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높은 곳을 향하여 2001-12-11 22:45:32 read : 158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119:1-8
1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2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3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5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사람이 어떤 이상(理想)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품고 사는 이상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바위 얼굴' 얘기를 기억하십니까? 초등학교 때 다 읽었을 겁니다.
옛날, 어느 동네 산마루에 인자한 모습의 사람을 닮은 바위가 있었어요. 사람들은 그 바위를 '큰바위 얼굴'이라고 불렀어요. 그 동네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훗날 그 큰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전설입니다. 모두가 그것을 믿었어요. 어느 날 그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한 장군이 나타나 마을 전체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장군의 부족한 인격에 사람들은 실망해 버리고 그는 떠나가 버립니다. 그 후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높은 직위의 정치인, 돈을 많이 모은 부자, 유명한 시인 등, 그들은 한결같이 사람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납니다.
사람들은 이제 큰바위 얼굴을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희망도 포기해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낙심해 있는 그때, 그 마을에 살던 어니스트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격려합니다.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히 저 큰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 포기하지 맙시다!" 사실 그는 이렇게 마을 사람들을 늘 격려해 왔던 것입니다. 그가 마을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는 동안, 저녁 노을이 어니스트의 얼굴을 비추면서, 어니스트 뒤에 있는 큰바위 얼굴이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어요. 그때 군중 속에 있던 마을 사람 하나가 소리칩니다. "보십시오! 저 어니스트가 큰바위 얼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들어보니 그 큰바위 얼굴과 어니스트의 얼굴이 너무나 비슷했어요. 그래서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그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뚜렷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그 동네를 평화와 행복의 마을로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어니스트, 그는 어릴 적부터 시간만 나면 그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이 동네에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가 나타날 것을 믿고, 날마다 한두 시간씩 그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 마음 속에 품은 아름다운 이상(理想)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과 그 큰바위 얼굴을 닮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청교도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이, 사람이 품은 이상(理想)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쓴 짧은 글입니다.
실제가 그렇지 않습니까? 가만히 여러분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아무리 미모가 빼어나고 몸매가 아름다워도, 늘 이 남자 저 남자 기웃거리며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겉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그 사람은 아무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늘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상처밖에 줄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여러분 마음 속의 이상(理想)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삽니까? 무엇을 소원하며 삽니까? 여러분이 품은 소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될 겁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이상을 품고 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썩어질 돈과 쾌락과 명예, 겉은 번지르르 하게 꾸미고 예배를 드릴지 몰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고 이상이 잘못되었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영향력도 없을 겁니다. 내 자녀라고 해도 아버지, 어머니로서 그에게 영향력을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약간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지만, 내 마음 속에 잘못된 이상이 자리잡고 있다면, 주위의 한 사람도 변화시키지 못한 채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여러 가지로 유명한 장입니다.
첫째,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 유명합니다. 모두 176절까지입니다.
둘째, 성경의 딱 가운데입니다. 신구약의 중심 되는 장에 놓여 있습니다.
셋째, 22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단락에 8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2 x 8 = 176절)
넷째, 22단락의 첫 글자가 히브리 알파벳 차례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나다라마바사...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단락, '가난해도 하나님을 보고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두 번째 단락, '나의 모습을 보며 자기의 모습을 꾸준히 살피는 자가 복이 있도다' 그 다음, '다가오는 세월을 준비하는 자가 복이 있을지니'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8절로 되어있는 첫 절만 '가'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8절의 첫 음절이 모두 '가'로 시작합니다. '가'가 8번, '나'가 8번, '다'가 8번... 이런 식으로 히브리 알파벳의 22개가 22개의 단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詩)를 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그래서 이 시편은 너무나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저는 달라스 신학대학의 한 학기 여름방학 동안, 한 주일에 두 글자씩(두 단락 16절씩), 약 3개월에 걸쳐서 이 시편을 번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 시편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22단락을 연속적으로 강의하고 싶지만, 한 책도 아닌 한 장을 가지고 22주, 6개월을 설교하면, 아마 6개월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혹 교회를 바꾸실 생각은 없습니까?" 하고 질문할까 두려워서 몇 개씩 뽑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119편 22개를 다 강의하고 싶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요.
제가 8월에 안식년을 떠나기 전까지, 22개의 단락 가운데 일관성 있는 주제를 가지고 강의하고자 합니다. 연속적인 강해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깊이 터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첫째 단락은 히브리어의 첫 글자 '알레프'로 시작합니다. 1절부터 8절까지 다 '알레프'가 나옵니다. 구조를 보면 8절까지를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이 시편기자가 바라는 이상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기의 이상을 설명합니다. 그 다음 둘째, 셋째 구조는 5절과 8절에 나오는데 약간 복잡합니다. 5절과 8절에 듀엣이 나오는 듯 합니다. 그림을 그리면 혼합된 색깔- 파란색과 흰색을 섞으면 하늘색이 나오듯이- 로 나옵니다.
두 번째 구조는 자기의 현실을 바라보는 겁니다. 시편기자가 나는 이런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상(理想)을 하나님 앞에 되새겨보니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상(理想)에 비춰본 자기의 이상은 너무나 안타까운 이상(理想)입니다. 그래서 탄식합니다. 자기의 나약함을 우리 모두에게 솔직하게 드러내 놓습니다. "하나님, 제 이상(理想)은 이렇습니다만, 저의 삶과 마음은 이렇지 못합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5절에서 8절에 나오는 한가지 내용입니다.
세 번째 구조는 이상(理想)과 현실의 다름을 고민하던 시편기자는, 드디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 제가 이러 이러하게 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상(理想)과 현실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만 알면 119편의 첫 단락은 다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고 잡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왕 구원받았는데 날마다 땅을 위해 살지 않고,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예배를 거듭할수록, 내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자라나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형상을, 인생 가운데 맛볼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이 시편기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성숙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상(理想)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 올바른 이상을 가져라
어떤 이상(理想)을 품고 살아야 합니까? 시편기자는 우리가 품어야 할 세 가지 이상(理想)을 말해줍니다.
1) 우리의 상태
시편기자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복 받은 상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상태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1절과 2절.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복이 있음이여' 우리말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번역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아쉐리'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복이 있음이여' '복이 있도다'도 '알레프'로 시작합니다.
시편기자가 가진 이상은, 하나님 앞에 나에게 복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제가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상태로 살기 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이상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야곱처럼 시편기자는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 자세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제가 결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 드디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고 자기의 이름을 바꾸어 떠났던 야곱처럼, "아쉐리! 하나님, 남은 생애동안 당신의 복을 받은 상태로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기자가 바랐던 축복이 무엇일까요? 이 복을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것'과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것' 이것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시편 1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리로다
지금 중부지방은 가뭄으로 난립니다. 서울은 민심이 흉흉합니다. 남쪽은 비가 많이 온 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뭄이 와도 깊은 강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사시사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그 마음이 합한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진 상태, 그것을 복 있는 상태라고 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충만한 자! 이것이 시편기자가 말하는 복 있는 상태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뭡니까?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지고 사는 자만이 인생의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람이면서 사람이 누구인가를 잘 모릅니다. 성경이 사람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영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육체적인 것만 가지고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활 속에서 한번 보세요. 돈이 있으면 굉장히 행복할 것 같습니까? 쾌락을 가지면 행복합디까? 완벽한 건강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합디까? 그 행복은 잠간입니다. 건강하고 돈 있으면 또 다른 걸 원합니다. 쾌락을 가지면 가질수록 마음이 더 허전해져요. 왜요?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 완벽한 행복을 느끼는가? 우리의 영(靈)을 만드신, 참 영(靈)의 근원이신 영(靈)적인 하나님과 우리의 영(靈)이 만날 때, 하나님과 내 영(靈)이 깊이 교제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가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느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이것을 시편기자는 복 있는 상태라고 말하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을 너무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으로 떨어뜨렸어요.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물질과 돈이 많은 것,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왜 구약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는가? 참 복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서는 그림자를 가르친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의 실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 뒤에 오는 참 복의 실체가 있다는 겁니다. 그 복의 실체가 바로 천국에서의 생활이요, 곧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자가 복 있는 자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내가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내가 싫어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나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부담으로 느끼시는 것은 나도 부담으로 느끼고, 하나님이 해야 되겠다고 하시는 일에 내 정열을 바쳐서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그 상태, 그것을 시편기자는 '복이 있음이여'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진정한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것이 시편기자의 이상(理想)이었어요. "하나님! 내가 복 있는 상태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고 남은 생(生)을 살기를 원합니다!"
2) 의로움
두 번째 이상은 우리의 성품과 직결된 겁니다. 의로움입니다. 3절을 보세요.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이것은 비교를 해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되겠다. 내 마음에 불의를 다 없애고, 의로움이 가득하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런 소원을 한번 품어보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 아파트 열 채가 소원이 아니라, 숨을 거두는 동안 내 안에 악이 없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의로움이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내 성품이 참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미움과 시기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옵소서! 주여! 내 마음을 의로 채워 주시옵소서! 이것이 시편기자가 가진 이상(理想)이었습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함
마지막 이상은 우리의 동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4절을 보세요.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근실히' 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부지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부지런히 지키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주의 법도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가 가진 이상(理想)은,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삶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악을 행치 않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요, 내가 성가대를 하는 것도 목사의 눈치를 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요, 내가 주일예배 나오는 것도, 헌금을 드리는 것도,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나의 동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시편기자의 소원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사울을 기억할 겁니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던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겉으로 그는 순종했어요. 그러나 마음으로는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어느 날 하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명령합니다. "너는 아말렉에 쳐들어가 아말렉에 있는 모든 악을 다 근절하라!" 악을 없애라는 말씀입니다. 악의 근원과 뿌리를 없애라고요.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어요. 전쟁이 끝나고 사무엘 선지자가 가서 묻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다 없앴습니까?" "예, 없앴습니다" "내 귀에 들리는 이 짐승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사울은 좋은 양과 좋은 짐승은 빼돌려 놓은 겁니다. 그때 사울이 거짓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치려고 그랬습니다" 사울만 그렇게 행동했습니까? 오늘 우리로 한번 적용해 볼까요?
직장에서 정직하게 사업해야 되는데, 속이지 말아야 하는데, 근실하게 일해야 하는데 속입니다. 그래서 이윤을 남깁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찌릅니다. "왜 속여서 이윤을 남겼니?" 그러면 우리는 대답합니다. "하나님, 영안 교회에 할 일이 오죽 많습니까? 제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바치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사업해도 십일조만 드리면 하나님이 축복할 것이라고 믿는 사울 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겁니다.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
신약성경에 대표적인 한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아파트를 팔았는데 1억 5천만 원을 받았어요. 그리고 헌금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 부부를 다 쳐죽였어요. 왜요? 1억 5천만 원 받아서 7천 5백만 원만 바쳤어요. 안 바쳤어도 하나님이 안 죽였을 겁니다. 문제는 1억 5천만 원을 받아서 교회 앞에 광고하기를 "7천 5백만 원이 전부입니다"하고 바친 겁니다. 반을 바치고 전부를 바친 것처럼 거짓말했어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을 속인 겁니다. 우리의 이상(理想) 가운데 이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와 같이, 이 시대에 죄를 짓게 되면 당장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죽이신다면 제가 몇 명이나 데리고 목회를 할까요? 저도 여기에 없을지 모르지요. 우리가 죄를 짓는 즉시 하나님이 징벌하지 않는다고, 은혜의 시대에 산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겨야 되겠습니까?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존경합니까? 그분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분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언젠가는 우리가 행한 모든 행위대로 갚으실 날이 있음을 정말 믿기는 합니까?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기자의 소원은 이것이었어요. "아버지 하나님! 제 삶 속에서 제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거룩하게 예배드리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만홀(漫忽)히 여길 때가 많습니다. 제 마음의 모든 동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비롯되게 도와주옵소서! 교회 봉사도, 신앙 생활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제 마음의 동기가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의 신앙이 저 천국으로 자라기 원하십니까? 올바른 이상(理想)을 품으십시오. 복 받은 상태로 살기 원합니다. 성품이 의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이상이 여러분 마음속에 굳게 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현실을 올바로 보아라
5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은, 시편기자가 자기의 현실을 발견합니다. 한글 성경은, 5절에서 중요한 단어를 하나 빠뜨렸어요. 5절 앞에 탄식하는 말을 빠뜨렸습니다. '아하!' '오!' 하는 감탄사입니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라고 번역했어요. 그것보다는, '오! 내 길을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혹은 '오호 통재라! 내 길을 정하사 주의 길을 걷게 하소서'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감탄사를 붙이는 것에 따라 내용이 달라집니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이 하나의 기도문 같이 들리지만, 감탄사를 넣게 되면 나를 바라본 탄식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이상(理想)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제가 이런 이상을 가지고 살기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고 난 이후에 자기를 돌아보았더니, 그 이상(理想)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겁니다. 내 신앙이 하나님이 주신 이상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탄식하는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것이 제 이상(理想)이었습니다만, 제 현실이 그와 같지 못하오니 어찌 하오리까! 오! 아버지 하나님!" 이런 뜻이에요. 이해하십니까?
이 시편기자의 고백은 이들의 조상들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십계명을 시내산에서 받아들고 와서 십계명을 강해해 줍니다. 그때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다 준행하리이다!"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준행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도 죽을 때가 되었어요.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너희가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 이방신을 섬기면 안 된다" 하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장담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만 섬기겠습니다. 걱정을 놓으십시오!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에 보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이방신을 섬겼습니까?
시편기자는 왜 자기의 모습을 올바로 볼 수 있었을까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상(理想)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현실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올바로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복 받은 상태인가? 하나님과의 삶이 일치하고 있는가? 나는 의로운가? 나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10년, 20년 나오면서도 자기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 변화되지 않는가? 나의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목회자들 가운데, 안수집사님들 가운데, 신앙 연수가 10년, 20년 된 집사님들 가운데, 그렇게 예배를 많이 드렸건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니고도 말만 하면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런데 자신은 몰라요. 10년, 20년 신앙 생활하고도 자신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을 몰라요. 자기의 가족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자신만 몰라요. 현실을 몰라요.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팔복(八福)에 대해 말씀하시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애통해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이상(理想)과 내 현실을 바라보고, 그 이상(理想)대로 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이사야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였어요. 나라가 어지러워졌어요. 그는 강대상에 올라와서 백성을 위해 기도했어요. 자신을 위해 기도할 것이 별로 없었거든요. "아버지 하나님! 저 불쌍한 백성들을~ " 하고 기도를 시작하는데 하나님이 이사야 앞에 나타나셨어요. 그때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비춰본 자기의 모습은 너무나 더러웠어요. 그래서 그는 백성을 위한 기도를 중단하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기도합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은, 그 당시 문둥병자들은 성한 사람들이 다가오면 입술을 가리키며 "부정하오! 내가 문둥병에 걸렸으니 나를 피하시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나는 문둥병자와 같은 자로구나!" 오늘날로 말하면 "내 영혼은 에이즈에 걸린 더러운 사람과 같구나!" 하는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제단 숯불을 가지고 오셔서 그를 정결케 하여 주십니다.
높은 곳을 향해 자라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현실을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부부관계가 옛날 같지 않습니까? 자녀가 비뚤어집니까? 영적으로 답답하십니까?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까? 그 원인을 여러분 안에 찾아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적나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십시오.
3. 올바른 기도를 드려라
시편기자는 세 가지를 위해 기도합니다. 5절부터 8절까지 중복되어 나옵니다.
1) 부끄럼 없는 성경공부
첫 번째 기도는 5절과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시편기자는 부끄럼 없는 성경공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반성을 겸한 성경공부를 의미합니다.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 말씀을 굉장히 열심히 공부한 사람 같습니다. 설교, 묵상, 암송 등 성경공부를 누군가로부터 배웠던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자기의 영혼을 searchlight로 비춰주시는데 놀랐어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데도 자기 안에 여전히 음탕한 생각이 있고, 입술에는 중상하는 말이 있고, 마음속에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고, 가난한 자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온갖 교만과 미움과 시기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사실을 발견하고 탄식하며 "오호 통재라!"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소원이 있사오니 부끄럼 없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제가 토요일이면 설교준비를 굉장히 어렵게 한다고, 여러분에게 종종 엄살을 떱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본문을 강해하고 연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제 전공이니까요. 성서 강해 하면,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10년을 넘게 그 분야를 연구했어요. 한국에 있는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전국에 다니며 '강해 설교'를 가르쳐요. 그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말씀을 다 준비해놓고 이 설교의 내용 가운데 제 삶을 비춰봐서, 제가 설교하기 부끄러운 부분이 있을 때 잠을 자지 못해요. 그 밤은 정말 괴로워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말씀을 부끄럼 없이 설교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 영혼을 touch해 주시고 저를 치료해 주세요!" 이것이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시편기자의 기도였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 말씀을 읽는 것, 성경공부 하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공부를 부끄럼 없이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부끄럼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우리 모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2) 위선이 없는 예배
7절을 보세요.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감사'를 '예배'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예배하리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만 해도 수많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수많은 예배가 '사울의 예배'라고 감히 지적하고 싶습니다.
사울은 예배하는 자였어요. 사무엘상·하를 읽어보면 사울은 예배드리고 나서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악신(惡神)이 그에게 임했어요. 다윗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너무 안타까워서 하프를 치며 찬양을 해서, 사울에게 내린 악신을 멀리하고 사울의 영혼을 달랩니다. 그랬더니 사울이 울어요. 울면서 " 다윗! 내가 너를 죽이려 하다니!" 하면서 회개하는 듯 했지만, 마지막에 눈물을 닦더니 옆에 있는 창을 다윗에게 던집니다. 다윗이 두 번 굴러서 피하죠. 그 창은 벽에 박힙니다. 이것이 사울의 삶이었습니다. 잘못된 예배입니다.
삶의 변화가 전혀 없는 예배! 때로 예배 시간에 sentimental해져서 울고 감정적으로 은혜를 받지만,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에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인격과 삶에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말에도, 물질 사용에도, 생각에도 변화가 없는 예배! 이것이 바로 '사울의 예배'인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위선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예배드리고 돌아가서 제 삶을 고민하게 도와주십시오! 남편, 아내, 직장인, 사장으로서 주님 제 삶을 고민하기를 원합니다. 제 삶에 찾아오셔서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 예배시간에 은혜 받은 것만큼 제가 변화되게 해 주세요!" 위선 없는 예배를 위해 그는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영안 성도 여러분! 우리도 같이 이 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와 삶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이런 사람을 원합니다. 25%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나라에 얼마나 부패하고 잘못된 것들이 많은지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구 탓입니까? 내 탓입니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3) 흔들림 없는 순종
8절을 보세요.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대충 순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 말씀이다 싶으면 아브라함같이 아들을 바치는 일이라도, 하나님 말씀이면 내가 지키겠나이다.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런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영안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저 높은 곳을 향해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올바른 이상(理想)을 품어야 합니다. 복 있는 상태, 의로운 성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두 번째, 내 자신의 현실을 올바로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끄럼 없는 성경공부, 위선이 없는 예배, 흔들림 없는 순종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런성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