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목자 여호와 2001-12-11 22:30:27 read : 178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23:1-6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성경 전체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구절이 있다면, 아마 시편 23편일 것입니다. 글을 모르는 유치원 아이도 이것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노년층에게도 시편 23편은 많은 사랑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한글 성경 번역판들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번역판은 개역판이라고 합니다. 공동 번역이 나왔고, 새번역, 표준 새번역, 개역개정판 등 참 많은 것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23편은 모든 번역판에 각각 실렸을 뿐 아니라, 성경에서는 유일하게 지방(地方)번역본을 가지고 있는 장입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편 23편 전라도 버전, 충청도 버전, 경상도 버전 등. 홈페이지에 어떤 형제가 시편 23편 경상도 버전과 전라도 버전을 올려놓아서 읽어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아직 이북 버전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번역본이란 것은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자신의 말로 된 것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지방 버전을 읽으면서 누가 장난으로 만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개역판 성경보다 어떤 부분은 더 정확하게 표현했어요. 아마 시편 23편을 굉장히 많이 묵상한 사람이 지방 번역본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원래 경상도 사람이 읽어야 하는데, 다행히도 제가 완벽하게 2개 도(道)의 말을 구사하는 사람 아닙니까? 저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지만 유치원부터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고향에 오면 경상도 말을 하고 서울 가면 서울말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시편 23편 경상도 버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내사 마 답답을끼 없데이
시이프른 풀구디 내 디비지고 쪼메 쉿다갈 또랑가로 델꼬가신다.
내 정신 챙기시사 올케 살아라 카심은 다 저 양반 체면 때문이라 카네.
내 죽울 뻔한 골짜구디 껌껌한데서도 간띠가 부가 잘 댕기는 것은
그 빽이 여사가 아인기라. 주의 몽디와 짝대기가 내를 지키시고
내 직일 놈 문디 앞에서 내 기 세아 주신다 아이가.
사는기 아무리 복잡다 케사도 저 양반이 맨날 지키주신다카이께내
내사 우짜든지 그 옆에 딱 붙어가 죽어도 안 떠날란다"
마음에 확 와 닿으십니까? 누가 시편 23편을 모르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 모두가 다 외울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이것은 다윗이 지은 시(詩)입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양을 쳤기 때문에 양과 목자의 관계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그의 소년시절에 쓰여졌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시(詩) 속에는 인생의 깊은 고민과 위험을 지난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아마 이 시편은 다윗이 상당한 고난을 겪은 후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인생에서 맛본 다음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그 만큼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장인인 사울의 추격에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왕이 된 이후에도 아들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는 바람에,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들을 피해서 도망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의 고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얼마나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겠습니까?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자기를 쫓아다닙니다.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신하들이 다 같이 자기 아들 편을 들어서 자기를 죽이고자 쫓아 다녀서, 그는 수개월 동안 사막으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모든 고난을 겪은 다음에, 평화로이 우리 가슴에 다가오는 이 짧은 시편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인생의 고난이 무엇인지 아는 자의 것입니다. 단순히 조잘거리는 유치원생들이 외울 수 있는 얕은 시편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 가운데서도 자녀의 반항을 경험해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힘과 권력이 없어서 그렇지, 힘만 많았다면 이 아버지인 저와 여러분을 꼼짝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혹은 가족들의 불화로 가정이 흔들리는 체험을 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거친 풍파로 삶 전체가 흔들려 본 사람들! 건강을 잃어서 좌절해서 무릎 꿇었던 분들이 이 자리에도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감, 삶의 풍파를 겪어보았다면 바로 이 시편은 당신의 것입니다. 편안하게 왕자로 태어나서 왕이 되었다가, 한 일생을 평화롭게 마친 사람이 쓴 시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같이 고난을 당한 자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윗의 고백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 고백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도와주십시오. 나도 다윗과 같이 삶의 고난 가운데서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이것이 이 시편을 대하는 저와 여러분의 기도이기를 소원합니다.
다윗은 망설이지 않고 시편 23편 1절에서 자신의 중심생각을 말하며 시작합니다. 주제가 먼저 시작됩니다. 주제가 나타난 1절을 외워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찬송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부분이 있어요.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임을 아십니까? "엘로힘"의 하나님이 있고 "여호와"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엘로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여호와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상징하며 하나님을 부를 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나의 곁에 계신 하나님! 나의 옆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늘 건강하고,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부도를 안 당하고, 자동차 사고를 안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이러한 잘못된 신학들이 설교되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그의 양이기 때문에 불행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야 돼요.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는 병중에서도, 혼란 속에서도, 사고를 만나고 인생의 풍파 가운데서도 나는 전혀 부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이십니까?
저는 어느 날, 이 시편 23편 1절 말씀을 읽다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게 많이 외운 말씀인데, 그 날 시편 23편 1절은 제게 다른 말씀으로 다가왔어요. 아주 간단한 진리가 깨달아졌어요.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면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반대로 내가 현재 부족감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그것이 제게 충격이었어요. 만일 내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고, 불안함이 있고, 갈망이 있고, 절망과 외로움, 좌절이 있다면, 만족감이 없다면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내 환경이 어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사실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저는 제 환경 탓을 했고, 하나님을 탓했습니다. 제 마음에 왜 곤고함이 있는가? 왜 부족감이 있는가? 그 이유를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어요. 환경 때문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있지 않기에 제게 부족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만족감이 없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일하며 쉬지 못하는 일 중독자가 될 겁니다. 만일 우리의 교육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만족감이 없을 거예요. 왜요?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유학생활 10년 동안 저는 그렇게 공부해 봤어요. 공부에는 끝이 없어요. 만족감이 없어요. 만일 우리의 재물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것입니다. 재물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이 재물이 날아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을 끊을 수 없을 거예요. 부족감이 있을 겁니다. 만일 다른 어떤 사람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실망할 겁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우리를 늘 실망시키니까요. 이것이 다윗의 말씀이에요. 그는 이 주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면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게 부족한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혀 부족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그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2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실 때 왜 부족함이 없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 2,3,4절에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저는 특별한 Out Line을 사용하는 대신 한 줄 한 줄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우리가 전혀 부족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우신다
두 가지 말로 비유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잘 다가오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양을 길러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 또 하나는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경상도 버전에서는 "도랑으로"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이 더 맞습니다. 흐르는 도랑이에요. 큰 물가가 아니에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보통 양들은 겁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이에나 같은 짐승은 얼마나 담대하냐 하면 사자를 상대해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자에게 시비를 거는 짐승은 하이에나입니다. 개를 닮은 하이에나 아시죠? 어떤 음식을 먹다가 사자가 나타나면 겁이 많은 짐승은 도망을 가지만 하이에나는 절대로 도망가지 않아요. 눈으로 보면서 먹을 것 다 먹어요. 그러다가 사자가 어느 정도 위험 거리에 들어오면 그때서야 포기하고 도망갑니다.
반면에 양들은 겁이 너무 많아요. 풀을 먹다가 옆에서 다른 양이 펄쩍 뛰기만 해도 주위에 사자가 있는가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뜁니다. 옆에 있는 놈이 뛰면 또 같이 뛰어요. 그래서 떼를 지어 종일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다 지쳐서 다 누워요. 겁이 그렇게 많아요.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음식조차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겁이 많은 동물이 양이에요. 양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배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눕지 않습니다. 모든 짐승이 다 그렇지만 배가 잔뜩 불러야 누워서 되새김질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눈에 익숙한 소의 모습이 있죠? 봄날 햇빛이 내리쪼이는 곳에 소가 여물을 잔뜩 먹고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습니다. 졸면서 다시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이처럼 짐승들은 배가 불러야 눕는 거예요.
여기서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공급을 묘사했는가 하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누워 있는 겁니다. 왜요? 배가 이미 너무 부르기 때문에 앞에 푸른 초장이 있어도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속이 꽉 찼어요. 포만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그 음식 위에 쭉 누워있는 양의 모습!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잔잔한 물가, 작은 개울가로 인도하십니다. 양은 겁이 많아서 콸콸 솟아나는 물이나 흐르는 시냇물에서 절대 물을 먹지 못합니다. 자기의 양털이 물에 젖어서 빨려들어 갈까봐 두려워서 그러는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보고만 있을 뿐, 세게 흐르는 물에서는 물을 못 먹고 왔다갔다하며 당황해하기만 해요. 세차게 흐르는 물 -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물이 잔잔하게 흐를 때가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비가 갑자기 한꺼번에 쏟아지니까, 그 사막에 비가 쏟아지면 도랑을 만들고 물이 콸콸 흘러가는 겁니다. 양은 겁이 나서 이런 센 물을 먹지 못합니다. 그때 목자는 팔을 걷어 부치고, 바지를 걷고 큰돌을 옮겨 댐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흐르는 물이 잔잔하게 흐를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 양들이 와서 안심하고 물을 먹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무엇을 얘기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당신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쉬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편은 잘 외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이 누구인가? 나입니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는 것이 누구인가? 나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누구인가? 나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아파트를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자가용을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사업을 유지하는 거예요. 삶의 모든 짐을 나 자신이 지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마 11:28)
그러나 이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다윗은 말년에 이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들어가면 음식이 쌓였어요. 재물이 쌓였어요. 그래서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을 거예요. 자신 때문에 수많은 부하들이 먹고사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어느 날 압살롬이 반역해서, 그는 광야에 쫓겨나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음식을 갖다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쌀 한 톨도 만들 수 없었어요. 거기서 다윗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내 목숨을 위해 양식을 공급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내 가족, 내 부하들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로구나!" "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금까지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앞길에 모든 필요를 친히 채우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먹고 살 문제가 아니다. 꼴이 아니다. 물이 아니야. 내가 그것은 너희에게 공급할거야. 너희는 하늘 나라를 신경 써라. 어떻게 옳게 살며, 하나님 앞에 영광되게 살 것을 고민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는 내가 너희를 다 먹이마."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의 양식만 공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병이어로 우리를 마음껏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에 남은 그 모든 물고기와 보리떡을 열두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제가 여러분에게 양식을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8월에 안식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고 있는데 안식년에 다른 곳에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못 가십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갈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이시면 왜 부족함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가? 그분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신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한 가지는 소생시키시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왜 "소생"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왔습니까? Resuscitation, Restore! 왜 하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셔야 합니까?
양의 습성 중 하나는 길을 잘 잃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양은 자꾸 우리를 떠나요. 풀을 쫓아서 먹다보면 어느새 멀리 떨어져 집을 찾지 못해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양의 비유를 든 것입니다.
그 당시 한 목자가 양을 100마리 정도 관리했어요. 목자는 그 100마리 양의 이름을 전부 다 알아요. 우리는 그놈이 그놈 같지만 목자는 다 알고 있어요. 목자가 그 양의 이름을 부르면 알아요. 저녁에 와서 출석 체크를 해 보니 한 마리가 없어요. 똘똘이가 사라졌어요. 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나머지 양을 우리에 두고 찾아 나서는 겁니다. 양은 풀을 먹다가 정신 없이 멀리 갑니다. 저녁이 되면 겁이 많은 양은 드디어 깨닫습니다. 동료들이 아무도 없고 목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양은 웁니다. 울면서 방황하며 뛰어 다닙니다.해는 지고 겁에 질려 돌아다니다 보면 가시덤불에 찢기고 웅덩이에 빠집니다. 사나운 짐승이 곧 그를 덮칠 것입니다. 그때 목자가 이름을 부르며 찾아 나섭니다. "똘똘아~~"
가시덤불에 찢기고 지쳐 쓰러진 양을 발견하고 목자는 먼저 가죽 주머니의 물을 먹입니다. 그리고 감람유 주머니에서 기름을 꺼내 그 상처 난 곳에 발라줍니다. 이것을 "소생"으로 표현했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아세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하다가 저절로 돌아온 것 같습니까? 목사님이 여러분을 돌아오게 한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을 하나님 곁으로 돌아오게 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여러분을 찾아가 소생시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세요. 때로 우리가 낙심했을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닦아주시고, 와서 기름을 바르시며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갈한 우리의 목을 채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만 우리를 소생시키지 않으세요.
팔레스타인의 양을 기르는 법을 읽어보면 참 재미가 있고 성경 말씀이 더 잘 이해됩니다.
때로 어떤 양은 습관적으로 목자를 떠나는 양이 있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목자는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섭니다. 포기하지 않아요. 끝까지 찾아 나서요. 그런데 참다 참다가 마지막으로 안되겠다 싶을 때, 그 가시덤불에 걸려있는 양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한 기구를 꺼내어 양의 다리를 붙들고 우지끈하고 부러뜨립니다. 양은 아파서 소리를 칩니다. 목자는 그 다리를 다시 깁스를 해 줍니다. 그 양은 그 날부터 절름발이가 됩니다. 목자가 왜 그렇게 하겠어요? 그의 옆에 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양이 살기 때문이죠. 성한 다리 가지고 또 방황하다가 목자가 찾지 못하면 죽으니까, 발을 절더라도 목자 옆에 두어야 안전할 것을 목자는 알기에 사정없이 다리를 부러뜨려 버립니다. 여러분, 이것도 "소생"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십니다. 때로 우리에게 와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 물을 먹이시는 하나님, 꼴을 먹이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것만이 소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방황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드디어 회초리를 드십니다. 그러나 그 회초리를 맞을 때, 여러분의 다리가 부러질 때 낙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대로, 어찌 자식을 경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하나님) 옆에 두시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채찍을 드시는 줄 믿습니다. 양들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 소생시키신 양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더 이상 옆길로 가지 않도록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광야! 언젠가 성지 순례 가보면 다 아시겠습니다만 그곳은 길이 굉장히 많아요. 그것을 Trail이라고 해요. 오늘날도 "Trail"이라고 써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에요. 일부러 길을 닦아 놓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꾸 밟아서 생긴 산길 같은 것을 Trail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의 길"이란 것은 바로 이 길입니다. 짐승이 밟았든, 사람이 많이 밟았든, 거기에는 수많은 길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길들은 사나운 짐승이 밟아서 생긴 잘 닦여진 길이에요. 그 길로 가면 양은 죽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좋은 길을 한번은 알았다고 해도 사막에 모래바람이 불고 나면 그 길이 금방 다 숨어져 버려요. 어디가 길인지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러나 목자는 압니다. 그러나 양은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몰라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데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가장 부담이 되고 괴로운 것은 바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느 길이 옳은지 알아야 가지요.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가? 직장을 가질 것인가, 사업을 할 것인가? 사업을 한다면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 해야 되는가, 저렇게 해야 되는가? 이런 문제로 고민해 보셨습니까?
요즘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저와 함께 하는 코너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글은 주로 선택에 관한 상담이에요. 방송 설교를 듣고 나서 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고, 자기의 사정을 쭉 적어요. "목사님,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 조언해 주십시오" 제가 교회 홈페이지에는 점잖게 씁니다만, 개인 E-Mail로는 "당신의 짐을 남에게 지우려고 생각하지 마시오. 내가 왜 당신의 짐을 져야 됩니까? 당신이 결정하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이렇듯 어떤 상황에서 무언가 결정한다는 것이 어려워요. 이 고민, 얼마나 어려웠으면 유행가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서 갈까~" 다 아시죠? 오죽했으면 우리가 그 노래를 좋아하겠어요? 우리의 심령에 맞으니까요. 무엇이 옳은 줄 압니까?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몰라요. 겉으로 보기에는 환한 길이고, 대로(大路) 같지만 결국에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를 누가 인도한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사실, 주님의 뒤만 따라가면 돼요.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해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95%는 이미 나타나 있어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상담하고 고민합니다.
"목사님, 5년 전 우리 시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핍박했는데 내가 이 시어머니에 대한 한(恨)을 풀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여러분, 그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주님의 인도를 구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 누가 와서 봉투를 하나 슬쩍 찔러 줬는데 눈감아 달라고 합니다. 봉투를 열어보니까 몇 백만 원이 들었습니다. 이 돈을 제가 받아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이런 것은 주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없어요. 왜요? 이미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까요. 주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 길은 안전하고 옳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잠언 3장 5,6절을 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을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유익과 욕심에 가리워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저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당신을 좇겠습니다. 주여,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뚜렷한 길을 지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목자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거예요. "당신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은 목자고 나는 양입니다. 가르쳐 주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절벽으로 인도하시면 절벽을 기어올라가겠습니다. 신작로와 거친 길이 있는데, 하나님이 거친 길로 가라하시면 제가 당신의 뒤를 좇아 그 길을 주저 없이 선택하겠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삶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이 왜 우리의 목자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집니다. 우기가 끝나고 나면 산 위에 눈이 녹아 있어요. 팔레스타인은 여름과 겨울이 바뀌어서 비가 오거든요. 우기 때는 풀이 저 밑에까지 있습니다. 건기가 찾아오면 풀을 찾아서 산 위로 가야 됩니다. "메싸"라고 하는 평지를 찾아가야 돼요. 건기가 되면 목자는 양떼를 그 평지로 인도합니다. 그 산 위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깊은 골짜기를 지나야 되는 겁니다. 때로 그 골짜기는 너무 거칠어 보입니다.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햇빛하나 들지 않는 깜깜한 골짜기예요.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삶의 풍파를 겪은 사람이에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뉘라서 평지만을 달리겠습니까? 뉘라서 환한 신작로만 펼쳐지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다 평안해 보여도, 상담을 해보면 그 마음속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남몰래 경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몰래 눈물 흘립니다. 남몰래 괴로워합니다. 누구하나 나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절망감 속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요,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 이 사망의 골짜기가 우리의 질병일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일수도 있어요. 사업이 무너지는 일일수도 있어요. 그런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간 것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왜냐하면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막대기"라는 단어는 경상도 버전에 잘 번역했어요. "몽디"라고 했는데, 바로 몽둥이죠. 70센티미터쯤 되는 몽둥인데, 그 앞에는 쇠가 박혀 있어요. 그것으로 뭘 하죠?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해석하기를 "내 양을 치라"고 하신 말씀을, 목사의 할 일은 양을 먹이기도 하지만, 말 안 들으면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야한다고 설교하고 목회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전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몽둥이는 치긴 치는데 누구를 칩니까? 양을 공격하는 짐승을 치는 거예요. 이리, 늑대 등을 칩니다. 때로 그 목자는 몽둥이를 던집니다. 앞에 쇠가 박혀 있으니까 맹수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위급할 때, 몽둥이를 던져서 맹수들을 치는 거예요.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 있는 거예요. 우리가 쓰는 지팡이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약간 더 큰 것입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다가 어떻게 하는가? 지팡이 허리가 구부러져서 목자가 짚기 위해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들어서 사용해요. 양이 다른 길로 갈 때 목을 걸어서 똑바른 길로 가라고 인도해 줍니다. 그 다음엔 양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고 할 때나 구덩이에 빠졌을 때, 지팡이로 양의 목을 걸어서 끌어올립니다. 구원의 방패입니다.
양을 칠 때 다윗이 이 일을 해 보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자기를 구원하시고 자기의 적들을 물리쳐 주시는 것을 다윗은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 때 스스로 대항하지 않았어요. 사울을 죽일 찬스가 왔을 때 그를 죽이지 않고 겉옷만 살짝 베었어요. 그리고 자기의 자식이 반역을 할 때 다윗은 그냥 도망 다녔어요. 아들과 전쟁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었는가? 하나님이 막대기와 지팡이로 다윗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보호해 주신 줄 믿습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풍파를 당해 보셨습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풍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질병,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가정의 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드시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드시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건기에 초원을 향해서 축복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갔듯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목자가 그곳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시려고 시험을 주실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공급하는 분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갑자기 장면이 바뀝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은 해석하기 쉬운 책이 아닙니다. 논란이 많은 책입니다. 무엇 때문에 논란이 많은가? 5절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목자와 양의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23편은 하나의 비유를 사용했는가? 두 개의 비유를 사용했는가? 이것 때문에 신학자들의 의견이 갈라져 있어요. 많은 사람이 두 개의 비유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5절 말씀 때문에,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아니거든요. 그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던 사람들은 목자와 양의 비유뿐만 아니라, 주인의 잔치 비유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을 짓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내 동생을 죽였어요. 그 형이 그 사람을 죽이려고 뛰어 옵니다. 그러면 베두인 광야에서는 도망가던 사람이 어떤 사람의 장막에 들어가 버려요. 법칙에 의해서 그 장막 주인이 그 사람을 내주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게 손을 못 댑니다. 원수가 그 사람을 죽이려고 밖에서 낫을 들고 있어요. 그런데 그 주인이 그 사람의 사정을 듣더니 그를 내주지 않고 잔칫상을 배설해서 그 사람을 먹이는 거예요. 저도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두 가지 비유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 가운데, 찰스 슬레밍의 "팔레스타인 목동들의 습관"이란 책을 읽고 아주 감명을 받았어요. 이것은 목자의 비유라는 겁니다. 잘 들어보세요.
건기가 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저 산 위에 눈이 녹아 내리는 풀을 향해 목자는 올라가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금정산에 올라가 봐도 알잖아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면 환한 평지가 있고 동네가 나오는 것, 경험하셨죠? 그것을 "메싸"라고 해요.
드디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메싸를 향해 목자는 양을 이끌고 절벽을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보니, 눈이 녹아 내려 물이 풍부해서 그런지 초원이 펼쳐지는 거예요. 양들이 달려가서 막 먹으려고 하면 목자가 못 먹게 합니다. 왜요? 그 메싸에는 독사가 많거든요. 갈색의 짧은 독사, 이스라엘에만 있는 이 독사가 굴속에 있다가 양들이 풀을 먹을 때, 솟아 올라와서 양의 코를 뭅니다. 뱀에게 물린 그 양은 죽어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목자는 양을 정지시키고, 지팡이를 가지고 조사를 합니다. 목자는 경험이 많아서 독사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압니다. 독사가 있는 구멍을 발견하면 그 구멍에 기름을 부어요. 왜냐 하면 뱀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기름이에요. 뱀은 몸으로 기어다니기 때문에 몸에 기름이 묻는 그 순간, 미끌미끌해서 제대로 행진을 못합니다. 그래서 기름과 기름냄새를 싫어해요. 구멍에 기름을 붓고 그것도 안심이 안되어 모든 양의 입과 코 주위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이 기름 냄새를 맡고 독사가 피해가도록 하는 겁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기름으로 바르셨어요. 원수가 있는 곳에 푸른 초장을 배설하신 거예요. 어떤 해석이든 상관없어요. 요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사탄 마귀가 공격하는 그 속에서도, 우리를 능히 보호하실 수 있고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다윗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입니다. 때로 원수가 나를 이기는 것 같습니다. 악한 질병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우리 머리에 부으십니다. 잔이 넘칠 정도로 우리를 축복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동안 영원토록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결심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미국에서 한 어린 소년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6살에 암에 걸려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이 아이를 두고 어머니는 너무 당혹해 합니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가운데 어머니는 어느 날, 우리가 읽었던 이 시편 23편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외우도록 했습니다. 시편 23편을 날마다 아이에게 강의해 주었어요. 특별히 1절의 말씀을 강조했는데, 영어로 다섯 단어입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어머니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꼽을 때마다 그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야. 너의 주인이 되셔. 여호와 하나님이야"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my Shepherd, 이것을 더욱 더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너의 목자야. 네가 병으로 이 땅에서 오래 살수 없을 것 같아. 엄마와 잠시 헤어져야 돼. 그러나 걱정하지마. 하나님이 너의 목자이기 때문이야. 네가 이 땅을 떠나는 날, 하나님이 엄마대신 너를 꼭 안아 주실 거야!"
어느 날, 이 소년의 어머니가 잠시 집에 들렀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급하게 가보니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6살 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두고 엄마는 통곡합니다. 그 마음을 읽어보셨어요? 한참을 통곡하고 어느 정도 진정해서 그 아이를 바라봤는데, 아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아이의 모습이 약간 이상했거든요. 얇은 천으로 아이를 덮어 놨는데 볼록하게 나온 부분이 있어서 천을 걷어 보니까, 두 손을 꼭 잡고 가슴에 얹었는데, 이 6살 난 아이가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꼭 쥔 채 죽은 거예요. 엄마가 그렇게 설명했던 My Shepherd! 그 어린 마음에도 주님이 자신의 목자 되심을 믿었던 겁니다. 행복하게 이 땅을 떠났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편은 다윗만의 시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시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The Lord is my Shepherd!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당신의 목자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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