흥을 이루었는가?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성경을 들여다보십시오. 3절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오늘 원어 성경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이 강조된 게 아니라, 역사와 수고와 인내가 강조된 거예요.
여러분이 오늘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장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하셔야 됩니다. 1장의 구조는 샌드위치 구조예요. 제가 얼마나 가르치는데 애를 썼으면 이런 생각까지 다 했겠습니까? 샌드위치의 특징은 뭐죠? 위와 아래가 똑같은 재료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무엇으로 되어 있죠? 빵! 위도 빵, 아래도 빵, 가운데만 달라요. 그 가운데 넣는 재료에 따라서 샌드위치 이름이 바뀝니다. 닭고기를 넣으면 치킨 샌드위치, 고기를 넣으면 햄버거, 햄을 넣으면 햄 샌드위치, 야채를 넣으면 베지터블 샌드위치, 이렇게 바뀌는 거예요. 빵은 똑 같아요. 1장의 구조가 이러합니다. 2절에서 3절이 위의 빵에 해당되고, 9절과 10절은 밑의 빵에 해당되어요. 저는 성경책에 이것을 표시해 놨습니다. 이렇게 하고 1장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세요.
2절에서 3절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볼 때, 사도 바울이 기도하다가 데살로니가 교인을 생각한 거예요. 데살로니가 교인! 하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무엇이 떠올랐는가? 왜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비전을 이루었는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9절에서 10절은 사도 바울이 아닌 그 주위에 있는 성도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평가한 말씀이에요. 9절을 보세요.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즉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저는 세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기를 원합니다. '버리고' '섬기며' '기다린다고'
믿음의 역사는 무엇인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간 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무엇인가?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신 것을 얘기한 거예요. 소망의 인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렸습니까? 그들은 추상적인 믿음, 소망, 사랑, 그것을 머리에만 품고 있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역사하는 믿음을 가졌어요. 사랑의 수고를 했고, 소망의 인내를 가졌습니다. 이 말씀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믿음의 역사를 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 왔어요.
여러분, 우상이 뭡니까? 우리는 '우상(偶像)' 이라고 하면 그저 돌부처 앞에 가서 절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만 우상 숭배가 아니에요. 오늘날 현대인들 가운데 성황당 앞에 가서, 고목 나무 앞에 가서 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을까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견책하셨던, 백성들을 책망하셨던 가운데 하나가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에 사는 저와 여러분의 죄는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숭배를 지적하시고 질타하십니다. 우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대신에 내 마음에 중요하게 자리잡고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우상이에요.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쾌락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취미가 우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 자신이 우상이에요. 취미가 우상이에요. 형태만 다를 뿐, 우상숭배는 여전히 우리들의 문제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그 말씀에 순종해서 우상을 버려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드리는 성도는 많아져도, 교회에 나와 설교는 듣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눈으로 쳐다보면 마음속에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거예요. 아직도 하나님이 자기 인생 속에 Priority, 넘버원에 자리 잡고 있지 못해요. 우선 순위에 있지 못해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일은, 언제든지 우선 순위 첫 번째가 아니라, 둘 셋 넷... 열 번째로 밀려납니다. 아직도 자녀가 더 중요하고, 출세가 더 중요하고, 돈이 더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우리가 주의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상을 이 새해에 다 버리십시다. 아멘!
두 번째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뭘까요? 사랑의 수고를왜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으로 표현했을까요? 사랑과 하나님 섬김은 다른 것 같아요. 그러나 이렇게 연결해 보세요. 사랑의 수고 = 하나님을 섬김! 그것은 같아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입니다. 사랑의 수고라는 말은 뭡니까? 봉사예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봉사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예를 들어서 한번 돌아보십시오. 교회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이 사랑의 수고에 관한 한, 한 종류의 교인은 전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사랑의 수고와 봉사를 하지 않는 교인들이에요. 예배만 드리고 돌아갑니다. 왔다갔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어요.
그러나 어떤 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수고를 합니다. 우리가 지난 5일 동안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새벽기도가 그냥 이루어진 것 같습니까? 예배당 문을 열고 박 목사 혼자 수고해서, 5일 동안 새벽 예배 설교해서 이루어진 것 같습니까? 아니요. 눈여겨 보십시오. 그 새벽 추운 날씨에, 주차요원들은 1시간 전에 나와 떨면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혹은 중요한 일들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이 드럼을 치고 피아노 반주를 하고, 오르간을 치고, 그 찬송을 연습하기 위해 하루 저녁 전날 나와서 두 시간, 세시간 연습을 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새벽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돌아갔습니다. 200명의 밥을 준비하기 위해 누가 수고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절로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그 전날 나와 시장을 봐서 콩나물을 다듬고, 국을 끓이느라,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기에 교회가 유지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십니까? 이 가야 동네에 있는 독거 노인 수십 명에게, 매주일 여전도회 회원들이 나와 돌아가며, 1년 내내 반찬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우리 교회 성도 중에 누군가가요. 급식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매년 10명 이상 우리 교회가 돈을 대준다고 하는 사실을 아십니까? 누군가가 헌금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매달 찾아가서 쌀을 전해주는 일이 있음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교회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비전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수고를 하고, 누군가가 자기의 물질을 내 놓았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한 거예요. 이것을 성경은 사랑의 수고라 얘기하고, 이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이라 말씀합니다.
이 새해에 부탁드립니다. 제발 교회에 손님이 되지 말아 주십시오. 더 이상은 되지 말아 주십시오. 한 달은 제가 참을 수 있습니다. 아니, 6개월, 1년은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5년, 10년 교회를 다니고서도 손님으로, 사랑의 수고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성도들이 오늘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비극이에요.
사랑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주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역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소망의 인내입니다. 무엇을 소망합니까? 주님이 다시 오심을 소망해요. "아~ 주님이 다시 오시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의 찬송을 부릅니다. "낮에나 밤에나 주님 언제 오시나이까!" 찬송 누가 못하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소망을 머리로 그치지 아니하고, 오늘의 현실을 주님이 다시 오실 것 때문에 참았다고 말씀합니다. 남편의 핍박을 참았습니다. 직장의 조롱을 참았습니다. 가난을 참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습니다. 인내(忍耐)가 있었다고 말씀하는 거예요. 무엇을 얘기합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추상적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믿음과 들려온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지진(地震)을 일으킨 줄로 믿습니다.
이 새해에 우리 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십시다.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 그래서 변화를 체험하는 교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달라지는 교회! 하나님을 올바로 믿었기에 내 가정생활이 달라지고, 내 말씨가 달라지고, 이 땅에서 사는 방법이 달라지는 그리스도인! 우리의 마음속에 이러한 소원이 있을 때 주님의 비전은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방법은 올바른 방법으로 선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올바른 방법으로 선교하라
8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믿음의 소문이 쫘악 퍼져서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요. 설교가 필요 없어요. 1년도 안된 교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어요! 여러분,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해요. 당신의 믿음의 소문은 어디까지 퍼졌나요?
제가 어릴 때 교회에 가면 유명한 집사님들의 이름을 외우곤 했습니다. '기도'하면 그 동네에서 유명한 집사님이 계셨어요. 경북 지역에서 '기도' 하면 누구 집사, '찬양' 하면 어느 집사, '선교' 하면 어느 집사, '전도' 하면 어느 집사... 저는 그분들 이름을 수없이 들으며 자라왔어요. 당신의 믿음의 소문은 어디까지 번졌습니까? 당신의 아이들에게는 도착했나요? 여러분, 세상에서 자녀를 하버드 대학에 보내는 교육을 시켜도, 당신 자녀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면,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하면, 마지막날 심판에서 주님 앞에 꾸중 받을 것을 아십니까? 자녀들에게 성경 과외 시켜 보셨나요? 무엇으로 자녀 교육시키겠습니까? 주일 학교에 보낸다고요? 아니요. 여러분의 믿음의 소문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나간 고든 맥스웰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루는 힌두교 수도승에게 찾아가서 인도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왜요? 영어와 인도말,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자기를 가르칠 수 있는데, 그 당시 인도에는 공부한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거든요. 이 힌두교 수도승이 마침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해요. "당신 날 전도하려고 그러지?" "아니요, 내가 전도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언어만 가르쳐 주시오" 그래도 안 된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 사람이 "지금까지 당신하고 지낸 사람 치고 그리스도인이 안된 사람이 있소?" 라고 했어요.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예요. 이러한 소문이 우리에게서도 번져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 사람하고 같이 몇 달을 지내면, 그리스도인이 돼요.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라요. 이것이 바로 영향력입니다.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 5:14,15" 이 2001년,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 멀리 가서 무슨 일을 할 필요 없어요.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으십시다. 새해에는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십시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개인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합시다.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의 소문이 우리 가정의 담을 넘어서서 내 직장으로, 내 주위로 번져나가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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