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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텐트 교회 /교회 떠난 목사가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일
    2016-02-26 11:15:11   read : 467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불교국 몽골 바꾸는 ‘게르 교회의 힘’… 한교연 ‘게르 교회 개척 프로젝트’ 현장을 가다

    텐트로 된 이동식 예배소… 좁은 공간이지만 열심히 기도·찬송하고 복음 전파

    ▲몽골 울란바토르 ‘열방의 빛 게르 교회’ 최고령 성도인 자르갈씨(왼쪽)가 간증을 하고 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린 24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 ‘열방의 빛 게르 교회’. 몽골선교 10년차인 이경준(69) 선교사가 전통 옷을 곱게 차려입고 앞자리에 앉아있던 이 교회 최고령 성도 자르갈(78)씨를 소개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자르갈씨는 차분히 인사말을 이어가다 목소리를 높여 간증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환영합니다. 지난해 여름부터 게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이곳 토속종교를 믿다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천국 가라고 저를 오래 살게 하신 것 같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았는데 예수님 믿고 건강해졌습니다. 아내와 여동생, 손자랑 함께 교회에 다닌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게르는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동물의 가죽을 덮어 만든 몽골의 전통가옥이다. 양 말 소 등을 키우며 생활하는 몽골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새로 세우거나 정리하기 편리한 것이 특징이다. ‘게르 교회’는 게르를 활용해 만든 예배처소다.

    이 선교사는 “자르갈씨처럼 게르 교회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몽골인들이 많다”면서 “최근 몽골에서 기독교가 성장한 것은 게르 교회의 확산과 하나님의 은혜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몽골 교회 중 절반 가까이가 게르 교회”라며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게르 교회에서 자연스레 복음을 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30㎡ 안팎의 작은 공간이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꼭 초대교회 같다”고 전했다.

    몽골의 기독교 인구는 2005년 약 3만명에서 현재 6만∼7만명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산된다. 10년 새 몽골의 기독교 인구가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교회 수도 2005년 350여개에서 700여개로 배가 늘었다. 현재 목사 수는 220명이다. 10년 전 50명에 비해 4배 넘게 증가했다.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조일래 목사)은 2013년부터 ‘몽골 게르 교회 개척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22개의 게르 교회를 헌당했다. 게르 교회 한 동의 건축비는 500만∼1000만원이다.

    현지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몽골의 게르 교회를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 북방선교의 전초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몽골 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목회자 교육 문제 해결이다. 다음세대인 기독 청소년을 양육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몽골복음주의협회(회장 밧바야 도르시 목사)는 2020년까지 몽골 인구 약 300만명 중 10%인 30만명을 복음화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선교사들의 비자 발급이 어렵고 이단·사이비 집단이 성행하고 있는 등 어려운 점도 적지 않다.

    이날 게르 교회를 방문한 세계한인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요셉 목사는 “예수님을 먼저 만난 여러분들이 300만 몽골인에게 복음을 전해주길 바란다”며 “특히 이단의 유혹에 절대 넘어가선 안 된다. 한국교회가 여러분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후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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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해비타트, 이창식 신임 이사장 선임… “가정과 사회 회복시킬 것”



    (사)한국해비타트는 24일 이사회를 통해 이창식 이사장을 선임했다.

    이창식 신임 이사장은 2004년 푸르덴셜투자증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1997년부터 한국해비타트 이사로 재직해 왔다. 이 신임 이사장은 2009년 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이창식 이사장은 "한국해비타트가 만드는 삶의 보금자리를 통해, 가정을 회복시키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Korea)는 저소득 가정의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을 돕는 비영리 국제조직인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의 한국법인으로 1994년 설립됐다. 지금까지 국내 총 4천여 가정, 해외 1만여 가정을 위해 집을 짓거나 고쳐 왔다(www.habita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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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유치 계획 보니… 할랄식품 개발·무슬림 관광 수입 목표

    올림픽 무슬림 선수 지원 53억원 투자

    강원도 “동남아 무슬림 타깃… IS와 연계 가능성 없다”



    ▲최문순 강원도지사(왼쪽 세 번째)가 지난해 5월 ‘이슬람 할랄시장 진출을 위한 공동협력 협약식’ 후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강원도 제공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할랄타운 조성과 세계이슬람경제포럼(WIEF) 유치 등으로 무슬림 시장 공략에 나선 것은 무슬림 관광객들을 유치해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다.

    강원도는 지난해 4월 정부세종청사를 방문, 2017년 140개국 3000여명이 참여하는 WIEF를 유치하겠다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도는 WIEF 유치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오는 9월 강릉에서 ‘동아시아 할랄 콘퍼런스’와 ‘WIEF 여성비즈니스 네트워크’ 행사를 개최한다.

    도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11개국 100여명의 무슬림 선수와 임원, 관광단을 지원하기 위해 53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도 세워 놨다. 중앙정부에 지원도 요청했다. 도내 식당에서 할랄식품 서비스를 제공하고 할랄 향토식품을 개발하는 등 무슬림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고 강릉 평창 양양에 무슬림 관광객을 위한 숙박·관광·의료시설도 조성할 계획이다. 정부 공모사업과 연계해 할랄식품 매장과 무슬림 기도실, 관광안내센터 등 편의시설도 확충한다.

    도 관계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동남아권 무슬림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이기 때문에 일각에서 제기하는 이슬람국가(IS)와 연계 가능성은 없다”면서 “동남아 무슬림은 유커(중국인 관광객)와 맞먹는 블루오션이므로 산업적인 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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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민들 ‘친이슬람 정책’ 안된다… “익산·대구는 할랄단지 잇달아 유보·철회하는데”

    강원도, 평창올림픽 앞두고 할랄타운 조성·콘퍼런스





    ▲이슬람대책강원도민운동 관계자들이 23일 춘천 강원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추진하는 이슬람 관련 정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슬람대책강원도민운동 제공

    강원도민들이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발표한 친이슬람 정책을 막기 위해 실력 저지에 나섰다.

    이슬람대책범국민운동 가톨릭농촌살리기운동 등 27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이슬람대책강원도민운동(대표 정형만)은 23일 춘천 강원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 지사가 추진하는 강원도 할랄타운 조성과 이슬람 금융투자 유치에 강력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원도민운동은 성명서에서 “최 지사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무슬림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무슬림 관광객 증가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할랄타운을 조성, 할랄콘퍼런스·세계이슬람경제포럼 개최 등을 발표했다”면서 “이는 유럽의 이슬람화에 따른 끔찍한 테러를 바라보며 온 세계인이 불안해하는 현실을 무시하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무슬림은 소수일 때 관광 문화 교육 등을 통해 평화주의자를 가장해 그 사회에 침투하지만 인구가 늘면 그 나라의 법과 제도 교육 등 사회 시스템을 거부하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통치하는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면서 “(그들은) 필리핀 민다나오섬처럼 분리 독립을 꿈꾸든지 한 나라의 전복을 꿈꾼다”고 지적했다.

    강원도민운동은 “그럼에도 정부와 지자체가 경제논리만 앞세워 특정 종교의 확산을 도와주는 것은 국가 치안과 국민 안전에 심대한 위협을 가져올 것”이라며 “한국이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소굴이 되어 동북아 국가의 이슬람 거점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100여명의 참석자들은 ‘할랄타운 조성으로 평화의 강원도에 테러리스트 들어온다’ 등의 푯말을 들고 춘천시청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강원도민운동은 전 국민 서명운동 등도 벌일 계획이다.

    정형만 대표는 “이슬람 선수단에 대한 특별 배려와 지원은 특정 종교를 협력 파트너로 삼는 것으로 동계올림픽 정신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며 “친이슬람 정책은 세계 지구촌 시민들에게 위화감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반올림픽·반화합적 정책이다. 당장 그만두라”고 비판했다. 정 대표는 “지금처럼 정부와 지자체가 이슬람과 무슬림을 단지 비즈니스로만 생각하고 접근했다간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정부와 지자체는 경제논리만 앞세워 이슬람 관련 사업을 앞 다퉈 발표했다가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 뒤 슬그머니 사업을 유보·철회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할랄식품단지 조성 계획은 전북 익산 주민들의 반대로 최근 유보됐다. 대구는 ‘한국형 할랄 6차산업 육성’ 사업을 발표했다가 시민들의 반발로 1주일 만인 지난 11일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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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떠난 목사가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일

    공단 여성 돌보던 박후임 씨, 마을 할머니들과 일하며 자연에 눈뜨다
    이은혜 기자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목사가 교회를 떠났다. 교인들이 목사를 쫒아낸 것도 복잡한 교단 정치에 휘말려서도 아니다. 도시의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하던 목사는 자연이 주는 단순한 삶에 매료돼 농촌에 터전을 잡았다.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농사만 짓고 사는 전업농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11년을 살았다. 교회를 떠나 무임목사로 오래 있다 보니 노회에서는 목사를 면직 처리했다. 노회에서 처음으로 안수받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목사' 타이틀에 미련 두지 않았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으려 하지 않고 깨끗이 벗어 버렸다.

    박후임 씨는 '목사' 직함 없이 농촌에 깊숙이 스며들어 살고 싶었다. 마을 할머니들에게 농사를 배우고 그들과 함께 뒹굴었다. 함께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삶이 곧 목회가 된 박후임 씨를 만나러 전라북도 진안으로 향했다.



    ▲ 박후임 씨는 전업농이다. 오미자를 키워 엑기스를 파는가 하면 집 주변에서 농사를 지어 지인들과 나눠 먹는다. 집 뒤편 닭장에서 토종닭들을 지켜보는 박후임 씨. ⓒ뉴스앤조이 이은혜

    17년 맡고 있던 교회를 떠난 까닭

    서울 구로동에 있는 새터교회는 1987년 어린이방으로 시작됐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공장 여성과 자녀들을 돌보던 새터교회는 기독교 여성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여성 노동자가 맘 놓고 일할 수 있도록 어린이집을 운영했고, 학교가 끝난 초등학생이 올 수 있도록 공부방도 만들었다. 중심에는 여성 목회자들이 있었는데 박후임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후임 씨는 이곳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새터교회에 줄곧 있었다. 왕성하게 활동했던 2005년, 박후임 씨는 새터교회를 떠났다.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생활한 도시인이었던 그는 남편과 함께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북도 진안으로 내려갔다.

    가난한 여성들과 함께 17년을 사역한 박 씨가 왜 갑자기 시골로 내려갔을까. 그는 1999년 1차 안식년 때 교회를 잠시 떠나 있었다. 그때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했다.

    "여러 교회 다니면서 설교 듣고, 예배를 드렸어요. 교회 안에 있을 때 안 보이던 것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니까 보이더라고요. 여성운동을 오래 해서 세상을 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세상으로 나오니까 내가 모르는 게 더 많고 교회에 길들여진 나를 보게 됐죠. 여성운동을 하면서 타이틀을 여러 개 갖고 있었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교회를 떠나니 교회라는 틀의 한계가 보였다. 하나님이라는 큰 존재를 담아내기에 교회라는 그릇은 너무 좁아 보였다. 게다가 교회 안에서는 자기가 아는 하나님만 절대화해서 이야기했다. 새터교회에서 17년을 보냈지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삶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박후임 씨는 남편 이재철 씨와 함께 1,000만 원을 들고 귀농했다. 부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하고 한글학교를 시작하는 등 마을 살리기에 주력했다. (사진 제공 박후임)

    목사님이 '후임 씨'로 불리기까지

    박후임 씨는 남편 이재철 준목(한국기독교장로회)과 1,000만 원을 들고 귀농했다. 마침 지인이 동네 빈집을 소개해 줬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시골에서의 삶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도시 생활을 탈피하려고 부러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도 생기지 않았고 무언가 소비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될 것 없었다.

    시골에 오기 전에는 도시에 살며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다고 자부했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공동체 습관이 몸에 뱄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농촌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공동체성이 강했다. 마을 사람들은 상대방 사정과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찾아왔다. 아침 일찍 전화해 그날 일정을 갑자기 통보하기도 했다.

    당황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박후임 씨는 처음 농촌에서 보낸 3년이 정말 소중했다고 추억한다. 농사를 배우려고 마을 할머니들을 좇아다니며 얻은 것이 많았다. 도시 문화에만 갇혀 있던 자아가 깨지는 시간이었다.

    "도시에 살면서 사람들을 섬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엄청난 섬김을 받던 삶이었어요. 목회자로서 누렸던 것, 익숙했던 것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과정이었죠. 전도사님, 목사님으로만 불렸지 '후임 씨' 심지어 '어이!'라고 불린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불리고 나니까 오히려 신선하더라고요."



    ▲ 박후임 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읍내 중학교 여학생들에게 나눠 줄 면 생리대를 만들고 있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공단 여성에 머물던 눈길이 마을 할머니들에게

    그렇게 '후임 씨'로 불리며 할머니들과 정신없이 3년을 보냈다. 3년이 지난 후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던 시각이 바뀌며 마을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마을에서 평생 농사지으며 묵묵히 자리를 지킨 마을 어른들의 삶을 더 알고 싶었다. 그들의 삶도 소중하고 귀한데 스스로 열등하다 생각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할머니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한글학교를 시작했다. 할머니들 대부분은 한글을 몰랐다.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 자기 이야기를 글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힘이 없어 글 쓰기 힘든 연로한 분들과는 이야기 수업을 진행했다.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할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가난하고 힘든 과거를 이야기할 때는 눈물을 쏟아 냈다.

    한글학교와 이야기 학교는 농한기에만 운영했다. 하지만 농번기를 보내고 온 할머니들이 그동안 배운 한글을 잊어 먹기 일쑤여서 매주 한 차례 진행하는 것으로 바꿨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못 배운 게 한이 된 할머니들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보고 싶은 어머니, 먼저 세상 떠난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딸 자랑과 떨어져 사는 손주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연필 끝에 꾹꾹 눌러 담았다. 한글 배우는 즐거움을 표현한 시도 있다.


    나는 아직 못다 한 일이 있어서
    조그만 더 있다가 저 세상 갈깨
    못 다한 일이 무어야고
    나는 지금 제일 행복해
    못 배운 글 눈 빠지게 배우는 중인데
    더 배우고 갈깨
    나는 글쓰기와 시쓰기 재미 있어서
    지금은 즐거워 행복하게 잘 지내
    사라온 인생길 허무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행복해

    배덕임 할머니 (할머니의 정서를 전하기 위해 원 글 그대로 옮겼다.)

    박후임 씨 혼자 이 모든 일을 진행한 것은 아니다. 박 씨가 다니던 봉곡교회가 지원했다.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한글학교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교회에 제안했다. 2008년 시작한 행복한 노인학교는 이후 도예·미술·조각 등 분야를 넓혀 갔다.

    할머니들의 삶을 보존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마을 박물관도 기획했다. 진안군이 '지역 기여 사업'으로 350만 원을 지원했고 봉곡교회 출신 김동엽 목사(목민교회) 가족은 소유하고 있던 폐교를 제공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진을 모았다. 집에서 쓰던 오래된 물건을 가져왔다. 시집올 때 떡을 담아 온 바구니, 이불 싸개, 어머니가 주신 오강이 모였다. 그렇게 학선리 마을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박후임 씨는 할머니들이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에 만족한다. 이제 박 씨는 어른들이 기쁘게 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목회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니 할머니들과의 삶이 곧 또 다른 목회였다.

    목사가 아니어도 괜찮아

    농촌에 가면 목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또 다른 목회의 장이 열렸다. 박후임 씨는 교회 안 목회가 아니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삶 자체가 목회라고 생각한다. 목회가 목사 직업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사업을 하든, 공장에서 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목회를 할 수 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뜻을 함께 나눌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목회가 될 수 있어요. 일상을 살며 매 순간 하나님 뜻을 구하며 살면 되는 것 아닐까요.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야죠.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평일에는 내가 살고 주일에 교회 가서 하나님 만나는 것이죠. 나 따로 하나님 따로에요. 교회 나간다고 다 하나님 만나는 게 아닐 수 있어요. 억지로 나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 안에 기쁨과 감사가 있는지 살펴봐야 해요. 없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는가' 고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목사로 17년을 살았고 농부로 11년을 살았다. 목사로 산 세월이 더 길지만 농촌에서 맛보는 단순한 삶도 나쁘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후회는 없다. 좀 덜 누리고 적게 먹더라도 나무와 땅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 수 있는 진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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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킷 리스트 써 보셨어요?… 크리스천이 좋아하는 버킷 리스트



    ▲버킷 리스트의 목적은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일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사진은 죽음을 앞에 둔 두 주인공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고, 이를 하나씩 실행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버킷 리스트’ 한 장면.

    의심 없는 믿음 갖기(탤런트 김혜자), 매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기(가수 자두), 세계를 향한 중보기도 하기(美 기독교 저술가 조 맥키버)….

    크리스천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아름다운 버킷 리스트이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을 가리킨다. ‘죽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속어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으로부터 만들어진 말이다. 중세 시대에는 교수형을 집행할 때 뒤집어 놓은 양동이(bucket)에 올라가게 한 다음 양동이를 걷어참으로써 죽음을 맞게 했다. 이로부터 ‘킥 더 버킷’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2007년 미국에서 제작된 롭 라이너 감독, 잭 니컬슨·모건 프리먼 주연의 영화 ‘버킷 리스트’가 상영된 후부터 ‘버킷 리스트’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화는 죽음을 앞에 둔 두 주인공이 한 병실을 쓰게 되면서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하나씩 실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스카이다이빙과 장엄한 광경 보기, 눈물 날 때까지 웃어 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을 실행하며 인생의 행복을 발견한다.

    버킷 리스트의 목적은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버킷 리스트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작성하는 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진지한 자기반성이며, 그 같은 반성은 삶에 대해 보다 겸허하고 진실한 자세를 갖게 한다. 지난 17일 탤런트 김혜자 권사에게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버킷 리스트)을 묻자 “의심 없는 믿음 갖기”라고 답했다. 평생 나눔과 봉사로 살아온 김 권사의 인생과제는 성숙한 삶을 위한 믿음의 단련이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평생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떠오른다. 죽음의 날이 정해지고 나서야 평생 진정으로 하고팠던 일이 떠오른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죽음을 앞둔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명문대에 들어갈 걸’ ‘대기업에 다닐 걸’ ‘강남의 주상복합아파트를 살 걸’ 등이 아니었다. 남의 평판에 신경 쓰며 산 것, 일만 하며 인생을 허비한 것,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감정을 억누른 것,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것, 행복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호주에서 수년간 임종 직전 환자들을 보살폈던 호스피스 간호사 브로니 웨어는 자신이 돌봤던 환자들의 임종 직전 깨달음을 저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2013, 피플트리)에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인생이 아니라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후회는 일하느라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장들은 일에 파묻혀 사는 동안 자녀의 어린 시절, 아내와의 따뜻한 가정생활을 놓친 것을 후회했다.

    세 번째 후회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하다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평생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후회했다.

    네 번째 후회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마감하기 고작 몇 주 전에야 ‘오랜 친구’들의 소중함을 깨닫곤 한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 수소문을 해보기도 하지만, 정작 그때쯤엔 자신의 수중에 친구들의 연락처조차 없다는 점을 깨닫고는 좌절한다.

    다섯 번째 후회는 같은 조건에서도 더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느라 좀 더 모험적이고, 좀 더 변화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이 간단명료한 행복의 다섯가지 진실을 근거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

    버킷 리스트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얼마나 큰 꿈을 갖고 있느냐보다는 나만의 꿈을 갖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버킷 리스트에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평생의 소원을 쓰기도 한다. 코끼리 등에 올라타기, 세계일주 하기 등은 누군가에게는 쉬운 목표, 가능한 목표일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루기 어려운 소원일 것이다. 불가능한 ‘소원 실현장’으로 쓰지 말자. 오늘 내가 당장 할 수 있지만 굳이 안 했던 것, 약간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그리고 하지 않으면 죽기 전에 후회할 ‘보통의 소원’을 써보자.

    인생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인생의 행복이 결정된다.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사소한 일상들이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편지 한통씩 쓰기, 자동차 정비나 농업기술 관련 자격증 취득, 매일 골목길 쓸기, 맨발로 바닷가 걷기, 바람에 떨어지는 꽃비 맞기 처럼 하루하루 속에 수많은 행복의 알갱이를 뿌려놓는 것이다. 그 작은 알갱이들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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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IS, “서양 음악 듣지 마” 10대 소년 공개 참수



    ▲ IS가 공개한 사진.

    이라크 모술의 IS 대원들이 최근 한 10대 소년을 서양 음악을 들었다는 이유로 공개 참수했다.

    ARA뉴스에 따르면, IS 대원이 모술의 한 공공장소에서 15세 소년을 참수했다. 이유는 그가 서양 음악을 들었다는 것. 이 소년은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들고 있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니네베 미디어센터 대변인은 ARA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이함 후세인(Ayham Hussein)은 모술 서쪽에 위치한 나비 유니스 시장에 있는 아버지의 식품점에서 팝송을 듣다가 지하디스트들에게 붙잡혔다”며 “그는 샤리아 법정에 회부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IS 대원들은 그날 저녁 소년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돌려보냈는데, 일부 주민들은 IS의 잔혹함에 놀라 저항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은 “샤리아 법정이 공식적으로 서양 음악을 금지한 경우는 없었다”면서 이러한 사례가 모술에서 처음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에는 눈을 가린 한 소년이 손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참수를 기다리는 모습과, 많은 이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IS는 지난 2014년부터 자신들이 만든 규정에 따라 처벌을 시행하고 있다. 절도범의 경우 손목을 자르고, 강도나 살인범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 동성애자는 고층 건물에서 떨어뜨리며, 음주나 명예훼손을 한 이들의 경우 태형 80대에 처하며, 간통범은 돌로 쳐 죽인다.

    앞서 12일(현지시각)과 지난 1월에는 10대 청소년들이 모술 모스크 본당의 금요기도회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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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 예배와 금요 기도회, 미국서 수입된 것

    미국 부흥회의 산물, 한국 개신교 토착적인 의례 아냐

    옥성득 sungoak@hotmail.com

    "수요 예배는 새벽 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와 함께 한국 개신교만의 특색을 보여 주는 예배다. 1907년 평양 대부흥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삼일 예배라고 부른 것은 불교나 도교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요 기도회는 개신교 본고장인 유럽이나 미국에 없는 전통으로 한국 개신교가 발명한 '개신교 한류'의 하나이며, 최근 미국 등 외국 한인 교회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조선일보>에 수요 기도회에 대해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으나 사실이 아니다. 많은 신자와 목회자들이 수요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를 한국 개신교의 토착적인 의례로 오해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수요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는 한국교회 발명품이 아니다. 한국 전통 종교와도 상관이 없고, 18세기 이후 영국과 미국과 여러 나라에서 이미 시행하던 공적인 모임을 우리 형편에 맞게 시행한 것이었다. 필리핀이나 아시아의 다른 선교지에 가면 아직 그 유산이 남아 있다. 현재 한국교회가 그것을 종교 한류(韓流)의 하나로 수출하고 있는 추세도 아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수요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했을까? 평양에서는 언제 어떻게 수요 기도회가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언제 시작되어 확산되었을까? 과연 한국교회 발명품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몇 가지 사료들을 찾아보자.

    한국 수요 기도회 시작, 1888년 서울

    주일예배 외에 공적 모임의 하나인 주중 기도회로 모인 것은 1885년 12월 말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아펜젤러 목사 사택에서 모인 제야 송구영신 기도회가 처음이었다. 그때 드린 기도는 한국인 첫 개종자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듬해에도 함께 간구했다.

    이를 본 한국인들의 설날 기도회가 1887년에 시작되었다. 1888년 6월 영아 소동으로 위험에 처한 교인들이 서울에서 주중에도 기도회로 모였다. 위기를 겪은 교회는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다. 1889년 1월 2일에 쓴 언더우드의 글이다.


    "1888년 12월 성령의 능력이 한국에 쏟아 부어졌고, 한 달 만에 20명이 추가로 입교했다. 1889년 1월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해 세례 교인이 100명을 넘었다. 현재 한국에는 두 개의 잘 조직된 교회가 있다. 매 주일 공개적인 예배가 이 도시의 두 곳에서 열린다. 주중 기도회도 계속 열리고 있다. 소년들은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고 자체로 기도회로 모이고 있다." (H. G. Underwood, "Korea,"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June 1889], 457.)

    1888년 11월 서울 언더우드고아원의 소년 네 명이 정동교회에 가서 토요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는 정기 기도회로 발전했다. (참고로 1890년에 고아들은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세면과 방 정리 정돈을 하고, 8시까지 한문 공부를 한 뒤, 외국인 교사와 함께 아침 기도회를 하고, 이어서 아침 식사를 했다.)

    1888년 가을에 서울 정동(새문안)장로교회 교인들도 수요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주일예배는 매주 앉을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넘치고, 본토인의 주중 기도회는 정기적으로 약 30명이 모입니다. 다음 주에 한두 명에게 추가로 세례를 주려고 합니다." (Underwood to Ellinwood, Jan. 7, 1889.) 1889년 1월에는 30명이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한국 개신교 첫 수요 기도회에 대한 기록이다.

    6년 후 1894년 서울에 있던 몇 개의 장로교회와 예배 처소의 모임을 보자. 곤당골교회(승동교회)에서는 무어 목사의 인도로 매일 아침 기도회가 열렸다. 남대문 전도 처소에서는 레널즈 목사의 인도로 매일 전도 집회를 열었다. 곧 서울에서는 매일 전도 집회(남대문), 매일 기도회(곤당골), 주중 성경 공부(정동), 주일 아침과 저녁 예배(남대문, 곤당골, 모화관), 주일 4부 예배(정동), 수요 기도회(정동, 모화관) 등이 시행되고 있었다.



    ▲ 1888년 말 첫 수요 기도회가 열린 정동장로교회 첫 예배실인 언더우드의 사랑채(오른쪽)

    평양 널다리교회, 1893년부터

    평양에서는 1893년 말부터 마페트 목사의 지도 아래 널다리교회에서 정기 수요 기도회가 열렸고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 중 1894년 1월 첫 주에 8명이 세례를 받고 2명이 학습 교인으로 등록하면서 설립되었다.

    "여러 달 동안 10여 명이 주일예배와 수요일 저녁 기도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습니다. 지난주에는 학습자반을 문답했고 1월 7일 주일에 8명이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그날은 한 씨와 저에게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합심 기도와 간절한 소망을 통해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모인 것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 안에서 서게 될 것입니다. 다른 두 사람을 공개적으로 학습자반에 받았습니다." (Moffett to Elllinwood, Jan. 12, 1894.)

    "이곳 우리 사역에 관한 한 지난 한 달은 아주 좋은 달이어서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10명을 신중하게 문답한 후 그 가운데 8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나머지 2명은 공개적으로 학습교인으로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는 주일 낮 예배와 밤 예배, 수요일 밤 성경공부와 기도를 위한 기도회가 있는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Moffett to Gifford, Feb. 1, 1894.)

    평양의 마페트는 교회 설립 이전부터 주일 낮과 저녁 예배, 수요일 밤 성경 공부와 기도회 등 매주 세 번 정기적으로 모였다. 초신자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함이었다.



    ▲ 마페트의 집이자 널다리교회의 첫 예배 처소 앞에 선 최치량과 한석진, 1893년

    1894년 5월 10일 장로교인과 감리교인들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한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 발생했다. 장로교인인 객주(客主) 최치량도 체포되어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 왜 조상의 종교인 유교를 버리고 사악한 예수교를 믿어 제사도 드리지 않는 짐승 같은 자가 되었는지 심문을 당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달라진 자신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며, 새 삶은 원동력은 바로 예수교의 힘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몇 번 위협을 받은 뒤 서양인과 그들의 종교와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방면되었다. 석방된 때는 수요일 저녁이라 그는 바로 교회로 가서 수요 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날 밤 정규 기도회가 열렸다. 최 씨는 감영을 떠나 곧 바로 기도회로 가서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읽고 서로 이야기했고 이 말로 서로 강하게 하고 위로했으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한 후 헤어졌다. 해가 돋기 전에 사령들이 몰려와서 보는 자마다 욕설과 매질을 하면서 많은 돈을 요구했다. 그들은 중형을 상징하는 붉은 오랏줄에 이들을 묶은 뒤 길을 따라 끌고 가서 감옥에 넣은 뒤 곧 차고로 채웠다." (Underwood, "Korea of Today,"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Sept. 1894], p. 662.)

    이런 수난을 겪은 후 부흥한 널다리(板洞)교회에는 1896년 1월의 경우 100명 이상이 수요일 기도회에 모이고 있음을 보고했다. (Moffett to Ellinwood, Jan. 21, 1896.)

    이상의 자료에서 보듯이 평양 장로교회는 1893년 말부터 수요 기도회를 정규 교회 의례로 시행하였다. 1894년 박해 후에는 수요 기도회에 참석하는 자가 꾸준히 늘어 1896년에는 100명 이상이 참석할 정도로 정착되었다.

    1895년 소래교회, 수요 밤 기도회로 모이다

    소래교회는 캐나다에서 맥켄지(J. W. McKenzie)가 온 이후 주일 오전 예배와 수요일 밤 기도회로 모였다. 1895년 3월 1일 그가 친하게 지내던 마페트 목사에게 쓴 편지이다.

    "동학의 접주 3명이 자신들의 집에서 예수교를 공부하면서 교회에 기부를 했습니다. 저는 이 지방에 새로 온 군수와 황해도 동학 수령들 간의 회견을 주선했는데, 후자로부터는 편지를, 전자로부터는 명함을 받았습니다. (중략) 작년에 열 가구에서 집에 있는 위패를 없앴고 더 이상 위패에 절하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60~70명이 두 차례, 곧 주일과 수요일 밤 기도회에 모입니다." (S. A. Moffett, "Earlier Days," Korea Mission Field [February 1936]: 33.)

    모화관 예배 처소와 행주장로교회의 수요 기도회

    1895년 서울에서 모화관 지역 부인들을 위한 수요 저녁 기도회가 언더우드 부인 지도로 모화관 예배 처소에서 모였다. 주일은 새문안교회에 집중하고, 수요일에 모화관 지역 여성들을 위해 언더우드 부인이 기도회 겸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1900년 언더우드가 목회하던 행주장로교회는 정기적으로 수요 기도회로 모였다.

    이로써 언더우드가 순회하며 담당하던 지역인 정동-모화관-행주 시찰에 1900년경 수요 기도회가 정착되었다. 서울과 평양 등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도 교인이 늘어나자 수요 예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미국 교회, 수요 기도회를 공적 예배로

    사실 주중 기도회 혹은 수요 기도회는 18세기 후반부터 세계 여러 곳에서, 부흥회나 선교회 모임에서 시행되었다. (참고 J. B. Johnston, The Prayer Meeting and Its History, Pittsburgh: United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70.) 미국 개신교 해외 선교가 탄생하고 미국공리회해외선교회 조직을 가능케 한 1806년 8월 윌리엄스대학 건초 더미 기도도 수요 기도회와 토요 기도회의 산물이었다.

    19세기에 와서 미국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들은 수요 기도회를 공적 예배의 하나로 널리 시행했다. 1860년대에는 도시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저녁 오전과 저녁 예배 외에 수요 기도회나 수요 특강회, 혹은 금요일 기도회를 실시했다.

    다음 자료는 테네시 멤피스 지역 교회의 광고이다. 제일침례교회에서는 주일 오전 11시, 저녁 7시 예배가 있고 수요일 저녁 기도회와 금요일 밤 청년회(YMCA) 기도회가 있다. 반면 제1장로교회는 주일 오전과 저녁 예배, 수요일 저녁에 특강 모임, 금요일 밤에 기도회를 했다. 제2장로교회는 주일 오전과 저녁 예배, 수요 특강 모임이 있었다. 이처럼 19세기 중후반 미국 교회들은 주일에 오전과 저녁에 예배로 모였고, 수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기도회로 모이거나 특강 기간을 가지고 함께 기도했다.



    ▲ <Tennessee State Gazetteer and Business Directory for 1860~1861>(1861), p. 135.

    1870년대에는 수요 기도회가 거의 정착되었다. 당시 미국의 각 도시마다 발간된 신문 종교란을 보면 여러 지역 교회의 예배를 안내하면서 주일예배들과 수요 기도회 시간을 소개했다. 특이한 경우로 1892년 볼티모어 그레이스감리교회는 수요 기도회를 위해 80쪽의 안내서를 발행하기도 했다.(Karen Tucker, American Methodist Worship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 232.) 그만큼 수요 기도회가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수요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는 한국교회가 만든 발명품이 아니었고, 미국에서 수입된 예배였다.

    예배 형식은 변한다

    최근 수요 저녁 예배나 주일 저녁 예배가 사라지거나 줄고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발명품도 아니고, 종교적 한류의 일부도 아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하겠지만, 무리를 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은 아니다. 주일예배로 안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동시에 토요일 저녁 예배, 주중 정오 기도회 등 예배와 기도회와 성경 공부는 모이는 이들의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해외 한인 교회들도 점차 수요 기도회를 없애거나 다른 형태로 모이는 실정이다. 곧 도시인들이 참석하기 힘든 수요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가 없는 교회가 더 많다. 예배나 의식은 문화와 만나는 부분이므로 모이는 시간이나 장소와 같은 외적인 요소는 각 교회 사정에 맞게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22조는 "예법과 의식을 각 곳에서 꼭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 대개 예법과 의식은 예로부터 같지 아니하였고 또 나라와 각 시대와 각 민족의 풍속을 따라 변할 수 있으나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틀리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간과 장소보다 성령과 진리로 드리느냐가 예배에서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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