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4월 16일 (수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 '무장공비→ 목사' 김신조 별세 / 이재명 지지율 1위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국회 앞 25만 인파 “3.1정신으로 체제 전쟁 승리” /인사만 잘 해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수십만 시민들 모여 “탄핵 반대” “자유 수호/ 이만희 교주로부터 수년간 성폭행 피해               교회가 농촌 살릴 수 있다 /목회자 10명 중 6명 "노후준비 못하고 있다               정치 양극화 ‘몸살’… 분노·혐오 내려놓고 하나님 뜻 구해야 / 목회자들에게 희망 은퇴 나이 물으니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부활절 설교 기쁨과 영광 함께하는 말씀
    2008-03-21 16:33:22   read : 620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8년 부활주일 설교 모음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2008년에도 어김없이 부활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기쁨과 영광을 성도와 또는 이웃 주민과 함께 또다시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번 호에는 설교는 물론, 부활절의 의미와 예배 자료를 첨부했습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부활절

    교회력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부활절은 교회의 출발과 관계가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그분을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나타나시는 부활 경험을 통해 다시 제자 공동체가 모였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계속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매 주일이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은 주께서 모든 죽음과 악의 권세를 깨뜨리고 생명으로 나오신 날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부활절은 특히 온 피조물에게 구원의 소망을 여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활 신앙은 교리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다시 사셔서 함께하셨다는 고백이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도 예수신앙으로 새롭게 생명을 되찾는 경험을 해야 할 문제다. 부활의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 주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구원의 품안에서 기뻐하며 생명을 살찌워야 한다. 이 살찐 생명을 가지고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며 살림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곧 부활 생명이다.


    ㉡ 부활절 예배 자료

    1. 부활절의 명칭
    부활절을 이르는 영어 ‘Easter’는 고대 이교도의 봄과 새벽의 여신인 ‘Eastre’에서 왔다 한다. 부활절의 원래의 이름은 히브리어 ‘파스카’다. 이 말은 유월절(Passover)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절을 ‘파스카’라 일컬음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월절이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절은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 생명, 승리, 새 희망 등 많은 것을 부각시킨다. 부활절의 색깔이 흰색인 것은 그것이 축하, 기쁨, 축제, 승리 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부활절 예배도 이 같은 정서가 잘 반영되도록 마련되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2. 부활주일 예배의 주요 사항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주일 예배를 부활주일 직전 토요일 밤에 철야예배로 시작하였다. 이 예배의 주요 내용을 보면, 먼저 성서 낭독으로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 및 복음서 중의 고난 설화를 읽었다. 이어서 세례, 견신례, 성찬예식 등의 순서가 들어 있었다.
    오늘날 개신교의 부활절 예배에서도 부활절 설교를 위한 본문으로 부활과 관련된 구약과 서신서, 복음서 중의 몇 구절을 택하며 성례전 역시 중세기의 부활 주일 예배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활주일 예배를 위한 몇가지 주요 사항을 적어본다.

    (1) 부활절 예배음악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주일에 베토벤의 장엄미사곡(Missa solemnis,op.123, 1818-1822)이 연주되고 개신교에서는 수많은 부활절 찬송가, 부활절 칸타타 등이 불리어진다. 개신교가 중세로부터 이어 받아 부르는 부활절 찬송가는 ‘싸움은 모두 끝나고’(156장), ‘즐겁도다 이 날’(157장), ‘할렐루야 할렐루야’(160장) 등이다. 바하(J.S. Bach, 1685-1750)는 부활절 예배송으로 칸타타 제 4번 ‘주 예수 우리 죄인 위해’와 제 6번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날이 이미 저물었나이다’ 등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헨델(G.F. Handel, 1685-1759)은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때 그 절기에 해당되는 곡이 불리어진다. 특히, 합창 ‘할렐루야’는 가장 많이 애창되고 있다.

    최근 개신교에서는 부활절을 위한 많은 찬송곡과 칸타타가 작곡되었다. 특히 한국인의 정서에 맞도록 작곡된 한국적 부활노래도 있다. 예를 들면, 나영수 작곡 ‘얼싸좋다 할렐루야’ 등이다. 이처럼 부활절 예배 음악은 교회전래적인 곡과 최근의 곡을 취사선택하여 적절히 부르거나 연주하도록 한다.

    (2) 부활절 및 설교 본문
    a. 행 10:34-43, 골 3:1-11, 요 20:1-9
    b. 사 25:6-9, 벧전 1:3-9, 막 16:1-8
    c. 출 15:1-11, 고전 15:20-26, 눅 24:13-35
    d, 출 14:15-31, 계 1:10-18, 눅 23:50-24:12
    e, 욥 19:23-27, 고전 15:1-11, 막 15:42-16:8
    f, 출 15:13-21, 거전 15:20-28, 요 20:1-10

    (3) 부활절 예배에서의 부름 성구
    <예1> 목사: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었다.
    회중: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성가대: 아멘, 아멘, 아멘
    목사: 오라, 우리 다 같이 사망을 이기신 우리 주님께 예배하자.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느니라.
    회중: 우리에게는 다른 주가 없사옵고 당신만이 우리의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다같이 당신이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성가대: 아멘, 아멘, 아멘
    <예2> 인도: 할렐루야, 우리 주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었다.
    회중: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성가대: 할렐루야 할렐루야
    인도: 우리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무덤에서 나오셨다.
    회중: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하신 주님 안에만 있습니다.
    성가대: 할렐루야 할렐루야

    ㉢ 부활절 교육활동 자료

    1. 부활절 촛불 밝히기
    중세기에는 신도들이 부활주일 전날(토요일) 저녁에 양초를 교회로 가지고 와서 이곳저곳에 불을 밝혔다.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같은 도시에서는 심지어 거대한 양초 원기둥을 거리마다 세워 불을 당기고 온 도시를 환히 밝혔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새로운 빛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부활절 철야예배 때 특수 제작된 커다란 양초를 켜고 예배를 드렸다. 오늘날 부활절 촛불은 부활절 전야에서부터 예수승천주일까지 사용되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어떤 형식으로든 부활절 촛불을 교회의 제단 같은 일정지역에 밝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부활절 아침 해맞이
    고대의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부활주일 아침의 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춤을 출 뿐만 아니라 해가 뜨는 순간 즐겁게 껑충 뛰어오른다 한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은 부활의 기쁨을 춤추는 천사들이라 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부활주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맞기 위하여 넓은 평원이나 언덕 꼭대기로 달려갔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동이 뜨는 순간 기도와 찬송, 축포 터뜨리기, 타종 등 일련의 경축순서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한다. 이 옛 풍습으로부터 미국의 여러 지방에서 부활주일 아침에 지켜지는 일출맞이 예배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는 수십 년 동안 이 부활주일 아침 해맞이를 부활절 아침 교파연합예배로 대치시켜 지켜오고 있다. 남산과 여의도 광장에서의 개신교 부활절 연합예배도 사실상 미국의 부활절 일출예배에서 근거되었다. 연합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교회에서는 해맞이의 의미를 살려 교회별로 신도들이 함께 부활주일 새벽에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부활의 기쁨을 대자연 속에서 노래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3. 부활절 달걀
    옛날에는 달걀이 봄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봄 절기에 서양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달걀을 선물로 주고받았다. 오늘날 부활절 달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시어 새로운 생명을 얻으신 그 바위 무덤을 상징한다. 교인들은 발고 아름다운 색깔로 달걀을 채색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다. 어린이들에게는 부활절 대예배 시간에 이 부활절 달걀과 캔디를 여러 가지 색깔로 장식한 봉지에 싸러 선물로 주면서 목사가 머리에 손을 얹어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을 받아라”하고 선언하는 것도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활절 달걀 굴리기 등 다양한 달걀놀이로 부활절을 즐긴다.

    4. 부활절 백합
    성서를 보면 백합은 아름다움과 완전한 선을 상징하는 꽃으로 묘사되고 있다(사 35:1, 아2:1-2, 마 6:28, 눅 12:27 등). 미국에서는 백합이 부활절의 상징이다. 이 꽃은 1882년 일본으로부터 버뮤다로 전래되었는데 부활절 즈음에 꽃이 피기 때문에 부활절 백합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국교회에서도 부활절에 백합으로 교회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발전시킨 프로그램으로 교회에서는 고인이 된 교우들의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교인들이 조상이나 일가 친척의 이름을 적어 붙인 백합 한송이씩을 교회에 가져와 제단 근처의 화병에 넣어 봉헌할 수도 있다.

    5. 부활절 장식
    그리스도인들은 중요한 절기마다 교회당을 아름답고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도록 장식해 왔다. 부활절에는 흰빛을 중심으로 갖가지 장식을 할 수 있다. 우선 앞서 지적했듯이 백합을 이용해 제단과 강단 주변을 장식한다. 강단 뒷벽에 대형 십자가가 부착된 교회에서는 이 십자가에 하얀 천을 운치 있게 걸친다든지 그 천을 십자가로부터 교회당 양쪽 뒤끝 천장 근처까지 늘어뜨린다든지 할 수 있다.

    6. 부활절 이웃돕기
    예수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불우한 이웃과 나누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만큼 중요하다. 고아원, 양로원, 소년소녀 가장의 집, 장애자수용서 등을 부활주일 오후쯤 방문하여 달걀, 꽃, 호분, 캔디 등을 선물하고 일상용품이나 금품을 전달한다면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7. 부활절 신앙특강
    교회 각 그룹이 주최하여 부활주일 오후나 부활절 기간의 수요일에 신앙강좌를 연다면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현대인과 부활신앙’ 같은 주제를 다루어 예수부활의 의미를 보다 심원하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추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 설교제목: 부활의 새생명
    본문: 마태복음 28:5-10, 로마서 8:3-5

    1. 부활에 관한 환상과 증언

    1)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들려간다. 살아있는 것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음은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체에 부여한 하나의 운명이라 할 수도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죽지 않을 수 있는 생명을 받은 것으로 창세기는 암시하고 있다. 창세기 2장 16절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 나무열매 만은 따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또 창세기 3장 2-3절에는, 하와가 그녀를 유혹하는 뱀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만 따 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영생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두 인간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향하여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은 몸을 죽을 것으로 운명지으셨다.

    그때부터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꿈과 환상이나 희망으로만 가능하였다. 동양에서는 신선 같은 허구적 존재를 창안하여 영생을 꿈꾸었고, 서양에서는 희랍신화를 만들어 냄으로 영생을 그리는 인간의 희망을 투사하였다. 구약성서를 보면 의롭고 죄가 없었던 오직 두 사람, 에녹과 엘리야만이 살아있는 채로 하늘로 들리워 올라간 인물이다.

    2) 본래 영생이란 죽음을 겪지 아니하는 상태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은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의 여생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의 새로운 생명일 수밖에 없다. 성서적으로 말해서, 죽었다가 다시 산 몸은 죄값을 치른 몸이니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부활은 가능한 것인가? 부활한 그 몸은 어떤 몸인가?

    구약성서에서는 몇 군데 부활에 대한 환상을 그린 구절들이 있다. 에스겔서 37:1-10을 보면,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에스겔은 그빌강가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신비한 환상 중에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로 소망에 찬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들판 한 가운데로 간 에스겔은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마른 해골들이 겹겹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 마른 뼈들에게 말했다.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가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마른 해골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두 살아나 굉징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12:1-3을 보면, 다니엘도 하나님의 묵시를 받는 중에,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살리신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 등의 부활을 말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예수 자신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1) 오늘 이 두 곳 본문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찬 어조로 증언하고 있다. 갈보리산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예수는 옆구리에 로마 병정이 찌른 창을 받고 두 손, 두 발에 못박힘을 받아 피가 다 쏟아지고, 결국 더 나올 것이 없어 물이 나올 절도가 되어 완전히 죽으셨다. 통상관례에 따르면 십자가에 죽은 죄수들은 최후로 다리를 꺾어 버림으로 죽음을 확인했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창으로 찔러 보고 나서 완전사망으로 판정되어 다리꺾기는 포기되었다. 그 분은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돌로 무덤 입구를 봉한 채, 군인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제 3일에 죽으셨던 예수가 부활하셨다.

    마태복음 본문은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으며,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나시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 말한다. 이 여인들은 예수 부활의 뉴스만 들은 것이 아니라, 무덤 현장에서 다시 사실 예수를 직접 만나 뵈었다. 예수가 부활하시어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되어 버렸고, 부활의 그리스도는 여인들 뿐 아니라, 나중에는 베드로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리고 열한 제자 모두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갈릴리 해변에서는 제자들이 잡아 온 물고기를 구어 나누어 잡수시기까지 했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로마서 본문에 의하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로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한다. 즉 그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보증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2) 예수의 부활은 의식만 없는 가사상태에서의 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집단 최면에 걸려, 환상 중에 예수가 다시 사신 것으로 착각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희랍신화와 같은 허구도 아니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오직 신앙으로만 존재하는 사건일 수 없다. 성서는 그가 정말 죽었던 그 몸을 다시 일으켜 살아나셨다고 선포한다. 이 증언은 3년 동안이나 예수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그의 제자들과 그를 시중들면서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던 몇몇 여인들의 생생한 경험의 보고였다.

    다시 사신 예수의 몸은, 죽기 전의 썩어질 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담은 변호된 몸이었다. 그 몸은 영원히 사는 몸이요 승천할 수 있는 몸이며, 하나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역사상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의 부활의 새생명은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나 회당장의 딸의 생명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시 살아났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죽어 썩을 몸으로 돌아올 것이지만, 예수는 영원히 사는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직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새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비밀의 사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건이다.

    3. 부활의 의미

    1) 기독교는 죄 없는 고난을 당하여 처형된 한 의인을 추모하는 무리들이, 자의로 모여 만든 종교가 아니다. 예수의 삶고 교훈들을 기억하고 엮어서, 다른 사람들과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교육적 목적에서 발생된 종교일 수도 없다. 기독교가 성립된 근본적 동기 두 가지는 부활의 체험과 오순절의 성령강림이다. 부활사건에서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밝혀졌고, 성령의 강림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신화적인 자연발생적인, 혹은 인위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신 사건임이 드러났다. 기독교는 이 하나님의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

    2) 부활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모든 죄와 위선과 자기 합리화를 깨뜨리시고 일으키시는 진실의 들어냄이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들어나는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은 생명의 복귀임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죄와 악, 거짓을 폭로하고 척결하는 두려운 심판도 된다. 집권자의 권력도, 성직자의 권위도, 민중의 무분별한 신념과 행동도 모두 심판받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우심만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3)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결코 사랑 때문에 정의를 희생시키시지 않으신다는 표식이 곧 부활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참아주실지 모르나 선과 악을 동시에 눈감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의 부활은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의 횡포와 지배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결의의 표식이다. 진실과 사랑과 의로움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진리의 들어냄이다. 진실과 사랑과 정의와 용서가 거짓과 미음과 불의와 복수보다 강하다는 확증인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중 첫 열매로서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셨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아니 이미 얻었다. 부활의 새 생명은 지금 바로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우리는 부활의 힘 속에서 어두음과 거짓과 두려음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 교회절기 프로그램,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4, pp. 41-56


    ㉤ 설교제목: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삶
    본문: 출 15:13-21, 고전 15:20-28, 요 20:1-10

    부활주일이다. 부활주일의 정서적인 반응은 ‘놀람’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과, 여자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 받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놀란다. 예수님이 시신으로 있어야 할 죽음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놀람’은 곧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바뀌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도 놀람을 경험하며,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자리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 이런 날이 될 때, 우리 또한 든든한 생명의 자리에 부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수의가 개켜 있고

    요한복음의 빈 무덤 증언은 여러 면에서 마가복음과 대조가 된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놀라자 한 흰옷 입은 남자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준다. 이 소식을 듣고 여자들은 벌벌 떨며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막 16:1-8).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먼저 여자들이 무덤을 방문했지만, 뒤이어 베드로와 남자 제자들도 무덤을 방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요20:3). 어떤 다른 존재가 부활 소식을 전해준 것이 아니라, 다만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이 무덤 안의 모습을 보고 부활을 알게 되었다. 즉 요한은 남녀 모든 제자들이 천사의 도움없이 자명하게 부활을 알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인들은 무덤을 보고 나서 당황하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한다. 보고를 받은 제자들이 무덤 안에 들어가서 찬찬히 살펴본다. 무덤은 어수선하지 않았다. 무덤 안에는 고운 베가 놓여 있었고 특히 예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한 곳에 개켜 있었다. 이것을 보고 “그제서야” 모든 제자들이 모고 믿었다고 한다. 즉 수의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수건이 개켜 있었다는 것은 아주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되어진 일이다. 마가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극적으로 불현듯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미 예고되었기 때문에, 당연하기 때문에 잠에서 일어나면 일불을 개듯 그런 방법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문제는 모든 제자들이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을 뿐, 예수께서 다시 사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은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20: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덤 안에서 차근차근, 확실하게 생명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주님이 몸소 가지런히 수의를 정돈하고 수건을 개켜 놓으셨다. 우리가 깨닫건 못 깨닫건, 예수님은 무덤이 아니라 생명의 자리에 계시다.

    이제 우리 차례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에 관계없이 틀림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하고 선언한다. 이처럼 부활은 우리들의 믿음에 관계없이 일어난 사건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 때문이다.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모두가 죽게 되었으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모두 살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아담은 모든 연약하고 믿음 없고 죄 된 인간의 조산이다. 모든 인간이 이 아담의 죄와 약함에 매여 있다. 우리는 한 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담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죄의 노예가 되거나 악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죽음을 깨고 나오신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다. 그 다음 열매가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 차례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23절)하면서 두 번째 열매를 언급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 살게 되었다는 현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이 부활하셨으니, 그 다음은 우리 차례다.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는 더 이어진다. 우리들의 부활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24절) 이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완성된다. 즉, 전 세계, 전 피조물의 생명 사건이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통치와도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신다. 그러고는 죽음의 권세를 포함한 모든 것을 굴복시키기까지 다스리신다(24-27절).

    우리 차례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는 체험을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이미 겨험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빛으로 체험하고는 죽을 수밖에 없는 오만한 사울이 바울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으니 그분께 속한 우리도 산다고 할 수 있었고 또 끝내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있게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게 된다. 아니 살 수밖에 없다. 우리를 짓누르는 죽음의 권세도 그리스도께 굴복했기 때문이다. 실로 온 피조물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부활 경험이요 증언이다.

    주께서 이끄신다

    모세가 노래한다. “주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여 주십니다”(출15:12,13) 출애굽기 15:1-18은 모세가 부른 노래다.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빠져나올 때 그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다. 뒤에서는 바로의 강한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물에 모두 빠져 죽거나 칼에 맞아 죽을 판이다. 이런 순간에 주께서 바다를 갈라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해 주셨다. 백성들은 무사히 건너고 뒤쫓아 온 바로의 군대는 모두 물에 빠져버렸다. 이런 놀라운 구원 경험을 하고는 감격해서 모세가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 모세가 부른 노래의 주제는 “주께서 이루어 주셨다. 주께서 하셨다”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바다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나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이 아니다. 모세 또한 두려웠고 어찌할 바를 모랐다. 다만 주님의 말씀대로 했을 뿐이다. 물론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행군한다. 그러나 모세의 앞과 백성들 앞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어서, 이 기둥의 인도에 따라 모세와 백성들은 움직인다. 주님의 말씀대로 인도하심에 따라가니 구원이 있다. “오직 주께서”하신 일이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모든 대적자들이 두려워 떤다. 블레셋 주민도, 에돔의 지도자들도, 모압의 권력자들도, 가나안의 모든 백성들도 겁에 질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가지는 주님 때문이다. 끝내 주님은 주의 백성을 다 이끌어 가실 것이고, 주가 소유로 삼으신 거룩한 곳에 살게 하실 것이다(15-17절).

    모세의 이 노래는 요한과 바울의 그리스도 부활 증언과 통한다. 요한복음에서는 비어 있는 무덤을 보고도 제자들이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하다고 증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하고 만물이 생명의 통치 아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아니라 ‘주님 때문엷라는 생명의 현실을, 모세는 홍해를 건너고 나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부른 노래의 마지막이 “주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18절)라고 하는 고백으로 끝나고 있다. 주께서 영원토록 다스리시니 여전히 믿음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가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세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삶을 만날 수 있었다.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다. 그 증거는 수의가 가지런히 개켜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요한),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 차례이고, 마지막에는 온 피조물이 부활할 차례다(바울).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삶의 현실이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신실하심과 크신 능력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께서 영원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모세). 그러므로 우리도 모세처럼 주님의 신실하심을 노래부르며, 주님의 다스림이 모든 피조물 위에 영원토록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자.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이미 생명 가운데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또 기뻐하자.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성만찬 예식을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가득 모시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

    * 2001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자료, 대한기독교서회, 2000, pp.183-189


    ㉥ 설교제목: 어떻게 살까?
    본문: 잠언 3:5-8, 살전 4:1-8

    TV에서 소프라노 조수미 씨가 초대손님으로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성도들 가운데는 지금처럼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속으로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은 조수미 씨가 그렇게도 살고 싶어하는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질문하고 답변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이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작품에는 자기 아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표도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육체적 쾌락과 돈 버는 것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퇴폐적이고 구역질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표도르의 문제는 그가 자신을 멸시당해 마땅히 비열하고 더러운 놈이라고 생각한 데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더욱 비열해지고,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반면에 셋째 아들 ‘알료샤’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이 깨끗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기에 그는 다른 사람을 선의로 대하고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합니다. 아무리 사악하고 저저분한 인간일지라도 상대방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사랑스럽고 선한 면을 찾아 내어 이해하고 인정해 줌으로써 사람들을 격려하고 구원합니다. 저는 항상 그 작품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기 앞서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바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4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표준새번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살전2:20에서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칩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잠언 3:5-6은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찾기에 앞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영웅적인 희생과 봉사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지만 물구나무를 서는 행위도 하나님이 웃으면서 받아 주실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애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꽃을 사든, 책을 사든, 옷을 사든, 보석을 사든, 함께 여행을 하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기쁘게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다는 마음이 우리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항상 견지했던 삶의 동기였습니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울 선생님이 견지했던 삶의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자신이 하는 활동의 동기는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라고 말했습니다. 고후 5:9에서는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자신이 일생 동안 견지해야 할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관심을 기울일 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데 관심을 기울여 보았습니까? 우리가 평소 갖고 있는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건강, 가정의 평화, 자녀의 성공 등 나를 기쁘게 하는 데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3.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가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갓난 곰 새끼가 혼자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잘 걸을 수 있을까? 오른발을 먼저, 아니면 왼발을 먼저, 아니면 동시에 앞발을 내밀고 그 다음 뒷발을 내밀어야 하나?’ 어미 곰이 말합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냥 걸어 보아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1-2에서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서 배운 대로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표준새번역). 우리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 보다 대부분 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상라야 할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배운 대로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본문 이하에 보면 바울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성결한 삶, 사랑의 삶, 근면한 삶에 대해서 지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성결한 삶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요을 젗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시이니”(살전 4:3-7)

    4.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 선생님은 왜 성적인 문제를 제일 먼저 거론하고 있을까요? 그만큼 그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시대의 풍조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시대정신에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로마서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만큼 하나님의 뜻에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시대정신이 우리 행동의 표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기에 앞서 먼저 기억하고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항상 간직합시다. 그러나 세상은 악합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체적으로 결혼을 귀히 여기고 가정을 순결하게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순결하고 바르게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로를 존중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 목회와 설교자료 2002,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교계소식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국회 앞 25만 인파 “3.1정신으로 체제 전쟁 승리” /인사만 잘 해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수십만 시민들 모여 “탄핵 반대” “자유 수호/ 이만희 교주로부터 수년간 성폭행 피해
    교회가 농촌 살릴 수 있다 /목회자 10명 중 6명 "노후준비 못하고 있다
    정치 양극화 ‘몸살’… 분노·혐오 내려놓고 하나님 뜻 구해야 / 목회자들에게 희망 은퇴 나이 물으니
    극심한 절망 속 다시 일어난 비결 끝 아닌 해피엔딩 / “탈북어민 강제북송 문재인,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
    트럼프 취임… 한국 교계 영향은 /“인구감소로 25년 후 한국 기독교인 32% 감소
    ‘양팔 없는 장애 극복’ 목사, 美 남침례회 부총회장 /다락방 교회 성폭행 피해자
    지미 카터, 세상에서 가장 망치질 잘했던 할아버지 / 카페서 ‘콘서트+설교’
    자선냄비에 몰래 넣은 돈뭉치 1500만원 /이영훈 목사 "야당, 192석 갖고 교만 빠져... 회개해야"
    제주항공 참사 애도…“유가족 위로하며, 축하 모임 자제하고 희생자 / 편리한 대형교회'와 '특색있는 소형교회'로 양극화 ,
    올해 주요 신대원 신입생 충원율, 총신·장신 빼고 미달 /무슬림에 강제개종 당해 결혼한 파키스탄 소녀
    탄핵안 가결…尹, 직무정지 /목회자 연금 마련” 전문경영인 임명
    여의도에선 “尹 퇴진” 광화문에선 “탄핵 반대”...7일 도심 대규모 집회
    구세군 자선냄비, /교회 탐방 유튜버들이 꼽은 ‘좋은 교회’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