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성취의 차이 2001-12-11 22:38:58 read : 1636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127:1-5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현대문명 속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문명의 꽃은 컴퓨터일 것입니다.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에, 사람들이 한 달에 걸려 하던 일들을 이제는 컴퓨터가 한시간도 못 되어 다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발명되었을 때 미래학자들은 "현대인들은 훨씬 더 많은 성취감을 맛보며 살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컴퓨터의 능력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실, 학교, 가정, 컴퓨터가 없는 곳을 가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비행기, 자동차, 심지어 아이들 장난감조차도 컴퓨터 장치를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미래학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컴퓨터는 우리의 수많은 일들을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미래학자들이 예언한 대로 컴퓨터가 발명된 이후에, 예전의 사람보다 성취감을 더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거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빠르게 일을 처리해 내는 여러분들은 예전에 비해 더 많은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그것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아니오" 일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더 많은 성취감보다는 더 많은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의 한 신문을 읽어보니 컴퓨터의 천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실리콘 벨리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컴퓨터가 가장 발달된 곳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들 중 얼마나 많은 영역을 컴퓨터가 대신해 주고 있습니까? 그곳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안락할까 생각하고 그곳의 동정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주일 평균 업무 시간이 70시간입니다. 컴퓨터가 발달되었으니까 더 적게 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미국에는 토, 일요일을 쉬니까 5일에 70시간을 일한다고 하면, 하루 14시간을 일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가까운 스탠포드 대학의 학생이 한 명 죽었습니다. 죽은 원인을 알아보니, 약 2주 동안 먹지도 않고 하루에 20시간이 넘도록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쳐서 죽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컴퓨터인가? 컴퓨터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많은 정보를 가져다주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그것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린다면, 우리는 지식은 늘고 있으나, 지혜는 줄어들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삶의 지혜가 줄어드는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학자인 제크스 엘룰이라는 학자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간단하게 지적해 주었습니다. '현대 문명으로 인해 뚜렷하게 나타난 가장 큰 사실은, 오늘날엔 모든 것들이 수단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에게 목적은 사라졌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바쁘게 하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수단만을 소유한 채, 어디에 도착할지도 모르는 바쁜 걸음을 오늘도 재촉하고 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이것보다 현대인의 삶을 더 리얼하게 표현한 것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너무나 바빠요. 그러나 현대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목적지도 모른 채, 바쁜 걸음을 매일매일 재촉하고 있는 겁니다.
수많은 정보가 넘쳐나는 풍요로운 사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어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삶이 과연 지혜로운 삶입니까?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 한번뿐인 귀중한 인생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좌절이 아닌, 올바른 성취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요?
시편 127편은 두 가지의 삶의 모습을 극단적인 대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좌절에 이르는 삶이요, 또 하나는 성취에 이르는 삶입니다. 먼저 좌절에 이르는 삶을 솔로몬은 1절과 2절에서 자세하게 얘기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헛된 삶의 특징이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성취한 것 같은데, 결과는 왜 실패와 좌절로 끝나게 되는가? 그 특징을 몇 가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합니다. 이 시편의 저자인 솔로몬 역시 무엇인가를 세우고 싶고, 강조하고 싶고, 무엇인가를 계속 보호하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성취욕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그는 대단한 성취욕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아버지인 다윗조차 건축하지 못했던 성전을 지었고, 모두가 부러워할 학식을 가졌던 사람이요, 명예와 부(富)를 한 손에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모두가 부러워할 대단한 성취를 이룬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일들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에서 먼저 좌절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1절과 2절 상반절을 읽으면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헛되며' '허사로다' '헛되도다'입니다. 왜 삶이 헛되다고 얘기합니까? 솔로몬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대단한 것을 성취한 것 같지만, 좌절로 끝나는 삶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나 종국에는 헛된 연기 같은 삶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삶입니까? "야! 저 사람 인생은 성공이야!" "나도 성공했다고 생각해. 나도 대단한 것을 성취했어!"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 앞에 가서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삶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는 대단한 일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성취가 자신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성패의 열쇠가 내 노력과 재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가정을 누가 지키는가? 내 힘으로 지킵니다. 내 인생을 누가 지키는가? 내가 지키는 겁니다. 내 미래를 누가 설계하는가? 내 힘으로 하는 겁니다. 내 사업을 누가 일으키는가? 내 힘으로 하는 겁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내 삶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내 능력과 자신을 믿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 같지만, 언젠가 그 삶이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솔로몬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솔로몬처럼 이 세상에서 집을 많이 지은 사람도 드물 겁니다. 그는 7년에 걸쳐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중의 하나인데, 그가 살 궁전과 집을 13년 동안에 걸쳐 아름답게 지었어요. 그는 건축에 대해서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얘기합니다. "내가 많은 건축을 했지만, 하나님이 내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것이 헛되다" 라고요. 그는 그가 지은 모든 것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최근에 고고학자들이 솔로몬의 궁전이라는 성문을 발견해 냈어요. 다른 것은 다 없어지고 성문이 남아 있는데, 그 성문이 4중문으로 되어 있었어요. 적들이 와서 공격을 합니다. 성문 하나를 없애기 위해서는 수백 명이 죽어야 합니다. "이 성문만 열면 성안으로 들어가겠지!" 하고 수백 명을 희생하며 성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또 성문이 나옵니다. 수백 명을 죽이고 또 성문을 열었어요. 그러나 또 성문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하자!" 그러면서 결사적으로 성문을 열었는데, 또 성문이 나와요. 그 다음엔 아예 공격을 못합니다. 왜요? 몇 개가 나올지 알아야지요. 솔로몬은 이처럼 철저하게 성문을 만들어서 자기의 성(城)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면 그 모든 것이 허사라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궁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1절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중심에 없는 삶, 즉 자신이 인생을 책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든 수고는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노래합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 말씀은, 더 많이 수고하면 수고할수록 더 많은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수고'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고통'입니다. 이것은 남이 나에게 주는 고통이 아니라 내 스스로 짊어지는 고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 힘으로 내 사업을 일으켜야 된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으라! 이 세상에 나를 돌아볼 사람은 나 혼자다! 내 사업, 내 가정, 내 자식들의 삶, 이 모든 것을 내가 짊어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수고와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고통을 줍니까?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그 고통을 초래하고 있는 겁니다.
영화감독인 조지 루커스가 자서전을 내었습니다. 그가 억만장자가 되고 나서, 30년 동안 자신이 일궈낸 사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몇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요약했는데, '나는 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성공을 위해서 달려간 인생을 살았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하여 나는 불철주야 뛰는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억만장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일생을 나는 살았다. 그 결과 나는 아내와의 관계를 잃어버렸고, 자녀간의 사랑도 포기해 버렸고, 결국 나는 슬픔과 좌절을 심으며, 내 마지막 인생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자서전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그것은 결국 성취가 아니라, 좌절과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하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 모든 것을 체험한 다음에, "나만큼 집을 많이 지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나만큼 내가 모은 재산을 보호하려고 했던 사람 나와 보라! 나만큼 공부를 많이 하고, 나만큼 내 인생을 세우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 그는, "내가 이 모든 수고를 다 해 보았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그 모든 수고와 투자, 사업은 좌절이었다. 헛된 것이었다!" 이것이 인생의 좌절의 지름길임을 깨달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성취에 이르는 삶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2절 하반절과 5절에서 말씀하는데 이 말씀을 깨닫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구절이 2절 하반부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러므로' 라고 시작했지만 '그러나'라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아멘!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면 이 설교 시간에도 잠을 주실까? 이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시편 127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일하지 말고 잠만 자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일하라고 권면하십니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취에 이르는 삶의 첫째 가는 특징은, 바로 태도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지으시고, 세우시고, 지키심을 인정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은 내가 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사업을 여러분이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여러분이 세우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는 저와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역사의 일들은 누가 하시는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에 협력자로서, 옆에 서서 돕는 자에 불과한 줄 믿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잠이 있고 쉼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합니까?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잠 즉, 활동이 없는 상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가장 큰 선물,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은 우리의 수고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우리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기하게도 성경을 찾아보니까, 잠잘 때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사람들을 종종 소개하고 있더라고요. 어떤 사람이 떠오르세요?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을 얻었어요. 그런데 수고할 때가 아니라, 잠잘 때 얻었어요. 누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 중에 아담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가장 큰 선물은 누구입니까? 하와였어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만들었어요. 아담은 부족한 것이 없었어요. 일 할 것이 있나요? 그냥 과일 따먹으면 되었어요. 생수가 흐르고, 그곳보다 더 좋은 세상이 없어요. 아담이 얼마나 머리가 좋았던지,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들을 데리고 왔더니 그대로 이름을 짓습니다. 사자, 곰, 기린... 다 짓는 겁니다. 하루 종일 걸려서 이름을 다 짓고 나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왜요? 이름을 지으면서 보니까 다 짝이 있는데, 자기만 짝이 없는 거예요. 내 짝이 누군가하고 기린 옆에 가서 서 보니까 아니에요. 곰 옆에 가보니 이건 더욱 아니에요. 내 짝이 어디 있나! 아! 외로워하며 그 날 밤도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났더니, 하와가 와 있었어요. 그래서 아담이 뭐라고 소리칩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어떤 사람은 아담이 잠들면서 하나님이 자기 갈비뼈를 떼어 가는 것을 봤다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셨을 때는 부분마취가 아니라, 전신마취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뼈를 떼어 내는데 어떻게 부분마취를 하고 떼어 내겠어요? 그것은 뼈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서 한 얘기가 아니라, "이 사람이야말로 내 짝 중에 짝이로구나!" 하고 너무 좋아서 한 말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아담이 하와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했나요? 일을 했나요? 컴퓨터 작업을 했나요? 고생을 했나요? 그가 한 것은 단지 잠을 자고 일어난 것뿐입니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그곳에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과 축복이 그의 앞에 와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인류의 조상을 예로 들었으니, 아브라함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을 언제 받은 줄 압니까? 잠잘 때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아브라함의 얘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하루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데 아마 잠잘 때 나타났을 겁니다. 꿈 중에 계시하시기를 "너는 너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 복을 약속하셨어요. 땅, 자손, 축복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니라!" 이 말씀 중 방패라는 말에는 아브라함이 시비할 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창세기 14장에 종 318명을 데리고 나가서 소돔 연합군을 다 물리쳤거든요.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내가 너의 방패다!" "할렐루야!" "아멘!"
그런데 너의 상급이란 말에는 약간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말은 점잖게 했지만, 하나님 앞에 시비를 건 것입니다. "하나님, 상급을 주시면 뭐합니까? 저에게는 그 상급을 이어갈 자손이 없는데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나가서 "아브라함아, 저 하늘에 별을 보아라! 네가 셀 수 있겠니?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을 거야!"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신지라!' 이 문제는 해결되었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또 다른 문제를 얘기합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땅을 줄 거야!" "하나님, 그 말씀을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반문하자, "양과 소를 준비하거라" 고 하시자, 아브라함이 재빨리 가서 양과 소를 잡아 반으로 갈라놓았어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행동입니다. 왜 하나님은 양과 소를 준비하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반으로 갈라놓았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뜻을 알아들었어요. "아, 하나님이 지금 나와 언약을 맺자고 하시는구나!" 계약할 때 인감도장 가지고 뛰어가듯이, 아브라함은 인감도장을 준비해 놓은 거예요. 그 당시 문화를 살펴보면,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개인과 개인간에 중요한 계약을 할 때는 짐승을 반으로 갈라놓고 쌍방이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우리 두 사람 중 한사람이 계약을 어기면 이 짐승과 같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립니다. 인감 도장을 다 준비해 놓고 나서, 이젠 하나님의 도장만 있으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잠들게 하셨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이 지나가셨어요. 잠에서 깨어난 후 아브라함은 못 지나갔어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네가 잘 때 나의 은혜로 얻어지는 것이지, 너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야. 네가 비록 믿음의 조상이라고 행실이 선하지만, 너의 행위로 나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갈라놓은 고기 사이로 못 지나가게 하시고, 하나님 혼자 지나가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입니다. 아브라함 인생의 최대의 복은 언제 왔는가?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잠을 잘 때 왔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성취로 끝날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어떤 자에게 잠을 주십니까? 사랑하시는 자! 우리의 수고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늘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내 노력을 통해 내 재산을 모으고, 내가 내 가정을 세운다고 밤새 고생하고 고통스럽게 일하기보다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볼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보다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드리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시는 자!"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 (여디디야: Jedidiah)'라는 그 단어가 솔로몬의 원래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운 성취를 얻으며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 스스로가 무엇을 하는가에 집중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인생인 줄 믿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나의 수고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축복의 근원 되심을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더 깊이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예를 3절부터 5절까지 아이를 통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무엇을 얘기합니까? 자식이 기업이니,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뜻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때가 있어요. 자식을 10명을 낳았다고 합시다. 우리 고향에 아들만 10명 낳은 집이 있었어요. 그 중에 우리 동기가 있었는데 이름이 칠남이었어요. 이름을 일남이부터 열남이까지 지었어요. 그 집 아이들과는 아무도 싸울 사람이 없었어요. 정육점을 해서 덩치도 좋은데다가, 1명하고 싸우면 9명이 와요. 그 부모님이 10명을 키웠습니다. 대학까지 다 시켜주고 키웠으니까 한 달에 1명이 50만원씩 내놓으라고 하면, 그 부모는 매달 500만원을 거둡니다. 기업 될 만 하지요?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는 그 말씀의 의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분이 와서 "목사님, 성경에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하며, 이 말씀을 들이대면서, "자식은 기업이라 그랬는데, 제가 아들 다섯을 유학까지 보냈는데, 제 솔직한 심정은 자식들이 기업이 아니라, 호시탐탐 내 재산만 엿보는 늑댑니다" 부모에게서 뜯어 갈 것만 고민하지, 부모를 도와주려는 자식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좀 이상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은 이 분의 말씀에 다 동의하실 겁니다.
오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자식 많이 낳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왜요? 예수님은 자식이 없었어요. 사도 바울도 자식이 없었어요. 이 말씀의 뜻을 가장 잘 적용하는 것은, 이 땅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 물질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낳은 자녀이건, 내 옆에 있는 이웃이건, 누구이건 간에 인생의 가장 큰 성취, 올바른 성공을 향해 걸어가는 비결은 물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우리가 우리 인생 가운데 올바른 성취감을 누리며 결론 맺기 위해서는, 믿음의 2세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이일수도 있고, 누구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내 믿음의 2세를 양육하기 위해 수고하고, 내 인생을 바치고, 내 물질과 시간을 바칠 때, 우리의 인생은 실패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성취를 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4절을 보세요.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자신의 전통에 날카로운 화살, 즉, 믿음의 2세대가 가득 담긴 자는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의 투자요, 최상의 성취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자신의 전통에 날카로운 화살을 준비해 오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언젠가 때가 되어 그 화살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는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성취가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종종 하신 말씀은, 내가 우연히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 전통에 나를 담아두고 생각하셨다고요. 그래서 내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나의 생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가 위대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위대한 모세가 이 땅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부모가 그를 낳았더니 저절로 모세가 되었나요? 아닙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전통에 넣어 숨기며, 목숨 걸고 믿음으로 그를 양육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바로가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고 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하나님의 위대한 화살이 될 것을 안 부모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어요.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 옆의 갈대 상자에 아이를 담아 떠내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에게 지켜보게 했어요. 그런데 바로의 공주가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누가 그렇게 하도록 했을까요? 하나님이요! 공주가 아이를 보니 너무 예뻐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지요. 그리고 젖먹일 걱정을 합니다. 그때 미리암이 뛰어가서 "공주님, 우리 동네에 젖이 남아서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하나 보았는데, 소개시켜 드릴까요?" "데려오너라!" 그래서 모세의 엄마를 데리고 왔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식 키울 때, 돈 받아 가면서 키운 엄마는 모세 어머니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 어머니가 모세를 키우면서 믿음에 대해 수백 배는 더 가르쳤을 겁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사람이야!" 그 당시 유모는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교육까지 책임졌어요. 철저하게 믿음으로 교육시킨 줄 믿습니다. 그 화살이 언젠가 꽂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40년 사역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한가지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는 60년 간 전통에 화살 하나를 키웠습니다. 그는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만일 모세가 여호수아를 전통에 담지 않았다면, 모세의 인생은 어떻게 끝났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긴 했으나, 그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끌고 다니다가 백성과 함께 죽었다는 좌절로 끝났을 겁니다. 가나안 땅에 모세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모세가 키우고 그의 전통에서 가다듬은 한 화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성취는 무엇입니까? 병을 고친 겁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입니까? 이 땅에서 풍랑이 이는 바다 위로 걸어가신 겁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 동안 사역하시며, 12개의 화살을 그 전통에 감추어놓고 그것을 예리하게 다듬었습니다. 이 열두 사도가 이 세상에 박힌 그 어느 날로부터 2000년이 지난 오늘, 이 한국 교회에 복음이 들어왔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열 두개의 화살 때문에!
바울은 16년 동안 수많은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그는 하나의 화살을 다듬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모데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성취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식이건, 이웃이건 간에 그들을 영적인 세대로 키우는 일,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는 일, 나의 자식뿐만 아니라, 내 옆의 친척과 교인들 모두와 어린아이 하나하나를 믿음의 세대로 키우는 일,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성공의 지름길이요, 우리의 성취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집을 세우기 위해 혈안입니다. 더 넓은 아파트, 더 많은 돈을 은행에 저축해 놓고,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살아갑니다. 누가 그 집을 세웁니까? 누가 그 저축한 돈을 지킵니까? 말로는 하나님이지만 내가 지키는 겁니다. 그 삶의 결과를 이미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라고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바벨탑을 지었습니다. 그 결과가 좌절임을 잘 아시지요? 그러나 11장 마지막에 놀라운 사건이 등장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은 한 화살을 다듬으셨어요. 데라의 자식 가운데 아브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셨어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허황되고 무너질 집을 짓고 있는 그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취를 사람을 통해 이루고 계셨습니다. 데라의 집에 있는 한 아이를 통해! 그 자식을 통해 하나님은 이 땅의 구원의 성취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진정한 성취는 바로 사람입니다. 당신 밖의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전통 안에 있는 화살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한번 질문해 보세요. 당신은 누구를 당신의 전통 속에 품고 있습니까? 자녀, 또는 자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 이름을 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자녀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화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을 빚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쳐 보셨습니까? 차라리 재산을 포기하고서라도, 돈을 더 많이 벌 시간을 포기하고서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전통 안에 숨겨놓은 화살을 빚기 위해 여러분의 물질과 시간을 희생해 보셨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전통 안에 다음 세대가 담겨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파트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노후 대책이 아니라, 자신의 전통 안에 숨겨진 화살을 예리하게 다듬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결심이 배어나는 한 주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어떤 화살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오늘 그 화살을 위해 주님 앞에 진정한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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