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과 가라지 교훈 9월 30일 2001-12-10 18:53:08 read : 1701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알곡과 가라지 교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24-30)
오곡이 무르익고 백과가 열매를 달리는 추수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땀 흘려 씨를 뿌린 결과들이 황금물결로 넘치는 풍년을 맞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신문에 보니, 쌀이 너무 많이 남아서 더 쌓아 둘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튼 지구촌 일각에서는 아직도 양식이 부족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할 일들입니다.
추수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영적 교훈이 무엇일까?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곡과 가라지의 교훈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귀한 진리를 말씀을 하실 때마다, 가장 알기 쉬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그런 비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거짓>이 더 위세를 떨치고 알곡들을 괴롭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1. 이 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을 선(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가라지를 뿌렸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비유를 보면, 곡식을 뿌린 밭에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를 가나 알곡과 가라지는 있게 마련이란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나라, 어떤 조직, 어떤 단체, 어떤 직장, 어떤 교회에도 알곡과 가라지는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알곡을 진(眞)이라면, 가라지는 위(僞)인 것입니다.
즉 <참됨>과 <거짓>은 항상 상존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끔 세상을 비관하고,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더 더욱 교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면 지나치게 한쪽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어느 곳에든지 명암(明暗)이 있게 마련이란 말입니다.
거짓과 참이 공존하고, 선과 악이 함께 하고, 진리와 허위가 같이하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마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또 다른 한쪽에서는 육신의 법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러한 갈등을 느꼈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내랴"고 탄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명암의 구조 가운데서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의미를 터득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생활에서 낙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는 가짜 상표에서 세계적이란 말을 듣는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유명 메이커의 본산지의 상품보다 가짜들이 더 진짜처럼 보이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사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두 개의 교회를 말하였습니다.
하나는 지상의 보이는 교회들이요,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적 하늘 나라에서의 교회는 하나이지만, 지상의 교회에서는 언제나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 같이 거짓과 참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가라지며 누가알곡인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과정에서, 그리고 더욱이 추수 때에 그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낙심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밤과 낮이 있듯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 간에서도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2. 알곡과 가라지를 공존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① 첫째로,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이 다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놓아두고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에는 대략 네 가지의 가라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곡식과 비슷비슷하여 농부들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섣불리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을 다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벼>와 함께 자라는 <피>를 연상해 보게 됩니다.
<벼>와 함께 자라는 <피>를 보면 겉으로 보기는 비슷하여 처음은 구별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점점 자라면서 결국 추수할 때는 분명하게 들어 납니다. 농부들은 그것을 잘 구별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벼와 피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피를 뽑다가 벼를 다칠 수 있기에 우선은 그대로 놓아둔다는 뜻입니다.
이번에 미국이 테러를 응징하려고 할 때 직접 테러에 가담한 자들을 치려다 보니 애매한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까지 죽게 될 것을 생각하여 신중하게 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거짓은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결국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으므로 내 버려 두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입니다.
② 두 번째로, 결국 최후의 심판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판단과는 다릅니다. 숨길수가 없습니다.
모든 불의는 불의대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당신이 선(善)하게 만든 이 세상에 어찌하여 악이 득세(得勢)합니까?"
"그리고 왜 당신은 그 악을 방관(傍觀)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기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였습니다.(합2:3)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정한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추수하는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듯이, 반드시 추수하는 때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들은 그 정한 때가 있음을 확신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모두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불의한 세력에 눌림을 받으면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최후까지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보면, 교회를 비판하고, 교역자들과 성도들을 비판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일 수가 많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갈라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교회와 타인을 심판하는 심판자로서의 오만함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으로 어떤 교회를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신자들이 지나친 교회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가 실족하는 경우들이 바로 이런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의 날, 다 들어 날 것이기 때문에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③ 셋째로, 가라지를 통하여 알곡을 연단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서 고통은 연단이요, 그 연단은 성장과 성숙을 낳게 합니다.
'고생해야 사람이 철이 든다'는 말이 이러한 뜻입니다.
아플 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실패해야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알곡이 가라지와 함께 한다는 것은 괴롭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그로 인하여 오히려 튼튼한 뿌리
를 내리게 됩니다.
세상에 어떤 곳에든지 연단을 통하지 않고 튼튼하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철도 진흙도 불 도가니 속에서 여러 번 연단을 통하여 강하게 됩니다.
신앙도 처음부터 튼튼한 신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라지와 함께 하는 동안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듯이 신앙생활에도 적당한 저
항이 있어야 튼튼하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자는 동안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을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잔다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의식이 없이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식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 왕도, 가롯 유다도 처음에는 잘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을 때 가라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에서 졸고 잘 때 마귀의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
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마귀들이 자기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알곡 되지 못하도록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사자들이 배가 부를 때는 그렇게 유순할 수 없습니다.
늘어지게 잠만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배가 고파 사냥에 나서게 되면 눈에서 빛이 납니다.
그리고 잡아먹을 상대를 골라 살금살금 접근하여 덮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알곡이 되어 충실한 열매를 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원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원줄기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등한히 여기면서 알곡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현실 교회가 부패했다고, 성령이 떠났다고 하면서 집에서 혼자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혼자 있게 되면 기도도 힘이 없어집니다. 숯불은 함께 모여 있어야 더욱 뜨거워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회가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여도 교회를 떠나서 신앙 생활을 잘할 수는 없습니다.
가라지가 없는 곳은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어딜가나, 가라지와 함께 살게 되어 있습니다.
가라지와 공존하게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엘 가나 가라지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들어 날 것을 미리 뽑아 버릴 수도 없습니다.
추수하는 날에 다 들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믿으려고 하지 맙시다.
너무 지나치게 순수성만 찾으며, 그것만 주장하지 맙시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까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면서 인내합시다.
그것이 초대교회 신자들이 걸어갔던 모습입니다.
우리들도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잘 깨달아 추수 때에 모두 알곡신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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