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장로교 동부한미노회는 임영수 목사를 초청하여 "영성과 목회갱신"이라는 주제로 5월 26일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뉴저지 소망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임영수 목사는 장신대를 졸업하고 신일고와 대광고 교목을 거쳐, 평강교회-남대문교회-영락교회-주님의교회 등의 목회를 마치고 모새골 공동체를 설립하고 사역하고 있다.
오전 강의에서 임영수 목사는 자신의 인생경력을 따라 구도자의 삶을 추구한 자신의 인생을 조명했다. 그리고 모새골(모두가 새로워지는 골짜기) 공동체 사역을 소개하고, 행위 추구가 아니라 존재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을 전했다.
특히 성공과 빠른 성장 등 행위를 추구하는 한국교회의 폐단을 소개하고, 목회자는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고 구도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것에서 받은 힘으로 목회를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목사가 영성이 준비되지 않은채 목회현장에 있을 때, 목사는 마음이 허하기에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려 하다 교회문제가 일어나며, 목사는 결국 설교를 만들어 내는 기계가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다음은 실존주의에 기초하고 분석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영성에 접근한 임영수 목사의 오전 강의 후반부 내용이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모새골에 들어오셔서 세종류의 질문을 한다. 먼저 한국교회의 대안인가를 묻는다. 목사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으로 살아온 삶의 결론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안은 아니다. 은퇴가 가까운 목사들은 자신도 은퇴 후에 이것을 하려고 하는데 얼마나 들었는가를 묻는다. 무엇이라 할 답변이 없다. 중견 목사들은 영성목회를 하려고 하는데 프로그램을 달라고 하는데 우리는 프로그램이 없다.
모새골 아카데미도 10여년 넘게 하는데 초기 기독교에서 부터 시작해서 리서치 하는 강의를 하면서 개신교 신앙은 이것이라고 제시를 하고 있다. 똑같은 반복이 없고 매주 주단위로 주제가 다르게 진행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의미가 없어서 못한다. 모새골에는 프로그램은 없다. 매뉴얼도 없다.
영성목회를 위해 라이프 스타일도 바꾸어야
목사들이 영성목회를 하려면 라이프 스타일도 바꾸면 된다. 행위 추구를 목표를 하면서 빨리 성공하고 빨리 큰 교회 목사가 되려는 목회를 했다면 그것을 버리고 존재 추구의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매일 매일 먼저 하나님과 깊은 대화의 삶과 사귐의 삶을 배워가면서 그것에서 깨달은 것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면 주석을 베껴서 시간을 때우지 말고 먼저 한 달 전에 로마서를 20번 이상 읽으면서 로마서에서 주는 메세지를 먼저 듣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름대로 로마서를 분석한 후 전통있고 건전한 주석을 놓고 하나하나 주제를 강의하면 성경공부하는 시간이 매우 기다려지고 가르치는 목사가 익사이팅해 진다.
자꾸 목사의 목회와 신앙이 설교와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분리가 되니 피곤해 지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읽고 싶은 책을 정독하고 그것에서 사고 구조를 뽑아내는 훈련을 하고 그렇게 하면 설교의 부담이 많이 줄어든다.
새벽기도할 때도 새벽기도를 빨리 해 버리고 쉬려고 하지 말고, 30분전에 먼저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먼저 듣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중심으로 5분정도 간단히 메시지를 던지고 교인들이 기도하게 하고 먼저 들은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이민교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목사님들이 행위 추구에 목회의 중심을 둔다. 설교를 잘하는 목사, 두날개의 목회... 독서를 해도 책을 보아도 전부 다 인기있는 설교, 잘 먹히는 설교,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것이기에 독서를 해도 성경을 읽어도 하나도 마음에 안식이 안된다. 분리가 되니 그런 것이다.
그리고 40대 이하의 갓 신학교를 나와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들은 모새골에 있다 갈 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고 나서 어떻게 목사로서 영적인 길을 걸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 방향을 잡았다고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세 그룹 중에 그래도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목사와 평신도들이 공허해 하는가?
모새골 사역을 하면서 기존 목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내적 인격과 외적 인격이 이제는 거의 일치 속에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행복하고 기쁨이 된다. 모새골은 모두가 새로워지는 골짜기의 줄임말이다. 여기에는 외부에서 각 교파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세계각지의 선교사들도 오고 각 교파에서 오는데 우리는 다 형제자매로 부른다.
평신도들도 많이 오는데 대부분 공통점이 교회생활을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자꾸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표상이 자꾸 흐려진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고민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교회가 이벤트 목회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는 교회를 크게 지어서 웨딩몰이나 카페를 만들어 개방하고 그것이 마치 요즘 교회들은 다 그래야 한다는 것 처럼 말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자꾸 그런 쪽으로 간다. 시설을 만들어 대외적으로 개방한다고 하는데 교인들도 공허감을 느끼고 있다.
목회자에게도 가장 문제가 공허이다. 피곤과 허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행위 추구가 아니라 존재 추구하는 구도자의 삶 밖에 없다. 저는 구도자의 삶을 저의 체질에 맞게 선택을 한 것이다. 주일 강단에 서기 전에, 심방을 하기 전에, 교회건축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모새골의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기 전에 가지는 개인의 시간이 있다.
지난 일주일을 돌이켜보고 수정할 것은 수정한다. 매일 아침마다 5시에 채플에 가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과 내밀한 대화가 있고, 다음에 군중 속에 들어간다. 먼저 군중 속에 있기 전에 내밀한 하나님과 대화와 사귐이 있은 후 군중 속에 들어갈 때 하나님과 사귐 속에 있는 현존으로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큰 것을 지향하거나 성공을 지향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풀을 뽑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훈련을 통해 자유함을 얻으면서 공동생활을 대중 앞에 있게 된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대중 앞에 노출되기 전에 먼저 내밀하게 하나님 함께 하는 삶, 그리고 교인들이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 들어와 있을 때 이미 하나님과 함께 그곳에 머무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자꾸 훈련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존재 추구이다. 빨리 무엇을 해치우려고 하는 이벤트도 아니고, 남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교회에 잠시 있을 때 교인들이 다른 교회는 찬양과 경배가 있고 심야기도회도 있는데 우리교회는 안하느냐고 해서, 찬양과 경배는 온누리교회가 원판인데 그곳에 가서 하라고 안했다.
행위 추구를 하는 목회
개척교회를 시작하면 먼저 돈을 빌려서 내부 인테리어를 하고 큰 강대상을 가져다 놓고, 빚을 지고 들어가니 성장을 못하면 중간에 그것을 팔게 된다. 영적인 것은 하나도 없이 사업하듯이 목회를 한다. 목사가 그렇게 하면서 안변한다고 교인들만 자꾸 윽박지르는데 참 위험하다고 본다.
먼저 교회개척의 뜻이 있다면 적은 인원들이 모여서 진지하게 성경공부부터 시작해서 수가 많아지면 서로가 돈을 내서 공간을 빌리면 된다. 교인들도 없으면서 성가대나 선교회가 왜 그렇게 빨리 만드는지 모른다. 최소한 교인이 100-200명이 된다면 틀을 잡아야 하는데 미리 해 놓으면 기득권이 생겨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조직에 억매이게 된다.
운영위원회 정도 만들고 자꾸 영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교회를 처음하면서 대중음식점 메뉴처럼 심야기도, 주일예배, 주일저녁예배, 삼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을 차려 놓는다. 교인도 얼마 안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메우려고 하는가. 목사는 시간 메우면서 기진맥진한다. 먼저 그럴 필요 없다. 처음에는 주일에만 모여서 주일설교를 진지하고 바르게 해 가고, 조금 모이면 주중에 성경공부를 하나 시작하고, 영적인 것이 성장이 되어가면서 보는 관점이 달라지면서 존재추구를 깊이 해 가다 보면 자연히 뭔가 보인다. 모방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겠다는 것이 생긴다. 한 1년 동안 해보면 다음 단계가 보인다. 그렇게 해야 한다.
영적충전을 위해 해야 할 것들
주변 목사님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준다. 목회현장에서 설교와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당신들의 삶을 분리시키지 말라고 한다. 당신은 자꾸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감동시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당신 스스로는 영적인 것이 형성될 시간이 거의 없으니 라이프 스타일을 이제 바꾸라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경쟁 때문이다.
경쟁에 들어가 발을 담가 놓으니 조급하고 늘 좋은 프로그램이 없는가를 살피게 되고 프로그램을 구걸하게 된다. 프로그램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영락교회, 남대문교회, 평강교회에서 목회할 때, 특히 영락교회는 대형교회인데 거의 내 스타일대로 영적인 목회를 했다. 다 하기에는 너무 피곤해서 프로그램들을 많이 잘라냈다. 영락교회 당회장은 교회내외 20여개의 중책을 맡는다. 교회학교 등 몇 개만 남겨놓고 다 내주었다.
조찬기도회 요청이 얼마나 많은지. 가 보아야 호텔에서 모여 아침 먹고 시시한 이야기들을 하고 끝난다. 조찬기도회는 부득히 한 것만 2달에 한 번씩 참가했다. 새벽기도회는 부교역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관혼상제도 교구별 목사님이 담당하게 했다. 한 달에 두 번 선착순으로 관혼상제를 맡았는데 아무리 유명한 장로라도 소용없고 무조건 선착순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쫓아내려면 쫓아내라고 했다.
남대문교회나 평강교회 같은 교회는 작은 교회이니 심방할 기회가 있었는데, 구역별 순서대로 심방했다. 처음에는 장로의 집에 먼저 안 찾아온다고 섭섭하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나중에는 저의 태도에 대해 신뢰하는 것을 경험했다. 영적으로 자꾸 성장이 되어 가면 자유해지니 그것에 억매이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참 신비로운 것 같다. 눈치에서 해방이 되고, 교회 당회장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부교역자이라는 자세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질문하면서 목회를 해 나갔다.
목사의 기능과 목사의 영성
목사가 영적으로 형성이 안된 채 목회현장에 있을 때는 문제가 된다. 결국 하나의 설교를 만들어 내는 기계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자신을 리뉴얼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한국에 일주일 한 번씩 목사들이 모여 리뉴얼할 수 있는 모임이 있었는데 저도 참여했다, 그런데 모여서 식사하고 사우나 하러 간다.
그리고 일 년에 한번 모여 선교탐방간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리뉴얼하는 전부이다. 그리고 시중에서 하는 두날개교회 또는 무슨 셀교회 또는 설교 잘하는 세미나 등은 거의 다 목사로서의 기능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에 대한 세미나이지, 목사가 먼저 영적으로 형상되면서 목사의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니 자꾸 교회가 문제가 된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목사는 영수증이 없이 3억을 쓴다고 자랑한다. 당회는 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한다고 한다. 이런 것은 목사의 입에서 해야 할 말이 아니다. 한국에는 1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 몇 개가 깨어졌다. 조사를 해보니 목사가 일 년에 쓰는 비용이 10억에 가까웠다고 한다. 영수증도 없이 마구 사용하고, 유학간 목사의 자녀를 위해 일 년에 몇 억씩 보냈다고 한다. 그런 유혹에 쉽게 빠진다. 왜냐하면 허 하기 때문이다.
구도자의 삶이 주는 유익들
충청도에는 도락산(道樂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가보면 다른 산과 분위기가 다르다. 도를 닦는데는 기쁨이 없으면 도를 못 닦는다. 그런데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면 처음에는 기쁨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사우나나 해외여행으로 채워지지 않는 기쁨이 있다. 그래서 도를 닦는다.
도를 닦아도 늘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갈등이 있다고 하면 누가 도를 닦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딴 짓을 하는 것이다. 내가 도를 닦아보면, 존재 추구의 삶을 살아보면 세상적인 것은 채울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도 있고, 하나님의 체험도 있다.
저의 영성은 어떤 학문적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제 영성의 패턴은 실존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그 영성에 접근하는 과정은 분석 심리학적인 방법이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신학에서 부터 할 수도 있고, 조직신학에서 출발할 수 있고, 상담학적인 것에서 출발할 수 있는데 저는 지금까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실존주의에 근거했고, 분석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영성이 저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다.
구도자의 길이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계속 만나고 있다. 영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친구 목사들이 와서 "너는 이제 됐다. 영락교회 담임목사는 장관자리이다"고 했다. 그래서 되기는 무엇이 되었는가. 지금까지 목사로 살아오면서 이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차이점은 대형교회에서 목회할 때는 숨어있을 여유가 있었다. 장로와 부교역자 등 조직이 있었으나, 모새골은 내가 없어지면 와해될 수 있으니 항상 하나님 앞에 숨어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름대로 좋다. 계속되어 간다고 본다. 구도자의 삶은 이 세상 여정이 끝날 때 끝난다고 본다. 제 소유는 하나도 없고 다 사단법인에 들어가 있다.
지금도 아침 묵상 시간을 거르지 않는다. 이제는 책을 이전처럼 그렇게 안 본다. 처음 구도자의 삶을 시작했을 때는 한계가 오면 한계에서 고민하다가 새로운 빛의 조명을 받고 그 한계가 깨어지면서 빛에 의해서 재통합이 되고 했는데 그것들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그런데 50대 후반 모새골을 하면서 한계가 오고 빛에 의해서 재통합이 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제는 거의 그런 것 없이 순탄하게 가고 있다.
그러나 매일 아침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내밀한 대화의 시간을 거르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생명이 끓어진다. 그런 시간을 통해 성경이 그대로 믿어진다. 문자 그대로 믿어진다. 이상하다. 자꾸 분석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일상에서도 느끼게 된다. 그러니 프로그램이 아닌 영적인 지도가 가능한 것 같다.
영성 목회라고 하는 것은?
동역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영성 목회라고 하는 것은 이론으로 신학적으로 어떤 체계적으로 익혀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어야 한다. 목사 자신이 묵은 상처가 치유가 되고, 목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삶을 배우고, 그러면서 욕심과 명예심에서 해방이 되어가고, 경쟁에 말려들지 않고 그렇게 하기에 시간이 좀 걸린다. 앞으로 시대가 자꾸 바뀌는데 그래야 그런 환경을 감당할 수 있는 목회자로서 설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도전을 견뎌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우선 그런 라이프 스타일을 갖게 되면 내적 자유함이 커진다.
작은 교회나 큰 교회나 구별이 안된다. 시간이 날때 집회초청을 받으면 허락하는데 지방에 있는 어느 목사는 교인이 너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서 자유롭게 된다.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상처를 덜 받게 된다. 상대방이 상처의 독화살을 쏠 때 그것을 못 쏘게는 할 수 없지만 화살이 날아와도 자유의 영역이 인격 속에 형성되어 있기에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앞에서 툭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객관화시켜 보게 된다. 그 전에는 화살이 심장 깊이 들어박혔지만 이제는 그런 변화를 겪어간다.
그렇게 살아보면 목사직이 참 고귀하구나, 상당히 중요한 일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 가면 이민교회에서 맞이할 어려움도 많이 극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타르시스와 성령의 변화
우리는 카타르시스와 성령에 의해 형성되는 변화를 혼동한다. 어떤 교인이 자신은 심야철야를 해야 일주일을 산다고 한다. 철야하는데 가보니 초저녁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그냥 조용히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도록 자신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도하다가 졸리면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고 온다. 분명히 카타르시스이다. 이 분은 사회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니 그것에서 카타르시스를 해야 한다. 주중에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삶은 거의 없고 일주일을 그것으로 산다. 그래서 그 교인이 심야철야 없이 못산다고 하는 것은 카타르시스이다.
구도자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라
구도자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보면 허세가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경쟁심에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손상을 입힌다는 것을 알게된다. 우리는 그런 것에 희생당하기 쉽다. 그런데 우리를 내어주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당히 존귀한 일을 위해 부르셨기에 부르신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진실되고 참된 것을 늘 알려주신다. 하루아침에 크려고 하지 말고 꾸준하게 그런 삶의 과정을 익혀가면 된다. 1주나 1달을 살아보고 변했나 안변했나를 따지지 말고 그 궤도를 꾸준히 걷다보면 어떤 시점에 가서는 문제와 부딪쳤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내 안에 평강이 있고 객관화하여 보는 것을 느끼고 내가 이렇게 변했나하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나서 이 길이 어려워서 버릴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온 것을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모새골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크게 감사한 것 중 하나는 내가 구도자의 삶을 포기했다면 누리지 못했을텐데 지금까지 구도자의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구도자의 삶도 하나님이 도와서 한 것이다. 어떤 때는 노회에 가서 다른 목사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관심이 전혀 달라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제일 꼴찌 목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때때로 있었고, 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길은 바른 길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구도자의 삶속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때 허구와 참이 구별이 된다. 질투와 시기에서가 아니라 저것이 아닌데 하는 것이 보인다. 저것이 무엇인데 성공이라고 젊은 목사들이 따라가는 것이 보인다. 교만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영성 형성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한다. 개신교적인 입장에서 영성 형성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하면서 그분의 뜻을 물으면서 그분에 대한 이해가 자꾸 바뀌고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면서 살아가는 여정이 영성이다.
신학자들이 영성에 대해서 복잡하게 이해하게 어렵게들 정의하는데 해보면 간단하다. 간단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너무 영성에 대해 학문적으로 십자가의 영성, 수도원의 영성 왜 그렇게 영성을 갈라놓는지 모르겠다. 영성은 하나님과 깊이 내밀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제가 모새골을 시작하니 다른 데에서도 한다고 많이 생겨난다.
그래서 어떤 목사가 한국에 있는 영성공동체를 모두 모아서 영성공동체 모임을 만들고 지도자를 세우고 자꾸 회원으로 들어와 달라고 했다. 그런 것이 싫어서 여기 나와서 혼자서 사는데 그런다. 그런 것을 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표상이 자꾸 새로워져야 한다.
목사가 내면에는 항상 곤고와 갈등 등이 있으나 강단에서 항상 긍정적인 언어를 설교를 하게 되면 상당히 위험하다. 교인보다 목사 자신이 위험하다. 존재 추구의 삶을 살아가면 내면의 세계가 밝아지면서 곤고가 없고 확신이 있게 되고 한 가지 체험에 안주하지 않게 된다. 목사들은 그렇게 가야 한다. 그 길을 주님 안에서 자꾸 배워가야 한다.
저는 해외에서 영성에 대한 학위논문을 쓴 것은 없다. 살아온 과정에서 되었고, 이야기한다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실존주의에 근거하고 있고 실천심리학적인 방법론으로 인간문제에 접근해 갔다고 밝힐 수가 있겠다. 그러나 목표는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가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의 깊은 평강과 자유함이 건강을 지켜주는 것 같다. 1개월 전에 병원에 가서 체크를 했는데 건강하다. 한 10년 동안 노동을 하니 몸에 배었다. 노동이 좋다. 늘 머리를 쓰니 오히려 노동을 할 때 휴식이 온다. 그리고 묵상과 노동은 항상 상호보완이 되어야 한다. 매일 하루 종일 눈만 감고 있으면 회의가 오고, 활동만 해도 안되고 언제나 적절하게 조화가 되어야 한다.
고난을 영적 업그레이드 기회로
삶의 상황을 역이용하라.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도 한 단계 영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어떤 절망과 어려움이 와도 그것이 저의 내면세계를 흩어놓지 못하는 것 같다. 자꾸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안목도 생긴다. 물론 실수할 때도 있다.
그때는 변명하거나 하지 않고 "하나님, 이것은 저입니다. 저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붙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며 그것을 저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다. 저의 어두운 면과 늘 화해를 할 수 있는 여유, 이런 것들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목회환경이 어려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선한 일을 여러분가운데 시작하신 그분은 여러분과 함께 선한 일을 완성해 가실 것이다. 믿으시고 그분과 함께 좋은 영적인 사람이 되어가면서 목사 자리에 있으라. 이것은 없고 기능만 배워서 목회하려면 타락한다.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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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자주’ 가지 않는 이유: 찬양과 설교?”
존 피이스, 바나 리서치의 ‘가나안 성도’ 설문 결과 분석
바나 리서치
문화선교연구원(원장 백광훈 박사)에서 존 피이스(Joshua Pease)가 쓴 '바나 리서치 연구가 알려주는 것: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교회는 가지 않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글을 번역·소개했다. 소위 '가나안 성도' 이야기이다.
피이스는 "그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이유가 교회에 대한 분노와 실망 때문은 아니다"며 "오히려 교회와 그들의 삶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음은 그 내용.
2014년, 기독교 작가로 잘 알려진 도널드 밀러는 '내가 교회에 자주 가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로 주목을 끌었다. 최근 바나 리서치에 따르면 이와 같은 현상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인정하면서도 교회나 종교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인구가 있으리라는 생각 아래, 바나 리서치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일상과 삶에 매우 중요하다고 시인하지만 지난 6개월 동안 교회를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시행했다.
바나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2004년 4%에 불과했던 이 유형의 기독교인이 최근 10%로 증가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X세대와 베이비붐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때론) 더 정통적인 비출석 기독교인의 신학
이 유형의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회의 품은 떠났지만, 이들의 신학과 신앙관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따르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 기독교인들은 출석하는 이들 못지 않게 '유일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유일신의 존재에 대한 미국 성인의 평균이 59%이고 교회 출석자들의 평균이 90%인 반면, 93%의 비출석 기독교인들도 유일신(하나님)을 시인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고 답한 이들도 94%로, 미국 성인 평균인 57%와 교회 출석자들의 평균인 85%보다도 훨씬 더 높았다.
끝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 대해서는 95%으로 강한 믿음을 보여, 미국 성인 평균인 65%와 교회 출석자들의 평균인 92%보다 높았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다른 양상을 보이는 항목은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이들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같은 가르침을 준다는 것에 동의하는 비중이 높았다. 비출석 기독교인들 45%가 기독교의 배타성을 반대한 반면, 일반 기독교인들의 86%는 반대했다. 이들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도 타인과 공유하는 비율이 18%로 낮았다. 이는 일반 기독교인의 67%에 비해 크게 낮다.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밀러는 교회를 가지 않는 이유로 '찬양과 설교'를 꼽았다. 찬양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 있거나 연결돼 있음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훈련 행위들은 전통적 교회 밖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더불어 그는 새로운 모습의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1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기존 교회 모임과 집회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밀러의 주장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상처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 성장에 교회의 행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서 떠났다는 점이다. 이는 바나 리서치 보고서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한 반대의견에 대해 밀러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서, 혹은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가 없어서 외로움과 고독함에 시달린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며 "나의 공동체는 충만하고 깊이 있고 영적으로 견고하며 감사와 희생이 넘치는 곳이다.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에겐 때론 이런 공동체 생활이 피곤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공동체는 많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누군가가 시작한 공동체"라고 답했다.
◈통했던 권위,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밀러의 관점은 외부적 권위 조직과 체계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는 문화적 변형의 깊이를 반영한다. 비단 교회뿐 아니라 정부와 같은 다른 조직들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찰스 타일러는 "갇혀진 나(buffered self)"라는 관점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외부 요소에 기인한 진리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지 않고 내면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는 추세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제도 교회를 찾았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내면에서 진리를 탐색하고 외부에서 확인을 얻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는 전통 교회에서 절대 진리에 대한 답을 얻었다면 이제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영적 여정을 위해 반드시 교회 건물을 출입하지 않고도 신앙의 리듬을 찾게 됐다. 이런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비출석 기독교인들과 소통 문제와 충돌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시대
비출석 기독교인들에 대해 이해해야 할 것은 그들이 신학, 공동체, 제자도,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 개념들에 대한 그들만의 정의가 불편한 대화를 초래할 순 있겠지만,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위 개념들에 대한 명확하고 올바른 이해와 경험을 쌓는 효과적인 공간으로 더 이상 기존의 교회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설교에 공감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와 주일 모임들이 공동체에 대한 효과적 본보기가 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이유는 교회에 대한 분노와 실망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와 그들의 삶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바나 리서치 편집장인 로세나 스톤은 "이 유형의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 사역을 이해하는데 더 중요해졌고, 숫자도 증가하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영향받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경말씀을 믿으며 기독교의 신앙과 가치들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교회가 이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적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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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연희교회 윤동현 목사 <뉴스앤조이> 제소, 모두 기각
법원 "기사 내용 진실로 볼 여지 있어" 1억 손배 청구 기각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자신의 성·재정 문제를 다룬 <뉴스앤조이> 보도가 허위라는 인천연희교회 윤동현 목사 주장이 기각됐다.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2민사부(이원신 재판장)는 6월 21일 윤 목사가 <뉴스앤조이>를 상대로 청구한 1억 원 손해배상 청구(간접강제 포함)를 모두 기각했다.
윤동현 목사는 '목사 집 들어간 여자 권사, 하룻밤 새 무슨 일이'(2016년 3월 23일 보도), '은혜롭게 덮고 넘어가자?'(3월 30일 보도), '13억 예산 중 담임목사 연봉만 3억'(4월 6일 보도), '인천 C교회 A 목사, 이번엔 유부녀?'(4월 13일 보도) 등 네 개의 기사를 문제 삼았다.
<뉴스앤조이>가 △자신과 B 권사가 불륜 관계에 있다 △자신이 D 권사와 수개월간 사택에서 관계를 맺고 이를 촬영했다 △자신이 많은 사례비를 받으면서 일부 교인에게 사적 용도로 금전을 요구했다는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윤 목사 주장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B 권사와 함께 밤을 보낸 사실과, B 권사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교인이 있다는 것은 윤 목사도 인정하는 '다툼 없는 사실'이다. 법원은 "원고가 '이를 통해 사회 통념상 자신과 B 권사의 불륜 관계라고 미루어 판단할 수 있지만, 이를 진실로 볼 근거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어서 그 자체에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유부녀인 D 권사와의 관계도 진실로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D 권사가 윤동현 목사와의 관계를 인정한다고 여러 사람에게 진술했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와 총회재판위원회가 이 진술을 모두 인정해 윤 목사를 출교 판결했으며, 윤동현 목사가 제기한 2017년 4월 27일 출교 판결 무효 확인 소송도 기각됐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3억 원대 연봉을 받았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법원은 윤동현 목사의 모든 입증에 의하더라도 <뉴스앤조이> 보도는 허위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오히려 교인들에게 2015년에만 개인적으로 수천만 원을 받았고, 윤 목사가 SBS 궁금한이야기 제작진에 '실제 1,000만 원 정도만 받았다'고 자인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기사 내용을 진실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윤동현 목사는 <뉴스앤조이> 보도가 자신을 음해한다며 민형사상 조치를 취해 왔다. 그러나 명예훼손 형사 고소 2건은 모두 무혐의 처분됐으며, B 권사의 명예훼손 고소도 무혐의 처리됐다. 보도 금지 가처분도 고등법원에서 기각으로 확정됐다. 검찰과 법원은 민형사 결과에서 모두 <뉴스앤조이> 보도의 공익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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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벗어나라
[홍인식 목사의 교회 해방] 실용주의의 포로가 된 한국교회
나는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의 삶의 이야기가 본 글의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남미, 미국 그리고 유럽
나는 어렸을 때(1974년) 부모님을 따라 멀리 남미 파라과이로 가서 이민자로서 살았다. 거기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파라과이 아순시온국립대학교으로 진학하여 경영학을 수학했다. 그 후 이민을 떠난 지 1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교역학(M.Div.)을 공부하고, 1991년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곧바로 파라과이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나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를 만나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교(ISEDET)에서 해방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선교사로 지내면서 가끔은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 보고도 하고 친구 목사들을 비롯한 교계 관계자들과 모임을 갖고는 했다. 가끔은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어디서 학위를 했느냐는 질문을 하고는 했다. 이 질문에 나는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공부를 했다고 답변을 한다.
그 후에 생각을 해 보니 나의 답변을 들은 사람들 반응이 이상했다. 사람들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답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지극히 짧다는 것이었다. "아, 네…" 그리고 그만이었다.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반응에 의아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고는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똑같은 질문에 이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했습니다"라는 답변에는 대다수 사람이 지대한 관심과 부러움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유학 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물어보기도 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십수 년 전의 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당시 한국 사회가 얼마나 미국 혹은 유럽 사회를 동경하고 있으며, 그 나라들에 경도되어 있는가 가르쳐 주고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 많은 부분에서 미국과 유럽 사회를 향한 경도 현상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 전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한국의 새 정부가 이견을 보이는 것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했다고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와 더불어 우려를 나타내는 우리들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미국 의존도, 미국에 대한 종속적 태도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미국제 한국교회?
미국에 대한 사회-정치-문화적 의존도는 한국 기독교 안에서 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 목회, 신앙 양태는 미국 교회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신학자 중 미국 유학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 어떤 나라보다 많다. 한국 목회자들은 미국 교회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다. 한국교회에서 유행하는 거의 모든 목회 모델은 미국 교회에서 온다.
'구도자 예배', '목적이 이끄는 삶', '야베스의 기도', '긍정의 힘', 그 이전에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방식' 등은 한국교회를 휩쓸었던 목회 모델이었다. 지금도 미국 교회를 배우려는 열망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현재 목회 현실과 목회 사역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국 교회 모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복음적 신학자인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그의 저서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원제: Made in America: the Shaping of Modern American Evangelicalism, 1996년, 2001년 김재영 번역, 나침반)에서 미국 교회 특징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1)
마이클 호튼의 지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복음이 미국 문화의 옷을 입으면서 실용주의(pragmatism)의 시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화의 옷을 입은 복음은 주관적, 감각적 그리고 물량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그것은 지난 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소비자 중심 목회 모델을 형성하게끔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호튼은 그의 저서에서 "예수는 상품이며, 죄인으로서 우리들은 소비자이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상품을 포장하고 판매하는 사람들로 변질된다. 따라서 소비자들인 우리는 더 이상 빚진 자들이 아니라 상품 구매자들로 나타난다"(영어 원본, 61쪽)라고 말하면서 미국 기독교의 실용화와 상품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미국 교회 영향에 의한 실용주의와 복음의 상품화 현상은 한국교회가 교회 성장과 번영신학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미덕1: 교회 성장
또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미국 교회의 영향력은 캘리포니아의 풀러(Fuller)신학대학을 통하여 유입된 교회성장학에서 가장 강하게 발휘되었다. 교회성장학은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각 교회가 성장함으로써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올바르게 전도가 이루어졌다면 교회의 수적 성장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점차 교회 성장이 교회 사역의 목적인 것처럼 변질되게 만들었다.
따라서 교회의 수적 성장은 교회의 사역을 정당화하는 잣대로 작용하게 이른다. 결과적으로 교회 성장을 위한 여러 다양한 방법론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리가 동질 집단의 원리이다. 동일한 성격을 가진 집단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원리다.
교회성장학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목회의 성공 여부를 수적 잣대로 가늠하게 되었고, 초대형 교회를 이룬 목회자가 믿음과 영성의 최고봉에 서 있는 사람들로 간주되어졌다. 이렇게 교회 성장과 번영신학이 한국교회를 사로잡고 말았다. 미국 교회의 완벽한 복사판으로 한국교회가 탄생했다고 지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목회적-신학적으로 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마이클 호튼은 위에서 언급한 저서에서 "이제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절망하고 짓밟힌 자들과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부유한 자들, 거만한 자들, 성취자들, 권력 있는 자들, 성공한 자들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
(중략) 번영의 복음은 미국에서 폭넓은 관객을 확보하였다. 많은 전도자가 이 물질주의적 복음을 장려하고 있다. (중략) 복음주의 신앙의 미국화(美國化, americanization of evangelical faith)가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 시민 종교, 실용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자아도취, 쾌락주의, 물질주의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마법적 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영어 원문, 85~86쪽)라고 지적한다.
호튼의 지적이 비록 20년 전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오늘 한국교회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 하락은 이 같은 기독교 복음의 변질된 전파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최고의 미덕2: 번영신학
한때 삼박자 구원으로 비롯한 기복신앙이 한국교회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삼박자 구원은 요한삼서 1장 2절을 바탕으로 구원 개념을 이해하는 것인데, 삼박자 구원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혼의 구원과 생활의 복과 건강의 복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으면 몸이 건강해지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온전한 개념이라고 이해했다.
삼박자 구원만큼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영향을 준 이론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질적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물질적 번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이 내시는 것이다"라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는 했던 것이 한국 교인들 모습이기도 하다. 기복신앙이다.
그런데 얼마 후 기복신앙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삼박자 구원으로 대변되는 기복신앙은 점차 그 힘을 잃는다. 샤머니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마치 무당에게 복채를 바치고 복을 빌어달라는 샤머니즘적 기복신앙과 삼박자 구원이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기복신앙이라는 단어는 샤머니즘적이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단어로 간주되어 기독교 내에서 점차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얼마 후 또 다른 미국적 표현인 '번영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번영신학'은 미국의 유명 작가들 작품을 통하여 세련된 모습으로 한국교회에 침투했다. 특히 2000년도에 미국에서 출간되어 3개월 만에 410만부 이상이 팔려 <USA투데이>,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던 애틀랜타의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 축복받은 삶으로 나아가기>(The Prayer of Jabez: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는 한국교회에 번영신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한국교회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거의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 조엘 오스틴(Joel Osteen, 1963년 3월 5일~)이다. 그는 오늘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목사이며, 레이크우드교회 담임목사로 사역 중이다. 한국에서 그의 책 <긍정의 힘>, <잘되는 나> 등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물질적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최고 목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윌킨슨과 조엘 오스틴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번영신학'은 한국교회가 물질적 풍요를 따르게 하였으며, 예수의 십자가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생명의 길을 벗어나 물질적 번영을 믿음의 표징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성공(?)한 목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러지 못한 목사는 게으름과 불신앙의 결과로서 목회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적 실용주의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 실용주의 모델과 '번영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특히 실용주의는 한국교회를 심각하게 오염한 주범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번영신학은 실용주의의 실질적 열매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정당한 것은 우리 목적을 달성케 해 주는 실용적 방법론이다. 방법의 정당성은 방법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가 택한 방법이 우리가 바라는 바를 달성케 해 줄 수 있느냐'라는 것에 있다. 결과가 방법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잣대이다. 결과가 방법의 정당성을 결정짓는다. 이는 목회의 마키아벨리 현상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마키아벨리적 실용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초대형 교회로 성장한 목회자는 모든 면에서 정당하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놀라운 성장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이해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성공한 그에 대하여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성과와 결과는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기에 그의 자녀를 통하여 지속되어져야 한다고 이해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그가 이룩한 결과로 정당화된다.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에게서 전수받은 마키아벨리적 실용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세련된 '번영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와 번영의 복음을 비롯한 긍정적 사고방식의 물질적 풍요를 쫓을 것이 아니라 다시금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예수의 길을 따라나서야 한다. 진정한 교회 해방은 미국으로 대변되는 '실용주의'와 '번영신학'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사사기 19-21장은 '레위인의 첩' 이야기다. 한 레위인이 가출한 첩을 친정에서 데려온다. 이 여정 중, 기브아 땅에 있는 베냐민 지파 한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 베냐민 지파 청년들이 몰려온다. 이들은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相關)하리라"(삿 19:21)고 말한다.
'상관하다'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남자와 여자가 육체관계를 맺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창세기 19장 소돔 이야기나 사사기 19장 레위인의 첩 이야기에서 '상관'을 요구하는 주체는 남성이고, 이들이 요구하는 상대도 남성인 탓에, 이 표현은 '동성애'를 암시하는 구절로 인식돼 왔다. 소돔은 타락의 대명사로 유황불 심판을 받았고, 사사기 19장의 베냐민 지파도 결국 전멸당했다. 이는 동성애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되고는 했다.
'레위인 첩의 죽음'(Death of the Levite's Concubine). 1638년 빌렘 발티위스(Willem Bartius)작. 에르미타주미술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은 6월 18일부터 매주 일요일 '한백 신학 교실'을 열고 있다. 성서 속 동성애를 암시한다고 해석해 온 구절들을 성서 비평 관점에서 해석한다. 6월 25일 두 번째 시간에는 사사기 19장 '상관' 구절을 동성애로 볼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이날 모임도 서대문구 카페 카멜로에서 열렸다.
김진호 실장은 이 구절은 이스라엘 12지파가 서로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부족 동맹' 시대의 긴장과 갈등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가 서로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부족 동맹' 관계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부족 동맹 사회를 구성하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다.
성서 기록에 토대를 두는 '고전 가설'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등 타지에서 들어와 원주민을 내쫓고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는 '정복 모델'(올브라이트 학파)과 성서 곳곳에 모든 원주민을 다 내쫓지는 못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데 근거해 이들과 뒤섞여 살았다는 '이주 모델'(알트-노트 학파)이 있다고 소개했다.
반면 고전 가설에서 한발 더 나아간 '수정 가설'로는 노먼 갓월드(Norman K. Gottwald)의 분석으로 알려진 '사회·정치적 혁명 모델'이 있다고 했다. 갓월드는 탈출한 이들이 기존 군주제 체제에서 벗어나 팔레스타인 땅에 모여 재부족화하고, 이들이 가나안 지역에 모여 살면서 부족 연합이 되었다고 본다.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은 부족(지파)별로 나뉘어 살았으며, 이 지역에 살던 다른 부족과 달리 '왕'을 원하지 않은 공동체였다는 점이다.
부족들은 서로 평등을 유지하며 지내 왔으나 필연적으로 긴장이 상존했다. 누군가가 부족들을 이끌거나 주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진호 실장은 이스라엘 동맹을 이끈 부족이 '에브라임'이라고 했다. 마치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처럼, 에브라임이 '경찰 부족'으로서 다른 동맹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김진호 실장은 사사기 19장 당시가 에브라임이 여전히 수위권을 쥐고 있지만 점점 타 부족에게 위협받는 시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브라임이 경찰 행세를 하는 데 불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부족 동맹은 모압 같은 타 민족과 전쟁을 위해 이스라엘 족속을 한데 소집하고는 했는데, 가끔 비(非)에브라임 출신 사사 기드온이나 입다 같은 전쟁 영웅이 등장했다. 그럴 때마다 에브라임과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사기 19장 시대적 배경은, 베냐민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에 대항할 신흥 세력으로 떠오르던 시점이었다. 사사 시대를 끝낸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출신이라는 점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에브라임에 살던 레위인이 베냐민 땅에 들어왔을 때, 베냐민인들은 레위인을 가만두지 않았다. 에브라임 사람이 못마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김진호 실장은 사사기에서 베냐민 사람들이 요구한 '상관'은 그 목적이 성관계가 아니라, 베냐민 사람들이 당대 경찰 부족이었던 에브라임 지파의 일원을 모욕하려 했다는 데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레위인이 '이성'인 첩을 대신 내어 줬는데도 그들이 순순히 물러갔다는 것이다. 이는 동성이나 이성을 떠나, '레위인' 자체를 모욕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레위인의 첩 또한 레위인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김진호 실장은 이 사건으로 에브라임이 베냐민을 칠 수 있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봤다. 사사기 20장 10절은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에브라임은 베냐민이 다른 부족을 이끌 만한 도덕성이 없음을 보여 줘야 했을 것이다. 베냐민도 불리한 싸움임을 알면서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평소 고까워했던 에브라임에 맞서는 길을 택했다.
이 텍스트가 쓰인 의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진호 실장은 왕정 시대에 쓰인 사사기는 아마 왕이 없을 때 발발하는 혼란과 그 폐해를 알릴 목적, 즉 군주제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봤다. 사사기 유명한 마지막 구절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도 이런 맥락이다. 마치 "봐, 왕이 없으면 저렇게 내분이 일어나고 치고받고 싸우게 되는 거야. 그러니 강력한 왕이 중앙에서 백성들을 통제해야만 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다.
김진호 실장은 사사기 텍스트를 '부족 동맹'의 갈등과 긴장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김진호 실장은 사사기 텍스트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대상이 '레위인의 첩'이라고 했다. 그는 "이 텍스트는 부족 동맹을 지탱하는 '숭고한' 이데올로기, 평등과 정의의 가치를 부르짖는 강렬한 소리들로 뒤덮여 있는데, 그 소리가 한 비극적 여인의 비명을 먹어 버렸다"고 했다.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첩에 대한 이야기는 묻히고, 이데올로기의 주체들이 강간당하고 난도질되어 죽임당한 그 여인의 몸을 도구화해 공존의 질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첩은 자기 살겠다는 남편에 의해 밖에 내던져졌고 능욕당했다. 밤새 욕보인 첩은 가까스로 숙소에 되돌아왔으나 결국 죽었다. 이런 상황을 다 아는 남편은 태연하게 "일어나 집에 가자"고 말한다. 이후 텍스트에서도 여성은 계속 피해자로 묘사된다. 남편은 첩 시체를 토막 내 다른 부족들에 보내 전쟁을 촉구하고, 이후 발발한 전쟁에서 베냐민 사람들이 멸족할 위기에 놓이자, 다른 부족의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온다. 에브라임을 포함한 이스라엘 부족 동맹들은 여성의 존재 가치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김진호 실장은 성서를 읽을 때 희생당한 자의 소리를 복원해야 하고, 말하지 않은 자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사실 이 텍스트에서 수치스러운 것은, 사회에서 여인을 이용하는 가학적인 역사"라고 말했다.
다음 시간에는 로마서 1장 26장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구절이 동성애 반대를 뜻하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7월 2일 오후 2시 충정로 카페 카멜로에서 열린다. 강의 전체 내용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