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이 달라지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1) 2015-12-17 10:44:09 read : 477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 설교학)
고도의 전략들
백화점 1층에는 화장실도 없고, 시계도 없다고 한다. 고객들의 편의와 서비스를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백화점이지만 판매 전략을 위해서 1층에는 화장실도 없애고, 시계도 두지 않는다.
화장실만 사용하고 그냥 갈 사람도 최소한 2층에까지 올라가면서 진열된 물건들이라고 보고 가라는 뜻일 것이다. 또한 그곳에 들어오면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
틀어주는 음악을 선곡할 때도 식당이나 다방에서는 다소 경쾌하고 빠른 음악을 틀어주는 반면, 백화점에서는 빠른 곡보다는 약간 느린 템포의 곡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고 한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자는 빨리 빨리 먹고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이고, 후자는 천천히 쇼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고도의 전략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판매전략은 이만큼 치밀하게 짜여지며, 그들의 경영전략은 매일 매일의 이익을 얻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마치 그들은 전쟁을 하듯 전략을 준비하고, 실현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한다. 그들의 고객들의 취향을 연구하며, 그들이 선호하는 것도 분석한다.
또한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맞춤 서비스도 준비하며, 애프터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경영자들은 고객처럼 느끼라고 말하며, 직무보다는 고객에 집중하라는 경영원칙도 제시한다. 실로 치열한 전쟁을 하듯이 그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고도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하물며 생명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인 설교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반드시 들려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바로 행해졌을 때 가져올 결과를 정확히 아는 설교자라면 설교에도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많이 있으며, 그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고도의 전략이 필요함을 분명히 아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는 이번 호부터는 몇 번에 걸쳐 설교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인 청중들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청중 이해와 연관된 작업이며, 새롭게 설교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주로 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대안적인 제시는 그 다음 영역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해석자인 설교자
하나님의 말씀의 커뮤니케이션인 설교는 몇 가지의 요건을 필요로 한다. 먼저는 오고가는 시대 속에서 들려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출처인 성경 본문(text)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록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본문은 사실 수 천년 전의 사람들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그 시대에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석자로서의 설교자가 필요하다.
설교자는 본문을 선정하고, 본문을 연구하며, 묵상과 석의의 단계를 통해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오늘의 시대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선명히 듣고, 해석하여 전달해 주어야 할 책임이 주어진다. 또한 그 해석된 말씀을 받는 대상인 청중이 필요하다.
일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로 완성될 수 있지만 기독교의 설교는 이 세 가지만으로는 수행될 수도 없고, 완성될 수도 없다. 또 한가지의 필수적인 요소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이다. 모든 설교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며, 준비에서 전달까지의 모든 과정들을 지배하셔서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여기에서 어느 한 요소가 중요하다고 할 수 없이 이 네 가지 요소들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행해지는 것이 설교 사역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함께 만나는 곳에서 설교 사역이 형성된다.
그렇다면 그 사역의 중심에는 누가 서 있는가? 설교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도 인간들에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성삼위 하나님, 그리고 복음의 말씀들,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사역의 중심에 있지만, 설교를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중심에는 설교자가 서 있다.
이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는 성령님의 역사 하심에 민감해야 하며, 이 시대를 향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자로서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수혜자들인 청중들에 대한 해석자로서 서야한다.
특별히 설교자들은 효과적이고 영향력있는 말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문화 사회적인 현상과 그 속에서 영향받고 있는 청중들에 대해서 민감한 설교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 동안 설교를 연구함에 있어서나 설교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본문의 중요성과 설교자의 중요성은 넉넉하게 강조되었지만 가장 소홀히 되었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청중들에 대한 것일 것이다.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전달의 기법에 대해서도 깊이 강조되었지만 청중들이 어떻게 듣느냐는 그렇게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것은 밭의 특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무작정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다.
산을 일구어 만든 조그마한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는 화전민과 같은 소규모의 농사꾼은 이것저것 고려할 여지도 없이 얻고자 하는 품목의 씨앗을 그의 밭에 뿌리고, 그저 주어지는 조그만 소득에 만족하지만 그러나 대규모의 농사를 짓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씨앗의 특성도 심각하게 고려하지만 특별히 밭의 특성을 깊이 고려하여 거기에 알맞는 씨앗을 골라 뿌린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풍부한 소출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확을 하고 안하고는 하나님 손에 달린 거야! 하나님의 방법이면 못 이룰 것이 없지!”라고 말하는 농부가 믿음이 좋은 농부일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농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무작정 씨만 뿌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설교자여서는 안되며, 혼자서 기분 좋은 설교자여서도 안 된다. 반드시 설교자는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청중들과 그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해석자들이 되어야 한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설교자는 반드시 말씀의 해석자여야 하며 청중들에 대한 해석자여야 한다.
청중들의 삶의 자리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문화 사회적 현상에 대한 해석자여야 한다. 또한 단순한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적절히 대처하는 자로, 다시 말해 해석을 통해 얻게 된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적절한 방법을 통해 말씀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강구하는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로서의 해석자여야 한다.
정보화 시대와 청중의 변화
몇 년 전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디즈니월드와 함께 많은 관강객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인 엡코트 센터(EPCOT; Experimental Prototype Community of Tomorrow)에 들린 적이 있다. 우리 문화가 오늘날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유명한 해석자들인 미래학자인 토플러나 내스비트 등의 주장들을 대중화시키고, 현실화 시켜놓은 곳이다.
그곳 전시장의 입구에 들어가면 커뮤니코(Communicore; 커뮤니케이션의 중심부)라는 거대한 전시관을 만나게 되는데, 거대한 조각물들이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단순한 노랫말을 한 곡조의 노래가 계속적으로 들려온다: “우리는 드디어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정보의 시대입니다.” 엡코트라는 거대한 지구의 내부로 우리를 데려가는 캡슐 안에서는 엄숙한 목소리가 우리 세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커뮤니코라는 전시관에서 나오던 대사들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내용 가운데 몇 가지는 그것이다: “지식과 커뮤니케이션이 증가하면서 우리의 삶과 세계는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우주 끝에서 깊은 바다 속까지 우리는 거대한 전자망을 만들었습니다. 더 이해하려는 우리의 탐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보의 거대한 보고를 만들었습니다....”
십 년 전의 이야기이니 이것은 수많은 내용들이 오늘날 현실화된 상황 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지금 문명사적 전환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거대의 변화의 중심에 서있다. 특별히 커뮤니케이션 혁명이라고 불리울 만큼 거대한 환경의 변화 가운데 서 있다.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은 과거의 형태와는 질적으로 다른 매우 혁신적이고 다양한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별히 전자 매체를 통한 획기적인 정보화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정보화란 “정보를 생산, 관리, 전달, 활용하는 인간의 제반 활동을 의미”하며, 정보사회는 그러한 정보화가 사회 전체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적인 상황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보사회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크게 요청한다는 점에서 지식사회라고도 불려지며 또 정보 연관 기술이 사회경제 활동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전자기술 시대나 고도기술사회(high technology society)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아날로그 시대와 대칭 되는 개념인 디지털 시대로 특징 지워진다. 이것은 TV를 통해서 시작되었으며, 컴퓨터를 통해서 확장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유형이다.
이렇게 정보화 사회로 치닫게 되면서 예기되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는 어떠한 특징을 갖게 될까? 그 중의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첫째로 지금의 대중매체가 일방적인 정보전달 체제인 반면 디지털 시대에는 쌍방향 전달 시대가 될 것이다. 디지털방송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먼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이제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시대가 된다. 그 동안 청취자 혹은 시청자들은 보내오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 놓여 있었으나 이제는 그 정보를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직접 선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견과 피드백을 입력함으로서 매체가 제공하는 정보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둘째로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개인화를 들 수 있다. 공중파 방송을 듣는 청중들은 정해진 채널에서, 정해진 프로그램을 통한 정보만을 얻게 되지만 이제는 인터넷과 같은 쌍방향 전달체제에서는 훨씬 다양한 정보에 접하게 된다. 동일한 사이트에 접속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결정된다.
셋째로는 가상 현실의 체험 여건이 보편화된다. 가상 현실은 실물은 없되 보고 느낄 수 있는 허구적 세계라는 점을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세계를 구현한다는 초현실성(hyper-reality)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 고도의 편집성, 중충성(重層性), 시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성을 지니는 가상세계는 활용여하에 따라 커다란 극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개념으로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서는 관계적인 욕구, 기능적인 욕구, 공리적인 욕구를 동시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장이 되면서 무미건조한 반복적인 일상사에서 염증을 느껴 모종의 이벤트를 갈구하는 현대 사회의 대중들에게 볼거리와 다양한 정보, 환상적인 소재를 제공함으로써 크나큰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우리 사회에도 이미 보편화되고 있지만 사이버스페이스로 대표되는 가상 현실은 이제 일상 생활이 되고 있으며, 공동사회(Gemeinschaft) 및 이익사회(Gesellschaft) 모두를 총괄하는 총체적인 생활공간으로 자리잡아 가게 된다. 물론 여기에 많은 문제점들이 도출되는 현실과 가상 현실의 혼동, 인격적인 교류의 단절현상, 명확한 토대로서의 윤리적인 삶과 정체성의 상실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서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같은 학자들은 “리좀적 구조”라고 말한다. 뿌리줄기 식물인 리좀은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를 말한다. 이것은 중간의 곧은 뿌리를 중심으로 하여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위계적인 조직화된 뿌리를 가지는 나무와 같은 식물 구조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런 리좀적인 구조는 요즘에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사이트”라든지, 우후죽순처럼 퍼지고 있는 음란물 사이트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윤리나 도덕, 마땅히 지켜야 할 어떤 규범 같은 것은 도외시되고, 그것에 의해서 지배받기를 거부하면서 공동체와 인간 삶을 흔들어놓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넷째로는 하이터치의 시대라는 특성을 가진다. 텔레비전, 신문, 전화, 팩시밀리 등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인 기능을 갖는 멀티미디어가 발전되고 있는데, 기술적으로 복잡하지만 그 원리는 간단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째로 이용하여 인간의 만족을 주려는데 그 중심 목적을 둔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양한 매체--하이테크--를 통해 더 강력하게 감동받기--하이터치--를 원한다. 이러한 현상을 닐 포스트만은 “설명의 시대가 지나고 쇼 비즈니스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간파한다.
이렇게 정보화 사회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을 변화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변화를 초래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새뮤얼 모리스가 새롭게 전신을 발명했을 때 주 경계선을 허물고 지역 와해시켰으며, 미대륙을 하나의 정보 그리드(grid)로 감쌈으로 통일된 미국 담론을 가능케 만들었다.
물론 그 결과 이면에 대해서는 찬반의 논의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매체는 인간이 발명하지만 역시 그 매체에 의해서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는 첨단 매체의 발전도 단순하게 과학 기술의 혁신적 발전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세계의 변화도 가져오게 된다.
정보화 과정은 많은 변동의 국면을 야기하는데, 초기에는 주로 기술적 영역에 영향을 끼치던 것이 기술,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되게 되며, 그리고 다시 기술, 사회, 문화적 영역으로 그 영향이 누진적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사회적 개방성의 지표로 간주되는 사회적 자유도(societal degree of freedom)가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간다.
이렇게 자유도가 확장되어 가는 개방적 생활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나 행동양식도 크게 영향을 받아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얼마만큼 사느냐”라는 생활기회(life chance)의 문제를 지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활방식(life-style)의 문제가 보다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된다. 이러한 변화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 그리고 사회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렇게 미디어 발달과 함께 문화와 그 사회가 바뀌고, 그러한 문화적인 특성에 의해 의식의 변화와 삶의 스타일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겠으나 그것이 종교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가능성이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위협요소이다.
이렇게 미디어가 많은 것을 결정하고 변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였던 마샬 맥루한의 예언과 같은 이야기--“매체가 메시지”(Medium is message)--가 이루어지는 시대 속에 서 있다. 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시대에는 그 매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문화 사회적 현상과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맥루한의 입장을 따라 그의 이론을 펼치고 있는 프랑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삐에르 바뱅은 “21세기 미디어 시대는 세상 사람들의 필요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종교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가 겪게 되는 가장 큰 흔들림의 주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죽음의 흔들림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흔들림이라고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찬란한 그리스-로마 문화는 원시 기독교에는 복음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자 흔들림으로 다가왔지만 그들은 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교회로 하여금 “선교사가 되라는 재촉”이며, 더욱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선교사가 되라는 독촉”이라는 것이다.
전자매체라는 새로운 기술공학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이 탄생, 형성, 발전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청중들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복음의 말씀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런 매체의 변화와 그로 인한 청중들의 삶의 변화에 대해서 소극적인 교회가 역시 영향력 있게 말씀 사역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복음의 전달 방법과 경로는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행해졌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도 당시 상황을 적절하게 고려하셨으며, 그 사회가 수용하고 있던 문화 양식이라는 방법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복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전하려는 청중들의 삶의 정황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필요에 동화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청중들을 깊이 고려한 방법이었다.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와 설교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동물이며, 의사소통을 위해서 매체를 사용했고, 그 매체를 끊임없이 개발해온 존재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매체의 변화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는 대략 세 가지로 분류되어진다.
“문자 이전 시대” (preliterate or oral age)와 인쇄술의 발달과 시작된 “문자시대” (literate or print age)이며, 전자매체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전자시대 혹은 멀티미디어 시대”가 그것이다. 기독교의 설교의 원형은 구두(oral)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형성되었다면, 오늘날 설교의 형태는 인쇄매체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문자 문화 속에서 그 틀을 갖추었다.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은 기독교의 설교(discourse)가 문자 문화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 기독교의 설교가 그 문화권 아래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잘 분석해 주고 있는데, 프린트 문화(print technology)의 선적이고 분석적인 구조는 기독교의 설교로 하여금 강해적이고 산문적인(prose) 설교 형태를 갖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록 문화의 영향권에서 형성된 기독교의 설교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명제적(propositional)이며, “개념의 전달”을 기본 골격으로 삼게 되었다. 설교는 어떤 개념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짜임새 있는 논리 구조를 중요하게 여기며, 논쟁을 그 골격으로 하여 개념 전달에 주력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명제적인 짜임새를 가질 때 좋은 설교가 된다.
그러나 전자문화와 영상문화가 발달되면서 이러한 프린트 문화에서 형성된 형태는 급격히 변하게 된다. 오랫동안 영향력을 가져왔던 명제적이고 논쟁적인 설교의 형태는 이제는 더 이상 영향력을 잃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전자매체에 익숙해지면서 그들의 청취 스타일과 그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프린트 문화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기독교의 설교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래와 함께 심각한 도전 앞에 놓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자시대의 도래와 함께 청중들의 변화와 메시지 전달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음이 기독교 설교가 고려해야할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되고 있다.
전자문화와 영상문화에 익숙한 청중들은 메시지를 받는 방식도 달라졌는데, 이제 논리와 명제에 의해서 어떤 개념을 받기보다는 이미지와 메타포, 스토리, 그리고 가시적인 영상을 맺혀주는 언어에 의해서 전달되어질 때, 그 개념을 확실하게 받게 된다. 정보화 시대에는 이미지와 기호 등이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시대에 청중들의 집중도(concentration span)에도 역시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텔레비전 리모컨으로 자주 채널을 바꾸는 사람을 “zapper"라고 명명하면서, 최근의 한 연구는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채널을 바꾸는가를 조사했다.
상품광고나 지루한 프로그램이 나오면 바로 채널을 바꾸는데, 17.8%이상이 매 2분마다 한번 이상씩 채널을 바꾸는 “heavy zappers"이며, 35.8% 이상이 6분 30초만에 한번에서 세 번까지 채널을 바꾸는 ”moderate zapper"이라는 한 연구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현상들이 설교의 현장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으며, 이것은 현대 전자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청중들의 실상임을 알 수 있다.
피에르 바뱅은 “뉴 미디어 기술에서 태어난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는 동안에도 교회는 흔들림을 당했고 앞으로도 많은 도전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회중들은 변화된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살면서 전혀 다른 채널을 통해서 메시지를 받고 있으며, 메시지를 받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현대 설교학에서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을 생각하게 했다.
무엇을 고려할 것인가?
몇 년 전 크게 히트했던 마돈나의 히트송이었던 “아빠, 이제 설교 좀 그만 하세요”(Papa Don't Preach)는 그런 가사를 담고 있다: “아빠, 제발 저에게 설교하지 마세요. 아빠는 언제나 잘못된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붙잡으라고 내게 가르치죠. 아빠, 이제 제발 설교 좀 그만하세요. 나도 결심했어요.... 아빠 제발 설교 좀 그만하세요...”
“설교하다”는 의미의 preach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뮤직 비디오가 도입하고 있는 메시지나 영상 테크닉은 오늘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살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 길이는 5분 정도이지만 약 60개 정도의 화면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오늘날의 뮤직 비디오에 비하면 그 화면 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빠르게 이어지는 연속되는 화면 속에는 이미지를 통해 전해지는 스토리는 한 십대의 소녀가 자기도 자유롭게 섹스를 가질 수 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낭만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소녀와 둥지를 벗어나려는 철부지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비쳐지는 내용이다.
딸의 어릴 적 모습이 플래시 효과를 통해 사랑스럽게 비춰지지만 이제는 성장하여 임신을 한 모습을 통해 그 모든 것을 깨어진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뉴욕의 거대한 빌딩군들이 보여지고, 그림 같은 모습으로 떠있는 맨하탄 건너편의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해변도 보여지고, 등장인물들이 클로즈업된다. 비디오 전체에는 작고 어두운 스튜디오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마돈나의 모습이 간단 간단하게 계속해서 비춰진다.
이것은 변화된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자 커뮤니케이션 시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도 보여주고, 그 메시지도 들려준다. 이미지 중심의 텔레비전과 비디오는 언어 매체 중심만으로 행해지는 설교를 향해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오디오 비주얼한(audio-visual) 매체와 문화 속에 익숙해진 청중들이 그러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와 함께 참여하고, 듣고 본다.
청중들의 듣는 방식이 이렇게 달라지고, 메타 네러티브(거대 담론)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절대진리를 증거하는 설교자들을 향해 거부의 몸짓으로 외친다: “제발 설교 좀 그만하세요.” 마돈나의 뮤직비디오의 메시지는 변화하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살고 있는 청중들의 유비적인 외침이다. 이것은 설교자들에게는 거대한 장애물로 느껴지지만 이것은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설교의 위기는 어제 오늘날에 주어진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설교는 영속적인 위기가운데 놓여있다”고 한 로드니 케네디의 말은 옳다. 많은 설교자들은 매주일 행하는 설교를 다시 한번 산에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바위 정도로 생각한다. 이러한 설교자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도 다시 한번 인내해야 하는 무엇 정도로 생각한다.
그저 의미 없이, 강력한 역사와 영향력에 대한 기대도 없이, 습관적으로 바위를 올리고 있는 설교자는 이 시대의 흐름을 읽으려 하지도 않고, 말씀이 가져올 영광과 풍성에 대해서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차알스 라이스가 말한 대로 이러한 설교 현장에는 설교가 마치 ‘조용하게 울리는 교회 종소리’와 같아 보인다.
‘친숙한 소리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게 여겨지며, 이른 아침 단잠을 깨우지 않거나 중요한 일을 하는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그저 참고 들어줄 만한 교회 종소리’와 ‘어떤 새로움이 있으리라 기대되지 않는 설교’와 같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는 실제로 이 정도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설교자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청중들이 달라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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