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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치 않는 삶
    2001-12-11 22:37:03   read : 162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125:1-5



    1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4여호와여 선인(善人)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이 땅을 지나는 순례자로서, 우리의 선배들이 순례의 길을 떠나며 불렀던 또 한편의 시편을 대하게 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붙여진 모든 시편을 다 다루지 못하겠고, 그 중 일곱 편을 뽑아서 다루고 있는 가운데, 오늘의 시편은 네 번째 순례자의 노래가 되겠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이 시편이 이스라엘이 외부의 지배를 받았을 때 지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시편을 읽어보면 그 정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평화롭게 살고있던 여러분의 동네에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무자비한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가운데 남자인 아버지, 남편, 아들들은 다 죽어버리고 전쟁에서도 졌습니다. 적군들도 많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수많은 분풀이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며, 시편 125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일제시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6.25때 공산당이 우리 남한을 거의 다 점령했을 때,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겪어보지 않았지만 부모님과 할아버님께 일제시대에 대해 많이 전해들었습니다. 저희 할아버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3년간 함흥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어요. 1945년 8월 15일,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에 해방을 맞아 풀려나셨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자유도 없고 인권도 없습니다. 어디를 가도 통제를 받아야 되고, 내 마음대로 말할 자유조차 없어요. 내 나라말을 쓸 권리도 다 빼앗겼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완전히 무시되고, 그들의 언어와 그들이 섬기는 신(神)을 섬겨야 하는 아픔을 상상해 보세요. 매일 매일을 불안 속에서 보내야 했던 암울한 시절! 그들은 그 속에서 얼마나 외로워하며, 불안해하며 요동했겠습니까? 이렇듯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 요동하는 사회,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회, 불안한 사회,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격동의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서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시편 125편은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외국의 지배 하에 있지 않습니다. 독립국가로서 당당한 위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사회 역시 격동과 혼돈의 사회가 아닌가요?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부도덕이 이 사회를 흔들고 있습니까? 공의보다는 부정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보다는 부도덕이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개발해 놓아도 먼저 우리 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문화를 개방할 때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겁니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고 문호를 개방했을 때, 다른 나라의 나쁜 것들이 먼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젊은이들을 지배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컴퓨터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컴퓨터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인터넷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저는 여기 앉아서 미국의 아들과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설교 자료들을 인터넷을 통해 뽑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도 역시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우리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인터넷의 모든 잘못된 것들이 개방되어 있어요. 이런 면 때문에 저도 매우 불안합니다.

    우리 호진이가 지금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저녁예배와 저녁 모임이 있으면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와야 합니다. 호진이가 컴퓨터를 만지기 때문에 혼자 두고 오면 굉장히 불안해요. 그렇다고 검사처럼 아이를 앉혀놓고 뭘 했느냐고 조사를 할 수도 없고, 몰래 카메라를 설치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제 마음이 늘 불안합니다. 요즘 더욱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옛날에는 호진이를 혼자 두고 우리 부부가 외출을 하면 입이 나오고, 삐치고 그랬는데, 요즘은 굉장히 반가워하는 눈치예요. 한술 더 떠서 한동안 외출을 안 하면 "엄마, 아빠 어디 나갈 일 없어?" 그러면서 자기가 집을 보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의심병이 생길 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밖에 나갔다오면 호진이를 재우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합니다. "오늘은 뭘 했니?" "컴퓨터게임은 어떤걸 했니?" "컴퓨터가 어떠니?" 하면서 많은 대화를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게 해요.

    우리는 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악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누가 총칼로 나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둠의 세력들이 저와 여러분을 지배하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는 다를지 몰라도 그렇게 놓고 보면 처한 환경은 비슷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들처럼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은 옛날 그들의 노래가 아닌 오늘 저와 여러분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만 쓰신 시편이 아니라, 오늘 이 문화적인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악(惡)과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격동하는 사회 속에서 요동치 않는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죄악과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굳건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을까요? 오늘 읽은 이 본문이 몇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절로 된 이 시편은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절에서 3절까지는 '의인의 안전'에 대한 시편기자의 확신입니다. 아무리 사회가 어려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는 굳건하게 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4절은 이 의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문입니다. 5절은 우리가 비록 구원은 받았을지라도 세상의 악을 따라갈 때, 하나님 좇기를 포기하고 세상을 좇아갈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그 비극의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의뢰하는 삶을 살자

    사회가 흔들리고 불안해질 때, 순례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 방법을 시편기자는 1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우리의 사회가 불안해지면 불안해 질수록,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우리는 어떻게 견고하게 살 수 있는가? 의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절에 나오는 '의뢰'라는 단어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단어를 연구하기 위해서 지난 주간에 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여러 가지 책들을 뒤졌습니다. 인터넷도 뒤져보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발견한 이 단어를 연구하면 할수록 이 본문이 저에게 살아서 다가왔습니다.
    '의뢰'라는 단어는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완전히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 단어는 장사가 활을 당긴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장사가 팽팽하게 당긴 활에 장전된 화살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 단어를 여기에 썼을까 많은 생각을 해 보았어요. 한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어요. 장사가 활을 막 쏘려고 최대한 활시위를 당겨 가지고 막 놓으려고 합니다. 그 활시위에 놓여있는 화살! 그 화살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 순간, 그 화살은 활시위와 장사에게 자신의 방향을 100% 의뢰하는 겁니다. 그저 맡겨야 되는 겁니다. "에이~ 난 그쪽으로 날아가기 싫어!"하면서 화살이 악을 쓴다면 말이 됩니까? 모든 것을 그 줄 위에 맡겨버리는 겁니다. 이제 장사가 놓기만 하면,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활시위가 앞으로 나가면서 그 화살을 밀어낼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 단어를 썼어요.

    문자적인 의미는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주로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썼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의 생명이 어머니에 의해 유지되고 보호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어머니 품속에 있는 갓난아기에게는 주위 환경이 중요하지 않아요. 바람이 부는가 안 부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날씨가 따뜻한가 추운가가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 먹을 것을 있는가 없는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돌 전에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해 보신분 계십니까?

    제가 최초로 부모님의 걱정을 느낀 때가 초등학교 2학년초쯤, 일곱 살과 여덟 살 사이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깼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 모르지만 아버님이 한숨을 몇 번 쉬더라고요. 자는 척 했지만 제 마음에 그 한숨이 스며드는 것 같았어요. 그 순간, "우리 부모님에게도 어려움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러나 갓난아기가 부모의 고민을 알겠어요? 어머니 품에 있는 갓난아기가 아버지가 부도를 만나건, 사업이 흔들리건, 전쟁이 일어나건,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이 시편에서 그 상태를 가리켜서 '의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의뢰'라는 단어를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브루스 왈키라는 신학자가 쓴 재미있는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분이 캐나다에 선교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에 캐나다의 로렌스 강을 건너게 되었어요. 상당히 넓은 강입니다. 얼음이 얼긴 얼었지만 건너가도 될 것인지 진단을 내리기 위해 막대기로 툭툭 쳐보고, 괜찮으면 네 발로 기었습니다. 앞발로(손이겠죠) 탕탕 쳐보고 괜찮으면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갔어요. 왜냐하면, 강의 가장자리에는 얼음이 두껍게 얼어도 물이 흐르는 가운데로 갈수록 얼음이 얇아지거나 얼지 않은 경우가 있거든요. 시골 사람은 다 알 겁니다. 저도 모르고 걸어갔다가 많이 빠져 봤어요. 그렇게 조심조심 가고 있는데, 강 중간쯤 왔을 때 갑자기 뒤에서 큰소리가 들렸어요. 돌아봤더니 마차와 말들이 수없이 달려왔어요. 그 선교사가 그것을 바라보면서, 강 중간쯤 오면 나처럼 진단하겠지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강 위로 마차를 몰고 그 선교사 옆을 지나가는 거예요. 그것을 본 이 선교사는 꼼짝 않고 생각을 했답니다. 의뢰하며 사는 삶과 의뢰하지 못하고 사는 삶의 차이가 이렇게 크구나! 나는 개처럼 기어가는데 저들은 말을 타고 건너가는구나! 그 날 이후 선교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 강물을 의뢰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내가 과연 하나님을 이렇게 의뢰하고 살았던가! 저들처럼 정말 하나님을 의뢰하며 내 인생을 폭풍같이 내 목표를 향해 질주하며 살았던가! 아니면 당당히 걸어가야 할 내가 네 발로 기면서 이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그는 주님을 의뢰하는 삶에 대해 수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의뢰하는 분이 누구인가요? '의뢰'란 무엇이냐?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믿고 맡기듯이, 내 인생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기는 거예요. 내 건강, 사업, 자녀문제, 모든 미래를 하나님에게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장사의 활에 있는 화살처럼...

    여러분, 우리가 믿는 분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1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다고요? 여호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식(儀式)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 의식(儀式)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예배드렸으니 한 주일은 괜찮겠지!" 그런데 어쩌다 예배를 빠뜨렸어요. "오늘 내가 다니다가 자동차 사고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운전대를 붙잡고 "주여!" 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운전대 잡고 기도하는 건 좋아요. 그러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돼요. "주님, 오늘 하루 주의 영광되게 살게 해 주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주여, 다른 사람은 다른 차와 부딪쳐서 다리가 부러져도 나는 다치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면 안 되겠죠?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를 의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에 있는 성물(聖物)을 의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안에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걸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염주를 걸고 다닙니다. 부산은 염주가 더 많이 보여요. 그러나 우리가 의뢰하는 것은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이 땅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이 천하를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줄 믿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이 단어는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의뢰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과거에 예수님 믿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하나님을 의뢰해서 내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내가 과거에 예수님 믿어서 내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 과거 시제가 아니라, 문제는 오늘입니다. 내가 앞으로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천국 갈 것을 믿지만, 오늘 하루를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불신앙인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격동의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요?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과거에 의뢰했던 자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늘 하루 매순간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않음과 같이 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평안을 얻기 원하십니까? 이 격동의 사회에서 기쁨을 가지고 살기 원하십니까? 여호와를 의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의뢰'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시편기자는 1절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특징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삶의 특징은 요동치 않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요동치 않는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폭풍이 불 때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태풍이 불면 유리가 흔들립니다. 작년 태풍 때 제가 사는 아파트의 유리도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백양산이 흔들립니까? 은광산과 금정산, 그리고 황령산이 흔들립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폭풍이 불어서 시온산이 끄떡없는 것 같이 서 있는도다! 할렐루야! 이것이 요동치 않음의 특징입니다.

    2) 환경을 다스린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말하는 시온산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시온산의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을 다스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자는 환경을 다스리는 특징이 있어요.

    이 세상에 사람의 종류가 굉장히 많아 보이지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앙 지향적인 사람과 환경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환경 지향적인 사람을 Other orientation 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에 자꾸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내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즉, 외적 조건에 지배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환경에서 찾는 사람, 나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조금만 칭찬하면 힘이 솟아나고, 반대로 조금만 헐뜯어도 기가 죽습니다. 그러므로 기쁨도 슬픔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쁨과 슬픔을 남에게서 빌려 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웃는 사람 속에서는 웃고, 우는 사람 속에서는 우는 겁니다. 칭찬 받으면 좋아하고 미움 받으면 분노합니다. 건강하면 웃고 병들면 웁니다. 사업이 잘되면 너무나 좋고 사업이 안되면 신경질을 부립니다. 이런 사람을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Faith orientation, 신앙 지향적입니다. 내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병들고 사업이 흔들려도,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그분입니다. 그분을 바라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환경이 나에게 영향은 미치지만, 내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지난 IMF 기간 동안 혹은 지난 한 달간에 요동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의뢰하고 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이 많으면 기쁘고, 돈이 없어지면 기분이 나빴습니까? 그랬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뢰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않음과 같이 굳건히 서리로다. 할렐루야! 우리가 왜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2절에서 말씀합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양산, 은광산이 이 가야를 두르고 있듯이 말입니다. 시온산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듯이,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들을 두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의 의미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무엇이 다른가? 가장 큰 축복이 하나님이 당신을 두르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만 하면.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군과 천사가 믿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때로 신앙의 선배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 손길을 잠시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야곱을 아십니까? 그는 형을 속여서 장자권을 샀습니다. 힘이 센 에서는 야곱을 찾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야곱을 외삼촌 집에 피신시켰습니다. 밧단아람이란 곳은 굉장히 먼 곳입니다. 부산에서 경기도쯤 되는 거리를, 인적도 없는 산골짜기 광야를 혼자 도망갑니다. 야곱이 얼마나 무서워했을까요? 처음에는 에서가 따라올까 봐 죽어라 마라톤을 했겠지요. 강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잠을 깊이 잘 수가 있었겠어요? 짐승이 나를 해치면 어떻게 하나, 불안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단한 어느 날 밤에, 큰돌을 베개삼아 겁에 질려 쪼그려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꿈에, 하늘이 열리며 사다리가 놓이더니, 천사가 야곱이 자고 있는 곳에 내려왔습니다. 야곱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나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베개를 했던 그 돌을 그곳에 놓고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람 왕이 굉장히 화가 나서 대대병력을 보내 엘리사를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잡혀가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산에 있었는데, 그 군대가 산을 겹겹이 둘러쌌어요. 엘리사의 종은 다리가 후들거려 있을 수가 없었어요. "오! 주인이여! 우리는 드디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팔짱을 끼고 태연하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에게 속한 자가 저들보다 많음을 알지 못하느냐?" 그 말을 듣고, 종이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하고 나밖에 없는데 누가 있다고 그럽니까?" 죽게 되었다고 한탄을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종의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람 군대와 엘리사 사이에 하나님의 마차와 병거와 군사들이 빽빽하게 둘러선 줄 믿습니다. 아람 군대가 올라오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의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두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맡기십시오! 걱정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때에 죽을 것이니까요. 믿으십니까?
    자동차 사고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수많은 선배들의 간증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3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업'이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뜻은 제비뽑을 때 쓰는 돌을 가리킵니다. 윷가락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나눌 때 제비뽑기를 해서 나누었습니다. 돌, 주사위를 던져서, 1번이 나왔으면 부산진구, 이런 식으로 나누었어요. 제비뽑는 돌이 기업이 되었어요. 그래서 '업'은 운명입니다.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운명으로 바꾸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운명에 미치지 못하리니

    여기서 '미친다'는 뜻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면,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적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악인의 권세가 우리의 삶에 자리 잡을 수 없을 줄 믿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 있나요? 예, 있습니다. 병들면 즐거운 사람 있습니까? 사업이 안되면 염려가 됩니다. 내 몸이 아프면 걱정이 되는 겁니다. 경제가 나쁘면 뉴스를 보고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그러나 영향은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면 그 영향은 잠깐입니다. 그 악의 권세가 내 삶에 뿌리를 박고 내리는 일은 없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 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악인의 권세가 당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함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사회의 영향은 받지만, 그것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악하고 흔들려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면 요동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증거를 성경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를 봅시다. 이 세계를 통일한 위대한 나라인 애굽이 모세를 추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모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니엘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 그 큰 권력 앞에서 다니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다니엘은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의뢰하면 우리의 삶이 요동치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격동의 사회 속에서 든든하게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과 건강과 재산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서 역사 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기도의 삶을 살자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굳건히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선인(善人)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게 되면, 그 다음은 자연적으로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의뢰한다 하고, 어떤 사건이 생기면 염려만 하고 무릎꿇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 4절에서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여호와여 선인(善人)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마음이 정직한 자를 문자적 의미로 번역하면, 마음이 곧은 자입니다. 이 단어는 고속도로를 의미합니다. 고속도로의 특징은 곧은 것과 편편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방해물이 없는 고속도로'입니다.
    기도할 때 미신적으로 기도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밖에 가면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죄를 짓습니다. 쾌락 다 즐기고, 성질 부리고, 집에서 폭군노릇 하고, 자기 살던 대로 살다가 교회 오면 "주여!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돌아가면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왜 기도합니까? 기도 안 하면 벌받을까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방해물이 없는 상태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속도로처럼 깨끗이 뚫려 있어야 합니다. 죄, 게으름, 부족한 헌신, 이끼, 돌멩이, 이런 것들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고속도로처럼 뚫려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이 흉흉한 바다를 지나가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격동하는 사회, 타락과 부정이 횡행하는 사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 시대를 어떻게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도의 삶을 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마지막 절에서 이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비록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는 하나님이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성도들이 있음을 압니다. 분명히 구원받아서, 계속해서 설교를 들고, 교회는 나오지만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지 않아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요. 1,2년 후에 관찰해보면 하나님이 그를 죄악가운데 버려 두십니다. 죄악 가운데 사는 것이 습관화되어 버리는 거예요. 돈은 벌었는지 모르지만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도록 내버려두시는 겁니다. 이것이 불행인줄 아십니까? 인생의 최대 비극은 하나님의 곁을 떠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 겁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아도, 내 삶을 드리지 않아도 내게 부담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인생의 위기임을 아십니까?

    시편기자는 얘기합니다.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라는 말씀과 그 다음 말씀 사이에 단어가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어떻게 사느냐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계속해서 치우쳐 행하고, 죄악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자리에 버려 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을까요? 앞으로 한국 사회가 점점 더 의로워질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군사 독재 시절에 우리가 문민정부 들어서기를 얼마나 갈망했습니까? YS가 들어서면 이 세상을 구원해 줄줄 알았어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DJ가 들어서니 그의 추종자들이 난립니다. 구세주가 들어섰다고요. 그러나 사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어요. 앞으로도 우리 사회는 악이 더 강할 겁니다. 성경이 이미 예언했습니다. 어두움이 더 밀어닥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기만 하면, 우리가 주님 앞에 무릎 꿇기만 하면, 올바른 삶을 유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시온산이 요동치 않음과 같이 굳건하게 살아갈 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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