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단점을 지적하면 공격적 태도로 돌변하는 편집증 / 4대 이단과 통일교, 뉴에이지까지… 대처법은 2012-11-23 10:39:24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충렬 박사의 ‘편집증’ 편집증의 심리적 특징과 이해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제2장 편집증의 심리적 특징과 이해
편집증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증상들을 갖게 마련이다. 이런 증상들은 일반인들이 편집증으로 인식하는 준거의 틀이다. 이들은 대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과 피해의식, 세상이 불공평하기에 모든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며, 자신은 항상 ‘피해자’라고 여긴다. 이런 피해의식이 심해지면 피해망상 수준까지로 진전되거나 발전된다.
편집증의 특성이 더욱 세분화되거나 전문화되면, 학자에 따라 소견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공통적 특성이 나타난다. 이런 편집증의 공통적 증상의 특성에는 크게 불안의 일차 원천들, 인지과정, 전형적 기분과 행동의 세 영역에서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고, 다른 관점에서 구분을 시도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심리적 특성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 신뢰성 결여
신뢰성 결여는 편집증의 1차 심리적 특징이다. 편집증은 타인을 의심하는 경향이 가장 특징적이다. 이는 편집증이 신뢰성과는 전혀 다른 의심의 측면이라 보는 이유이다. 실제로 편집증은 신뢰 결여에 근거하고, 신뢰 결여는 의심을 산출한다는 연관성이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친척이나 친구, 가까운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동기에 부당하게 회의적이면서 냉소적이고, 그리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전혀 악의가 없는 데도 그들에게 필경 어떤 숨겨진 의도나 음모가 있는 것으로 의심한다. 심지어 호의적인 일에도 숨겨진 의미를 찾고, 배우자나 친한 친구의 충실함과 정직성도 배신의 증거로 확대시킨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상대방이 자기가 계산한 시간보다 1분만 늦어도 바람을 피운 증거라 주장한다. 이런 의심은 기준이 매우 주관적이면서 완고하기에, 그들 스스로 세운 기준을 누구도 알 길이 없다.
일반인들은 그저 사회적인 통념에서 생각하고 활동하는데 비해, 이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어디서든 무엇에든 지나치게 예민하므로 속임수와 기만의 신호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작은 단서들을 찾아내 확대 및 왜곡해서 최악의 예상들을 확증하고 만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지극히 간단한 것인데도, 자기식의 생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선입견이 작용한 결과다. 예상된 의미를 확증하지 못하는 사건들을,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기만적이며 머리를 잘 굴리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입견은 그들 기준에 들지 않는 한에서는 어떤 사실도 다르게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시킴으로써 예상했던 대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성의 결여는 의심의 태도로 발전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의심적 태도는 다시 자기 자신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발전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허물어뜨리지 못하게 철저하게 방어하려 드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행동과 책임의 한계에서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편집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 관계적 사고와 자만심을 가지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상대방의 전혀 악의가 없는 행동이나 사건도 자신의 인격에 대한 공격으로 지각한다.
편집증의 편협한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것에 대한 강한 두려움에서, 나아가 그들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편집증 환자들이 자기결정권을 확증하는 수단으로 아무도 자신을 정복할 수 없다는 태도와 자만심을 갖는 이유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신이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함으로써 자신의 운명도 혼자 개척할 수 있다고 과신한다. 이런 과신으로 그들은 결코 누군가를 필요로 하거나 의지하지 않을 태도를 취한다.
편집증의 과신적 현상은 정상인들에게 때로는 긍정적인 측면으로도 평가된다. 물론 정확하게 보지 못한 결과이다. 그들의 생각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적개심에 기초하고 있는 비정상성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특성은 때로 정상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드러난다. 그들의 무기력감과 무능함을 스스로 자극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힘에 복종하는 입장에서 갑작스럽고 맹렬한 반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면 이런 반격은 다른 측면의 공격성이면서 자기방어의 일환이다. 그들은 의존성에 대한 위험을 느끼면서 자신의 지위를 다시 얻고자 고투하고, 속임수와 배신을 두려워하면서도 공격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비난할 뿐이다. 이때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면, 그들은 강력하고 사악한 힘들이 악한 의도로 자신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2. 박해받음과 통제력 상실
편집증에서 ‘박해받는다’는 관념은 2차 특징이다. 편집증에서 스스로 박해받는다고 생각하는 현상은 그럴만한 근거가 없음에도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요인이다. 이런 현상은 그들의 박해받는다는 생각이 굴욕당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점에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수동성을 간과할 수 없다. 박해나 굴욕 당함, 그리고 피해의식은 모두 수동화된 성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편집증에서의 수동성은 능동적 존재에서 수동적 존재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그들은 폭력적 박해를 당했든, 혹은 잔인하게 이용되었든 자신을 무자비하게 공격을 받는 무력한 대상이라고 느낀다.
편집증에서 ‘박해받음’은 때로 의식에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이상한 현상을 유발시킨다. 강렬한 성적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돼 때로는 전 생애에 걸쳐 위협당하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는가 하면, 스스로를 자기와 가장 친밀하거나 친밀하기를 원했던 사람들로부터 거칠고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의도를 가진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 대상이라 비하시키기도 한다.
그들이 정당하지 않은 행동을 보고도 심하게 의심하면서 스스로를 박해받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과도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들의 생각은 사고력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그들의 내면에서 작용되는 정신적 장치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스스로 그런 피해적인 사고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 작동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에게 나타나는 사고 과정이 일정한 과정을 거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슈레버에 관한 사례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슈레버가 겪었던 굴욕적인 신체 경험은 박해받음과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신체적 굴욕이 신(神)에 의해 겪은 굴욕인지 아버지의 냉혹하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겪은 굴욕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슈레버의 사고체계에서 아버지가 미친 듯 가하는 가학적이고 잔인한 일련의 신체적 고통은 자녀들을 훈련하기 위해 의도된 사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문자 그대로 자녀들의 의지를 꺾어 부모의 소원대로 따르는 순종적이고, 유순한 아이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편집증의 박해관념은 마치 중세 특수 고문기술에 대한 인상도 준다.
그러나 슈레버의 박해는 실제와는 다르게 그의 생각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 생각은 직접적이거나 공개적이지도 않았고, 실제와 다르게 생각 속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실로 그 박해는 다른 사람들이 박해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인데, 타인이 이들의 박해받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편집증 환자의 자존심과 고상한 사상에 거슬리는 불쾌한 일이 된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들의 의지에 대한 가학적 파괴와 이에 수반되는 계속되는 굴욕과 신체적인 고통은 부정되고 이상화된 동기가 작용한다고 인식돼야 하는 점이다. 이런 특성은 이들에게 박해적 사고를 만들어 내는 이른바 주형의 틀이다. 그런 점에서 편집증 환자는 어떤 형태로든 자율성과 자존감이 항상 공격받고 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스스로 ‘살해’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이 가능해진다. 이때 아동과 부모 사이라면 부모는 박해자로, 아동은 박해받는 자의 도식이 된다. 물론 여기는 힘의 우위성에 따른 것으로 강자와 약자로 여겨질 수 있는 조건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힘이 강한 사람은 박해자로, 힘이 약한 사람은 박해받는 자로 여긴다.
이런 기괴한 이론에는 아동은 사악하고, 파괴적이며, 악하므로 스스로 의지를 버릴 때까지 위험한 특성을 파괴하기 위해 부모가 매를 때려야 한다는 가정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박해하는 부모와 박해 당하는 아동 사이에 미묘한 공통분모가 발생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박해하는 부모인 경우 자녀가 부모의 박해를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동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자녀가 부모의 가상적인 박해 행위를 실제로 본다면 그 인식은 보다 더한 박해적 행동에 의해 파괴돼야 하는 반항의 형태가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아동은 자신이 박해받는다는 사실을 자신으로부터 숨겨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숨기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숨겨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편집증의 박해적 사고의 근거를 밝혀야 한다. 이들의 박해적 사고는 그들의 불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박해받는 사고는 편집증 환자로 하여금 타인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현상은 그들이 약하고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신뢰하거나 의지하는 것은 배신당할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며,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도망쳐버릴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보다 자신의 통제력과 자율성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겐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편집증이 자율성의 위협에 극히 예민해지고, 모든 의무적 행위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 권위에 지배당하거나 자기보다 더 강한 힘에 부속되는 것은 이들에게 극심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이로 인해 그들은 자신을 유혹하고 복종시키려는 미묘한 책략이므로 두려워하고 협력하는 것을 매우 꺼리게 된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그 어떤 것에도 끝까지 저항해야 하는데, 이런 저항이야말로 자신을 파괴시키려는 외부의 세력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내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이는 이들의 외부의 영향력에 대한 특징적인 저항은 애착불안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는 이유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애착이 될수록 그만큼 자율성은 침해당한다는 생각이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그들이 누군가와 밀접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면 통제력과 자율성을 잃게 된다는 생각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두려움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아무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못하도록 주의 깊게 경계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통합성과 지위를 다시 찾고자 고투하는 이유이다.
그런가 하면 전술한 것과 달리 편집증 환자는 스스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들은 속임수와 배신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은 공격적이 되고 자신을 핍박하는 대상에 대해 비난하며, 과대하게 포장된 장점들과 우월성을 드러내며 거기에 대응하여 자신을 추켜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들을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설정한 자기상과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강력한 힘이 자신을 조종하여 악의에 굴복하도록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편집증의 애착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하찮은 사람으로 전락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정신분열형에서의 불안과 유사하지만, 정신분열형과 달리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강화하는 점이 다르다. 그들은 자기결정권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고양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보상을 얻기 위해 적극적인 환상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러기에 외부로부터 능력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는 스스로 내부에서 그것을 만들어낸다. 이런 그들의 내적 세계는 거절과 고뇌의 경험들을 완전히 보상하고, 망상적 사고를 통해 실제보다 매력적인 이미지를 재구성한다.
3. 파괴적인 공격성
파괴적인 공격성은 편집증의 또다른 특징이다. 편집증 환자는 누군가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면 가차 없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이다. 그들은 작은 단점의 지적이라도 견디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강한 공격성으로 대응한다. 이런 점에서 편집증의 파괴적 공격성이란 자기애적 박탈감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그러한 자기애적 박탈감과 수치심은 굴욕감과 격노를 증가시킨다. 실제로 그들은 상처받은 자기애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데 공격성 뿐 아니라 다양한 방어기제를 동원한다.
그러면 이들의 공격성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마 해결되지 않은 공격성으로서 부모에 대한 양가감정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공격성을 다루는 일차적 기제가 투사라는 점에서 이것이 이해된다. 이 투사는 편집증 환자들의 자기감을 형성하는 이후의 내사물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방어기제로서는 매우 훌륭하게 사용되는 편이다. 이런 관점에서 코헛(H. Kohut)은 자기애의 발달적 병리 관점으로부터 병리적 내사에 뿌리내리는 고착되고 박탈된 자기애의 특성을 과대적 자기의 측면으로 이해했다.
이들의 공격성은 슈레버의 사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슈레버는 아내가 사산(死産)한 것에 대한 고뇌, 그리고 그에 따른 실망으로 남성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게다가 그에게 일어난 급성 심장장애는 매번 자신의 능력과 가치감에 도전을 받는 순간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모두 그들이 중요한 공적 자리에 새로운 책임자로 임명되거나 선출된 상황에서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옳다면 편집증 환자들은 명백한 성공에 직면하여 심장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 원인은 무의식적 죄책감 뿐 아니라, 환자 근저에 있는 무가치감, 부적절감 또는 자극이 없다는 느낌 등과 관련된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존경이나 성공에 대한 도전이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때 이런 현상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무가치감은 다시 공격성으로 되어 환자가 치료받을 자격이 없다고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이는 공격적 환자에게는 해소되지 않은 시기심이 있음을 상정한다.
그러면 편집증에서의 박해관념은 자기애의 역설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로부터 빼앗아온 것이라는 자기애적 지시를 따른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공격적 환자에게는 옳은 것이나 좋은 것들이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자기애가 도전받거나 위협받을 때 훨씬 더 취약해진다는 자기애의 역설에서 이해된다.
다르게 설명하면, 그들에게는 자기애가 위협받고 약해질수록 위험에 처한 자아는 전투를 준비하고, 즉시 그것을 방어하는 일에 파괴적인 공격성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슈레버의 사례는 일반적인 병리적 관점을 넘어선다. 그의 아동기는 엄격하고 징벌적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박해의 결과로만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아동기에 경험한 박해는 실제 박해였으나, 그것이 끼친 역동적 영향은 자기애적 박탈과 특히 연관된 정신적 상처인 외상(外傷)에 뿌리내리고 있다. 게다가 박탈되고 병리적으로 왜곡된 자기애는 성인기에 슈레버의 질병을 발생시켰고, 방어작용을 위한 공격성과 동기를 제공했다.
4. 방어적 분노
편집증은 분노를 특징으로 한다. 내면에 축적된 부정성이 분노를 유발한다는 점에서다. 게다가 이 분노는 그들에게는 공격보다는 방어적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비상사태나 위협을 항상 경계하고 준비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위험들을 만나든 그렇지 않든 공격과 명예훼손의 가능성에 대해 고정된 수준의 준비성과 경계심을 유지한다. 그들이 아주 사소한 위협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단서에도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항상 초조한 긴장과 방어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직된 통제 상태는 그들에게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이완되어 편안히 경계를 푸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는 아마도 나름의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상대방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특성이 바로 일종의 적개심에서 비소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편집증 환자의 표면에는 불신과 방어적이라는 경계심이 드러난다.
그 현상의 바탕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다른 사람들을 향한 깊은 적개심이 흐르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지위를 부당하게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이 세계를 속이는 이른바 ‘높고 권력 있는 사람들’, ‘사기꾼과 도둑들’에 의해 무시되고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이유이다. 다만 그것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런 적대감을 적당히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편집증 환자의 방어성은 매우 특이한 점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는 귀인(歸因)을 시도함으로써 자존감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다. 이로 인해 그들은 특유의 방식으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방어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다른 방어적 차원의 하나로서 그들은 자신의 실패를 부정하고, 무엇이든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편집증에서 그렇게도 중요시되는 투사의 존재를 암시한다. 또 그들은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결점들까지도 끄집어내는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 그들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을 방어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경멸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온갖 미묘하고 직접적인 방식을 사용해 사소한 결점들을 지적하고 과장하면서도 그런 행위를 재미있다고 느낀다. 이런 증상을 보면 그들이 여유롭고 즐거운 것 같은 인상이지만, 그들 관점에서 생각하면 다소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이런 것과 달리 정상인들이 그들의 심리나 행동을 관찰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그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긴장감을 들 수 있다. 편집증 환자들은 대개 긴장돼 있으면서 경계하는 행동을 일차적으로 보인다. 실제 그들의 눈동자는 고정되어 있고, 주의를 끄는 모든 것에 예리하게 초점을 맞춘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마치 경계근무를 서는 초병처럼 긴장된 모습을 보인다. 이런 긴장의 특성들에서 우리는 그들이 환경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를 잘 알게 된다.
어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은 과도한 필요를 유발시키는 점에서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잠재적인 악이나 기만, 또는 자신을 비하하는 것 등을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지나칠 만큼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는 그들이 집요하고도 완강하게 외부 환경에 수용적이지 못하면서 저항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외부환경을 받아들이는 것과 저항하는 문제는 외부에 근거하기보다는, 자신의 심리적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외부적 환경을 덮어놓고 수용하거나 그런 이완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자신을 붕괴하는 행동이라는 점에서다.
편집증 환자의 긴장성은 또다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규제하고 긴장하여야 된다는 생각으로 점점 더 진전된다. 실제로 그런 특성은 편집증 환자들로 하여금 과거에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못마땅해하고 용서하지 않게 만든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의 기준에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관용한다거나 그런 문제를 잊어버린다거나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시각에서 그들은 최근에 사회적으로 알게 된 사람들과도 잘 싸우고 까다롭게 굴며 논쟁을 잘하는 편이다. 이런 논쟁은 점차 그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 현상은 대인관계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숨겨진 동기들을 찾는데 몰두함으로써 분노와 격분에 빠지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확고한 불신과 방어적 경계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더욱 분개한다.
편집증 환자들에게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노력한 결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와 존경은 부당하게 달성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반면 자신은 전혀 그런 인정이나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스스로는 인정받을 만한데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무시당하고 심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으며, 세상을 속이는 사람들로 인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미끄러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다른 증상을 유발할 것은 자명하다. 그들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왜곡적인 사고는 다시 또 다른 감정으로 진전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다. 그들에게 방어가 흔들리고 통제가 풀어지면서 운명에 대한 환상이 확산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기저의 두려움과 격노가 드러나 공격성을 보이고, 욕설을 마구 퍼부으면서 엄청난 적대적 힘을 폭발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폭발은 오래가지 않으며, 두려움과 적대감이 분출되고 나면 평정을 되찾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방어를 재구성하며 공격성을 억제하려 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이전 성격 유형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5. 인지 왜곡
편집증은 사물을 인식하는 인지적 양식에 문제를 보인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기에 비정상적으로 인지한다. 이런 인지왜곡의 문제는 편집증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인에게도 어느 정도는 있다. 다만 편집증이나 다른 정신장애를 갖는 사람들은 그 심한 정도를 보이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인지왜곡 현상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도 심하게 일어나지만, 편집증의 왜곡과는 다르다. 정신분열증의 인지 왜곡은 어떤 근거를 갖지 않는데 반해, 편집증은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며 나름대로는 상당히 체계적인 논리에 근거해 있다.
여기에 햄린(R. M. Hamlin)과 로어(M. Lorr)는 이를 입증하는 연구를 시도했다. 그들은 심리운동(psychomotor) 속도, 인지, 그리고 사회적 인식의 객관적인 종합 검사를 사용하여 정상적인 대상, 신경증적 대상, 편집증적 대상, 그리고 비편집증적이고 정신분열적인 대상들의 집단을 차별화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들에게 연구된 집단들 사이의 기본적 구별은 인지적 결함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단지 기괴한 연상, 사회적 고립, 혹은 무감각한 동기의 기초 위에서만 그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시각적 포착능력 검사’(visual scanning test) 또는 ‘크기 추정 검사’(Rod-and-Frame Test)를 사용한 편집증 환자 집단과 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의 집단비교에서는 거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으며, 시각적 포착능력과 지각능력의 범위에서는 두 집단 모두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조금 더 혼란스러운 반면, 적어도 지각적 기능에서는 편집적 과정이 두 집단 모두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편집적 환자와 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 모두에게 지각적 양식이 비슷하며, 비슷한 방식으로 지각 기능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또 시각적 구별 과정에서 동일한 물체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 모호한 슬라이드를 사용하여 편집증 환자와 비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의 반응의 차이가 검사되기도 했다. 이 검사에서 편집적 환자는 비편집적 환자보다 개념적 신호를 잘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뿐만 아니라 편집적 환자는 심지어 신호 과제의 소통적인 수행을 방해할 때조차 비편집적 환자보다도 이러한 신호와 통제를 더 많이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편집증 환자는 신호를 바꾸는 것이 어려웠는데, 그것은 신호를 바꾸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때조차 그것을 바꾸는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편집증 환자 집단은 그러한 주된 개념적 신호들이 검사에서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될 경우에 부적절한 반응을 더 많이 보이는 경향이다. 이는 스스로 어떤 것에 생각이 고정되면 좋은 것이라도 바꾸기 어려운 것을 드러내는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런 특성은 편집증 환자들이 신뢰감을 갖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지만, 이는 약간의 강박증을 갖는 바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증상의 실험은 편집적 정신분열증과 비편집적 정신분열증에서 동일하게 나타났다. 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와 비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 사이의 인지적 차이를 비교하는 실험에서이다. 이 차이는 요인을 분석하는 기술을 이용한 징후 평가에 대한 연구였다. 이 연구에서 편집적, 비편집적, 그리고 정서적 조건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편집적 요인으로는 적대적 호전성, 편집적 투사, 그리고 과대적인 팽창성 등이, 비편집적 요인으로는 개념적 혼란과 지각적 왜곡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다른 연구에서는 편집적 징후와 관련된 두 가지 요인을 보여준다. 그 첫째는 관계 개념, 박해 망상, 음모 통제와 신체 파괴, 과대 관념, 그리고 청각, 후각, 근육 운동, 지각적인 환각 등의 지각적 왜곡을 포함하는 편집적 과정의 요인이다. 둘째는 지각적 왜곡과 공격적인 언어 표현을 포함하는 적대적인 편집적 요인이다. 그러한 요인을 분석하는 연구의 요지는 편집증과 정신분열증의 차이를 드러내준다. 즉 편집적 환자가 덜 혼란스럽고, 덜 움츠러들며, 적대감을 더욱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망상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증 환자와 일반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반면 비편집적 징후는 혼란스러운 동작, 기괴한 동기, 혼란스러운 사고 형태를 띠는 경향도 있다. 비편집적 징후와 편집적 징후의 차이는 비편집적 징후에서의 혼란과 편집적 징후에서의 과도한 조직화로 나타난다는 점에서다. 이런 차이는 ‘로샤하 검사’(Rorschach Test)에서도 나타난다. 즉 편집증 환자는 비편집증 환자보다 색깔에 대해 덜 반응하며, 더 나은 수준의 조직과 전체적인 상황을 더 명료하게 파악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웩슬러 성인용 지능 척도(WAIS)와 같은 검사에서도 일반적으로 편집증 환자는 비편집증 환자보다 지적인 기능이 더 발달했고 왜곡이 더 적게 나타나는 편이다.
그러므로 검사자료는 비교 집단인 비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 집단에서보다 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집단에서 개념화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의 성격은 보다 잘 통합되어 있으며, 지각적 영역이 보다 잘 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편집증과 비편집증으로 구분하는 데서 편집증 환자가 인지적 왜곡을 더 보이지만, 정신분열증의 구분에서는 그렇지 않다. 편집적 정신분열이 비편집적 정신분열증 환자보다는 인지적 기능과 심리적 기능의 측정에서 더 정상적인 수준에 근접하기 때문이다.
편집증 환자의 신뢰감 결여는 다른 정신 기능을 변화시킨다. 이런 경우에 그들의 신뢰감 결여는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지각과 사고, 기억들을 임의적으로 각색한다. 물론 정상인들도 자신의 필요와 과거 경험들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건들을 지각하고 추론한다. 그러나 편집증 환자의 감정과 태도는 그들 안에 만성적이고 만연한 의심을 일으키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만들어낸다. 또한 편집증은 지나치게 예민해서 적대감과 기만의 신호들을 쉽게 탐지한다. 이런 탐지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자신의 임의적으로 추론한 것으로 거의 부정적인 색채를 띤다.
그들은 이런 지각된 의심들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예상을 확증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을 적극적으로 집어내어 확대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다. 편집증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애착을 피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혼자 떨어지게 되거나 현실검증을 잘 못해서인지 자신의 의심과 환상들을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상상이 확대되는 것을 막아줄 사람이 없기에 자신의 두려움과 소망들을 지지하기 위해 사건들을 조작한다. 또한 하나의 사실에 끊임없이 생각하고 증거들을 모으며, 자신의 신념에 맞게 과거를 재구성하고, 불안과 욕구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복잡한 논리를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타당한지를 전혀 검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본 것과 생각한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이때 스치는 인상들과 어렴풋한 기억들이 사실로 간주되고 서로 연관성이 없는 사실이 적당히 합해져 결론이 내려진다. 의심에서 추측과 상상으로 이어지는 '흔들림이 없는' 과정은 결국 망상을 야기하면서 경직되어 견고한 신념체계가 만들어지기에 망상은 편집증 환자의 매우 장애적인 산물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태도들을 공유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사적인 추측과 가설들을 고안하고 형성시키게 되면, 이것들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은 타당한 것으로 확정되고야 만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편집증 환자의 망상은 다른 병리적 유형들에서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의 망상은 자기강화와 독립적인 사고에 익숙하고 자신의 유능함과 우월성을 확신하므로 신념을 형성하는데 기술적이며,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다. 이는 그들의 망상이 체계적이고 일견 합리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다.
6. 결론: 피해의식 심해지면 피해망상으로까지 발전
지금까지 우리는 편집증의 심리적 특징과 이해에 대하여 기술했다. 편집증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므로 타인에 대한 의심과 스스로의 피해의식, 그리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며, 자신은 항상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이런 피해의식이 심해지면 피해망상의 수준까지로 진전되거나 발전된다는 점이 중요시되었다. 여기에는 불안의 일차적인 원천들, 인지적 과정, 전형적인 기분과 행동의 세 영역의 관점에서 구분하는 것도 가능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의 구분을 시도할 수도 있지만 심리적인 데에 초점을 두어 기술했다. 이런 점에서 다음의 몇 가지는 편집증을 이해할 수 있는 심리적인 특징으로 정리되었다.
신뢰성의 결여에서는 일차적인 심리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타인을 의심하는 경향이 가장 특징적이었다. 이는 편집증이 신뢰성과는 전혀 다른 의심의 측면이라고 보는 이유로써 신뢰의 결여에 근거하고, 신뢰의 결여는 의심을 산출한다는 연관성이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친척이나 친구, 가까운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동기에 대해 부당하게 회의적이면서 냉소적이고, 그리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기에 그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전혀 악의가 없는 데도 그들에게 필경 어떤 숨겨진 의도나 음모가 있는 것으로 의심한다고 했다.
박해받음과 통제력 상실에서는 이차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었다. 편집증에서 스스로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현상은 그럴 만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의 박해받는다는 생각이 굴욕당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해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수동성을 간과할 수 없었다. 박해받음이나 굴욕을 당함, 그리고 피해의식은 모두 수동화 된 성격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편집증에서의 수동성은 능동적인 존재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했다.
파괴적인 공격성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면 가차 없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들은 작은 단점의 지적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강한 공격성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였다. 파괴적인 공격성은 자기애적인 박탈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했는데, 이는 자기애적인 박탈감과 수치심은 굴욕감과 격노를 증가시킨다는 점에서였다. 실제로 그들은 상처받은 자기애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데에 공격성 뿐 아니라 다양한 방어기제를 동원한다는 점이 중요시되었다.
방어적 분노에서는 그들에게는 공격적인 것보다는 방어적인 차원이 중요시되었다. 편집증 환자들은 비상사태나 위협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준비되어 있다는 점에서였다. 실제로 위험들을 만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들은 공격과 명예훼손의 가능성에 대해 고정된 수준의 준비성과 경계심을 유지한다고 했다. 그들이 아주 사소한 위협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단서에도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항상 초조한 긴장과 방어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직된 통제 상태는 그들에게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고 보아야 했는데, 그들이 이완되어 편안히 경계를 푸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였다.
인지의 왜곡에서는 사물을 인식하는 인지적 양식에 문제를 보인다는 점이 중요시되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였다. 이런 인지왜곡의 문제는 편집증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인에게도 어느 정도는 있게 마련이지만, 편집증이나 다른 정신장애를 갖는 사람들은 그 심한 정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특히 인지왜곡의 현상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도 심하게 일어나지만, 편집증의 왜곡과는 다른 것이었다. 정신분열증의 인지적 왜곡은 어떤 근거를 갖지 않는데 반해, 편집증은 나름대로 근거를 갖기에 그들 나름대로는 상당히 체계적인 논리에 근거해 있다는 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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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4대 이단과 통일교, 뉴에이지까지… 대처법은
서구교회사에 나타난 이단판별의 역사와 향후 전망
다음은 원성현 박사가 로앤처치(http://lawnchurch.com/)에 기고한 글이다. 원 박사는 연세대를 전과목 만점으로 수석 졸업했으며, 부산장신대, 장로회 신학원, 연세대 철학과를 거쳐 연세대 교회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편집자 주
근대교회 시대: 다채로운 이단분파의 재흥
(1) 이단분파의 온상적 환경
근대의 대표적 이단분파들은 미국에서 발생했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찬 사이언스 등 미국에서 발생한 4대 이단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들이 미국에서 19세기를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발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미국의 정치, 사회, 종교적 상황이 이단발생의 온상이었다. 19세기 미국사회는 경제불황, 서부개척, 남북전쟁과 분열, 자본주의 폐해로 인한 노동문제, 흑인 노예문제, 스페인과 전쟁수행, 대각성운동 그림자였던 종파분열,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신학적 대립, 카톨릭의 내분사태와 카톨릭에 대한 개혁파의 반대운동 등 끓는 가마와 같은 형국지세였고, 이러한 종합 현상은 이단종파가 득세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
(2) 다양한 이단종파들
이사야 43장 10절, 이사야 44장 8절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여호와의 증인’이 태동됐다. 아담의 차자인 아벨이 최초 여호와의 증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으뜸 되는 여호와의 증인이고 그 후계자는 창설자인 찰스 테즈 럿셀, 과도기 지도자 조셉 플랭클린 러더포드, 성장기 나단 노오르(11만 5천명의 증인을 2백만 명 이상으로 성장시킴) 등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의 독점과 자파 출판물 우선성, 아리우스주의적 피조물 그리스도론, 성령의 거부, 삼위일체의 부인, 그리스도의 신성 부정, 천사장 미가엘과 예수의 동일성(불순종의 죄로 타락하여 사탄이 된 루시퍼를 예수의 형제로 여김), 행위구원 강조, 지옥설 부인(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 리 없다는 주장), 선택적 구원론(선택된 자들과 양들 외에는 구원을 못 받음), 지상낙원설, 사후 영혼사멸설, 악한 자의 최후 부활 거부, 재림 예언의 남발 등을 주장했다.
몰몬교 역시 여호와의 증인과 마찬가지로 주도자들의 기존교회 타락에 대한 불만, 잘못된 성경해석, 주관적 신앙체험 등에 의해 출발했다. 창시자는 조셉 스미스 2세이다. 그는 한참 교파분쟁이 지속되던 장로교회에 속한 자로, 그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이탈한 자였다. 그는 몇 차례 환상을 자신의 신흥이단 창출 근간으로 삼았다. 후계자 브라이엄 영은 몰몬교를 성장시켰다. 그는 유타주 솔트레이크로 가서 둥지를 틀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채택, 25명의 아내와 56명의 자녀를 뒀다. 몰몬교도는 미국 내에서 2천 5백만명을 웃돌며, 그 중 50만명 이상이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참 신앙의 독점, 몰몬교 집단만의 참교회성, 조셉 스미스 영접을 통한 구원, 교회 역사의 정통성 부인, 정통교리의 실패성, 권위 출처로서의 몰몬경, 오염된 성경,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 및 값진 진주를 영감된 유일의 책으로 믿음, 다수의 하나님과 신인동형론적 신관, 성자 부인, 독생자 거부, 삼위의 동일본질성 부정, 만인구원설에 가까운 보편구원론, 사도시대에 끝난 지상교회와 이를 회복하는 몰몬교회론, 침수세례, 일부다처제 등이 몰몬교 핵심 교리다.
안식교는 초창기 이단으로 규정됐으나 오늘날에는 이단시하지 않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 모습은 당시 미국 천년왕국 사상 유행기와 맞닿아 있다. 이는 기성종교의 안이한 태도에 대한 반동으로, 타락한 모습을 지녔던 기성교회는 열정적인 신자들의 불만을 야기시켰고, 이는 새로운 신앙운동의 모티브가 되었다. 당시 뉴욕주 중서부 지역은 이러한 신생종교운동의 최적지였고, 약 20년 동안 이 지역에서는 몰몬교, 강신술, 재림운동 등 신생종교가 발생했다. 밀러가 창시자였던 안식교 재림운동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지역에서 발생했다.
윌리암 밀러는 기존 자유주의 후천년설 재림론(예수께서 천년왕국이 도래한 이후에 재림한다는 주장)에 맞서 새로운 전천년설 재림론(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실제 창시자는 엘렌 G. 화이트였지만, 사실상의 진원지는 밀러였다. 그는 침례교회에 속했으나 염증을 느낀 나머지 독자적으로 성경공부를 해 1843년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했으나 불발했다. 예수 재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밀러는 다니엘 8장 14절의 2300주야를 2300년으로 계산, 주전 457년부터 합산하니 1843년이 나왔다고 한다. 로마력으로 1844년 10월 22일인 그날 12만명의 안식교 교인들이 뉴욕주에서 재림을 고대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안식교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종말론주의자 밀러의 세대주의적 시한부 재림신앙에 근거하여 태동했다.
히람 에드슨은 1844년이 재림의 해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의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간 해라 주장하면서, 여기서 죄를 완전히 도말한 후 재림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한편 요셉 베이츠는 안식일을 제정했다. 그는 안식일이 창조 때 예표된 뒤 에덴동산에서 명령됐고, 시내산에서 확인됐다고 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교황과 짐승을 경배하는 자, 짐승의 인을 이마에 받은 자라고 주장했다. 실제 창시자 화이트는 감리교 출신이었으나, 이러한 선배들의 이론들을 종합하여 실제적인 안식교 출범을 가져왔다.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그녀는 이백 번 이상의 환상을 보았다.
죄악된 품성을 소유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 미완성, 하늘 지성소에서의 조사심판(율법의 표준에 따라 개인의 성품과 생활이 검토됨, 즉 하나님이 친히 지성소에서 의롭다 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 구원이 됨, 신자도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하면 구원이 막힐 수 있게 됨, 그리스도의 보혈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되는 길이 막히게 됨)을 통한 그리스도 구원의 완성, 죽은 후 조사심판에서 구원의 여부가 가려지며, 구원받은 자도 율법준수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상실한다는 이중 구원론, 일요일을 이방인 태양우상숭배일로 보고 원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한다는 주장 등이 안식교의 주된 율법주의적 교리들이다.
안식교는 흔히 이단종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혼음교리, 이권분쟁, 가정파괴 등과 같은 비도덕적이며 반사회적인 행태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경건한 삶은 청교도를 방불케 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강조하여 세속적 삶, 즉 무도회, 화투, 담배, 술 등을 금하고 검소한 옷차림, 화장금지, 보석 장신구 부착 금지 등 단순하고 검박한 삶을 촉구했다. 또 사회봉사와 구제활동에 역점을 두고 의료선교, 무공해 농산물과 식품 생산 등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로써 안식교는 자신들에 대한 이단혐의를 어느 정도 가린 듯하다.
크리스찬 사이언스는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했으며, 그녀는 엄격한 예정론을 신봉하는 회중교회 출신이었다. 그녀는 한때 치명적인 병에 걸렸으나, 큐임바이가 개발한 심리치료를 받고 나아 그의 열렬한 제자가 됐다. 최면술과 안수로 병고침을 받은 그녀는 <과학과 건강>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이를 신적 계시로 주장했다. 성경 외의 계시론, 치유은사를 인간심리 요법사가 아니라 신적 계시로 여김, 이원론적 질병관(병을 망상과 환상으로 보고 이를 정신 및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태도), 하나님을 우주의 무한한 원리나 생명, 진리, 사랑, 혼, 영, 마음 등으로 보는 범신론적 견해, 영적 그리스도만의 주장과 육체의 예수를 거부하는 기독론, 성육신 부정, 인성 부인, 부활 부정, 죄에서 해방이 없는 질병 치유를 구원으로 여김 등이 그들의 지론적 교리이다.
(3) 디아포라(중요한 점)에 의한 이단판별
상술한 이들은 정통교리인 디아포라를 명백히 위반했다. 정통적 삼위일체 신관과 기독론을 그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곧 중요한 점에서 그들은 성경과 전통, 예수의 유일한 구원성을 위반했다. 이는 명백한 이단으로 판별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 그리고 프로파간다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과 담론(디스꾸르)의 길을 열어놓아, 언제든 그들을 설득하여 정통 진리의 길로 인도해야 할 책무가 정통 기독교에 있다. 물론 그들과의 담론 형성은 차이점을 노정시킬 뿐이지만, 그러한 접촉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 그리고 디스꾸르를 거부하는 전근대적 태도가 될 것이다. 정통 기독교가 이러한 개방적 방식을 채택할 때, 정통 기독교는 타자에 의해 개방과 관용을 받을 수 있다.
6. 근대후기교회 시대: 연대(Solidarity)와 관용(Tolerance)
(1) 신종교운동과 뉴에이지운동의 발흥
신종교(new religion) 혹은 신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전후로 등장한 새로운 종교 현상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이 운동들은 주로 서구 지성사회를 개혁하려는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과학종교(Scientology), 통일교회(Unification Church), 창가학회운동(Soka Gakkai International),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 운동 등에서 확인되듯 미국·한국·일본·인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캐리비안 등까지 널리 확산되는 등 범지구적으로 일어나는 종교운동이다.
기독교의 맥락에서 형성된 신종교운동들에는 전술한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몰몬교),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외에도 문선명의 통일교, 노엘 스탠톤의 예수군대(Jesus Army), 데이빗 버그의 국제가족회(The Family International) 등이 포함된다.
이슬람의 맥락에서 형성된 신종교들로서는 바하올라의 바하이신앙(Bahai Faith), 파드 무함마드의 이슬람국가회(Nation of Islam), 미즈라 아흐마드의 아흐마디야운동(Ahmadiyya),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와하비즘(Wahhabism) 등이 있다.
동양 철학과 사상에 영감을 받은 신종교들은 박티베단타 프라부파다의 국제크리슈나 의식회(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마하리쉬의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데니스 링우드의 삼보불교회(Triratna Buddhist Community), 마끼구찌의 창가학회 등으로 대별된다.
미확인 물체(UFO)와 관련된 신종교들에는 라엘의 라엘리안 운동(Raelian movement), 보니 네틀의 천국의 문(Heaven’s Gate), 조지 킹의 에테리우스회(Aetherius Society), 이보 벤다의 우주의 사람들(Universe People), 노만 부부의 우나리우스 과학회(Unarius Academy of Science) 등이 있다. 자아수련과 관련된 신종교에는 호세 실바의 실바 마인드 콘트롤(Silva Mind Control), 헬렌 슈크만의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s), 마이클 머피의 에살렌 연구소(Esalen Institute), 우명 우승철의 마음수련, 일지 이승헌의 단월드 등이 있다. 뉴에이지 관련 신종교운동들로는 엘리자베스 프라핏의 보편승리교회(Church Universal & Triumphant), 헬레나 불라바스키와 헨리 올코트의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 아일린 카디의 핀드온재단(Findhorn Foundation) 등을 들 수 있다.
신종교들은 다양한 시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주로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등장하여 영향력을 크게 성장시킨 종교공동체들이다. 이 공동체들의 창시자나 지도자는 독특한 교육이나 계시를 통하여 신종교의 기초를 형성했고, 점차 신자를 늘려나갔다. 대부분 신종교운동들은 주류 사회와 구별되는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독특한 신념과 의례 방향을 제시했다.
따라서 이전에 주류 종교들 안에서 형성된 전통적 흐름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혼합적·절충적 성격을 보여준다. 신종교운동의 가르침에는 현대사회 문제점으로 흔히 지적돼 온 지나친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정신이 담겨 있거나, 급속한 세속화에 대한 영적 대응과 재생 분위기가 강조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신종교운동은 개인의 자립적 영적 성장을 도모하며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회복과 통합을 모색하고, 나아가 마약과 술로부터 도덕적 자유를 준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 생활방식을 혁신하고 대체하는 혁신적 삶의 방식을 표방한다.
신종교운동 일부인 뉴에이지운동은 종교보다는 문화운동으로 더 각광받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의 근원은 1875년 뉴욕에서 러시아인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에 의해 창설된 신지학협회에 있다. 신지학의 기본명제는 “모든 종교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 논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뉴에이지운동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였다. 뉴에이지 사상의 출현 배경은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세계관, 과학만능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몰락에 있다. 즉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근거한 과학발전을 통해 인류가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이루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과학만으로는 세계 도처의 홍수와 가뭄, 태풍 등 자연재해와 기아와 전염병 등의 사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고, 오히려 과학만능주의는 생태계 파괴와 핵전쟁 위협, 인간성 상실 등의 폐해만을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전제로 한 과학만능주의의 한계는 모더니즘의 한계점을 드러낸 것이었고, 이러한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다. 이와 더불어 종교와 문화 현상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적 뉴에이지운동이 나타나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뉴에이지 사상은 1960년대 중반 미국이 아시아인들에 대한 이민법을 개정한 후, 힌두교 정신적 지도자였던 구루들이 미국에 건너오면서 동양 신비주의 사상들이 서구의 합리주의, 과학주의와 결합하면서 형성됐다.
이러한 뉴에이지 사상은 현대문명에 염증을 느낀 현대인들, 특히 서구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현대를 위기와 기회의 시대로 평가한다. 지구의 위기 원인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있지만 무지와 망각으로 사용되지 못했으며, 그 원인은 인류 사상과 종교를 지배했던 기존 전통적 종교 가치관들이 인간 스스로를 나약하고 유한하며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복종관계가 인류를 위기에 직면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오쇼 라즈니시는,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가 원죄설로 인간을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렸고, 하나님을 가장 높은 영광의 장소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가치없는 존재로 평가돼 스스로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시켰는데, 이는 초대교회 펠라기우스적 견해, 곧 인간의 자유의지와 능력을 주창한 인본주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기독교의 굴레를 벗으면 인간은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시대가 된다는 주장이 뉴에이지 주장의 핵심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주장한다.
뉴에이지 혁명은 지구상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이기심을 떠나 진정 행복한 세상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아숭배를 통해 자신에 대한 지식이 심화되면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전지구적 사회문제가 해결되리라 본다. 따라서 뉴에이지 운동에는 인간의 잠재력 계발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초능력, 심령술, 두뇌개발 등 다양한 신비주의적 성격이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초대교회의 혼합주의적 영지주의(헬라철학과 밀의종교, 유대교, 기독교, 마니교 등의 결합)와 중세 신비주의를 한몸에 담은 현대판 혼합주의 종교이다.
또 신과 우주가 하나이며, 한 인간의 영혼이 우주의 핵심이고, 우주의 핵심은 곧 인간의 영혼이라는 범신론이 뉴에이지운동의 출발점이다. 명상을 통한 신인합일 경험, 각 종교의 신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다원주의 사상, 인간의 존재가치를 어떤 것보다 우위에 두는 인본주의, 인간이 여러 방법을 통해 점차 신으로 진화해간다는 영적 진화론(인간이 신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환생을 규정했으며, 환생을 거듭할수록 영적으로 신에 가깝게 진화한다고 주장함), 신성을 깨닫기 위한 의식개혁 강조(초월명상, 강신술, 동양종교, 영지주의, 심령과학, 무속신앙, 투시, 점복, 최면술, 점성술, 요가, 관상, 수상, UFO에 관한 것들, 마녀숭배, 윤회설, 범신론적 학문운동, 인간의 잠재력 계발운동, 초혼 곧 영매를 통한 접신행위, 텔레파시와 정신동력 등의 사용), 영화와 음악 및 대중 영상매체와 도서 등 대중문화를 통한 뉴에이지 사상의 확산 등이 뉴에이지운동의 내용과 방법들이다.
상술한 바대로, 신종교운동과 특히 거기 속한 뉴에이지운동의 핵심은 정통 기독교의 원죄론적 인간관을 거부하고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극도로 고조시킨 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전세계의 불행이 불식된다고 이들은 본다. 이들의 근원은 초대교회 영지주의와 중세 이후의 신지학에서 찾을 수 있으며, 비록 정통 기독교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상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스스로 전지구적 위기의 대안이라 자처하는 이상,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들과는 솔리다리티와 똘레랑스가 불가능한 것 같아 보여도, 다른 차이점을 확인하고 이에 대처하려는 타자성의 철학정신, 곧 디스꾸르(Discourse)를 형성하여 상호간 존재와 인식론적 차이를 점점 더 자세하게 확인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은 곧 정통 기독교가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에 앞서, 거대한 혼합주의 종교사상인 그들로부터 정통 기독교를 보호하는 적절한 수단이 될 것이다.
(2) 기존 종교들의 공존시대
현대의 기독교는 내부적 문제인 이단문제와 함께 외부적 해결 과제인 종교간 대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는 디스꾸르와 똘레랑스를 필요로 하는 상호소통적 아젠다이다. 이제 각 종교는 교리적 정통성을 보존하는 일과 더불어 타자와의 연대도 모색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곧 모든 종교들은 인류애의 보편성과 이성, 자연법과 양심 등에 근거하여 각 종교들의 공통 지향점을 모아 이 세계를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적 양극화현상(국가와 집단과 개인 단위), 환경오염으로 인한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 엄청난 핵무기와 가공할 파괴무기로 인한 전쟁 위협, 인종 및 종교분쟁, 인권탄압과 인종학살 등의 근원을 제거하고 평화를 정착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모든 종교와 분파는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시대가 됐다.
(3) 정통기독교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솔리다리티와 똘레랑스
모더니즘 시대는 동일성의 철학으로 인한 종교분쟁과 공격적 선교 행태로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의 국면을 노출시켜왔다. 그러나 상대주의적 문화관과 다원주의적 종교관에 입각하여 전지구적 대립과 투쟁을 불식시키고자 한 타자성의 철학은 종교들의 대화를 추동하고 있으며, 이는 향후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제 우리는 분리와 격리를 주로 했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이전 관행에서 벗어나, 모든 종교와 이단에 대해서도 똘레랑스와 디스꾸르 정신으로 솔리다리티를 추구해야만 한다. 기존 자세로 접근하면 기독교는 다시 그렇게 혐오했던 유대주의적 기독교와 맥을 같이하는 게토화로 전락할 것이다.
7. 나가는 말
초대교회 시대는 ‘디아포라’(중요한 교리)를 근거로 이단판별을 시행했다. 성경에 근거한 정통 삼위일체 신론과 기독론이 이단판별의 중요한 잣대였다. 그러나 이단판별 형식은 중세의 무지막지한 극악한 종교재판 방식이 아니라, 장기간 디스꾸르를 통해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시대 이단판별 역시 ‘디아포라’ 원칙에 입각해 역시 그러한 방식과 일맥상통했다. 특히 깔뱅의 제네바교회는 ‘꽁지스뜨와’를 통해 면밀한 조사와 검토를 행한 후 신중하게 이단을 판별했으며, 그 목적 역시 회개를 위한 권징이었다.
세월이 흘러 근대교회 시대에 접어들수록, 이단의 행태와 주장은 심각한 경지에 도달했고, 이는 정통 기독교 신학사상과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도저히 똘레랑스와 솔리다리티가 불가능한 정도에까지 치달았다. 심지어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 발생한 신종교운동과 뉴에이지 등은 도저히 정통 기독교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이단판별 자세와 태도에서 엿볼 수 있는 바는, 바로 신중한 이단판별 행태 즉 ‘아디아포라’(중요하지 않은 곁다리 교리나 사상)가 아니라 ‘디아포라’(중요한 핵심적 교리, 즉 삼위일체 신론과 정통 기독론 교리 등)에 근거해 장기간 디스꾸르적 이단정죄 자세를 가졌다는 점이었다(디스꾸르는 타자와의 차이점을 확인하지만 배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고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의미).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과연 한국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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