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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후의명곡서 정준&양동근 가스펠송/ 스타' 자두 목사 남편 월급 30만원
    2015-08-14 11:47:14   read : 470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불후의명곡서 가스펠을 볼줄이야…정준&양동근 할렐루야!

    가수 양동근과 배우 정준은 아주 잘 알려진 교회오빠입니다. 기독교 영화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할 정도로 이들의 신앙은 유명합니다. 두 교회오빠가 최근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멋진 가스펠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과감한 선곡도,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이 정말 멋있습니다. 네티즌 반응도 열광적이었습니다.


    양동근과 정준은 지난달 25일 KBS 불후의명곡에서 ‘오 해피 데이(Oh Happy day)’를 찬양했습니다. 흑인 배우 우피 골드버그가 주연한 영화 ‘시스터 액트 2’에 나온 아주 유명한 블랙 가스펠곡이죠.

    그러나 자세한 가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봤는데 구절구절이 참 은혜롭네요.


    두 교회오빠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날은 기쁜 날이라고 찬양합니다.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것을 온몸으로 기뻐하는 이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다”며 “그분은 우리가 승리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고 소리 높입니다. 그것도 지상파 무대에서 말이죠. 가스펠 그룹 헤리티지와 찬양단 헤리티지 메스콰이어가 나와서 힘을 보탰습니다.

    개사한 한국랩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이런 랩을 했습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다 떠나가!
    믿음 소망 사랑 그중의 제일은 사랑!”

    이 내용에 감동하는 네티즌들이 참 많네요.

    한 네티즌은 “믿음 소망 사랑, 그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할렐루야”라고 반응했고 또 다른 네티즌은 “블랙 가스펠 무대를 지상파에서 저 정도의 스케일로 소화하는 것 자체가 감동”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 진실한 마음이 통해서일까요. 이들은 이날 최고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저 귀만 즐겁게 하는 것을 넘어서 영혼까지 채워준 느낌이랄까요. 교회누나의 가슴을 여러 차례 찌릿찌릿하게 해준 무대를 선사한 교회오빠들의 찬양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 남깁니다. 앞으로도 지상파에서 이런 무대를 자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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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 유적지에서 외친 “민족을 하나로 이어주소서”

    원로목사 20여명, 광복 70주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예배



    ▲70∼90대 원로목사들이 11일 6·25전쟁 때 폭격으로 무너진 강원도 철원제일교회 터를 방문해 손을잡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철원=강민석 선임기자

    찜통더위가 맹위를 떨친 11일 낮. 비무장지대(DMZ) 인근에 위치한 강원도 철원제일교회 이상욱(55) 목사는 20여명의 원로목사들을 교회 앞으로 인도했다.

    새로 지어진 현대식 교회 옆에는 한민족 분단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옛 교회터가 남아 있었다. 마치 잘려진 한반도의 허리처럼 흉물스런 기둥과 벽면은 6·25전쟁 당시 폭격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목사는 폭격으로 무너지기 전인 1930년대 교회 모습을 공개했다. 그리고 폐허로 남은 교회터에 무릎을 꿇었다. 원로목사들도, 함께한 기자도 동참했다. 찬송가 한 장을 부르는 데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올해 93세인 고희집 목사 등 70∼90대 노(老) 목사들은 ‘광복(분단) 70주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예배’를 드렸다. 이 민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교회마다 거룩함을 회복하고 전도의 열정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기원했다.

    “주여” “복음통일”을 몇 번이고 외쳤다. 태극기를 흔들며 통성기도를 드렸다. 무너진 교회 벽에 손을 얹고 부르짖는 노 목사의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간구하는 원로목사들의 기도는 무더위까지 날려 버렸다.

    철원제일교회는 선교와 애국운동의 중심지였다. 1919년 당시 박연서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을 일으켰다.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해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했다. 이 단체는 단원 23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20년 해산되고 말았다.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이 교회 청년들은 활발하게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 병동으로 이용됐고 지하 기도처는 주민들이 학살된 곳으로 전해진다.

    옛 교회터 입구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곳은 철원제일교회의 유적지입니다. 교회예배당은 1936년에 기공해 37년에 완공한 석조건물입니다. 건평 194평으로 1층에 1개의 소예배실과 10개의 분반공부실이 있었으며 2층은 대예배실로 당시로는 아주 큰 예배당이었습니다. (중략)

    지금은 한국전쟁으로 예배당의 모습은 사라지고 잔해만 남아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며, 신앙의 순결을 지키려 순교한 성도들의 뜨거운 피가 오늘 우리에게 교훈하는 터전으로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신앙의 유적지이자 철원군에서 지정한 문화재입니다.”

    한은수(예수교대한감리회 웨슬레총회) 감독은 설교에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일제 통치와 6·25전쟁을 겪은 고난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전 총회장 최병두(79) 목사는 우리나라 위정자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최 목사는 “위정자들은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말고 겸손하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나랏일을 해 달라”고 주문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전 총회장 박정근(82) 목사는 “성장이 둔화된 한국교회가 이 순교의 피로 인해 크게 부흥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실히 믿는다”고 기도했다.

    전국기독교총연합회 사무총장 이상형(76) 목사는 “한 핏줄 한 동족끼리 화목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 목사는 “잘라지고 동강난 휴전선을 이어 달라”며 “아버지여,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입니다. 평화통일을 원하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옵소서”라고 간구했다.

    이날 행사를 준비한 한국기독교원로목회자후원회장 이주태 장로는 “오늘 예배의 의미는 남북 분단의 아픔을 이해하는 데 있다”며 “한국교회의 순교신앙이 예전 같지 않지만, 그럴수록 선배목사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행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철원제일교회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 제23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무너진 교회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이유는 이곳이 3·1운동의 역사성을 지니고 6·25전쟁 당시 기독 청년들의 반공투쟁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폐허로 남은 교회터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런 무언의 감동과 의미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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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고비사막, 초원 체험관광 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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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석·정용섭·박은조·최철호 목사의 '원고 작성부터 설교까지

    멘토와 함께하는 설교 학교 3학기…△글쓰기 △원고 작성 △설교 전달 △말씀과 공동체
    김재광

    목회멘토링사역원이 주최하는 설교 학교 3학기 과정이 오는 9월 8일 개강합니다. 한 학기 동안 '원고 작성부터 설교까지'를 주제로 공부합니다. 세부 주제는 △글쓰기 △원고 작성 △설교 전달 △말씀과 공동체입니다. 강사는 각각 김기석(청파교회)·정용섭(대구 샘터교회)·박은조(은혜샘물교회)·최철호(아름다운마을공동체) 목사입니다.



    ▲ 멘토와 함께하는 설교 학교 3학기가 오는 9월 10일 개강합니다. 김기석(청파교회)·정용섭(대구 샘터교회)·박은조(은혜샘물교회)·최철호(아름다운마을공동체) 목사가 각각 △글쓰기 △원고 작성 △설교 전달 △말씀과 공동체를 주제로 강의합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자료 사진)

    김기석 목사가 1강 글쓰기 강의를 맡아 진행합니다. 일시는 9월 8일(화) 오후 3시부터 5시까지이고, 장소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 청파교회입니다. 아래는 김기석 목사가 쓴 강의 소개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수강을 희망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말과 글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열어젖힐 힘이 있어야 한다. 글이 자폐적 감상 속에 머물지 않으려면 보편성을 지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 혹은 세계에 대해 예민해져야 한다.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서 끝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글 쓰는 것도 배울 수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언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구조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두 번째 강의는 9월 14일(월) 서울 용산구 청파동 효창교회(김종원 목사)에서 열립니다. 시간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입니다. 정용섭 목사가 '원고 작성,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강의합니다. 아래는 정용섭 목사가 쓴 강의 소개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원고 설교를 지지한다. 평생 매주일 200자 원고지 35매 분량의 설교 원고를 작성했다. 개중에는 요약문 설교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에 장단점이 있다. 소위 설교 베테랑이 되기 전까지는 완전한 원고 설교를 하는 게 좋다. 원고 작성을 통해서 '언어가 말을 거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 성서의 고유한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수영 선수가 꾸준한 연습을 통해서 일류 수영 선수가 되는 것과 같다."

    3강은 '설교 전달,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 길'이라는 주제로 박은조 목사와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10월 1일(목) 12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은혜샘물교회에서 모입니다. 이날은 점심 식사가 제공됩니다. 멘토와 점심식사를 함께하고 강의와 질의응답 시간을 바로 이어 갑니다. 박은조 목사의 말입니다.

    "내 생각은, 그날 아무 전제 없이 만나서 설교에 대한 얘기를 함께 나눴으면 합니다. 물론 초점은 '설교 전달, 청중과 호흡하는 길'에 맞추어야겠지요. 참석자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10월 12일(월) 아름다운마을공동체 최철호 목사와 함께 '말씀과 공동체,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주제로 공부합니다. 시간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이고, 장소는 효창교회입니다. 아래는 최철호 목사의 강의 소개 글입니다.

    "세상 정사와 권세, 시대 우상이 강제하는 삶 속에서, 단지 교양 있는 삶을 위한 설교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시대 우상이 가장 집요하고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곳은 결국 먹고 자고 입고 즐기는 생활양식, 결혼·임신·출산·육아·교육·소비 등 일상생활 현장입니다. 이 지점에서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좋은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시대 우상을 재생산하는 삶에 복무하게 됩니다.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삶을 위해 설교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으며, 어떤 구조적 한계 속에 놓여 있는지, 말씀과 공동체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현실화하는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설교 학교 3학기 과정에 참여하길 원하는 분들은 아래 안내 사항을 참고하시고 신청서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개별 강의에 대한 자세한 안내 사항은 담당자가 신청하신 분들께 별도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 설교 학교 3학기 안내 -

    1. 일정 및 장소

    1강 9월 8일(화) 오후 3시~5시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목회자도 글쓰기를 배워야 한다'
    2강 9월 14일(월) 오후 3시~5시 정용섭 목사(대구 샘터교회 - 강의 장소 효창교회) '원고 작성 어떻게 할 것인가'
    3강 10월 1일(목) 오후 12시~3시 박은조 목사(은혜샘물교회) '설교 전달,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 길'
    4강 10월 12일(월) 오후 3시~5시 최철호 목사(아름다운마을공동체 - 강의 장소 효창교회) '말씀과 공동체,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
    2. 참가비: 강좌당 2만 원, 한 학기 전체 등록 5만 원
    3. 입금 계좌: 국민은행 406237-01-005927 (예금주: 목회멘토링사역원)
    4. 참가 문의: 070-8766-2312, pastormentoring@gmail.com
    5. 참가 신청서 작성 페이지 바로 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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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쉐프 출신 목사가 '푸드 트럭' 모는 까닭

    미국 텍사스 주 루츠 목사, 찾아가는 교회 표방하며 '길거리 음식 사역'
    이은혜 기자

    바야흐로 쉐프 전성시대다. 요즘 TV를 틀면 어디서나 앞치마를 두른 쉐프를 볼 수 있다. 쉐프들은 유명인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으로 짧은 시간 안에 먹기 좋은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친숙한 말투와 쉬운 조리법으로 인기몰이를 하기도 한다.

    미국에는 잘 나가던 쉐프직을 마다하고 길거리를 떠도는 목사가 있다. 앨런 루츠(Allen Lutes)는 알링턴하이츠연합감리교회(Arlington Heights United Methodist Church·알링턴교회) 목사다. 목사가 되기 전, 그는 요리 학교를 졸업하고 알링턴 시에서 6년 동안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쉐프다.



    ▲ 알링턴하이츠연합감리교회 소속인 파이브앤투는 오병이어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한다.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한다. (파이브앤투 페이스북 갈무리)

    그가 몰고 다니는 '파이브앤투 푸드 트럭(Five and Two Food Truck·파이브앤투)'은 미국 텍사스(Texas) 주 알링턴(Arlington) 시에서 만날 수 있는 푸드 트럭이다. 파이브앤투는 겉으로 보기에 일반 푸드 트럭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파이브앤투 트럭 옆면에는 '길거리 음식 사역(street food ministry)'이라는 글귀가 있다. 트럭 이름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예수님이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꿈꾸고 있다.

    파이브앤투는 지난 6월부터 노숙인이나 취약 계층에게 따뜻한 식사를 나눠 주고 있다. 벌써 2,500인분이나 나갔다. 한 달에 두 번, 가정 폭력을 피해 도망 나온 엄마와 자녀들이 머무는 쉼터에 찾아가기도 한다. 인스턴트 음식이 많은 쉼터 식사와 달리, 파이브앤투 음식은 따뜻하고 영양가 있는 한 끼 식사로 엄마들이 특히 좋아한다.

    루츠 목사와 봉사자들은 음식을 나눠 주고 바로 돌아가지 않는다. 필요한 사람 모두가 음식을 받으면, 만든 음식을 들고 그 사람들 곁으로 가서 함께 먹는다. 루츠 목사는 함께 앉아서 밥을 먹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파이브앤투가 특별한 점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먼저 건강하고 맛있는 한 끼 식사를 대접하러 가는 거예요. 음식을 받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으면서 트럭 이름인 '파이브앤투'의 의미를 궁금해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기독교에 관한 대화가 시작되길 바라는 것이죠.

    한 번 대화가 시작되면 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음식을 나누는 건 타인과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행위거든요.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는 동안 그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듣죠. 교회를 대신해서 와 있는 셈이에요. 우리가 직접 교회가 되는 것이죠."



    ▲앨런 루츠(Allen Lutes) 목사는 쉐프 출신이다. 6년 동안 운영하던 레스토랑을 접고 목사가 되어 푸드 트럭을 운전한다. (파이브앤투 페이스북 갈무리)

    루츠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부터, 평소 교회에 다니면서 필요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일을 꿈꿔 왔다. 그가 음식 나눔 사역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오병이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부터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6)"는 성경 구절이 꼭 자기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렸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현실이 계속 눈에 밟히던 차였다.

    "배고픔은 우리 사회 즉 내가 속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우리 중 가장 작은 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파이브앤투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효과적이고 독특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음식을 대접받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거든요."

    루츠 목사가 푸드 트럭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알링턴교회 교인들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이다. 교회는 사역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두 차례 자선 골프 대회를 열고 교인들에게 푸드 트럭의 취지를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총 5만 4,000달러(약 6,340만 원)를 모금했다. 그중 3만 5,000달러(약 4,100만 원)로 1996년식 자동차를 구입하고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푸드 트럭으로 개조했다.

    트럭이 준비됐다고 해서 루츠 목사 혼자 하루에 500인분의 음식을 준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알링턴교회에서만 64명이 음식 만드는 일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조리 자격증을 소지한 루츠 목사가 그들을 훈련시켰다. 봉사자들은 교회에 모여 트럭에서 나눠 줄 음식 조리법을 배웠다.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눠 주는 자원봉사자들도 이 사역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알링턴교회 교인 제인(Jane)은 50년 가까이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파이브앤투의 사역을 도우면서 그 어느 때보다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음식을 만들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일을 하면서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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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스타' 자두 "목사 남편 월급 30만원,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사연 들어보니…

    한국아이닷컴 이슈팀 reporter@hankooki.com



    '라디오스타' 자두 "목사 남편 월급 30만원,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사연 들어보니…

    가수 자두가 목사 사모님으로 지내는 근황을 공개했다.

    지난 5일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는 자두와 이지현, 황혜영, 슈가 출연한 '주부 요정 특집'으로 꾸며졌다.

    이날 방송에서 자두는 재미교포 목사 남편과의 알콩달콩한 결혼생활을 자랑했다.

    MC 김구라는 "자두가 예전에 신지 급 주당이었다"고 폭로하자 자두는 "지금은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에 또 김구라는 "사실 목사는 박봉이다. 믿음으로 극복 중인가?"고 묻자 자두는 "처음 연애했을 때 한달 수입이 30만원이었다. 그 당시 나 역시 빚도 있고 소송도 있어서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자두가 "그래서 결혼을 못 할 줄 알았는데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생기면 베풀면서 살고 있다.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다"고 하자 MC 들이 "은혜받았다"고 농담을 해 유쾌한 웃음을 자아냈다.

    한편 이날 방송에서 자두는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자두는 "남편이 한국말을 못 하는 게 너무 귀엽다. 싸움도 사전을 찾아보면서 한다. 그래서 큰 싸움이 안 난다"고 말해 이목을 끌었다.

    자두 “가진것 없는 재미교포 목사와 결혼, 부모님 반대 심했다”




    가수 자두가 결혼 후 처음으로 ‘자기야-백년손님’에 출연, 녹슬지 않은 입담을 뽐낸다.

    자두는 8월6일 방송되는 SBS ‘자기야-백년손님(이하 ‘백년손님’)’ 289회에 등장해 3년차 아내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2013년 재미교포 출신 목사인 훈남 남편과 결혼한 자두는 ‘백년손님’을 통해 알콩달콩한 결혼 생활들을 공개한다.

    무엇보다 자두는 “재미교포 출신 목사 남편에 대해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는 말로 결혼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을 고백, 현장을 달궜다.

    MC 김원희가 “자두씨 남편분이 너무 훈남이라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남편에 대해 묻자 자두가 “남들이 교회 오빠 만날 때 저는 교회 목사 만났다”고 재치 있게 대답, 웃음을 안겼던 터.

    이어 자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집안이라 처음에 목사와 결혼하겠다니까 가족들이 반겼다”고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자두가 “그런데 남편이 엄마와 첫 대면에서 황당한 고백을 하면서 결혼 반대 문제가 불거졌다”고 전해 패널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남편에게 자두의 엄마가 “어디서 살고 있냐”고 묻자, 남편이 “집 없어. 집 없어. 친구 방”이라고 대답해 엄마를 경악하게 만들었다는 것.

    또 자두의 남편은 “어떻게 이동하냐”는 엄마의 질문에 “차 없어”라고 답하는가 하면, “계획이 있어야 하지 않냐”는 물음에는 “계획 없어. 계획 없어. 온리 하나님 뜻”이라고 답해 엄마를 멘붕에 빠뜨렸다는 해석이다. 이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 어떻게 결혼을 하냐며 초반과는 달리, 가족들의 반대가 생겨났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자두는 “그런데 결국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엄마가 ‘사위는 진정한 목회자다. 물 흐르는 듯 여정대로 가는 게 맞다’고 결혼을 허락해주셨다”며 “지금은 사위를 너무 사랑해주는 장모다”라고 전해 스튜디오를 훈훈하게 물들였다.

    제작진 측은 “자두가 결혼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SBS ‘백년손님’을 찾아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결혼 생활에 대해 모조리 쏟아냈다”며 “가수 때와는 달리 ‘목사님 사모님’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돌아온 자두의 이야기들을 기대해 달라”고 전했다.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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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냐 예언이냐 - 예언이 사라진 교회

    속(續) 평신도를 깨운다 6 (예레미야 23:16-40)

    천정근
    1.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사계절이 순환한다든지, 모든 것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든지, 자연이 끊임없이 자기 균형을 맞추려 한다든지 하는 법칙들은 그 자체가 인간을 향한 창조주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알아듣느냐 마느냐 복종할 것이냐 반항할 것이냐는 인간의 몫이겠지만, 그 몫을 자연이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파헤쳐 놓은 강물이 스스로 원래 상태로 복귀하려는 것은 그 의지가 꺾을 수 없는 '절대언어'에 따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자연뿐 아니지요? 자세히 탐구해 보면 사회나 인간관계 같은 것들 역시 동일한 '절대적 원리'에 따르고 있습니다.

    '절대'란 거기로부터 모든 삶의 양태가 하나의 맥락과 궤로 연결되어 통일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배타적인 게 아닙니다. 통일, 곧 하나로의 화해이고 일치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인적 인격입니다. 그 메시지를 한 인간이 자신의 인격 안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됩니다. 말도 없고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지만, 그는 아는 겁니다.

    '이제 나는 알았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무엇을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고,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것을요. 그러니 그 방식을 따르고 그 인도에 부합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차분해져야 하고, 탐구심과 이해력과 집중력이 있어야 합니다. 파편화한 삶에 시달리면서는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주된 공부는 파편화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탐구이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라는 게 얼마나 파편적이고 파행적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두가 전체주의처럼 '아멘'을 외치는 공론화한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나에게 말씀하시는 내 인생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게 됩니다. 이게 선택받았다는 말의 의미일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에게 그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와 복종이 요구되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받아들임'과 '저항'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이 이해와 순종에 입각한 일관된 삶의 의지적 태도를 우리는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근본주의란 옷깃을 여미고 뭔지도 모르면서 거룩한 척 행동하거나, 제한적으로 종교적인 특별한 일에 헌신하라는 말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원리주의자들에게서 보이는 고립되고 배타적인 율법적 관념론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존하는 나의 삶이 신(神)의 현존의 증거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네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있느냐? 살고 있느냐?' 주장이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교리가 아니라 영감, 곧 삶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무수히 느끼다시피 감동이 어찌 억지로 일어나나요? 억지로 감동한 척하면 그것만큼 추악한 일이 없을 겁니다. 그것은 자연에 따르는 게 아니니까요. 진짜 감동이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진실한 자각 가운데서 나오는 거지요. 진정한 감동에는 일관된 이성과 책임 같은 것이 따르지만 센티멘털은 '그때그때 달라요'가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상들처럼 나타나 보이면서 기교를 부리지 않으십니다. 가령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영이 영을 자각 못하고 혼이 혼을 자각 못하고 육이 육을 자각 못하는 것처럼, 나의 삶이 신의 존재의 증거가 되는 종교적 감각은 쉽게 망각되고 무시됩니다. 특별한 영적 경험도 별로 도움이 못 됩니다. 인간의 이성과 욕망도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지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 역시 집요하리만치 인간에게 무심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는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과묵하고 느리고 고요하지요? 축복일지라도 죄악일지라도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적어도 씨가 땅에 떨어져 싹트고 자라서 열매 맺는 시간만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효과가 나타날 때쯤 인간은 벌써 그 얘기를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서두르시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느림은 영원한 비협조 부조화입니다. 이게 안식일적인 노동입니다. (인간들은 안식일은 이해 못하고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를 가지고 싸우지요.) 세상은 언제나 이런 본래 자연에 따르는 근본주의적 헌신에 힘입어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님이 망각되고 무시되는 이유 역시 그 겸손하고 고요한 숨겨진 방식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언제나 간과되는 것이 '하나님'이고 '말씀'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이라고 발음할 때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거기 계셔야하고, '말씀'이라 말할 땐 거기 하나님으로부터 울리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 그냥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 버리면 거기엔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없이 다만 상징과 기표로서 의사 전달만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패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정작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우리는 성령(聖靈)을 상실하게 됩니다. 관용적 표현이란 빠른 소통에는 효과를 내지만 진정한 소통에는 걸림돌이 되는 경우들이 많지요. 서로가 말을 다 통했는데도 절대 통하지 않는 관계라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위험을 인식하면서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설교)을 헤아려 볼 때, 거기에는 두 가지의 기능적 측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목회적 측면이고 그 다음은 예언적 측면입니다. 목회적 측면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적용해서 교회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해 주는 일종의 종교적 서비스라고 할 수 있고, 예언적 측면은 이와는 달리 개개인의 이해타산을 초월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자체를 환기시키는 계몽적 사역입니다. 곧 실생활을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파괴하고 깨뜨려 제고(提高: 쳐들어 높임)하게 해 주는 기능입니다. 물론 목회에 일깨움과 가르침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주된 관심과 목표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목회적 사역자' 혹은 '예언적 사역자'로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사목(司牧)이라는 말도 쓰지만 예언과 목회는 목적이 사뭇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예언은 아나키즘(anarchism)적이고 목회는 전체주의적이지요? 우열을 나누기 전에 이 둘은 자주 서로 충돌합니다. 왜 충돌하는 것이며 이 충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화해시켜야 할까요? 기독교인인 우리가 경전으로 믿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두 차원의 서로 다른 성경이 우리의 선입견 안에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만 있고 예언이 사라지거나, 예언만 있고 목회가 사라지거나 할 테지만 주로 나타나는 병폐는 목회만 남은 예언의 실종입니다. 그 증거가 신앙의 이 두 측면, 곧 개개인의 목회적 차원과 예언적 차원이 충돌할 때 그 원인과 의미를 묻고 화해를 모색하기보다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해 버리는 경우들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목회적 측면 일변도로 말씀을 가공해 버리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전투에 나가기 전 '주역'(周易)에 의지해 점을 친 기록이 자주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쁜 점괘가 나오면 좋은 괘가 나올 때까지 다시 쳤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피치 못할 전투를 앞두고 가장 길한 징조를 의지하겠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매번 최후의 결전인 전장에서 오직 승리의 확신을 확보해야만 했던 지휘관의 실존적 고결함마저 느껴집니다. 그것은 결연한 이성이며 거룩한 종교성이겠지요? 운명에 대한 최후 복종이며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치열한 자세였을 겁니다.

    신혼시절 아내와 아침시간을 큐티(QT) 나눔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주말에는 종일 큐티만 한 적도 많았습니다. 한 줄의 말씀이 도대체 어디까지 '나'라는 개인의 내면에 잇닿아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좀 신비화, 신화화하는 경우들이 있는 겁니다. 즉 그날 분의 본문을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때 그야말로 점을 치는 것 같은 태도가 발생하는 겁니다. 아주 그것을 추구했던 '옥스퍼드운동'이라는 캠페인이 있기도 했었습니다만, 이건 숭고한 본래 목적과 달리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으로 유치한 신앙을 길들일 수도 있습니다. 즉 자기 마음에 들어온 구절,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 혹은 유리한 구절에만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나중엔 성경이 아니라 삶이 그런 식이 되겠죠? 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우연성'이지만 결국엔 주관적 필요에 의한 '필연성'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구절은 거부하거나 대충 넘겨 버리게 되는 거지요. 바로 이런 태도가 긍정주의와 성공주의, 번영신학의 문제가 됩니다. 어째서 이런 태도가 나타나는 걸까요?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주권적 의지에 대한 몰이해(불신앙)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자기 편의주의적인 몰입과 도취가 개입되는 거지요.

    둘째로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그에 따르는 직면(直面)을 기피하려는 심리적 자기방어가 숨겨진 이유가 됩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 같은 환상 속에 살고 싶은 거지요? 현실을 직시하고 직면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단순히 긍정이나 부정의 반응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다 직시하고 직면함으로써 그것(육)을 통찰하고 그 본질(영)을 뚫고 나가는 것이 진정한 긍정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에게 닥친 어떤 문제나 사건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보다 그에 대한 회피 반응으로서의 긍정적인 태도만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조금만 진실한 사람이라면 이 긍정이 부정의 다른 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회개도 이럴 때는 값어치가 없어집니다. 그건 그저 계속적인 왜곡과 속임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종교적 태도로 발전하게 되면 일종의 기만이 라이프 스타일을 이루게 됩니다. 나쁜 것은 보지 않고 좋은 것만 본다는 것은 일면 건강한 측면이 있지만 거기엔 진실에 대한 뒤틀린 기만이 항상 따라오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위선을 넘어 기만적이 되었다는 데 여러분은 동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강단이 남발하는 긍정의 메시지들은 부정적인 우리 사회와 우리가 놓인 현실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걸 믿음이라 하지만 실은 각자가 욥의 친구들처럼 자기들의 당황과 곤란을 감추느라 급급한 겁니다. 진실이야 어떻든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만 해석하는 겁니다. 회개와 개혁을 말할지라도 영감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으니 센티멘털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고,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령,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에서는 당회장 목사님의 오랜 파트너였던 재정장로가 비자금 문제로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리 의리부동한 세상이라지만 인간적으로 따지자면 목회를 지속할 낯이 없어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심지어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사망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분의 장례에서도 예배가 드려졌겠고 설교가 있었겠죠? 어떻게 했을까요? 그 모든 것을 우리는 거짓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쩔 수 없는 믿음의 행위라고 해야 할까요? 판단하려는 게 아니라 묻고 싶은 겁니다. 예언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요?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자살 사건들을 보면, 상당수가 당사자들에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의 장로며 안수집사였다는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를 수사가 붙습니다. 고인들을 비난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얼마나 마음의 궁지에 몰려 괴로웠으면 극단적인 자진을 결행했을까요? 동정이 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독교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한 희망이고 희망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긍정주의적인 번영신학은 잘 나갈 때는 자기 교리에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진짜 절망이라는 판단에 이르면 역설적으로 더 이상 진짜 희망이 없는 겁니다. 잘 나갈 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절망에 이르면 희망의 여지가 없는 이것이 그들의 진짜 신앙이었던 겁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죠. 천국에 못 간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자신이 어떤 내용을 가진 신앙인인지를 안다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로 목회적 야망과 목표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이유에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약성서와 신약 복음의 연속성과 차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다(고린도후서 3:15)'고 말했지만, 이 목회적 목적이야말로 '모세의 수건'이 아니라 '욕망의 수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투명하게 그저 읽기만 해도 저절로 알려질 메시지도 이상하게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난 2,000년간을 이 책을 읽고 해석해 왔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남아 있을까요? 그런데도 여전히 해석이 문제가 되고 설교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곧 그러한 수건 덮인 해석들이 끼치는 교회적 해악과 사회적 해악이 있습니다.

    바른 메시지와 그 영향력을 차단시킨다는 겁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하고 장사합니다만, 동시에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감추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일깨우는 예언적 메시지를 차단하려 합니다. 이게 아이러니이지요? 가장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파하는 기독교인들이 어느 면에 가면 가장 말이 통하지 않는 부정적이고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뻔뻔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됩니다. 천국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전파하는 그들이 세상을 조금만 낫게 바꾸자는 목소리에도 안면을 바꾸고 외면을 합니다. 문자와 교리를 강력히 주장하다가도 말문이 막히면 '무조건 믿어라, 불신자는 지옥행'이라는 무서운 무속적 신비주의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 신학적 불균형과 실천적 비일관성의 양면 자기모순을 지닌 게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보편적 자화상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의 그러한 개성적 성향들은 그대로 집단 전체의 성격이 되어 있습니다.

    가령 작금의 대형 교회들은 각기 나름대로 성격상 하나의 인격과도 같은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일이지만 그것은 담임목사의 인격과도 부합합니다. 곧 그와 그가 풍기고 선포하는 유무형의 메시지(영향력)가 그 교회인 겁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사랑의교회는 그대로 옥한흠 목사님이고 온누리교회는 그대로 하용조 목사님이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그대로 조용기 목사님인 겁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예언자들과 왕들이 구약성경의 서명(書名)을 장식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 외에도 구름같이 허다한 사례들이 많겠죠? 저는 그들의 차세대를 언급하고 싶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소견에 그들은 일세대가 떠나간 잔여의 의미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가봇(사무엘상 4:21)'입니다. 무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경험과 직관이 내리는 결론입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교회를 세습한다거나 물려받는 목회 방식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가령 애플을 누가 물려받든 그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에게 교회란 한 사람의 목회자가 사라지면 후임자가 즉각 초빙돼 이어지는 그런 게 아닙니다. 백년 이백년 전통의 프리미엄을 누려 가며 번영을 구가해야 하는 기관도 아닙니다. 목자가 사라지면 양들은 흩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또 다른 누군가를 광야에서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예비해야죠. 그게 계승이고 승계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어떻게 거대한 콤플렉스(Complex)에서 찾겠습니까? 정말 그런 스승이 나타난다면 저는 대형 교회가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인이 다 그에게로 모인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기꺼이 그에게로 갈 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세계의 기독교인이 다 거기 모인대도 그건 저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광야의 사람을 기다려야하는 거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사라지면 우리 교회는 자연 해산하고 교인들은 각자 자기의 갈 길을 찾아가야한다고 봅니다. 그런 얘길 할 규모도 안 되어 말이 서진 않지만, 누구에게 물려주고 싶은 맘도 없습니다. 교회가 무슨 국가기관인가요? 혹은 기업인가요? 이익집단인가요? 가령 동학(東學·천도교)이 국가를 상대로 농민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왕성했었지만 왜 지금은 자취도 없어졌을까요? 탄압과 박해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와 최시형(崔時亨, 1827~1898)과 전봉준(全琫準, 1854~1895)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록될 만한 예언자가 전무했던 몇 백 년의 기간도 있었습니다. 그때라고 목회자가 없었겠습니까, 사제가 없었겠습니까? 교황도 있었고 대주교도 주교도 보제도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세습이 교회의 당면 문제가 되는 교회를 저는 제 마음에 교회로 인정하질 않습니다. 제 말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습니다. 제 믿음과 양심이 그렇게 여긴다는 고백입니다.

    이상 일별해 본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전반적 실태입니다.

    1) 신앙의 목적에 대한 목회적 예언적 측면에 대한 몰이해.
    2) 기복주의적이고 성공주의적인 긍정 일변 신앙의 기만성.
    3) 1, 2항의 교회 체질이 공고화하고 사회화하는 과정의 영적 권능(영향력) 상실.

    모순되게도 긍정주의 신학의 원동력은 콤플렉스입니다. 곧 두려움과 열등감의 역동이 자아도취와 과장된 성역으로서의 대형 교회를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출발하는 지점으로부터 벌써 과녁을 벗어난 것이죠? 따라서 대형 교회의 성장은 한국교회와 사회에게 모순의 비대함일 뿐이지 축복의 선물일 수가 없는 겁니다. 거기에선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은 실종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이해를 가로막는 뻔뻔한 욕망의 예언이 '수제천'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2.

    선지자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경(요시야 13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유다 최후의 네 왕들의 시대를 살면서 약 41년간, 예루살렘 멸망 후에 이집트로 피체되기까지 예언자로 존재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자기 시대의 정치·종교 권력자들에게 저항했고 그로 인해 일생을 형극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성전의 수비대에게 매를 맞고 감금을 당했고, 매국노라 비난받았고, 온갖 음해를 받았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시위대 뜰에 위리안치당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입으로 자기나라의 멸망을 선포했고, 침입자들의 학살과 난민과 포로들의 참상을 지켜보았고, 마지막엔 반역자라는 이름으로 죽임당했습니다.

    만군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를 헛된 희망으로 채워 주는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그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환상을 지껄이는 것이지, 야훼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야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쉴 새 없이 '너는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완고하게 자신의 고집을 세우는 자에게 '너에게는 아무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 가운데 누가 야훼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으며, 야훼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은 적이 있느냐?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달려갔고, 내가 말해 준 적도 없는데 그들은 예언했다. 만일 그들이 나의 회의에 참석했다면, 그들은 나의 백성들에게 나의 말을 선포했을 것이요, 백성들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중략)

    나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들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하고 그들은 말한다. 예언자들은 언제까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꾸며 내는 거짓말을 할 셈이냐? 바로 그들의 조상이 바알로 말미암아 나의 이름을 잊은 것처럼, 그들은 꿈 이야기로 나의 백성들로 하여금 내 이름을 잊어버리게 할 생각인 것 같다. 꿈을 꾼 예언자는 그 꿈이나 지껄여라. 그러나 나의 말을 들은 예언자는 그 말을 충실하게 전하여라.

    (중략)

    나는 나의 말을 훔치는 예언자들을 칠 것이다. 혀를 놀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고 말하는 예언자들을 칠 것이다. 내가 보내지도 않았고 그런 일을 맡기지도 않았는데, 거짓말과 분별 없는 짓으로 나의 백성을 빗나가게 한 예언자들을 나는 칠 것이다. 그들은 이 백성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다.

    '이 백성 가운데 어느 누가, 혹은 어느 예언자가, 혹은 어느 사제가 너에게 '무엇이 야훼의 짐인가?' 하고 묻거든, 너는 '네가 바로 야훼의 짐이다. 내가 너를 던져 버리리라' 하고 야훼께서 말씀하신다고 대답해 주어라."

    예레미야의 신학은 당시 유다가 처한 국제적이고 지정학적인 상황들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제 예언자 학교나 제사장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된 입장에서 체험적으로 성숙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여기서 당대의 예언자들, 사제들, 목사들, 교회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적이라 규정합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감언이설이고 자기 욕망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고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에 부합한 것일 뿐이라 질타합니다. 바로 그 이유로 백성은 그를 따르지 않았던 겁니다. 오늘날 자동차도 마다하고 지하철로 몰려가 대형 교회의 좌석을 메우는 평신도들은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요? 그들의 설교, 그들의 찬양, 그들의 기도, 그들의 헌금은 다 어디에 바쳐지는 걸까요? 당대의 예루살렘, 예수님 시대의 성전에는 종교적 선행과 프로그램과 사업들이 없었던가요? 예언이 사라지면 목회는 무의미해집니다. 하나님은 바로 너희가 나의 대적이고 짐이고 원수라고 하는데, 그들이 '예레미야'에 이런 글이 있는지조차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주 인간적인 고뇌와 고립감을 호소하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모세로부터 이어져 온 예언자들의 반열에 서 있다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구태의연한 무수한 사목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주류, 비타협, 그로 인한 고립과 고난, 거기서 더욱 강화한 간 그의 메시지들은 진정한 예언자로서 예레미야를 증거해 주는 기록들인 겁니다. 바로 이것들이 당대에 그가 거부당하고 그의 메시지가 배척받았던 증거들인 겁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 시대에 지시해 주는 복음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6:22-4)

    예레미야 예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심판의 기정사실화에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그 첫 설교부터 멸망을 선포합니다. '너희가 회개하면 멸망치 않을 것이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게 아닙니다. 이미 틀렸다는 겁니다. 긍정주의적으로 좋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현실의 엄중함을 직시하라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적 종말론입니다. 그 절망 너머에 죽음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신 것이지, 하나님은 상상하는 대로 자가 조정이 가능한 다변신 로봇이 아니신 겁니다. 따라서 세상이 자신만만하고 여유 만만할 때가 가장 위태로운 때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고 여유가 있으니 하면서 뒤로 미룰 때가 가장 어리석은 때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1:14)

    우리는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일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절대적 죽음만이 새로운 생명의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시대에 만연한 긍정주의적 메시지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침묵하실 때조차 끝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을 찾으려 성경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말처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마'는 겁니다. 끝내 모르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진리의 빛을 받아 알게 된 사람은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의 진실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만에 게으르게 타협하고 굴복하는 것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기도를 드린답시고 눈을 감은 채 잠꼬대 같은 꿈과 비전을 보지 말고 눈을 떠 우리가 놓인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특히 대형 교회라 불리는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언어'를 제고해 보아야 할 겁니다. 욕을 먹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불명예를 감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세례요한처럼 사도 바울처럼, 광야에 나와 보지 않고는 예루살렘이라는 콤플렉스의 콤플렉스가 보이질 않는 법입니다. 어찌 광야에서 울부짖는 사자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애완용 스피치같이 길들이겠습니까. 이 설교를 받을 만한 분들은 받으시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예레미야'에 이런 말씀이 있는 줄은 알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천정근 / 열린 교제와 깊이 있는 말씀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주력하는 자유인교회 목사. 산문집 <연민이 없다는 것>(케포이북스, 2013) 저술.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졸업했으며, 한독선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논문으로 <1880~90년대 똘스또이 중편에 나타난 종교 윤리적 관점> 등이 있다


    ========================================
    김병삼 목사 설교/ 나를 본받으십시오!
    본문: 고린도전서 4:9~21

    신앙적 해석이…
    오늘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이 되지요. 바울과 아볼로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음에도 자기중심적인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격이란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드러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인격이 어떠한지가 잘 드러나는 말씀이지요. 지금 사도 바울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습니까? 바로 보여주는 것이 13절의 말씀입니다.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라는 두 단어는 당시의 배경에서 볼 때, ‘자연적인 재앙이나 질병들을 추방할 목적으로 신에게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뽑힌 미천한 인간이나 죄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이해가 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잘난 척하는 것을 보니 참 지혜로운 것 같은데, ‘우리’는 미련해 보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보니 참 강한 것 같은데, ‘우리’는 연약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도인 ‘우리’를 미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지요. 바로 이 시점에서 억울한 가운데서 인격이 드러납니다. 14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고 12절과 13절에서도

    “12 …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를 압니다. 억울한 소리를 들으나 변명할 수 없을 때, 누군가와 싸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꼬여갈 때.
    목사로서 저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많이 이해가 됩니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변명하지 않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참고 권면합니다. 아니,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처럼 권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신앙적 행동을 종종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에서 참았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의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때가 있습니다. 참 억울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떠나 피난 가야 했을 때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배신으로 도망을 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피난길에서 자신의 신하였던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피난 가는 왕이지만, 아직 왕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놓고 저주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부하들이 분을 참지 못하여 칼을 빼 들고 시므이의 목을 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 하 16장 10절에서 다윗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만류합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고 하며 그의 저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그대로 갑니다.

    억울했을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그 모욕을 참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회복시키고 복을 주셨던 것을 압니다. 그의 마음 자세와 신앙을 보시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억울한 이 순간 사도 바울 역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사도 바울이 신앙적인 해석을 한 것입니다. 믿음의 언어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비천한 사람 취급을 받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구나!’
    삼선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서형선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라는 시입니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행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계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비록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당신이 나에게 바라시던 그 모든 것을 주셨사오니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40대의 채찍에서 한 대 감한 39대의 채찍을 유대인에게서 맞았고, 한 대만 맞고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로마의 태장을 세 번 맞았습니다. 어쩌면 좌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좌절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인생이 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자기 생각대로 사람도 환경도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나요? 이런 감사의 고백이 억지로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진정한 신앙적 고백인가요?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삶을 변명하기보다는,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어떤 비방을 받든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가 꺾이지 않으므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고백은 아닐까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런 신앙적 해석이 자신에게서 일어나자 원망과 욕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비방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했지만, 이들은 결코 찌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찌꺼기라고 인정하는 순간, 더는 찌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참 난해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억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억울함을 씻으시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비천한 취급 받는 것을 참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를 높이시는 하나님,
    바로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요즘 방송에 관계된 일로 방송국에 자주 가다 보니 여러 부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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