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추모예배를 위한 준비 /잠4:7~9 2011-01-27 22:23:00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11 설날설교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민족 명절인 설날이 또다시 다가옵니다. 목회자는 이에 따른 설교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 각 가정에서 추모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권면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4가지의 설교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한두 개를 요약해서 주보에 동봉하여 성도들이 추모예배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듯합니다. 물론 목회자도 참고를 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① 제목: 하나님을 높이는 가정
찬송: 248장, 399장
성구: 잠언 4:7~9
설날 명절을 맞이하여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제단을 쌓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집안이 하나님을 높이는 훌륭한 믿음의 소문난 가문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생은 높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처음에는 재미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삶의 고통이 우리를 눌러서 숨차게 만들어 보립니다. 또는 마라톤과도 같아 갈수록 숨이 차고 다리는 무거워지면서 어려워진다”고 말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은 하루에 2~3백번 정도 웃지만 성인은 하루에 열 번을 웃기도 힘들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생은 처음 출발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직업을 구하는 사람도 구하기 전에는 입사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2~3년만 지나면 직장은 피곤한 곳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인생에서도 형통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먼저, 창조자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시고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믿고 사랑하며 영원토록 그를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늘로부터 복이 내려옵니다. 가정이나 자녀, 건강의 복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줄 것입니다.
둘째,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라, 너는 겸손하게 봉사하라, 희생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 같은 인생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모든 도움을 하나님께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어야 건강의 소리, 축복의 소리, 가정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마치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훌륭한 연주자가 있더라도 바람을 불어넣어 주어야 훌륭한 소리가 나듯이 말입니다. 자신은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쏟아 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높여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각종 은혜를 경험하고 험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높여 자신의 인생과 사업에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록펠러입니다. 록펠러(1839~1937)는 석유의 왕으로서 미국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금세기 갑부 16인’ 중 1위로 꼽히고 있습니다. 록펠러는 33세 때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10년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3세 때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억만장자가 록펠러 혼자뿐이었으며 일주일 수입이 1백만 달러나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이 세상에서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데에는 어릴 때부터 유대인 어머니로부터 다음의 10가지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제일 첫 교훈인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친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지만 더 중요한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높이는 것, 바로 이 교훈이 록펠러를 성공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인생에 성공을 하기를 원한다면, 올 한 해 우리의 가정이 아브라함처럼 축복받는 가정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올 한 해 동안 하나님을 높이는 개인과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서 세계 만방에 높여 변화시키는 사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 세사의 부와 명예와 존귀를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높이는 여러분과 가정이 되어서 올 한 해,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조재호, <최신 추모설교집>, 청우, 2005, pp.68~71
② 제목: 야베스의 축복
찬송: 404장
성구: 역대상 4:9~10
오늘 본문을 보면 야베스는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그는 유다 족속에 속한 사람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족보도 없고 학벌도 모릅니다. 뚜렷한 업적도 없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를 가리켜서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명시해 놓아습니다. 야베스는 여러 형제 중에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야베스가 그런 축복을 받았겠습니까?
1. 고난과 고통의 댓가로 주어진 이름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그 어원이 ‘고통’이란 뜻의 ‘야차브’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존귀는 ‘고통의 댓가’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진주가 귀한 것은 조개 속에 들어간 모래알이 쓸릴 때마다 그 아픔을 이겨내며 수년간 진액으로 모래알을 싸고 또 감싸며 마침내 고통의 결정체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쟁과 고난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건하게 살았지만 오히려 한가하고 평안할 때 그의 신복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므로 큰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한가할 때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73을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훈장은 아무나 받을 수 없습니다. 고난을 극복한 혁혁한 공을 세운 자가 받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과 면류관도 고난 후에 받는 것입니다. 새로 시작된 이 한 해 동안 고난이 없기를 바라기보다는 가시와 엉겅퀴가 많은 세상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용기있는 성도가 되셔서 존귀한 자로 세움 받기를 바랍니다.
2. 야베스의 축복은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10절을 보면 야베스는 하나님께 간절히 축복을 사모하며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만큼 지혜롭고 복된 성도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삶의 형태를 ‘3y’체질이라고 합니다. 첫째, Hurry(서두르다), 둘째, Worry(염려하다), 셋째, Angry(분노하다) 이런 못된 체질을 바꾸는 일도 기도 외에는 다른 처방이 없습니다. 내가 서두르고, 염려하고, 화를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권고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기도생활을 본 받으면서 경건생활에 힘씁시다.
야베스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야베스의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그 좋으신 하나님께 기도해서 소원을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3. 지경을 넓힌 사람입니다.
지경이란 말은 땅과 땅의 경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야베스의 소원대로 그 지경을 넓혀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지경은 점점 더 확장되고 넓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장막도 넓어지고, 직장과 사업장도 점점 창대하고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큰 공장도 건축하고, 사업이 확장되셔서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이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차이가 납니다. 즉 넓은 마음을 갖느냐, 좁은 마음을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장수합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잘 삽니다. 좋은 마음, 협소한 생각, 이기적인 생각들이 언제나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고, 당황하게 만들고 장래성이 없는 후회하는 일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열왕기상 4:29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넓은 마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조카 롯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할 정도로 넓은 마음이었습니다.
눈을 들어 좀 넓게 세상을 바라봅시다. 하나님 앞에 넓게 구합시다.
‘하나님, 내 장막을, 내 기업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마음을 넓게 만들어 주옵소서’
새해에는 야베스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박현모, <최신 추모설교집>, 청우, 2005, pp.107~111
③ 제목: 내일과 자랑
찬송: 531장, 539장
성구: 잠언 27:1
1. 부질없는 세상 자랑
사람들은 자기 자랑, 자기 주변 자랑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자랑하고 있는 사람은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을 듣고 있는 다름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자랑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고, 어리석은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당신이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이 정말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모든 염려를 맡기고 믿음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둘러싸고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이 만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에게는 동일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잘 활용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항상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연속선이 있습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과 자극제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현재라고 하는 시간은 미래와 관계를 맺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과거의 사건이나 기억들 때문에 현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과거에 얽매여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과거의 불행했던 잔영들로부터 도저히 헤어나지 못한 채 현재와 미래의 삶도 불행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화려한 삶의 흔적들에 묻혀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추억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화려했던 삶이 현재의 나를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어 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거울의 역할을 감당할 때 시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의 삶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미래의 불행을 염두에 두지 못합니다. 현재만 만족할 수 있다면 내일의 삶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시간 개념을 가지 사람은 미래의 만족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삶을 조절합니다. 현재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내일의 행복에 장애가 된다면 현재의 욕망을 포기하고나 조절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쾌락의 노예가 되어 미래를 구겨놓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두 가지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염려와 근심 속에 살아가는 삶의 유형입니다.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우고, 열심히 준비하지만 여전히 걱정 투성이입니다. 불안과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염려와 걱정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안정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늘릴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우기가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삶은 당연히 내일에 대한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3. 진정한 자랑
우리 삶의 성취자는 내가 아니라 여호와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면서 장사하며 이를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이 안개임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허탄한 것입니다(약 4:13~17).
우리의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져가는 것들이 아닙니까?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우리가 자랑할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약한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밖에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오늘 정월 추모예배에 참여하신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잘 활용하고 제한된 시간 속에서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고백하면서, 또 주의 뜻을 좇아서 우리의 연약함 속에 일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고백하면서 살아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전형준, <장례예배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2005. pp.401~404
④ 제목: 예수님의 죽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나?
성구: 마가복음 10:45
원래 성경해석과 설교는 문맥 속에서 그 문단을 전체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원칙이겠느냐, 제목 설교나 주제설교에서는 성경의 한 구절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나 어구에 집중하여, 성경 전반의 사상을 설교하는 것도 필요하고 유익하다. 이번 경우가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 주해>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예수께서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이후에(막 10:32~34),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에(막 10:35~40) 대한 답으로 주신 내용, 즉 섬김의 도에 관한 말씀(막 10:41~45)의 마지막 구절이다. 원문에는 마가복음 10:45절을 시작하는 두 단어 ‘그리고 왜냐하면’이 접속사로 들어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이 앞에서 이야기 되던 섬김의 도에 관한 언급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마니 이 구절은 마가복음에서 가장 논의가 많이 되는 구절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구절과 연관되어, (1) 마가복음 10장 45절과의 관계와 통일성 문제 (2) 이사야 52장 13절에서 53장 12절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와의 연관성 문제 (3) 이 이야기 자체의 진정성 문제 등이 논란의 주제들이다.
필자는 마가복음 10장 45절이 앞부분(막 10:35~44)과 통일성 및 연관서이 있으며, 또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를 그 배경으로 가지고 있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것9진정성)으로 본다.
물론 자기희생이 섬김의 도의 최고봉임은 사실이다. 이 구절은 섬김의 도의 중심 구절이기도 하지만, 십자가 사건의 핵심구절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전서 2장 21~25절이 이사야 53장을 아주 만이 암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언급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구원론보다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본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교회사 속에서 마가복음 10장 45절은 베드로전서 2장 21~25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관한 중심구절로 사용되어 왔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의 경우 중요한 어휘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그 성경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주요한 어휘들을 중심으로 마가복음 10장 45절을 간략하게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1. 인자
예수의 인성이 강조된 ‘인자’의 개념은 구야에서는 시편이나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 등에서 발견되고 이사야에서는 하나님의 종의 개념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이 두 가지(인자와 종의 개념)가 이곳 마가복음에서 구약시대의 중요한 대속물의 개념(시 49:7)과 연결되어 있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에 사용된 ‘인자’라는 호칭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즐겨 쓰시던 용어인데, 지상적 인자(예수의 인성을 강조), 고난 받는 인자(고난과 죽으심을 강조), 묵시적인 인자(종말론적인 심판과 통치를 강조) 등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인자’라는 용어로 자신의 영광을 자원하여 가리고(막 8:38, 13:26, 14:26)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는 데까지 섬기심을 수행하려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빌 2:6~8).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렇게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며, 고난과 죽으심을 언급한다(막 10:32~34, 14:24).
2. 오다
‘오다’동사는 일차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며, 복음서에서 인자가 온 목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 즉 이 동사는 메시아의 사명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예를 들면, ‘오다’라는 동사를 마태복음 5장 17절(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완정을 위하여), 마태복음 10장 34~35절(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누가복음 12장 49절(불을 지르려고), 누가복음 19장 10절(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9장 39절(보는 사람을 못보게 하고 봇 보는 사람을 보게 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10장 10절(생명을 풍성히 주려고) 등에서 나온다.
마가복음에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라고 언급된 예수의 오신 목적은 이곳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인자는 섬기기 위하여 오셨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었다.
이는 이사야에 언급된 백성의 죄(사 53:5, 6, 8, 10~12)와 연결된 인자의 대리적 죽음의 사명을 암시한다.
3.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에서 “종이 주인의 식탁에서 봉사하다”라는 뜻이 있는 ‘디아코네오’동사는 명서(일군 혹은 집사, 그리고 그 직분)를 함하여 신약성경에서 100번이나 사용된 중요한 어휘이다.
기독교 지도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어휘인데 여기에서 주님의 섬김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신의 일생을 섬김의 일생으로 보신다. 그분의 성육신, 사역,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 모두는 인류를 위한 섬김의 생애이다.
그 중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에서 예수님의 섬김은 최고조에 이른다. 인자의 죽으심은 단지 비극적인 사건도 용기 있는 순교의 죽음도 아니고 오직 모든 사람을 위한 최고의 희생이었다. 이 어휘는 이사야 52장 13절과 53장 11절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4. 자기 목숨을
‘자기 목숨을’이라는 어구는 뒤에 나오는 동사 ‘주다’와 함께 이사야 53장 10절과 12절을 암시한다. 물론 “목숨을 대속물로 주다”는 출애굽기 21장 30절과 같은 곳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목숨’은 전인격을 표현하며 동시에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말씀하시고, 자신도 자신의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원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말씀하셨다(요 10:11, 15, 18). 그리고 신약에서 마가복음 10장 45절과 매우 비슷한 어구인 디모데전서 2장 6절에서는 바울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고 기록할 때, 목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어휘를 쓰고 있다. 예수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목숨 즉,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희새을 통하여 섬김의 본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죄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여셨다.
5. 많은 사람의
이사야 53장 11~12절을 암송한 결과라고 보여 진다. 신약에서 비슷한 어구인 디모데전서 2장 6절에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나오는 전치사가 들어간 합성어가 쓰인 대신에 전치사는 ‘안티’(교환의 있는 ‘대신하여’의 뜻과 ‘위하여’의 뜻이 있으나, 속전과 관련하여는 전자가 유력하다)에서 ‘휘페르’(‘위하여’라는 뜻)로 바뀌었다. 또한 ‘많은 (사람)’대신에 ‘모든 (사람)’으로 바뀌었다(막 14:24, 마 26:28에서도 ‘모든’으로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다소 상이하게 보이는 어구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동일한 단어들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많은’과 ‘위하여’라는 어구는 이후에도 마가복음 14장 24절(“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에서 나오고 있다. 이 어구는 제한속죄설이냐 만인구원설이냐에 대한 논쟁의 근가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랍비문헌이나 심지어 쿰란 문서에서도 ‘많은’이라는 용어는 “선택받은 공동체, 즉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표현하는 전문용어였다. 그러므로 이 어구는 속죄의 목적과 효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벧전 1:18~19)를 나타내는 어구이다.
6. 대속물
‘대속물’ 어휘는 신약성경에서 이곳과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20장 28절에만 나온다. 이사야 53장 10절의 속건 제물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라는 어구 전체가 디모데적서 2장 6절의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과 흡사하고, 동시에 전체적으로 이사야 53장 10~12절을 암시한다.
이 대속물 속은 속전이라는 어휘는 그 동족어와 함께 칠십인 역에 140여 회 사용되었는데, 값을 주고 노예, 전쟁 포로, 채무자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는 데 지불하는 값을 의미하며, 이것은 필로나 요세푸스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신약의 속죄의 개념이 나왔다. 이 ‘뤼트론’의 동사형 ‘뤼트로마이’(대속하다)는 신약에서 누가복음 24장 21절과 디도서 2장 14절과 베드로전서 1장 18절에 사용됐다. 그리고 대속물을 주고 성취한 사실을 말하는 ‘뤼트로시스’는 누가복음 1장 18절과 2장 38절에 그리고 히브리서 9장 12절 등에서 사용되었다.
이렇게 대속물을 주고 성취한 상태, 즉 ‘속량’ 혹은 ‘구속’을 의미하는 동족어가 ‘아포뤼트로시스’인데, 바울 서신들에서(롬 3:24, 8:23, 고전 1:30, 엡 1:7, 14, 4:30, 골 1:14) 집중적으로 나온다. 이 어휘도 “노예를 값 자고 사서 해방시키다”는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값 주고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사서 해방을 주셨다(고전 1:30, 히 2:14~16).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값 주고 사셔서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고전 6:19~20).
이 대속물이라는 어휘는 이사야 52장 3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의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대속물이며 왜 대속물이 요구되는가? 등과 같은 질문이 대두된다. 이사야 53장 12절의 뒷부분(“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회개를 외치셨던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죽였으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대속물로 죽으시고 그의 피는 바라던 새 언약이 실현되도록 하였다(막 14:24).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은유로도 그 한 가지 만으로 구원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7. 주다
‘주다’ 동사는 인자의 죽음의 자발성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 속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혹은 외아들을 주셨다고 언급한다(요 10:11, 15, 17~18, 롬 8:32, 요 3:16, 갈 1:4, 딛 2:14 등). 이는 예수님 자신의 자원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내어주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도사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에는 예수님의 자원성과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을 어구별로 살펴본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죽으심은 이사야의 종의 노래(사 52:13~53:12)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의 죽으심은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이다. 그의 죽으심은 대속적이다(막 10:45, 딤전 2:6). 그의 죽으심은 자발적이다(막 10:45, 요 10:11, 15). 그의 죽으심은 속죄적이다(막 10:45, 사 53:10). 그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요 3:16, 롬 8:32).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을 구원과 연관하여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 구원의 다양한 측면이나 구원과정의 다양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다면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본문 적용>
이 본문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적용 할 수 있는 측면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모든 분야에서의 섬기는 지도력에 대한 가르침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초점을 맞춘 원시적인 복음 메시지이다. 그러나 본고의 목적은 첫째에 있지 아니하고 둘째에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맞추어서 설교를 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소대지로 설교할 것을 제안한다.
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왜냐면 우리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 독생자의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이다.
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종말론적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섬김, 희생, 속죄의 완성일 뿐만 아니라 최종적이다.
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대속적이다. 인자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셨다. 그 죄 값을 대신 치루셨다.
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발적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라의 표시이며, 죽는 데까지 이른 아들의 자발적인 순종이다.
마. 예수님의 죽으심은 속죄적이다. 인자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다. 죄 용서뿐만 아니라 그 권세와 결과(정죄와 사망)로부터 해방하셨다.
그리고 만약 이 설교에 만추어서 찬양을 한다면, 이젠 고전이 되어버린 영국의 복음성가 작사가이자 작곡가이며 가수인 그레이험 켄트릭(Graham Kendrik)의 ‘섬기는 왕’(The Servant King)이 아주 잘 어울린다.
또한 조직신학적인 축면에서의 고려사항이 있다면, 제한 속죄설이냐 만인구원설이냐의 문제와 아울러 속죄론에 있어서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소개와 강조 등일 것이다.
※ 장동수, <그말씀> 2005년 7월, 2005, pp.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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