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교회 생활 2001-12-11 22:27:22 read : 173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데살로니가전서 5:12-15
12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勸勉)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惡)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善)을 좇으라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을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삶의 현장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아마 이것은 우리가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아는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예를 들어 아무리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가정이 불행하면 그 인생은 불행해 지는 거예요. 직장에서 아무리 많은 부하 직원을 거느리고 떵떵거린다고 해도 가정이 깨어지면, 그 인생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 아닙니까?
우리는 얼마 전에 IMF를 보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IMF 때문에 고통 당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똑같은 부도를 만나고, 똑같은 어려움을 만났는데 어떤 인생은 좌절해서 꺾어져 버렸고, 어떤 인생은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 꽃같이 환하게 피어났어요.
사회 심리학자들이 이것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도대체 그 차이가 무엇인가? 그들이 밝혀낸 것 가운데 하나는 90%이상이 가족 간의 관계에 달려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가 튼튼하고,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튼튼하면 똑같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 어려움을 통해 오히려 그 인생이 피어났습니다. 평생 돈을 위해 살고, 사업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IMF 때 돈을 잃어보니 돈이 별거 아니로구나! 그리고 참 귀한 진리를 발견하고 오히려 뜻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반면, 똑같은 상황 앞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차이는 다름 아닌 가정에 있었어요.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 생활이 불행했던 적이 있습니까? 아마 이 가운데 계신 분들도 한 두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거예요. 다른 교회에서 불행한 교회 생활 때문에 교회를 옮긴 사람들, 아니 영안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 교회 37년 역사 가운데 불행을 맛본 분들이 이 가운데 계실 거예요. 신기하게도 구원받은 우리 백성에게 교회 생활이 불행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없어져요. 돈이 안 벌리는 것도 아니요, 직장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요, 자식이 속썩이는 것도 아닌데 교회 생활이 불행하면 내 영혼이 시들어져 버리고, 내 마음에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고, 삶의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왜 그럴까요? 교회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합니다. 주일날 한 번 와서 예배 한 번 드리는 교회 생활이니까, 내 삶과 내 행복과 별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 생활을 조금만 깊이 해 보십시오. 교회 생활이 나의 행복을 좌우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기관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축복을 전달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기관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축복을 직접 체험하고 전달하는 기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과 교회를 세우시고, 이 두 기관을 통해 천국의 축복과 천국의 기쁨을 우리로 하여금 맛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중요한 거예요.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행복을 위해, 그의 편지 말미에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영광되며 우리에게 축복이 될 것인가 하는 말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람직한 교회 생활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원리를 알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인 교회 안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배우는 시간 되어, 앞으로 남은 우리의 생애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한 몸에 받고 사는 영안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바람직한 교회 생활을 위해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관계를 올바로 정립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지도자와의 관계요, 두 번째는 성도간의 관계입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 그리고 성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그 교회 생활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교회 생활이 행복하게 되면 그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코 제가 설교하기 쉬운 본문이 아니었어요. 제가 주일 아침이면 설교 준비를 일찍 끝내는데, 오늘은 상당히 늦게까지 책상 앞에서 씨름해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 제가 이런 내용을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우리 집사님 가운데, 혹은 다른 목사님께서 설교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까? 지도자에 대해서, 그리고 지도자를 어떻게 대하라는 말씀을 제가 어찌 설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에게 뚜렷하게 주신 말씀은 "너 자신을 잊어버려라. 너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지 않니? 너는 나의 도구야.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이 말씀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너는 오늘 이 아침에 다 전해야 돼. 그것이 설교자의 부담이야!" 하나님은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주의 음성을 듣고 저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사람의 말로 이 말씀을 받지 말고 주의 말씀으로 받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우리 성도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우리가 교회사적으로 볼 때, 목회자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지금까지 존재해 왔습니다. 첫 번째는 성직주의예요. 성직자가 모든 것을 독점해야 된다고 생각해 온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부터 출발되었냐 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출발되었어요. 중세를 살펴보면 그때는 신교가 없었어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제(신부)가 모든 교회의 권한을 한 손에 다 쥐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은 성경을 읽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어요. 라틴어로 된 성경을 신부 혼자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그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을 화형 시켰어요. 이 교회의 모든 일은 성직자가 독재해야 되고 성도들은 그저 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돌아가면 되고, 성직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 성직주의입니다. 오늘날 솔직히 천주교에는 아직도 이런 성직주의가 남아있다고, 우리가 개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모든 권한이 교황에게 있어요. 성도들은 그저 순종해야 돼요.
교회사적으로 이러한 성직주의가 있어 온 반면, 반성직주의가 있었습니다. 너무 성직자들이 권한을 높이니까 거기에 대한 반발심으로 싹트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성직자들은 더 이상 교회에 필요없다는 주장입니다. 형제교회와 같은 어떤 교파에 가 보면 목사가 없어요. 부산에도 그런 몇몇 교회가 있습니다. 어떻게 예배드리는가? 저도 그런 교회에 가 봤어요. 빙 둘러앉아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자와 목사가 없으니까 빙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다가 찬송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하세요. "이 집사, 설교 혀어~" 그러면 이 집사가 일어나서 설교하는 거예요. 몇 분인 시간 제한도 없어요. 예배시간도 없어요. 계시가 끝날 때까지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날 아무에게도 하나님께서 계시를 안 내려 주셨어요. 그러면 설교 없이 일찍 예배가 끝나는 거예요. 모든 교회들이 이 방향을 따르지는 않지만 이에 동의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것이 반성직주의입니다.
이것은 둘 다 극단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옳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은 분명히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교회 안에서 목회자를 허락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 목회자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 그 다음 목회자, 그 다음 성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못 번역해서 그렇게 해석된 거예요.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성경에서 '다스리며'가 자주 나오는데 그렇게 좋은 번역은 아니에요. 이 단어를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너희를 지도하며'입니다. '다스린다'고 하면 목회자가 성도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이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제가 약 5년 반전에 영안 교회에 취임하며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제가 결코 여러분보다 앞서 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앞장서서 여러분을 이끄는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동등한 선상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 앞에는 주님만이 계십니다. 우리 모두 손을 잡고 그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됩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그것이 성경적이에요. 목회자는 누구인가? 더 이상 성도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이어주는 제사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목회자도 성도와 똑 같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목회자를 주셨는가? 은사가 다 다르다는 겁니다. 찬양의 은사를 성가대원에게 주셨고, 주일 학교 교사에게 가르치는 은사가 있듯이 목회자는 목회자의 은사가 있습니다. 설교하는 은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예요. 똑같은 몸이지만 은사가 다른 뿐이에요. 여러분, 저를 이렇게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는 이것이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리 한국 사회는 계급 사회잖아요? 성경에 나타난 직분은 목회자와 안수집사가 있을 뿐이에요. 장로가 있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해석에 따라 틀려요. 성경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과 목사는 다 같은 사람을 지칭한 것같이 보여집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에 동의해요. 장로도 안수 받으면 목회자예요. 그런데 왜 우리 한국 교회는 서리 집사가 있고, 권사가 있고, 권찰이 있고, 전도사가 있고 강도사가 있습니다. 강도사가 어떤 사람인가? 이름이 흉악하잖아요. 무슨 계급이 그렇게 많으냐? 한국 교회만 계급이 많아요.
한국 교회에는 뭔가 진급하는 맛이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교회 생활 한 5년 열심히 하면 서리 집사 되고, 그 다음에 열심히 하면 진급해서 안수집사 되고, 안수 집사 되고 나서 놀면 또 이상해요. 그래서 침례교회에서도 뭘 줍니까? 안수집사 5년 열심히 하고 나면 장로 되고, 장로 되어서 만족 못하시는 분은 목사 받는단 말이에요. 이것을 계급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도 똑같은 반열에 선 사람이에요. 집사도 똑같아요. 성가대원도 똑같아요. 성도도 똑 같아요. 단지 은사가 다를 뿐이에요.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 이 특별한 은사를 가진 목회자에 대해서 너희가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되는가? 그것이 교회 생활에 절대적으로 많은 부분을 좌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교회의 한 기관에서 리서치를 했습니다. 교회 생활이 굉장히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 가운데 100명을 뽑아서 질문을 했어요. 교회 생활이 불행한 이유 가운데 첫 번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당신은 불행합니까? 100명 가운데 76명이 '내가 교회 생활이 불행한 이유는 목회자와의 관계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어요.
여러분, 목회자가 여러분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불편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 여러분의 교회 생활이 절대로 기쁘지 않다는 거예요. 축복이 될 수가 없어요. 사실 아닙니까?
저에게 가끔 다른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이 상담을 요청해 옵니다. 목회자와의 관계가 너무 불편하다고 하면 저는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한 가지는 빨리 그 관계를 회복하라고 상담해 줍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회자와의 관계만큼은 회복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되지 않거든 그 교회를 떠나라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가르쳐요. 왜냐하면 목회자와 관계가 불편할 때 우선 설교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에요. 신앙생활이 축복이 되지 않아요. 모든 것에 걸림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는 비결 가운데 첫 번째로, 목회자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1. 목회자와의 관계
1) 목회자에 대해서 알라
12절을 보세요. 목회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세 가지가 필요한데 12절에서 먼저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여러분, 어떻게 목회자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합니까? 먼저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목회자에 대해서 알아라. 이 말씀은 그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보다 높은 위치에 선 사람은 아니지만, 목회자의 중요성을 너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인식해야 한다."
가끔 성도들 가운데 목회자와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지. 그래 삐졌어? 그래, 한 번 해보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내가 하나님보고 신앙생활하지 너보고 신앙생활 하냐?" 그래서 설교 시간에는 일부러 콧구멍이 뚫어져라 팝니다. 코털을 뺍니다. 조용하게 설교하는 데 맨 앞자리에 앉아서 성경책을 막 젖힙니다. 목회자에게 반항하는 겁니다. 그런 얘기 저는 많이 들어요. 예배가 축복이 되겠습니까? 아니요. 그것은 목회자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하는 짓이에요.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무엇이고, 목회자가 여러분의 삶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를 모르게 될 때, 수많은 신앙의 낙심이 거기서부터 찾아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많은 목회자와의 불편한 관계가, 목회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시는 거예요. 너희를 가르치는 목회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라!
또 어떤 사람들은 목사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신내린 무당 정도로 알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 말이 좀 거칩니다만, 그 마음을 살펴보면 사실 그래요. 늘 목사를 어떻게 대하는가? 사업은 하는데 "목사님 호떡 장사를 할까요? 우산 장사를 할까요? 무엇을 할까요?" 또 결혼을 하면 "봄에 할까요? 가을에 할까요?" "4월달에 할까요? 5월달에 할까요?" 그러면 무당 목사는 뭐라고 합니까? "내 기도해 볼께. 사흘 뒤에 만나!" 그리고 나서 "봄에 혀~"라고 말합니다. 무당 교인이요, 무당 목사예요. 많은 성도들 마음속에 목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과 자신의 신앙을 중개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하나님께 바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전혀 목사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성도들은 목사를 자신들의 고용인쯤으로 생각을 합니다. 목회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봉급을 주고 고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국의 많은 성도들 잠재의식 속에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헌금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많은 성도들이 헌금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목사에게 준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헌금한 돈으로 우리 교회 목사와 부목사는 다 봉급 받고 있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야 해! 당연한 걸 가지고 뭘 그래?" 그래서 안 도와 주면 마음 깊은 곳에서 화를 내요.
이것은 신앙생활에 굉장한 혼돈을 가지고 오는 민감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헌금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누구에게 드립니까? 하나님께 바치는 거예요. 여러분만 헌금 바칩니까? 저도 똑같은 성도로서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가능한 한 많은 액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입니다.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치는 거예요. 저는 한 번도 성도들에게 봉급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헌금 하셨으면, 하나님은 그 헌금을 가지고 선교도 하시고, 목회자의 생활비도 주시고, 필요한 곳에 쓰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많은 오해들 때문에 성도들은 풀타임 사역자가 나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내가 어려울 때 찾아와 주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 기쁨이 없고 신앙생활에 혼돈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을 위해 특별한 은사를 주어서 너희에게 파견한 목회자가 누구인지, 그의 중요성과 그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목회자에 대한 오해가 없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가장 귀히 여기라
어떻게 목회자와 올바른 관계를 가질 것인가? 목회자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예, 사랑 안에서 어떻게 여기라고 하셨어요? "가장 귀히 여기며". 이것이 제가 설교하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주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저는 잊어버리십시오.
왜 목회자를 가장 귀히 여겨야 되는가? 이 말씀의 어려움이 "가장"에 있어요. 그냥 귀한 사람 정도로 여기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현실감 있게 여러분께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스승, 직장 상사, 친구, 아내, 부하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 모든 사람들보다 더, 가장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나요? 여러분의 축복을 위해서 이 말씀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가장 귀하게 여기라. 왜 그럴까요? 그의 인격이 훌륭해서인가? 그가 나보다 나아서인가? 아닙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는 "저가 하는 일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의 사역 때문에, 그를 가장 귀한 자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안수집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저희 할아버님 시대에는 목회자들이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임집사님 같은 분은 종종 얘기합니다. "그 때는 목사님이 아니라 천사였어. 천사!" 저도 그런 기억이 나요. 목사님이 한 번 오시면 그 집에 잔치가 벌어져요. 그 당시엔 목사가 귀했으니까 한 목사님이 교회를 10개정도 맡았어요. 그래서 1년에 한 달 정도 와서 목회 하게 되는데, 그 한달 동안은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에요. 요사이는 목사가 너무 많아 탈이에요. "너 아니면 없냐!"는 식이죠. 여러분, 이렇게 목사를 대접하면 누가 축복을 받겠습니까? 천사 대접을 받은 목사가 축복을 받았을까요? 예, 물론 그 때 많은 목사님들이 기뻤을 거예요. 그러나 불행을 당하는 성도들도 있었어요. 목회자를 홀대하고 가볍게 여긴 그 결과가 교인들에게 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설교에 대한 감동이 나도 모르게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의 말씀으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을 가르치는 목회자를 그 하는 일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설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왜냐 하면, 여러분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해 주는지 저는 몸둘 바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목회자를 만나보면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는 것 같아요. 불행하게도 심방을 가도 '당연히 당신은 나를 위해 와야 된다. 내가 누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성경공부도 당연히 당신이 할 일을 한 건데 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할 줄 모릅니다. 상담을 해 줘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설교를 해도 감사할 줄 몰라요. '당신의 일 아닌가! 나도 봉사하고 당신도 봉사하는 건데'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교회 생활이 축복된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를 살펴볼 때, 저에 대한 사랑과 귀하게 여김은 제가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부목사님들에 관한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부목사님들이 저보다 능력면에서 탁월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당연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목사님들을 굉장히 경시여기는 풍조가 있는 것 같아요. 부목사님들을 함부로 취급합니다. 재직회에서도 부목사님께 함부로 말합니다. 목회자를 앞에 두고 못할 얘기들을 해 버립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그 목회자를 대우할 때, 그분들이 나가서 어떻게 아름다운 개척자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훌륭한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그들의 인격과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 때문에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의 경험에 상관없이, 그들의 능력에 상관없이, 그들을 존중해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목회 일은 쉬운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을 보면 목회자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어떤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면, 목회 하는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이 "장례"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기독교인지 유교인지 분간이 안가요. 사람 한 분 돌아가시면 유교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 해서, 한 달에 몇 번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목사는 죽을 판이에요. 우리의 장례 예배를 생각해 보세요. 돌아가시려고 하면 임종예배 봐야 하고, 그 다음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돌아와서 추모예배, 그 다음은 추도 예배 드려야 해요. 사람이 한 명 죽으면 얼마나 일이 많은지 몰라요.
제가 영안 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새벽기도 나가야 하는데, 새벽 1시에 전화가 왔어요.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재빨리 일어나서 그곳에 갔습니다. 전도사 때니까 얼마나 열심히 합니까?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가르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하면서 찬양을 두 시간 넘게 목이 터져라 불러도 할머님이 안 돌아가시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 다음날 기력을 회복하셨어요. 석 달 후에 그 할머니에 대한 전화가 와서 또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세 번을 똑같이 하고 나니까 네 번째 전화 받고 갈 때는 이런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주님, 이번에는 꼭 데려가 주옵소서!' 여러분, 성도가 돌아가실 때마다 그렇게 한다면 전도사, 목사는 죽겠더라고요.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데 어떤 가정에서는 그 힘든 장례를 하고 왔는데, 우리 부목사님들 그 고생해도 식사 한번 대접하지 않는 가정들이 있더라고요. 세상에서도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여러분, "가장 귀히 여기라"는 말씀은 굉장히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목회자와의 관계를 가르치고 있는지 아세요? 디모데전서 5장 17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 장로교에서는 목회자도 장로입니다. 그렇게 구분해서 만약에 얘기한다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한국말은 굉장히 멋있게 번역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번역할까 하고 옛날에는 무척 망설였을 거예요. 저도 이 원어를 보고 너무 황당했어요. 이 말씀은 잘 다스리는 장로 목회자들을 배(倍)나 물질적으로 보상해 드리라는 얘기입니다. 배(倍)나 대접해 드리라는 거예요. 여러분을 잘 다스리는 존경하는 목회자와 지도자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일을 해 주었을 때, 그에게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것보다 두 배로 대접하라는 말씀이에요. 예를 들면 초등학교 선생에게 명절에 구두티켓 한 장을 갖다 주면 목회자들에게 두 장 갖다 주라는 거예요. 이것이 원어 성경 말씀의 뜻입니다.
그 다음 더 중요한 것은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라고 하셨나요? '더할 것이니라' 감사의 태도를 가지라는 거예요. "아, 목사님, 왜 우리에게만 가르치고 목사님께 대해서는 안 가르칩니까?"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겠죠? 예. 성경은 굉장히 많이 가르칩니다. 너희들이 목회할 때 성도들이 대접해 준다고 하고 안 해준다고 토라지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라고 책망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경책받아야 하고, 제가 경책받아야 할 말씀이에요. 그러나 성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장 귀히 여기라"
지난 설날에 한 집사님이 트럭에 뭘 잔뜩 싣고 오셨어요. "뭡니까?" 물었더니, 배를 21상자를 싣고 왔어요. 목회자들, 직원들, 다 한 상자씩 나누어주었어요. 드리고 싶어도 형편이 안 되는 분은 못하죠.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여러분, 우리 교회는 목회자가 많아요. 새가족이 하루는 멋모르고 "목사님, 사역자들 식사대접 한 번하고 싶습니다" "몇 명이나요?" "전부 다 데리고 오세요" 그래서 제가 다 데리고 갔습니다. 그 날 밥과 반찬이 모자랐어요. 부부동반으로 전부 합하면 30명이에요. 앞으로 조심해서(?)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 이후로는 식사 초대가 들어오면 "몇 명까지 합니까?" "어디까지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제가 정말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담임 목회자니까 존경받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쳐두시고 애쓰시는 부목사님들을 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도 목회자예요.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여러분들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분들이 여러분에게 심방을 가고, 여러분을 위해서 장례식을 인도해 드리고, 무엇인가 봉사를 하면 '당연하지!' 라고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히 여기라 말씀합니다. 이것이 교회 생활의 축복입니다!
목회자를 어떻게 대해야 되는가?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13절 마지막에 보면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3) 너희끼리 화목하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목회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너희끼리 화목 하라니 저는 이해가 안 갔어요. 그런데 나중에 제가 이 말씀을 깨달았어요. 목회자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저 목사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제가 비결을 가르쳐 드릴게요. 목사 공격하지 마시고 여러분들끼리 분당을 일으키세요. 파를 만드세요. 가야파, 개금파, 남천동파 등을 만들어서 치고 받고 싸우십시오. 저는 그런 교회에서는 목회를 못할 것 같아요. 왜요? 가야파에 살짝 미소를 던지면 개금파가 코에서 연기를 냅니다. 개금파 하고 식사 한번하고 나면 가야파는 저를 아예 안 쳐다보려고 해요. 이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 인줄 아세요?
너희가 목회자와 올바른 관계를 갖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파당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영안 교회는 오직 예수파만 있는 줄 믿습니다. 누구의 파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어떻게 행복하고 바람직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목회자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데 알아야 되고, 가장 귀히 여겨야 되고, 서로 화목해야 됩니다. 그 다음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성도간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어요.
2. 성도와의 관계
오늘 여기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교회 안에 등장하는데 14절을 보세요.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勸勉)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나와요. 규모 없는 자, 마음이 약한 자, 힘이 없는 자. 여러분, 이러한 사람들을 여러분이 잘 대할 때, 여러분이 아름다운 교회 생활을 하게 되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축복이 된다고 하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1) 규모 없는 자를 권계하라
규모 없는 자는 어떤 자인가? 쉽게 말하면 질서가 없는 자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말도 마음대로 하고, 행동도 마음대로 하고, 나왔다 안나왔다 하며 하여튼 자기 멋대로인 자입니다. 규모가 하나도 없어요. 이런 자들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권계해야 됩니다. 권계가 무엇인가? 권하여 책망하는 겁니다. 야단을 치는 게 아니고 좋은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책망하는 거예요. 성도가 잘못된 일을 할 때 누가 책망합니까? 오늘날 교회에서는 모든 책망을 목회자에게 미룹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이 잘못한 것을 알아요. 그런데 대면해서 말을 못해요. 그리고 목사에게 얘기합니다. 목사는 그 사람을 불러서 야단을 치던지 강대상에서 칩니다. 그러면 교인이 다 떨어지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도간에 규모 없는 사람을 보십니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보십니까? 여러분이 권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책망해 주셔야 돼요. "이 형제, 왜 교회를 나왔다 안나왔다 그래?" "집사님, 집사님이 되셔서 저의 모본이 되셔야 할 분이 어떻게 수요 예배도 안나오십니까?" 아멘! 이것이 좋은 교회 생활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권계해요. 그러니까 서로 조심하고 규모 없는 삶을 살지 않게 돼요. 그리고 여러분이 저를 권면해 줘야 돼요. "목사님, 이런 것은 잘못한 것 아닙니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가운데,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 장로교 목사님인데, 이런 얘기를 해 주셨어요. 하루는 한 장로님이 오시더니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뭡니까?" "요즘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에 대해서 불평이 한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입니까?" "제가 몇몇에게 들었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잘 안 한다고 합디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아주 지혜로운 분이었어요. 목회학을 가르치면서 이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목회자가 당황스럽잖아요? 그런데 이 목사님은 "그래요? 장로님은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유구무언이더래요. 왜 유구무언이겠어요? 교인들이 목사님이 요즘 밖으로만 너무 나가고 심방을 안 한다고 하니까 장로님도 같이 맞장구를 친 거예요. 사실은 자기 마음에 있는 이야긴데 성도가 해 주니까 '할렐루야!' 하고선 둘이서 목사를 난도질 해놓고 나와서는, 자기 얘기라고 안하고 "이러이러한 소문이 있던데..."라고 말한 겁니다. 그 목사님이 이렇게 가르쳤답니다. "장로님, 그럴 때는 어떻게 하셔야 하는지 압니까? 성도가 몰라서 목사를 욕하면 장로님이 권계하셔야 합니다. 야단 치셔야 합니다. 혹 그 말이 맞더라도 어떻게 목사님을 공개석상에서, 장로 앞에서 당신이 욕할 수 있는가라고 야단치시고 그 다음에 저에게 오셔서 다른 사람 핑계대지 말고, 목사님, 제가 볼 때 요새 목사님이 심방을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심방 좀 더 해주십시오" 이렇게 권면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분위기로 돌아가야 돼요. 성도가 잘못하면 성도끼리 서로 책망을 해야 돼요. 규모 없는 자들을 너희가 권계하고, 그렇게 될 때 잠시의 아픔은 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교회에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하면 신앙생활을 체계적으로 하게 되고, 규모 없이 행하는 자가 점점 사라지고 변화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 축복이 되는 거예요.
2) 마음이 약한 자를 안위하라
두 번째 등장하는 사람은 마음이 약한 자입니다. 원어에 번역할 게 없으니까 이렇게 했습니다만, 영어로 표현하면 Small Soul! 나는 이 교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은사도 없어. 나 같은 게 뭐~ . 저 안수 집사님이나 하시지. 나는 가진 것도 없고 재능도 없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서 1년이 되고 2년이 되어도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겁니다. 은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4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안위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위치를 찾게 도와주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구원받은 모든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은사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어요. 그 은사를 누가 발견하게 해 주는가? 목회자가 하는가? 그것이 사실 저의 고민입니다. 새가족이 우리 교회는 많이 와요. 다른 교회에서 굉장히 은사가 많은 분인데, 우리 교회 새가족으로 와서 왔다갔다만 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봐 잠을 못 자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새가족 명단을 봅니다. 이 사람 요즘 어디서 봉사하고 있는지 고심하느라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예요. 왜 그래요? 우리 교회에 안위하는 자들이 적어서 그래요. 목회자가 하는 게 아니에요. 성가대원들은 성가대 끝나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새가족이 오면 눈을 부릅뜨고 옆에 앉아 보는 겁니다. 옆에 앉아 보니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성가대 하십시다"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중등부 교사들은 저 사람이 말에 조리가 좀 있는 것 같고 성경을 잘 안다 싶으면 "교사하십시다. 중등부 교사하면 얼마나 축복 받는 줄 아시오!"라고 새가족이 한 명이라고 오면 서로 데려 가려고 해야 합니다.
반대로 "오려면 오고 말라면 마라! 나도 해보니 힘든데 이 짓을 왜 시키겠노?" 마음이 약한 자가 눈에 띄는데, 교회 1,2,5년을 나오고도 봉사하지 않고 자기의 은사를 못 찾고 방황해서, 교회생활이 재미없어서 나올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들을 안위시켜주는 성도가 적은 교회, 그것은 올바른 교회 생활이 아니라 말씀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새가족 한 명이 오면 "이놈의 교회 등쌀에 못 견디겠다!"고 나오지 말까 고민하는 그런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서로 끌어가려고 애를 써야 돼요. 너무 많아서 대기자 발령이 받아져야 돼요. 봉사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1년 기다시리오" "2년 기다리시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에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십시다. 아멘!
3)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라
마지막 세 번째 성도와의 관계는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라고 했어요. 힘이 없는 자란 말은 쉽게 말하면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약한 자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잘 알지 못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자입니다. 예를 들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오늘은 구원받은 것 같고 내일은 아닐 것 같아서 늘 고민이에요. 구원은 받았는데 늘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해요. 성경을 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해요.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해요. 이러한 자들을 붙들어 줘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찾아가서 말씀을 가르치고, 구원의 확신을 심어줘야 되고, 죄의식에 사로잡힐 때, 용서에 대한 구절을 가지고 가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설 수 있도록 붙들어 주는 관계! 여러분, 교회에 있는 성도가 모든 사람들과 이러한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교회는 참으로 천국 같은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교회 생활이 기뻐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생활은 사치로 하는 게 아닙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게 아니에요. 우리의 생명과 행복이 달려있는 중요한 생활입니다. 우리의 모든 축복이 교회 생활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람직한 교회 생활에 대해, 이 아침에 참으로 구체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이 우리 모두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서 교회 생활에 큰 기쁨을 누리심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준비하신 축복을 남김없이 다 받아 간직하는 영안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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