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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의 이야기성(Narrativity)이 회복되어야 한다1)
    2015-12-17 10:08:47   read : 462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설교자의 임무: 기억나게 하는 사람

    오늘날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가 있다면 어떻게 깊은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발굴하여 그것을 오늘의 청중들에게 듣게 하는 일이다. 설교자는 “간신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미온적인 기술자”나 안일한 전문가로 정착해서는 결코 이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정이 불타고 있어야 할 것이며, 지치고 피곤해진 영혼, 죄악의 조류에 떠밀리며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발굴한 말씀의 보화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설교의 형태 새롭게 하기와 연결된다.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기억나게 하는 일(reminding)이며, 성도들의 마음속에 영감을 불어넣는 일이며, 그들을 다시 새롭게 세우는 일이다. 사람은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분주함 가운데 놓이게 하면서 많은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잊어버림은 과거를 잊게 한다는 사실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현재를 바로 서지 못하게 하며 미래를 마비시키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그것을 결국 되풀이하게 된다는 격언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를 잊어버림으로 히로시마를 낳았고, 히로시마를 잊어버림으로 이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나, 현대인들은 너무 쉽게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간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좋은 기억은 오래 간직할 수 있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은 감추어서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가장 친밀한 선생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수님 역시 잊어지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remember me)고 명하셨다. 설교자의 사역은 기억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우웬은 사역자들을 가리켜 “기억나게 하는 살아있는 매체”(living reminder)들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쾌락을 탐닉하고 즐거움을 탐닉하다가 무미건조해지고, 혼탁해진 이 세대 속에, 그리고 그러한 심령들에게 설교자는 영감을 불어넣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영감을 불어넣는 일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땅의 것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영감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이나 잘못된 이상을 내려놓게 만들고 본질적인 이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행동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제시한 주장들을 확대 해석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들이 사로잡혀 살아갈 수 있는 우상이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즉 동굴, 시장, 극장, 종족의 우상이 그것인데, 사람들이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히면서 갖게되는 “오류”라고 그는 해석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않는 편견으로, 동굴에 묶여 있는 포로들과 같이 그들은 넓은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가 처한 환경과 여건이라는 동굴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행운의 여신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종족의 우상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에 발생하는 우상이다.

    극장의 우상은 기존의 권위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교황청이 그렇게 발표하였기 때문에 천동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나, 무대 위에서 휘황한 조명을 받는 배우의 연기를 마치 현실로 받아들이는 가상현실에의 오류를 가리킨다.

    이러한 편견과 우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사람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갖는 특성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잘못된 이상과 오류의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을 향해 진정한 이상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야 하며, 위대한 영감을 불어넣음으로서 본래의 이상을 회복하는 사역자들이다.

    이렇게 설교자는 잘못된 우상에 대항하면서 영감을 불어넣음으로서 인도하는 사역자들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진정한 영성이 회복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회복되는 리바이벌(revival)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는 본질적으로 리바이벌을 지향한다.

    기억나게 하는 사역의 도구: 이야기

    모세의 가슴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대한 영감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사막에서 부딪혀 오는 우상들에 젖어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깨울 수 있었다.

    떡 반죽 그릇과 고기가마로 상징되는 풍요로움이 있었던 애굽의 우상, 보이지 않는 신(神)과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줄 것 같았던 황금 송아지의 우상, 지친 사막의 생활에서 시원한 오아시스와 같이 생각되었던 성적 유희(遊戱)를 통한 쾌락의 우상,

    그리고 가나안 땅 가까이에 와서는 피부에 그을린 사막의 먼지를 뒤집어쓴 이스라엘의 여인들보다는 화려한 의상과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손짓하면서 유혹하는 도시 여인들에게 매력을 느끼며 그들이 영원한 즐거움을 줄 것처럼 착각했던 환락의 우상 등, 모세는 말씀을 통해 순간 순간 그것을 경계해야 했다.

    그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대한 이상을 계속해서 새롭게 보여주면서 영감을 깨우쳐야 했다.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러한 우상에 사로잡힐 수 있는 가능성을 예고하면서 그들의 본질적인 이상을 깨우치려고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가나안의 문턱에서 그의 마지막 설교들을 담고 있는 신명기서는 모세의 이러한 마음들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잊지 말라”는 명령(8-9장)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약속의 땅에 대한 위대한 영감들을 깨우치고 있다(11장).

    그리고 후대의 사역자들에게 아람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었으며,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며, 어떻게 여기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기억나게 하며,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을 부탁하고 있다(26장). 기억나게 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심령의 부흥을 일으키는 일을 위해서 모세가 사용하였던 것은 이야기였다.

    말씀의 사역자들의 사명은 “인간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연결하는 것이며 우리는 한 이야기를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나우웬은 주장한다. 랍비들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인도하였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랍비였던 예수님도 이야기를 통해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이야기는 기억하게 하고,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데에는 신앙교리에 대한 창백한 설명이나 제시보다는 보다 강력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의 많은 인물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모세와 다른 많은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느끼게 하고, 보게 하며, 결단하게 하는 하나의 장(場)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거닐면서 그들이 서야할 자신을 위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는 잘못된 우상들과 편견들에 대해서 대항하지만 억압하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영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술수는 쓰지 않는다. 이야기는 강요하지 않지만 이야기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고, 거기서 함께 만나게 하며, 대화를 나누게 한다.

    이야기는 진정한 이상으로 나아가도록 억압하며 끌고 가지는 않지만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조용히 인도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여, 그것을 보게 하고 듣게 하며, 경험하게 해주는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한 분의 생애를 기억하게 해주고, 거기에 동참하도록 도와주는 이야기는 숨겨진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소중한 자원이 된다.

    교리적인 설명으로 가득 찬 오늘의 설교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으며,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의 설교는 주로 논리와 명제, 교리적인 설명과 논증으로 가득 찬 교육적인 설교의 형태를 취해 왔다.

    이러한 설교 형태는 어제 오늘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수사학에 근거한 오래된 설교 방법으로 설교에 수사학의 도입은 어거스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인 설교학은 스콜라주의 영향과 함께 소위 “명료한 이해와 명료한 해석, 명료한 적용”을 중요시하는, 즉 본문이 주석적으로 이해되고, 신학적으로 해석되며, 그리고 적용되는 형태에 대해 깊이 관심을 기울여 왔다.

    19세기 이후에는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 비평학 등의 발전과 함께 성경의 신비적인 여러 내용들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갖게 되면서 주석은 주로 역사적인 재건(historical reconstruction)으로, 신학적인 해석은 설교의 주제와 관련된 명제들을 찾는 일에 주력되었으며, 적용은 종종 여러 종류로 분류되어지는 대지들(points)로 확장되었다.

    주로 설교는 연역적(deductive)이고, 명제적(propositional)이었으며, 성경이 가지는 이야기의 구조를 상실하게 되었다. 주로 개념들(ideas)을 전달하고, 대지를 만들어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설교는 교육적인 설교(didactic preaching), 혹은 가르침으로서의 설교 형태를 취한다.

    대지는 본문으로부터 추출되는데, 설교는 그 대지들은 논리적이고, 질서 있게 배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기본적인 목표는 관념의 전달이며, 설교의 목적은 수사학적인 기법을 통해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청중들은 단순히 수동적인 수신자일 뿐이며,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그리고 교회의 전통과 성령이라는 수원지로부터 청중들이라는 피동적인 필요자들 사이를 연결하는 수도관(conduit)이 되어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설교자는 회중들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난 존재로 인식되며,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설교자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틀에서의 설교는 필연적으로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구조를 갖게 된다.

    이렇게 기독교의 설교는 지난 300여년 동안 논리적인 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은 이것을 설교가 갇혀 있었던 “이성주의의 덫(rationalist bind)”이라고 하며, 유진 라우리(Eugene Lowry)는 “설교가 갇혀 있었던 덫”(homiletical bind)이었다고 주장한다.

    설교자들은 그러한 패러다임에 익숙해 있었고, 또 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주로 명제와 한 두 가지의 예화를 곁들이는 방법을 통해 설교해 왔다. 설교에 명제를 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대지를 정하는 것이 설교 준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렇다. 설교는 덫에 걸려 벗어날 줄을 모른 채 안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설교로 하여금 마치 바벨론 유수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했으며, 성전이 피폐하고 백성들이 흩어졌던 모습이 현대 교회 속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매체의 변화를 통해서도 이러한 특성은 설명해 볼 수 있는데,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문자 이전 시대(preliterate or oral age)와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문자시대 (literate or print age),

    그리고 전자매체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전자시대 혹은 멀티미디어 시대가 그것이다.2) 기독교의 설교의 원형은 구두(oral)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형성되었다면 오늘날 설교의 형태는 인쇄매체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문자 문화 속에서 그 틀을 갖추었다.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은 문자 문화가 기독교의 설교(discourse)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기독교의 설교가 그 문화권 아래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잘 분석해 주고 있는데, 프린트 문화(print technology)의 선적이고 분석적인 구조는 기독교의 설교로 하여금 강해적이고 산문적인(prose) 설교 형태를 갖게 했다고 주장한다.3)

    이러한 기록 문화의 영향권에서 형성된 기독교의 설교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명제적(propositional)이며, “개념의 전달”을 기본 골격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므로 설교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명제적인 짜임새를 가질 때 좋은 설교가 된다.

    그러나 전자문화와 영상문화가 발달되면서 이러한 프린트 문화에서 형성된 형태는 급격히 변하게 된다. 오랫동안 영향력을 가져왔던 명제적이고 논쟁적인 설교의 형태는 이제는 더 이상 영향력을 잃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전자매체에 익숙해지면서 그들의 청취 스타일과 그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자문화와 영상문화에 익숙한 청중들은 논리와 명제에 의해서 어떤 개념을 받기보다는 이미지와 메타포, 스토리, 그리고 가시적인 영상을 맺혀주는 언어에 의해서 전달되어질 때, 그 개념을 확실하게 받게 된다. 지금까지 말씀의 사역자들은 주로 여러 가지 아이디와 이론을 통해 인도해 왔다.

    그리고 지루한 설명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설교는 오늘의 청중들의 가슴을 말씀으로 적시기보다는 실망을 안고 교회당을 떠나게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자서전을 보면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나마 교회에 발걸음은 완전히 끊어버린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회자가 좋은 설교자였다면 아마도 나는 교회에 계속해서 출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의 전반은 주로 교리적인 논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특별한 교리에 대한 설명하는 내용뿐이었다. 그의 설교는 내게는 너무 메말랐고, 흥미도 없었으며, 그리고 전혀 유익도 되지 않았다.”4) 교리와 설명으로 가득했던 설교에 대해 실망하고 나아가는 것이 그뿐이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설교에서는 신앙생활의 여러 측면들에게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리는 교회를 지탱시켜주며, 신앙을 바로 이해하며 세워 가는데 지침과 같은 요소이다. 또한 설교가 지성적이 되어야 하느냐, 감성적이 되어야 하느냐를 논증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청중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이 어떻게 듣느냐를 고려하지 않은 치우친 방법이며, 그 교리를 어떠한 그릇에 담아 전달하느냐의 문제이다. 즉 예수님은 ‘좋은 이웃’이 되는 법에 대해서 설교하실 때,

    첫째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도와 주라, 둘째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라, 셋째 끝까지 책임지라 등과 같은 방법으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여기에서 ‘좋은 이웃’은 교리가 될 것이며, 이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거나 설명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교리적인 설명과 논증의 구조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 전하셨다.

    설교의 이야기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렇게 교리를 논증하고 설명하는 형태의 설교는 필연적으로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인 산문적인 설교가 되어왔다. 이제 기독교 설교자는 다시 성경의 말씀 사역자들과 같이 이야기꾼이 되어야 하며, 말씀 사역의 한 기술로서 이야기의 기술을 재발견해야 한다.

    계몽주의와 문자시대의 영향으로 논리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을 받아 상실해 버린 설교에서의 이야기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은 무엇이며, 왜 우리는 설교에서 이야기성의 회복을 꿈꾸어야 하는가?

    이야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며(understand),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는(attention)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야기는 오래 기억하게 하며(remember), 사람들의 감성적인 부분들을 고양시켜주기(stir up) 때문에 이야기가 시작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실로 인간들의 삶은 이야기로 채워져 왔고, 이야기에 의해서 아름답게 채색되어져 왔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며,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기대하게 된다(anticipate). 가령 어떤 설교자가 그의 설교를 시작할 때, “한 여자가 자신이 주문해 놓은 장미 몇 송이를 찾아가려고 꽃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와 같이 시작한다면,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구나’ 우리들은 단순히 그렇게만 추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꽃가게 안과 밖에서 펼쳐지는 삶에 대한 관심이 표출되면서 그에 대한 깊은 기대감을 갖게 된다.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특성인 “무엇인가 더 있음”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안다. 즉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하게 이야기가 전달해 주는 사실 이상의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효과적인 이야기는 그것이 끝난 다음에 말하는 사람의 마지막 단어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싹이 움터오게 하는 어떤 씨앗을 남기기 마련이다. 강력한 이야기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하며(do something), 그것이 일어나게 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effect something).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 그래요. 설교의 요점(혹은 대지)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하는 정도로 반응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드러날 때 우리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고,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놀라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단순하게 꽃가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우리의 마음 깊이에 있는 어떤 것을 자극하여 장미송이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을 촉발시켜 준다.5) 이렇게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그 장소와 사건 속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서 그것들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스토리의 인물(character)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를 갖게 한다.6)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러 이야기(비유)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는 개념이나 조직적인 논리를 통해서 어떤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시지 않으시고 늘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셨다. 이야기의 효과성(effectiveness)이나 탁월성 때문만은 아니라, 이야기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복음을 전달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에이모스 윌더(Amos Wilder)는 복음의 바로 핵심적인 본질은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한다.7) 예수님이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신 것은 청중들의 관심만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의 구조는 잘 갖추어진 논증을 통해, 즉 일련의 개념(idea)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정의하고, 삼단논법과 같이 논증하는 것도 아니며, 종교적인 정의를 열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메시지를 삼단논법이나 지적인 논증, 혹은 정의로 바꾸어서 전한다면 복음 그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변형시키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크래독은 “메시지의 본질적인 구조는 언제나 이야기(narrative)의 특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8)

    이러한 점 때문에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이야기)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이야기를 사랑하셨다. 앞서 언급한대로 좋은 이웃인 누구인지를 묻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좋은 이웃이란 첫째..., 둘째... 이다...”와 같이 논리적으로 정의하려 하시거나 논증적으로 증명하려하지 않으시고, 이야기의 특성을 따라서 말씀하신다.

    좋은 이웃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시지 않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시는데, 지금껏 수많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내린 그 어떤 정의보다도 선명하고 훌륭하게 이웃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야기(비유)를 들으면서 청중들은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서게 되며, 그 아픔과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게 된다. 가슴을 파고들 듯이 밀려오는 메시지, 참 이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 가슴으로 담게 되며, 느끼게 된다.

    구약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다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시대를 넘어서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를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경험한다.

    기억하고(remembering), 이야기하면서(telling)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건들은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야기(storytelling event)를 통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이야기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형성되고,9) 거룩한 이야기들을 되뇌면서(retelling)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현재 속에 견고하게 서게 되며, 미래의 사건을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웨인 로빈슨(Wayne B. Robinson)은 “믿음의 삶은 그 자체가 이야기의 특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10) 우리는 구약 성경의 중심에서 우리는 그러한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와 엎드렸을 때,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예배자들에게 들려줄 것을 제사장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너희를 구원했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잘 섬겨야 한다”는 명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리 하는 아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말하라고 명령하신다.11) 또한 유월절을 지내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는지를 외워 들리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보스톤대학의 교수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하나님은 이야기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셨다”의 주장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구약 성경에서나 신약 성경에서 복음의 메시지 전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설교(speech)가 어떠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는 윌더는 기독교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모드(the basic speech-mode of Christianity)는 이야기였으며,12) 이야기가 초대교회 생활과 증언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이야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들의 믿음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이야기 안으로 모아져 온다. 하나님은 오늘도 역동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시며, 인간을 향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과 함께,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좋은 이야기와 같이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으며, 그리고 끝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순히 비전과 환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꿈의 장면(dream shot)과 같은 것이 아니고, 순례이며, 힘들지만 끝까지 달려가야 하는 경기이며, 간단히 말해서 역사(history)이다. 새로운 기독교의 설교는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이야기의 형태를 가졌다.13)

    이와 같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셨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설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수단(vehicle)이었고, 기독교 설교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룬다. 복음도 본질적으로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된다.

    이야기(narrative)는 하나님과 세상(world)을 드러내는 도구였으며,1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선명하게 노출시키고 계시하시는 장(場)으로 삼으셨다.15) 그래서 성경은 이야기를 가장 중심 되는 매개체로 삼았으며, 예수님은 이야기(parable)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마 13:34).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설교는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특성(narrative quality)을 가져야 한다. 논리의 틀이 아니라 이야기의 틀을 통해서 전해져야 한다. 교리적인 설명으로 가득찬 산문적인 설교가 아니라 이야기와 같이, 이야기를 통하여 전달되는 시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설교를 위한 단순한 예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와 같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움직임과 플랏을 가진 설교, 이야기의 특성을 따라 전개되는 설교를 말한다. 또한 단순하게 어떤 교리적인 설명을 전해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함께 경험해 가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이것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 설교의 기초에 대한 재발견이었다―현대 설교학은 논리와 명제 중심의 설교, 성경을 설명하는 해설식 설교, 설교의 개념을 전달하는 논증식 설교에서 이야기와 같이 흐름과 전개가 있는 설교의 틀을 발전시켰다.

    특히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preaching-as-storytelling)는 논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전통적인 설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청중들에게 “어떻게 들려지게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의 표출이었으며, 이야기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오늘의 시대 속에서 보다 강력하게 복음이 들려지게 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복음의 선포로서의 설교는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교의 새로운 형태는 현대 설교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이러한 모든 설교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은 언제나 이야기에 있었다.

    이제 설교를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 혹은 “이야기 나눔(shared story)”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설교의 형태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설교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이야기성이 살아나야 한다.

    하시딤(Hasidim)은 논리와 명제, 논증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18세기 중엽 동유럽에서 발생한 유대인의 한 분파였는데, 냉냉해진 이성주의의 틀에 갇혀 있었던 유대주의에 대한 일종의 개혁운동이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실천이 무의미하고 학구적이 되어 왔다고 인식하였을 때 하시딤은 예배와 말씀 연구를 말없는 음악(nugunim)과 황홀한 춤, 그리고 이야기로 새롭게 하려고 했다. 하시딤은 청중들로 하여금 알고 있는 방법을 초월하여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보게 하고 듣게 해주는 방식을 통해 그 의미와 신비감을 맛보게 했다.

    그들은 이야기의 특성을 잘 이해했고, 그들의 예배와 설교(가르침) 속에 이야기성을 새롭게 회복하려고 했던 한 흐름이었다. 마르틴 부버는 하시딤의 이야기들을 모은 책에서 하시딤의 창시자였던 바알 셈(Baal Shem)의 제자였던 그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설교의 이야기성 회복의 중요성에 대해 웅변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장애를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의 거룩한 스승이었던 바알 셈은 기도할 때마다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때로는 춤을 추기도 했는데, 그 부분을 말하면서 나의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의 스승이 그러했던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춤을 추면서 그분이 이렇게 하면서 기도했노라고 이야기를 계속해 갔습니다. 그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는 다리를 더 이상 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능력을 갖습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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