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은 자의 생활 모습 (마 18:21-35) 10월 14일 2001-12-10 18:54:34 read : 177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용서받은 자의 생활모습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 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게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21-35)
세상에서 용서가 없는 사회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한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런 사회라면 지옥과 같이 살 수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남에게 잘못을 범할 수도 있고,
남에게 본의 아니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만일 전혀 용서가 없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이겠습니까?
아마 살벌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오직 보복의 보복만이 있을 것입니다.
<죄> 사함이라는 말의 성경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빚을 탕감 받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친 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우리말로는 그렇게 번역하였지만,
원문에서 보면 이때 <죄>를 '오페이-레마타'라는 말로서 그것은 부채(負債)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에게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시고..."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자의 기쁨이 바로 구원의 기쁨 이라는 것입니다.
1.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에게나 빚진 존재들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은 빚을 지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부모에게 사랑의 빚을 지었습니다.
태어난 후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아 주지 않았으면, 내가 오늘 나의 위치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부모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의 돌봄의 손길이 없었으면 우리는 살아 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랐건, 남의 집에서 자랐건, 아무튼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살아오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나를 가르친 스승의 빚을 졌고, 이웃의 빚을 졌고, 나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의 빚을 진 존재들입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장사를 해서 돈을 모은 사람들도 내 물건을 팔아준 이웃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런 결과를 낳게 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건강을 잃었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았고,
내가 외롭고 괴로울 때 친구의 도움을 받았으며,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렇게 살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것이 모두는 빚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잘나서, 자기의 노력으로 오늘의 자기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이외는 믿지 못할 사람들이고, 내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뿐이고,
그래서 저들과 겨루어 이겨야만 살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모두 경쟁의 대상으로 보고, 어쩌다 상대방의 약점이 생기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남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여 자리를 얻게 되고, 그렇게 하여 부귀영달을 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보니 얼마나 피곤한 사람들이겠습니까?
2.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탕감 받은 존재들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뜻과 같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이어야 하는데, 그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두 가지 의식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1) 첫째는 빚진 자의 의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뻔뻔스러운 사람은 남의 빚을 지고도 빚진 의식 없이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빚진 사람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빚을 갚기 전까지 어딜 가나, 무엇을 하나 항상 빚 생각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빚진 죄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빚을 지면 그 빚부터 갚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빚을 갚으려는 마음이 있지만, 갚을 능력이 없을 때 절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먼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의 빚을 진 존재임을 항시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기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겸손이 나오게 됩니다.
왜 크리스천이 겸손해지지 못하는가?하면 빚진 자의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 나라는 남의 나라의 빚을 많이 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빚을 내다가 잔치를 하고, 빚을 갚을 능력을 키우지 않고 그것으로 흥청망청 쓰고 있다면 그것이 빚진 의식이 없이 사는 경우일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경제가 좀 성장했다고 우리 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비춰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위치에 오를수록 겸손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2) 그런가 하면, 빚을 탕감 받은 자의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인이 불쌍히 여겨 일만 달란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죄의 빚을 탕감 받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의식이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들의 의식 속에는 항상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빚을 탕감 받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런 의식 때문에 복음의 빚진 자라고 스스로 고백하였습니다.
남에게 돈을 빚졌을 때는 자신이 갚아야 할 존재임을 의식하고 살지만, 그것을 탕감 받았다면 주인께 대한 감사함으로 늘 충만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죽을죄를 용서해 주었는데도 아무런 의식 없이 살고 있다면 그야말로 뻔뻔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에게 주님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가 용서받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생활이란 것입니다.
3. 고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타인의 죄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탕감 받은 자들이라면 탕감 받은 기쁨과 감격을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할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처럼 자신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고서도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의 목을 잡고 끌고 가, 감옥에 가두었다면 어찌 그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같이 행하는 것을 보고 다른 동관들이 그 주인에게 다 고해 받치니, 그 말을 들은 주인이 크게 노하여 다시 그를 불러들여 엄히 책망하면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쳐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8:35)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먼저 자신을 살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었던가를 항상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이란 자신을 바르게 보면서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죄의 빚 속에서 살다가, 그 죄의 무거운 빚 멍에에 눌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죄의 값을 탕감 받았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해야 할 존재들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평불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탕감 받은 자의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사는 성도들이라면 남의 허물과 죄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 모습이 어떠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도리어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경우들이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마는, 그래도 자신이 탕감 받은 죄인임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의 기독교 신앙인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많이 악해졌기에 성도들의 관용을 도리어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지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받쳐진 존재이었고, 이삭이 우물을 파면 다시 원수들이 와서 그 우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삭은 다시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즉 희생과 양보의 생활이 이삭의 삶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어 그의 삶이 시들지 않도록 풍성함으로 채워 주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너무 눈밝아 차고, 똑똑 하다고 잘사는 것은 아닙니다.
좀 어리숙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도리어 잘 되고, 복을 받고 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영악스럽고, 빈틈없고, 남에게 지지 않는 사람들이 잘 살 것 갖고, 그런 사람들이 앞설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항상 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용서를 받았으면 남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보면 원수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2: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사노라면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그 복이 돌아갑니다.
여러분 후손들이 그 복을 다 받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원수를 직접 갚으려는데 인류의 비극이 있을 것입니다.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낳고야 맙니다.
테러를 무력으로 근절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인류의 비극은, 그리고 역사적 종말은 바로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려면 인류는 전멸하는 위기를 맞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왕이 오실 날이 가까워 오는 것 같습니다.
그 평화의 왕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9:5-7절에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사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용서함을 받은 자의 생활 모습!
거기에서 우리 성도들의 참 모습이 보여 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참 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허물이 탕감 받은 것처럼, 타인의 허물을 용서하면서 사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용서하면서 사는 참 신앙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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