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교회 안에 있는 더러운 귀신의 정체 / 성경적인 부활 2013-05-17 08:02:39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거룩한 교회 안에 있는 더러운 귀신의 정체
치유, 그 삶의 온전한 변화는 어디서 오나?
김명섭kimsubway@hanmail.net
35절~36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누가복음4장 31절~41절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
33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성경을 주의깊게 읽으면 이전에는 미쳐 깨닫지 못하던 중요한 대목을 발견하곤 한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는 장소가 다름아닌 ‘회당 안’이라는 사실이다. 회당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공간이다. 유대인들의 예배당이다.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교회’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거룩한 교회 안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마치 냉장고 안에서도 음식이 부패하듯이 교회에 다니면서 심지어 거룩한 직분을 가진, 겉으로 봐선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내면에는 심각한 영적인 문제 안고 살아 갈 수 있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거나 교회에 다니면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거나 의롭게 된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교회는 완전한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다. 건강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치유 받아야 할 사람들의 공동체란 뜻이다.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핵심은 교회 안에서 거룩한 직임과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명예욕과 권력욕, 사리사욕과 탐심 같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이 전하는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정신분열과 동일한 증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귀신들림은 현대의학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정신분열’만을 말하지 않는다. 귀신들림이란 ‘정신장애(disorder)’를 포함한다. 정신장애란, 건강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일명 마음의 감기라고 하는 우울증을 비롯해서 망상장애와 공황장애, 불안장애와 인격장애 등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를 총망라한다. 물론 악령에게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귀신들림’이나 ‘정신분열’과 ‘정신장애’를 동일하게 볼 순 없다. 또한 그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 원인이 유전적인 요인 외에도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경쟁과 지나친 상처, 지나친 스트레스와 지나친 탐욕으로 부터 비롯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성경이 말하는 귀신의 정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탐욕으로 인해 생겨난 건강하지 못한 마음의 질병’을 통칭한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귀신들림’이란, 좁은 의미에서 악령의 지배나 정신분열을 겪는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건강하지 못한 마음 곧 정신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현대인들은 모양은 다르지만 크고 작은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경우 마음의 병을 가진채 살고 있다는 것을 자신과 타인 모두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병으로부터 예외 일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도 탐욕과 이기심,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해서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는 이들 가운데도 지나친 탐욕에 이끌려 살다가 인생을 망치는 사건을 종종 목도하게 된다. 교회 안에서 교회 일을 하면서 탐욕스런 악령에 이끌려 자기과시와 열등감, 이기심과 정욕에 이끌려 극심한 분란과 소동을 일으키곤 한다.
영성의 지표를 통해 살펴 본 귀신의 개념
성경이 증거하는 귀신의 정체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누가복음은 귀신을 다양한 언어로 묘사한다. 귀신을 가리키는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면, 귀신(악령과 귀신들림)을 ‘포네라(πονηρ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더러운 귀신(정신분열, 정신장애)을 ‘아카다르톤 프뉴마(ακαθαρτον πνευμα)’로 기록한다.
또한,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마귀를 ‘디아볼로스(diaboblos)’와 ‘다이몬”(daimon)’ 곧 훼방자와 대적자로 표현하며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성령에 대하여 자주 언급한다. 누가복음이 증거하는 성령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든 아래 필자의 영성지표에 따르면, ‘악령(the Devil spirit)’은 탐욕보다 더 낮은 단계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악령은 최고의 영성을 나타내는 성령(The Holy Spirit)에 정반대 되는 개념이다.
구 분
세 분
마음의 가치(동기와 목적)
삶의 결과(열매)
영(얼)
Spirit
1. 성 령
(The Holy Spirit)
희생, 헌신, 섬김, 나눔, 용서
충성, 온유, 절제, 기쁨, 평화
하나님 나라, 거룩, 안식, 일치
2. 정 신
(Spirit)
보편가치, 자유, 평등, 인권, 진선미 봉사, 환경, 정직, 질서, 신용
보편가치의 실현, 공정사회, 복지국가
3. 마음과 생각
(Mind & Heart)
지성(知性),감성(感性),의지(意志)
진선미(眞善美), 희노애락(喜怒哀樂)
육
Flesh
4. 필요(Need)
의, 식, 주
일용할 양식
5. 탐욕(Desire)
명예욕, 권력욕, 물욕,
이기심, 정욕, 쾌락, 사리사욕
시기, 질투, 다툼, 분쟁
6. 악령(the Devil)
귀신들림, 우상숭배, 공중권세
타락, 죽음, 전쟁
귀신의 정체
34절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전까지는 잠잠하던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비로소 회당 안에 있던 귀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하는 귀신의 반응에 주목해야 한다. 놀랍게도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증거한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귀신의 말을 통해 ’귀신들림(마음의 질병)‘이 예수님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라는 말을 통해서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는 악한 권세를 멸하러 오셨다는 사실도 증거한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악령에게 포로된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다. 마음의 질병을 겪는 이들을 치유하는 일이다. 분노와 탐욕에 붙들린 사람들에게 평강과 기쁨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정신장애를 넘어 정신분열로, 정신분열을 넘어 귀신들림까지 이어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사명이 놀랍게도 귀신의 입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목적은 예수께서 행하신대로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는 치유의 사역을 감당해야 마땅하다. 치유는 단순히 병을 고치는 치료의 차원이 아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치유’란 마음의 변화를 통한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 위의 영성표에 언급한대로 성령의 역사는 희생,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다.
이와 달리 악령의 역사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타락, 전쟁, 죽음이다. 참된 크리스천의 사명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탐욕에서 희생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저마다 발딛고 있는 가정과 삶의 현장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참된 교회의 역할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계의 전 영역에서 벌어지는 악령의 역사으로부터 성령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령충만은 커녕 탐욕충만을 넘어 악령충만에 가깝다. 명예욕과 권력욕, 물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지도자들은 인기와 명예 같은 세속적인 영광과 부의 축적과 사치와 같은 세속적인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성령과 귀신은 반비례 한다
35절~36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귀신의 정체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이 쫓겨 나갔다. 빛이 비취면 어둠은 소멸하듯이 성령과 악령은 반비례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라는 바울의 말대로 성령충만은 곧 ‘말씀충만’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중심에 와 닿을 때, 그 거룩한 가치에 붙들려 살아갈 때, 우리 안에 있던 숨겨진 죄악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에 속한 더러운 가치들은 소멸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더러운 탐욕과 이기심에 붙들려 살아가던 나 자신을 비로소 조명하게 된다.
어거스틴의 통찰대로 ‘어둠은 빛의 부재(不在)’일 뿐이다. 어둠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빛이 없는 상태’가 바로 어둠이다. 빛 가운데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불평’이란 ‘감사없음’이다. 감사하면 불평은 사라진다. ‘두려움’이란 ‘믿음없음’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을 이겨낸다. ‘다툼’은 ‘평화없음’이다. 평화가 회복되면 다툼은 사라진다. ‘절망’은 ‘희망없음’이다.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생명없음’이다. 이처럼, 빛 되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면 어두운 악령은 쫓겨 갈 수 밖에 없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프란시코(St. Francis of Assisi)의 기도는 이와 같은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대표적인 기도다. 어두운 영에 대적하기 위해 마땅히 간구해야 할 기도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영혼을 병들게 하던 악한 권세를 멸하고 건강한 영혼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요,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날 성령충만(희생, 헌신, 섬김, 나눔, 용서, 충성, 온유, 절제, 기쁨, 평화)해야 마땅한 교회는 탐욕충만(명예욕, 권력욕, 물욕, 이기심, 정욕, 쾌락, 사리사욕)을 넘어 악령충만(다툼, 분쟁, 타락, 죽음, 전쟁)하기만 현실이다.
중한 열병을 치유하다
38절~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마음의 질병 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도 건강한 삶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지만 시몬의 장모가 앓던 중한 열병을 고쳐 주셨다. 이밖에도 누가복음은 수많은 치유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치유는 현대의학이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 그 자체다. 신비란 설명가능한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언표불가능한 체험의 영역이다.
나는 매주일 예배가 마치면 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기도를 행한다. 행여 신통방통한 치유의 능력이 나에게 전혀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다만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그 놀라운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간절히 기도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 크고 작은 치유를 행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수없이 목도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러한 치유사건은 나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 내몸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나를 통해서 주님께서 행하신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일 뿐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아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 성경의 증거하는 모든 치유는 주님께 ‘의뢰할 때’ 비로소 치유를 베푸셨다.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누군가 병든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병낫기를 간청했다. 기도의 본질은 ‘간구’와 ‘의뢰’다. 의뢰는 아무나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오직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게만 의뢰한다. 따라서 치유는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자들에게만 친히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내시는 증거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의 고백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1-16)” 치유를 통해서 단순한 병고침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일임을 널리 드러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병을 고침 받은 여인이 일어나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 수종을 들었다. 병고침을 받은 여인이 건강해져서 다른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도왔다는 말이다. 치유도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치유 받은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 치유 받은 몸과 회복된 건강으로 자신과 같은 고통 받는 또 다른 이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일, 이것이야 말로 치유의 본질이다. 치유로 끝이 아니라 치유 받은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까지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의 치유는 이와 같은 ‘치유의 목적’과 ‘치유이후의 삶’에 대해 거듭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치유를 행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데 급급하고, 치유 받은 자들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귀신만도 못한 사람들
41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시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누가복음은 쫓겨 나가는 귀신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그 목적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작 회당 안에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그져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만 여겼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지만 아무런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 오늘 말씀의 진짜 주인공은 회당 안에 귀신들린 사람이나 치유받은 시몬의 장모가 아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끝내 알아채지 못했던 회당 안에 유대인들, 곧 귀신만도 못한 사람들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누구나 원하는 한결같은 바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원치 않은 질병을 만난다. 때론 시몬의 장모와 같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은 질병을 통해서 도리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치유 받아 그분이 누구신지, 이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나아가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해냈다. ‘귀신들린 것’이나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은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됐다.
모든 일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성이 있다. 좋은 일 속에도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 속도 좋은 일이 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누구인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해석을 해내는 사람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어딘가 솟아날 구멍을 찾는 사람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기에 어떤 문제와 인생의 장애물을 만나든지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도록 쓰임 받길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결국 주님께서 하시는 일(하나님의 영광 곧 치유와 회복, 성숙과 변화)이 나타나길 부단히 의뢰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변함없는 치유의 기적을 이루어 가심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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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부활
이인규dsmedic@naver.com
1.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뜻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신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며, 도덕적 각성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또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도 신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며, 또한 부활에 대해서 성경과 다른 자의적인 해석을 하기도 한다. 특히 많은 이단들이 부활을 실제적인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부활 혹은 상징적인 부활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첫째로 교주 자신을 예수의 영이 부활한 것으로 만들려는 조작에서 비롯되었으며, 둘째로는 육체를 죄악시하는 이원론적인 개념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신체적인 의미로서, 특히 신약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하는 토대 위에 기초된 것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은 분명하게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성경을 신앙의 기준으로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은 자의 부활이 분명히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15:12-14)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주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었다. 만일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부활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4:3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행4:1-3)
사도들은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활을 전하였던 것이다.
이만희의 시온성경신학원은 부활을 ‘지상에서 영생을 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지방교회(위트니스 리)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신인합일을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또 안식교는 예수를 천사장 미가엘이라고 주장하며, 모세가 예수보다 먼저 부활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천사와 더불어 모세를 매장하신 미가엘 즉 그리스도는 그가 잠깐동안 무덤에 있은 후에 하늘에서 내려오사 그를 부활시켜 하늘로 데려 가셨다.(엘렌화잇, 살아남는 이들, 157쪽)
- 모세는 죽었으나 미가엘이 내려와 그의 육체가 썩기 전에 그를 다시 살렸다. 사단이 그의 시체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미가엘이 모세를 부활하게 하여 하늘로 데려 가셨다.(엘렌화잇, 같은 책, 186쪽)
- 모세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할 자들을 대표>하였다.(엘렌화잇, 같은 책, 186쪽)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비성경적이다. 안식교는 소위 선지자라고 불리는 엘렌화잇의 주장을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부활의 첫열매가 아니라 모세가 첫 부활이었다면 다음 성경구절들은 모두 오류와 모순이 되어버리며, 우리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부활을 본받게 되어진다.
“그러나 각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15:2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는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함이니라 하니라.”(행26:23)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또 몰몬교는 죽은 사람이 부활하면 천사가 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비성경적인 내용이며, 몰몬교는 요셉스미스에게 천사로 나타난 모로나이라는 자가 주후 400년경에 죽었던 몰몬의 아들 모로나이로서 1800년대에 다시 부활하여 천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은 죽어서 천사가 된 사람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혹간 성경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예를 들면 나사로)을 예로 드는데, 그것은 부활이 아니다. 성경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지만,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부활이 아니다.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가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을 말하지 않으며, 부활이란 종말적으로 예수의 재림시에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미래의 사건으로 다시 죽지 않는 영생을 전제하여야 한다.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2:18)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부활은 엄연한 사실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잠자고 있는 모든 믿음의 선조들도 다 망한 것이 되어진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사람의 부활을 보증하는 첫열매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15:17-21)
예수님 당시에도 사두개인파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마22:23, 막12:18) 그들은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귀족들의 계층이었다. 특히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비판하였다(마3:7)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으며, 이들은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했다. 그 결과로, 부활도, 천사도, 영의 존재도 인정치 않았다(막 12:18, 눅 20:27, 행 23:8).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때로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요청하고(마 16:1-4), 부활에 대해 고의적인 난문(難問)으로 예수를 시험을 하려고 했다(마 22:23-33).
2. 불신자도 부활한다.
부활은 우리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들뿐 아니라 심지어 불신자들도 부활한다는 사실이다.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행24:15)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다만 성도들은 부활하여 영생을 살지만, 악인들도 부활하여 심판을 받으며 영원한 벌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
“저희는 영벌에(eternal punishment), 의인들은 영생(eternal life)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3. 구약에서의 부활
혹간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는 부활의 개념이 언급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부활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특히 다니엘 12장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들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12:2)
물론 신약성경은 부활에 관한 기록이 너무 많으므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며, 구약에서도 부활을 의미하는 구절은 생각보다 많이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37:13)
특히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의 장으로 유명하다. 또 신약에서는 마르다는 부활을 믿었으며, 아브라함도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믿음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4)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7-19)
성경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부활에 대해서 더 이상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4. 장래의 부활체의 형태
그렇다면 우리의 부활체는 어떤 모습일까? 물론 우리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범위 안에서 추론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여호와의 증인,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 그리고 자신들의 교주를 재림예수이며 교주가 성령으로 왔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집단들은 모두 부활이 ‘영적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양태론을 주장하는 이단들은 하나님이 직접 예수로 오시고, 예수가 직접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주장하므로, 성령이 곧 예수와 동일한 인격적 존재이어야만 한다. 즉 양태론자들은 예수가 오순절에 성령의 형태로 오셨다고 주장하여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종말적인 예수의 재림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
성경에 의하면 부활은 영적 부활이 아니라, 그 몸은 신령한 몸(고전15:44)일 것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우리는 우리의 부활체가 어떤 형태가 될지, 또 궁극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본질의 모습이 어떨지, 영광의 몸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임의로 상상하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성경에서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전15:49)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빌립보서3:21에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고 기록되어있으므로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부활체가 우리의 부활체가 되는 것이다.
혹간은 우리의 부활체가 영적이라는 증거로서 막 12:25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 천사와 같다고 한 것을 인용한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의 부활체가 천사와 같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할 때에는 천사와 같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우리의 궁극적인 부활체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성경으로 보면, 우리의 부활은 새로운 몸을 입거나, 변하는 신체적인 부활이라는 것은 확실하며 그 육체는 신령하고 영광된 육체이므로 썩지 않을 것이다.
영적 부활이 아니라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즉 예수님의 부활체는 영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신체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과 음식을 함께 먹으셨다는 것도 신체적인 몸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겨있는 공간에 나타나시기도 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시기도 하셨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은 그 부활체가 신체적이지만, 살아있을 당시의 육체가 아니라, 새로운 몸이라는 것은 암시하여 준다.
늙어서 질병과 고통을 가진 사람이 그 육체를 그대로 갖고 영생을 한다는 것은 고난이 될 것이며, 장애자나 불구자가 그 몸을 그대로 갖고 영생한다면 그것은 악몽이 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부활 시에 우리가 갖게 되는 영생의 몸은 하늘에 속한 몸이며, 강한 몸으로서,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이며,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부활의 첫열매이시며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나신 자이신 예수님의 부활체가 살과 뼈가 있는 신체적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부활체도 신체적이 될 것이며, 다음의 성경구절은 우리에게 영혼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몸이 부활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우리의 부활체가 어떤 모습일지를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은 우리의 부활시 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natural body)으로 심고 신령한 몸(spiritual body)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natural body)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spiritual body)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어쨋든 우리의 부활체는 썩지 않을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게 되며, 강한 것으로 살게 되며, 신령한 몸이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체는 영(spirit)이 아니고, 육의 몸(natural body)도 아니며, 신령한 몸(spiritual body)이라고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5. 신천지의 부활
신천지는 예수의 영이 이만희에게 임하고, 열두사도의 영이 지파장에게 임하며, 신천지 교인의 숫자가 144,000명이 되면 하늘의 144,000명의 영이 임하게 되므로 지상에 영원히 영생을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4)
신천지는 성경에 ‘살아서’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죽지 않고 살아서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 문장의 목베임을 당한 영혼도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일까? 신천지는 앞의 문장(목베임을 당한자)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이고,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은 죽지 않고 지상에서 영생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살펴보자.
[공동번역]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린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현대인의성경] 나는 또 여러 보좌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과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이 되어 다스릴 사람들입니다.
[NIV] I saw thrones on which were seated those who had been given authority to judge. And I saw the souls of those who had been beheaded because of their testimony for Jesus and because of the word of God. They had not worshiped the beast or his image and had not received his mark on their foreheads or their hands. They came to life and reigned with Christ a thousand years.
다른 번역 성경은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 앞문장과 뒷문장의 사람들을 동일하게 언급한다.
즉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을 모두 동일한 쉼표와 and 로 연결하여, 그들이 모두(they) 살아나서 일천년동안 통치한다고 말한다. 즉 뒷부분의 사람들만 죽지 않고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가 다시 살아나서(came to live) 일천년을 통치한다(reigned)는 내용이다.
과연 이만희교주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가? 신천지의 열두 지파장들도 일부는 교체되거나 죽었고, 신천지의 이십사 장로들도 일부는 교체되고 죽었다. 늙고 노화되어 가는 이만희도 곧 죽게 될 것이다. 훗날 신천지 교인들은 모두 무덤에 묻히게 되는 이만희를 보면서, 이만희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겠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부활은 성경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육체적인 부활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재림예수의 영이 이만희에게 들어와서 사는 것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144000명이 되면 지상에서 죽지 않고 산다는 주장도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그런 종류의 영적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마 9:18)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롬 14:9)
유대인들에게는 수혼법이라는 제도가 있다. 형수가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혼인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남편이 죽은 형수를 돌보게 하려는 제도였다. 일곱형제가 차례로 형수를 취하였다가 죽은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으로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게 하려는 고의성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신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마 22:31)
그 외에 성경에서 언급되는 모든 부활을 살펴보아도 부활은 지상에서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천지가 말하는 지상에서 죽지 않고 사는 영적 부활은 성경에 전혀 없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부활이나 상징적인 개념도 전혀 성경에 없는 내용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산 소망이 된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들도 살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여야 할 것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라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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