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준의 그녀 박수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미녀/ 황교안 후보자를 위한 기도문 2015-05-29 12:00:19 read : 537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배용준의 그녀 박수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미녀였네요
▲배용준과 결혼을 앞둔 박수진. 소속사 키이스트 캡처 배용준이 올린 박수진과 커플 사진. 인터넷 캡처
올해 결혼을 앞둔 가장 핫한 스타 커플은 배용준 박수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누나의 눈에는 둘의 의외의 조합뿐만 아니라 이 커플이 참석한다는 크리스천 모임에 관심이 갔습니다. 원조 한류스타 ‘욘사마’ 배용준은 박수진이 속한 크리스천 여자 연예인 모임인 ‘하미모’에 여러번 동반 참석했다고 합니다.
‘하미모’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미녀들의 모임의 준말입니다. 엄정화 김성은 예지원 한혜진 엄지원 정혜영 등이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미모는 성경공부를 하고,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고 있습니다.
박수진의 신앙도 덩달아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는 2012년 한 기독교매체 ‘열매맺는 나무’와의 인터뷰에서 연예 활동을 하며 힘든 순간마다 하미모가 큰 힘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중보 기도해주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인기 많고, 인정받는 여배우들이 본인에게 흠이 될 수도 있는 고백을 하면서 눈물로 회개하는 모습은 박수진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는 군요. 그러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하나님 안에서 다시 깨닫고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박수진은 가족의 건강 때문에 간절히 하나님을 붙잡게 됐다고 합니다.
그는 “그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라는 것을 경험했다”며 “아무 것도 없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항상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과 그 상황에 따른 배움을 주시니까, 그냥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긴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얼굴만큼이나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지난 2월 교제를 시작해 최근 양가 상견례를 마치고 올해 가을 결혼은 앞둔 배용준 박수진 커플을 축복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내뿜는 부부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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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성공회 동성애자 목사 “성전환자 위한 예배 의식 만들자”
주교회의서 논의할 것 제안해 논란
영국성공회의 한 교구 목사가 성전환을 축하하는 예배 의식을 제안, 논란이 일고 있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랭커스터 교구 목사인 크리스 뉴랜즈(Chris Newlands) 목사는 교회의 대의원회의(Synod)에 “성전환자들이 교회에서 환영받고 정착하기 위해서 이것이 필요하다”면서 “성전환에 대해 기념할 수 있는 예배 의식을 영국성공회 차원에서 마련할 필요가 있는지 논의하는 주교회의를 열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동성애자인 뉴랜즈는 가디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교회가 성전환자들에게 축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같이 제안했다”며 “성전환자들은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등 엄청난 트라우마를 받는다. 교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영접해 준다는, 선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뉴랜즈는 성전환을 한 한 교인을 보고 이 같은 제안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교인이 다시 세례를 받고 싶어하기에 뉴랜즈는 “세례를 한 번 받았으면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나는 소녀일 때 지금과 다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성(性)과 새로운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뉴랜즈는 “그래서 내가 그 멤버에게 ‘한번 생각해 보자’고 말했고, 우리는 결국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성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세례 의식 등을 실시하는 예배 의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뉴랜즈는 이전에도 동성애와 관련해 영국성공회에 문제를 제기했었다. 지난 2012년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사제들에 대해 영국성공회가 ‘유리 천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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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후보자를 위한 기도문(?)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기도문 돌아
황교안 신임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키기 위한 기도문이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돌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황 총리 후보자 관련 기도문은 “황교안 총리 후보 지명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는 자랑스런 기독교인입니다. 어릴때부터 성일침례교회를 다녔고, 그 바쁜 공직생활(검사) 중에도 야간신학대학을 나온 전도사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점으로 미루어 개신교인임으로 추정된다.
기도문은 계속해서 “황교안 후보는 현재 안티 기독교 분자들과 불교인, 종북좌파들의 극렬한 반대를 받고있습니다. 황 후보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에 다니엘과 같이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에겐 천군만마와 같습니다”고 이어졌다.
한편 황교안 후보자는 부인의 금융자산이 최근 6년만에 30배인 약 6억 원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딸이 총리 내정 사실을 사전에 통보 받은 뒤 발표되기 직전에 증여세를 급하게 납부한 것으로 보도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다음은 기도문 전문이다.
황교안 총리 후보 지명자
그는 자랑스런 기독인입니다.
어릴 때부터 성일침례교회를 다녔고, 그 바쁜 공직생활(검사) 중에도 야간 신학대학을 나온 전도사입니다. 여주에 있는 기독교 민영 아가페 교도소의 이사를 12년간 맡기도 했습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때 정부대리인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석기의 국회의원 뺏지를 떼어냈고, 종북좌파의 온실 통진당을 해산한 일에 두 팔을 걷어부치고 앞장섰습니다.
황교안 후보는 한 때 검은 승복을 입고 죽창을 휘둘러 국민을 놀라게한 “조계종 폭력사태” 때 폭력에 가담했던 땡중들 130명을 연행하여 가담 정도와 죄질에 따라 전원 사법처리 했습니다.
황교안 후보는 현재 안티 기독교분자들과 불교인, 종북좌파들의 극렬한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황 후보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에 다니엘과 같이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에겐 천군만마와 같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기도하는 지인들에게 이글을 전달하여 우리가 함께 기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한 것이 될 것입니다.
2015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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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가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단 이유
한 달 전, "내 식대로 아파하자"…"노란 리본 보면 힘이 돼요" 유가족 말 듣고 변화
박요셉 기자
세월호 참사 이후 시민들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기 시작했다. 가방이나 핸드폰에 리본을 걸거나 페이스북·카카오톡 프로필에 자기 얼굴 대신 노란 리본을 올렸다.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들은 공식 석상에 노란 리본을 달고 나왔다. 한때 광화문광장, 시청광장, 홍대입구역 주변은 노란 리본으로 물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노란 리본 물결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세월호 참사 1주기 때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울·안산·광주·부산 등 전국 각지를 노랗게 물들였다. 지금도 광화문광장과 안산합동분향소에 가면 노란 리본을 단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평소 노란 리본을 달지 않은 김동호 목사(높은뜻연합선교회 대표)도 최근 리본을 달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5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는 글을 올렸다.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김 목사의 체크무늬 양복 상의 가슴에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김 목사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노란 리본을 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지난 4월 15일 페이스북에 밝혔다.
▲ 평소 노란 리본을 달지 않던 김동호 목사는 지난 5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란 리본을 달기 시작했다고 했다.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 대화한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세월호 1주기.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정치인들. 정치인들이라고 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별로 진실성은 없어 보인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거리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 같은 느낌이 든다"
김 목사는 자신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누가 뭐라 한다고 노란 리본을 안 달 수 없지만, 누가 뭐라 한다고 노란 리본을 달 수도 없지 않은가"라며 노란 리본을 갖고 이래라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노란 리본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노란 리본 달았다고 다 바리새인이 아니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모두 다 보수 꼴통도 아니다."
김 목사는 노란 리본을 떠나 각자의 방식대로 아파하자며 글을 맺는다. "노란 리본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고,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너는 네 식대로 아파하고,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좀 아파하자"고 했다.
현재 김 목사의 글은 5만 6,000여 명이 팔로우(그 사람이 올리는 글을 볼 수 있는 기능)하고 있다. 마침 그가 이 글을 올린 날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날. 그의 글은 사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280여 명의 사람들이 댓글을 달며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김 목사의 글에 공감을 표한 한 누리꾼은 "노란 리본이 각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아파서 달고 어떤 사람은 노란 리본으로 마음을 표현하기가 부족해 달지 않습니다. 노란 리본보다 이제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부터 돌아보고 수리해야겠다는 사람은 없을까요?" 하고 댓글을 남겼다. 또 다른 누리꾼도 "꼭 노란 리본을 달아야 애도하고 아파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는 이 일이 벌어지지 않게 각자가 반성하고 나부터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고 했다.
누리꾼들 중에는 반대 입장을 가진 이도 있었다. 한 누리꾼은 "(노란 리본을) 다는 게 맞습니다. 유가족들에게는 그게 살아갈 힘이니까요. 많은 이가 잊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그 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메시지입니다"고 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 아파한다는 것은 그들의 방식대로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식대로'라는 말은 방관자의 변명으로 이용되기 좋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노란 리본을 달고 가족 편에 서서 진실을 밝히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고 했다.
김동호 목사는 이러한 댓글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노란 리본도 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후 노란 리본을 단 것이다.
김 목사가 실종자·희생자 부모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 목사는 5월 22일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을 만나 식사를 같이 했다. 이때 유가족 중 한 명이 김 목사에게 소책자 몇 권과 노란 리본을 건네주며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힘이 되어요" 하고 말했다.
이날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은 김 목사에게 한국교회에 느끼는 아쉬움도 전했다. 가족들은 대다수 교회들이 먼발치에서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들에게는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교회가 세월호 참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약한 자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고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유가족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그냥 달기로 했다. 장미 꽃 한 송이 꺾어 드리는 심정으로"라고 했다.
누리꾼들은 김 목사의 변화를 환영했다. "고맙습니다", "잘하셨습니다"는 등의 댓글이 주를 이뤘다. 한 누리꾼은 "내 식대로의 관점보다 유가족이 원하는 대로의 관점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더 반갑습니다. 직접 만나고 변한 게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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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눈으로 본 교회 위기, 책으로 펴낸 젊은 물리학 교수
[인터뷰] 전남대 황인각 교수,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예수를 제대로 알아야"
박요셉 기자
▲ 전공서 한 권 써내지 않은 물리학 교수가 신앙 서적을 냈다. 전남대학교 물리학과 황인각 교수. 그는 평신도의 눈으로 본 한국교회 모습을 책으로 풀어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전공서 한 권 써내지 않은 물리학 교수가 신앙 서적을 냈다. 저자는 고등학생 때 예수를 영접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공부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젊은 나이에 교수직에 올랐다. 그렇다고 이 책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잘하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었다고 고백하는 간증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교회를 상대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저자는 20여 년 신앙생활을 하면서 9번 교회를 옮겼다. 집이 이사를 가 옮긴 탓도 있지만, 교회에 분쟁이 나고, 빚 때문에 예배당이 경매로 넘어가고, 교회와 저자의 신앙이 안 맞는 등 여러 이유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스무 명 남짓한 개척교회부터 수천 명에 이르는 대형 교회까지 여러 규모의 교회를 거쳤다.
그가 여러 교회들을 옮기면서 보았던 한국교회 문제점들을 책에 담았다. 실적 위주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 말씀은 없고 개인의 생각이 나열되는 설교와 예배, 다음 주에 나오라는 말만 전하는 주일학교, 명예와 체면으로 이뤄지는 봉사 등. 책의 제목은 '성도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이다. 마치 '나는 이렇게 안녕하지 못한데 당신들은 안녕하냐'고 묻는 것 같다.
▲ <성도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책의 제목이 마치 '나는 이렇게 안녕하지 못한데 당신들은 안녕하냐'고 묻는 것 같다.
<뉴스앤조이> 기자는 평신도인 그가 한국교회 문제를 꼬집는 책을 쓴 이유를 묻기 위해, 책의 저자 황인각 교수(전남대학교 물리학과)를 만났다.
황인각 교수는 세 그룹을 염두하고 책을 썼다고 했다. 전반부는 교인들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있는 목회자들과 앞에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교인들, 후반부는 문제 의식을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황 교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전도 집회 때 들은 설교가 교회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가 왜 구세주인지,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학 선교 단체 경험도 신앙의 틀을 잡아 주었다.
"대학에 가서 CCC라는 선교 단체에 들어갔어요. 아침마다 동기들과 성경 구절을 묵상했는데,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는 시간이었어요. 2학년 때는 순장이 됐어요. 순장은 전도를 해야 하고 소그룹을 인도해야 해요. 교회를 다닌 지 3년도 안 된 제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요. 성경을 읽을 때도 이전과 달랐어요.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해 성경을 읽으니 더 깊이 말씀을 묵상할 수 있었고, 혼자 감격하고 울 때가 많았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 마치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목사님 말씀에 잘 순종하는 모범적인 기독교인처럼 보인다.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책을 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언제부터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했는지 물었다.
"대학생 때부터예요.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라고 말해요. 선교 단체에서 이런 내용을 배웠죠.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목회자가 없더라도 학생들끼리 모여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전하면 그게 교회라고요.
그런데 교회는 다르게 가르쳤어요. 교회가 목회자 중심, 예배당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요. 교인들도 수동적이었어요. 대학부 학생들에게 성경 공부를 하자고 하면, 목사님 없이 우리들끼리 어떻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느냐 그러다 큰일 난다는 식이에요. 담임목사도 우리들끼리 성경 공부하는 것을 금지했어요."
황 교수는 교회를 9번 옮겼다. 유학이나 이사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교회 안의 갈등 때문이었다. 황 교수는 이러한 문제들이 일부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처음 다니던 교회에는 분쟁이 생겼어요. 장로들이 목사를 쫓아냈어요. 설교 시간에 교인들이 소리 지르고, 목사와 장로들이 험한 말을 하며 몸싸움을 벌였어요. 결국 목사님은 몇몇 교인과 함께 교회를 떠났어요.
새로 옮긴 교회는 빚을 갚지 못해 망했어요. 스무 가정이 모이는 교회였어요. 가족 같은 분위기였죠. 그런데 담임목사가 새로 오더니 교회가 달라졌어요. 더 성장해야 한다며 갑자기 새 건물로 옮겼어요. 그러고는 1년 후 빚을 못 갚아 예배당을 내놓았죠. 목사는 어느 날부터 교회에 안 나오고 교인들은 모두 다른 교회로 흩어졌어요."
▲ 황인각 교수는 교회에서 느끼는 분노와 답답함을 글로 풀었다. 어떤 이유로 자신이 화가 나는 건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무엇인지 정리했다. <성도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황 교수는 9년 전 광주에 있는 교회에 다닌 게 책을 쓴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전남대학교에서 교수로 채용되어 광주에 처음 왔을 때였다. 집과 가까운 대형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주일예배가 끝날 때마다 황 교수는 분통함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설교를 듣고 화가 났어요.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친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울 거다'는 등의 애기만 했어요. 그냥 좋다, 은혜롭다, 기쁘다는 식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우리가 말씀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의 설교는 하지 않았어요. 교인들은 그런 말씀에 열광했어요. 그걸 보자 퍼뜩 정신이 깨면서 나라도 흐지부지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예배가 끝날 때마다 속에 있는 분노와 답답함을 글로 풀었다. 어떤 이유로 자신이 화가 나는 건지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오늘날 교회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묻고 글로 답했다.
"오늘날의 교회는 진리를 배우고 영적인 훈련을 하기에 불편한 곳이 되어 버렸다.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더라도 자신들이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에 그리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교회는 다른 데에 마음이 쏠려 있다. 교회를 어떻게 부흥시킬까. 어떻게 행사를 성대하게 진행할까.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까. 건축은 어떻게 할까, 돈은 어떻게 모을까 등을 고민한다.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는 데 힘을 다 쏟느라고 더 본질적인 고민을 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이런 현실적인 고민도 때때로 필요하겠지만, 이것들이 교회 활동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25쪽)
그는 한국교회 문제가 목회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모두의 문제라고 했다. 교회가 회복하려면 평신도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목회자만 의지하지 말고,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자 스스로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지인과 신앙에 대해 얘기하면 한계에 부딪혀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관념으로 받아들입니다. 결국 제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더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 그런데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교회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는 거라고. 그런데 지금 우리 모습이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나요."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뿜어내요. 향수가 향을 발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 말이에요.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진다는 말씀을 보세요.
우리의 존재와 일상의 삶에서 '예수 맛'이 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지닐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자신의 존재에 충실할 때 자연스레 세상은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이 사람들 안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어떤 것이 있구나', '그들은 살아 있고, 서로 사랑하는구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18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 그레이스홀에서 ‘두날개의 이단성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다.
합신 이대위 유영권 목사는 두날개에 대한 연구 배경에 대해 “정확하진 않지만 저희 교단의 50여개 이상 교회가 두날개를 하고 있으며, 그중 몇 교회는 아주 큰 어려움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날개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겠다는 상담과 의견들이 들어와 두날개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분명히 알게 해 이미 두날개를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이 이를 지속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판단토록 돕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공청회를 일방적으로 강행했다는 김성곤 목사 측의 주장에 대해 유 목사는 “지난 2월에 김성곤 목사와 만나 참여하겠다는 응답을 받았다. 하지만 며칠 후 공청회를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받았다. 하지만 공청회는 두날개를 힘들게 하는 목적이 아니고, 두날개가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라면 활성화 되도록 돕고 문제가 있다면 고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2005년부터 두날개에 대해 조사해왔다는 김성한 목사는 “두날개는 기존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지 성장을 돕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모태신앙에서 자란 김성곤 목사는 30세가 돼서야 주님을 영접했는데 교회에 30년을 열심히 다녀도 사람하나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교회를 개혁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개혁을 하고자 한다면 개혁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김 목사는 김성곤 목사 측의 기존 교회에 대한 진단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한다.
김성한 목사는 두날개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다락방과 베뢰아, 신사도운동과 더불어 다단계피라미드 혼합돼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담임목사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는 것을 넘어 예수님과 동급처럼 각인시킨다는 점 등을 문제삼았다.
수정했다고 하는 교재마저도 몇몇 단어만 바꿨을 뿐 모든 것이 ‘눈 가리고 아웅’ 식이라고 김성한 목사는 지적했다.
김성한 목사는 성장주의 셀교회에서 벗어나 장로교회의 풍성함을 회복할 것, 축제예배에서 경건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돌아갈 것, 현세적, 기복적, 신비주의적 신앙에서 벗어나, 성경적인 개혁주의 신학으로 회복할 것 등을 수용하지 않으면 두날개를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형택 목사는 교리적인 부분에 집중해 두날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먼저 박 목사는 이번 공청회가 노회 헌의에 따른 정상적인 과정일 뿐이라며 김성곤 목사를 일부러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두날개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 셀 운동의 문제점, 삼위일체 존재방식이 공동체적이라는 교리, 가계저주론, 죄의 혈통유전설, 쓴 뿌리 사상, 인간 3분설, 신사도운동의 용어와 흔적들 등을 거론하며 이단성이 있음을 설명했다.
박 목사는 “두 날개 양육 시스템이 교회 전도에 유익하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나 기존교외와 틀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있고, 두날개 지상주의로 마치 두날개 시스템이 하나님이 디자인한 교회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과거에 알파코스나 G12나 D12나 두날개나 거의 동일한 방법과 위험한 사상과 교리가 있어 목회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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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오늘날 어떻게 지켜야 하나?
레위기·민수기 넘어 신명기 관점으로…
교회 공동체와 선교·구제 위해 사용
권성권
새벽 시간에 신명기 26장을 읽어 나가는데 '첫 소산물'과 '셋째 해의 십일조'의 규례가 나왔습니다. 그 두 규례는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나눔'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어요. 모세가 광야 40년을 회고하면서 새로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세대를 바라보면서 설교한 게 신명기죠. 그중 '첫 소산물'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얻게 될 모든 소출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영원히 기억토록 하는 차원에서 강조한 규례죠.
그럼 '셋째 해의 십일조'는 무엇일까요? 첫째와 둘째와 셋째의 십일조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사실 십일조의 법적 규례는 40년 광야가 시작되는 레위기(레 27:30)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레 27:32)까지 모두 당신의 것임을 친히 밝히셨죠.
그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을 때 그가 '하늘과 땅의 소유권자'(קָנָה, 창 14:19)로 하나님을 가리킨 것과 같은 격이죠. 물론 아브라함은 그때 율법의 규례 이전에 사랑과 감사의 표현으로 그걸 드렸었죠.
레위기에 기반을 둔 민수기는 그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주라고 명령을 합니다(민 18:21). 대부분의 성물(聖物)이 제사장에게 돌아가게 했지만 십일조만큼은 레위인에게 주도록 했고,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주게 한 것이죠. 다만 민수기는 법적 강제성보다 자발적 헌신에 방점을(민 18:24) 두죠. 물론 후대에 갈수록 자원치 않기 때문에 히스기야(대하 31:4-19)나 느헤미야(느 10:37-38) 같은 지도자들이 그걸 강제하려고 힘을 기울였죠.
그처럼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초점을 맞췄죠. 그런데 가나안 땅을 바라보던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 그 십일조 규례의 무게중심을 이동하게 되죠. 이른바 광야의 이동식 성막이 아닌 가나안 땅의 '하나님의 택하신 곳'(신 14:23a)에서 드리게 했고,
그걸 통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배우도록'(14:12b) 했고, '붙박이 성전'이 너무 멀면 '돈을 가지고 가서 원하는 걸 구입토록'(신 14:24-26a) 했고, 그 성전에서 제사장과 '백성들까지도 함께 먹고 마시게'(신 14:26) 한 게 그것이죠.
그런 십일조 규례를 해마다 지키도록 강력히 주문했는데, 문제는 그 땅의 가난과 죽음과 질병으로 인해 생겨나는 고아나 과부, 그리고 나그네가 문제였죠. 그래서 모세는 그런 다양한 층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도록
'셋째 해의 십일조'를 그들에게 사용케 한 것입니다(신 14:28-29). 7년 안식년을 기준으로 3년째와 6년째의 십일조를 성읍에 모아 그들에게 주게 했고, 7년 안식년의 휴경 때 나오는 소산물로도 그들이 먹고 살도록 배려하게 했던 것입니다.1)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레위기나 민수기의 십일조 규례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막의 레위인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신명기의 십일조 규례는 하나님의 나라로 선언한 그 땅의 다양한 층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제사법적인 측면에서 사회·문화적인 측면과 인권적인 측면을 내다보게 하신 셈이죠.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 가운데 하나인 십일조 규례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 시내 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었고, 그때 비로소 율례와 법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을 그로부터 40년 동안 훈련받았고, 하나님 나라를 일굴 가나안 땅에서는 그 율법을 이정표로 삼아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하셨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크리스천들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친자녀로서 구약의 율례와 법도를 준수해야 하죠. 다만 중세의 유대 랍비이자 사상가인 마이모네데스(Maimonides)가 그걸 613가지로 분류했고, 오늘날엔 제사법과 정치·경제·사회·문화·인권 등의 도덕법, 그리고 음식법을 포함한 정결법 등의 세 가지로 나누죠.
그중 제사법과 정결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전환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죠. 다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된다고 한 것,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한 것, 정치·경제·사회·문화·인권과 같은 도덕법은 지켜야 할 몫입니다.2)
그중 십일조를 레위기나 민수기의 관점을 넘어 신명기의 관점으로 확대 해석하여 살핀다면 어떨까요? 이른바 사회·문화적인 측면과 인권을 위한 도덕법적인 차원으로 바라볼 때, 오늘날에도 충분히 지켜야 할 일이지 않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고, 바울도 구제 성격의 연보를 언급한 바 있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막 12:17)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위의 말씀들이 약간의 해석이 필요하긴 하지만, 어찌됐든 그 근간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도 십일조를 지키는 게 좋다는 점이죠. 그것은 모든 소유물 가운데 10분 1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신앙 자세요,
율법의 차원 이전에 아브라함처럼 감사와 사랑의 표현으로 드리면 좋겠고, 혹시라도 율법의 도덕법적인 차원 즉 사회·문화·인권적인 차원에서 십일조를 해석하여 드려도 무방치 않을까 싶어요. 물론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에 기인하도록 교회가 유도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다만 교회는 어떻게 그 십일조를 사용해야 할까요? 구약에서는 첫째와 둘째 십일조를 성전에 가져와 레위인과 함께 모든 백성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용도로 사용했다면, 셋째 십일조는 레위인은 물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해 구제하는 데 사용토록 했죠.3)
그걸 현대 교회가 적용한다면 우선은 '성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 2:20-22)를 중심으로 함께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면 되겠죠. 예배를 비롯한 교회 내의 모든 제반 사항들에 사용하는 것 말이죠. 그걸 매 3년 중 2년째의 십일조로 하기보다는 현대 상황에 맞게 모든 십일조 중의 3분의 2를 그렇게 쓰면 되겠죠.
셋째 해의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록된 토라 이외에 구전 토라, 즉 모세오경의 유권해석집과 같은 성격의 미슈나에는 매해 소출의 십일조 외에 매해 3%를 따로 내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에게 나누라는 지침이 있다고 하죠.4) 그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할 때, 앞선 3분의 2 이외에 나머지 3분의 1을 구제와 선교 비용으로 쓰면 될 것입니다. 특별한 선교 헌금의 명목으로 따로 걷을 게 아니라 그 십일조로 그 용도로 정확하게 쓰면 될 일이죠.
그것이 이상적인 십일조 규례와 그에 따른 사용법이라면,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가 어떻게 수용하고 지켜야 할지 명확해집니다. 작고 연약한 개척교회나 미자립 교회야 교회 내부를 위해 사용하는 십일조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일 테니, 200명 이상 모이는 중·대형 교회들이 십일조의 3분의 1을 그런 교회를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 곧 하나님나라를 함께 세워 가는 길이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일 테니 말이죠. 샬롬.
나는 요즘 뜻하지 않게 돈 많은 장로 한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면서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까 하는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사실은 전에도 그런 경험이 한번 있었는데 부천에서 재산세를 5번째로 많이 내던 고등학교 동창생과의 관계이었다. 아버지가 벽돌을 말릴 땅이 넓은 벽돌 공장을 했었기 때문에 벽돌을 말리기 위해서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땅 값이 올라서 부자가 된 친구이었다.
고교 때는 친한 사이였지만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가난한 자들을 대변해야하는 나의 입장과 처지가 너무 달라서 만날 일이 없는 친구였다. 그런데 평소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일부러 외면할 수밖에 없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웬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부자가 만나 주겠다는데 가난한 내가 손해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얼른 달려갔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글쎄 친구는 “네가 고생을 많이 하는데 그동안 가까이 있으면서 내가 너무 무심했다”면서 두둑한 봉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간밤에 예수님이 이 친구 면회를 왔었나?”하는 생각도 들고 하여간 감사한 마음으로 성금을 접수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새로 온 시장이 고등학교 선배인데 시장이 내가 동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한번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 뉴스를 전해주기 위해서 그동안 개인적으로는 만남이 없던 나를 초대했나 했더니 헤어질 때 시장을 만나면 자기를 만났다고만 하라고 했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당시 나에게는 큰돈인 기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적지 않은 돈을 본 순간 ‘모종의 음모’가 있구나 싶었지만 딱히 집히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장이 나를 길들이기 위해서 그 친구를 활용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그와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결국은 그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후원을 받기 위해서 무조건 비굴하게 타협만 할 수는 없어서 적당하게 자존심을 세우고 실익도 채워야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늘 긴장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자는 돈의 사용이 보통 사람들의 호흡과 같아서 기쁜 나쁜 것, 좋은 것, 해결책 등 모든 것을 돈으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돈이 가장 가깝고 쉽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미묘한 자기의 기분을 돈으로 표현하고 나는 그들이 나에게 돈을 얼마나 줄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피차 간에 보이지 않는 긴장관계가 존재했었다.
돈 많은 장로와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대화가 처음에는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다가도 진도가 나갈수록 점점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장갑을 끼고 만지는 것과 맨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사물과 상황에 대한 감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돈이라는 장갑을 끼고 만지기 때문에 감촉이 다른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돈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본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를 한다. 왜냐하면 지킬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늘 돈을 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시달림을 받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뜻으로라도 부자에게 함부로 접근하면 속으로 무시를 당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부자는 사람뿐만 아니라 정의나 양심, 이런 가치들에서도 자기를 지켜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이 정의나 양심을 주장하기는 쉽지만 부자가 그런 것을 주장하려면 자기 살을 베어 주어야 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위장의 상태에 따라서 주위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게 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하여 감각이 예민해지기 쉽지만, 배가 부르면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즉 배의 기름기와 눈의 시력은 비례한다. 기름기가 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사람들의 배고픔, 슬픔, 억울함 등이 정확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부자와 관계를 가질 때는 그는 나와 다르게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것을 내세운 것은 자본주의이고 ‘있는 놈이 더 무섭다’며 부자를 쫒아내자고 주장한 것은 마르크스였다. 인간이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부자도 자기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한 말씀은 영원한 진리일 수 밖에 없다.
지난 2008년 미국으로 유학을 온 이후 계속해서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 상황으로 변해가는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까를 고민해왔다. 무엇보다도 첨단의 이슈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낯선 종교인 이슬람과,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곁에 이웃이나 나그네로 다가온 무슬림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사회의 두 가지 대표적인 혐오주의는 이슬람과 동성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집단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극명하게 엇갈린다. 최근 동성애 옹호단체와의 충돌은 그들은 물론 안티기독교 세력에게 비난의 빌미를 주고 결국 기독교의 입지를 위축시키고 선교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호소하는 한 선교단체 대한 기사를 접했다.
나는 이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종교 간의 만남에서 가장 빈번하게 범해지는 실수는 나의 이상으로 상대의 현실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교리적, 신학적 입장에서 이슬람을 판단하고 공격한다. 생각해 보자. 이슬람의 교조인 무함마드를 공격하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를 공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모를 욕하는 원수를 대하듯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복수하려고 한다.
내가 공부하며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이슬람은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교회나 계몽주의를 경험하지 않은 기독교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원적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 성직자들과 율법학자들의 절대적 신임과 영향력, 무슬림이 꾸란을 대하는 절대공경의 태도(성육신 하신 알라의 말씀), 율법에 대한 절대복종 등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다. 적어도 보통 무슬림들의 종교적 세계관은 계몽주의 이후를 사는 서구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절대성의 신화 안에 갇혀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의 강점이 자기를 비판하고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불로 연단하는 과정을 지나며 살아남은 종교다. 계몽주의, 인문주의의 도전을 겪으며 기독교는 혹독할 정도로 시험의 과정을 지나왔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과학적 세계관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권에 의해 죽어갔는가? 하나님이 불러주신 거룩한 책이라 믿었던 성경을 낱낱이 쪼개버린 문서비평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거나 무신론자가 되었는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가르치는 유물주의, 공산주의를 통해 얼마나 혹독한 비판과 박해를 받았는가? 계몽주의와 현대의 도전은 기독교를 세상에서 한 세기 안에 없애버릴 것처럼 그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고 기독교는 새롭게 태어났다. 본질적 진리는 같지만 외면적으로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하게 되어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가치의 체계가 되었다. 합리주의, 이성주의와도 기꺼이 대화할 수 있는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이슬람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꾸란에 대한 역사비평, 문서비평은 아직도 감히 생각할 수 없다.
서구에서 활동하는 많은 온건주의 무슬림 학자들 중에는 이미 스스로 비판적인 사상가들이 의외로 많다. 불행히도 이런 논의가 아직까지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공론화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솔직하고 온건한 두 진영의 신학자들은 이미 많은 부분 서로의 본질에 대해 대화하고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인 작업은 아직 학자들의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이슬람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 무슬림들과의 삶의 현장에서 나누는 만남과 대화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표준은 나중에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이고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확신한 예수를 실제로 따르는데 있다. 근원으로 돌아가라. 이 근원에서 우리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슬림은 서로 더 가까워질 것이다(한스 큉).”
나는 성경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타종교인들을 대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는 황금율이 진리다. 나를 낮추고 먼저 존중하면 그런 대접이 돌아온다. 이것은 진리의 문제 이전에 예의의 문제다.
나는 손님을 대하는 정중한 예의로 그들을 대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2011년에 에큐메니칼 진영(WCC)과 복음주의 진영(WEA)이 역사적으로 합의한 원칙에도 잘 드러나 있다. “기독교 선교는 우월주의나 강압적 방식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으로, 전도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름으로, 도덕적으로 합당하게 행동하며, 섬김과 정의를 실천하고, 폭력을 배제하고, 상호존중과 협력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않는다.”(기독교 선교윤리) 상대를 비하하고 비방하는 것은 절대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95년부터 2007년까지 군목으로 섬기며 이미 체험한 바 있다. 군대라는 다종교가 공존하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신자가 상대를 존중하면 그들도 우리를 깍듯하게 대접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제 삼자가 판단하고 존중하는 쪽이 승자가 된다. 다른 종교를 대할 때 교리를 앞세워 비방하고 논쟁하려든다면 상대를 자극하여 결국 불필요한 싸움을 만들고 안티기독교 세력에게 빌미만 줄 뿐이다. 그 대가가 우리만 받을 핍박이라면 달게 받겠지만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선교의 문을 막아버린다는데 있다.
참된 선교는 십자군의 정신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말없이 먼저 희생하며 문화적,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일이 선교다. 그 다음은 성령이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판단하게 하실 것이다.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을 통과한 기독교의 매력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선교가 하나님의 역사(Missio Dei)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믿고 인정한다면 무슬림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상대를 품으려면 상대보다 그릇이 커야한다. 타 종교를 비방하지 말고 기독교의 진리를 내 삶으로 보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