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계시의 성문화된 성경,선포되는 말씀인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했다. 목사의 사역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설교사역이다. 특히 한국 교회 목사의 경우 설교 횟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한 주간을 예로 들면 매일 새벽,주일 낮?밤,수요일
밤,금요일 낮?밤,결혼식,회갑연,대소 심방 등 평균 20여회 이상의 설교를 하게 된다.
대학에서 강의해보면 수강 학생들이 1년이
지나면 썰물 나가듯 빠져나가고 다시 새로운 학생들로 강의실이 찬다. 수강자는 바뀌지만 강의 내용은 바뀔 필요가 없다. 물론 보완과 새로운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설교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설교의 경우는 전하는 사람도,듣는 사람도 변함이 없다. 필자의 경우 30년째 한 교회
강단을 지키고 있다. 설교를 듣는 사람쪽에서는 30년 동안 동일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30년 동안 주일 낮?밤,수요일
밤 등 세 차례 설교를 들었다면 4680여회의 설교를 들은 셈이 된다. 거기다 매일 새벽기도회를 나오는 사람이라면 30년 동안 1만3680여회의
설교를 듣게 된다. 그런데 설교 이후 변화되고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고충은 설교 기회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각종 영상 전파매체의 발달로 설교가 노출된다는 것,그래서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평가와
비교의 기회가 폭넓게 제공되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럴수록 전하는 사람들은 정제된 설교,부식되지 않은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는
신학강의처럼 경직화해도 안되고 시골장터 약장수처럼 떠벌려도 안된다. 흔히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을 쓰곤 하지만 꿩도 아무렇게나 잡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인 설교는 지켜야 할 자리가 있고 넘어선 안될 선이 있다.
전달되지 않는 설교도 문제지만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도 문제다. 돌고래나 물개는 1년 정도 훈련과 조련 과정을 거쳐 쇼를 벌인다고 한다. 1년 정도 훈련 끝에 스위트 홈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물개를 본 일이 있다. 그런데 20∼30년 동안 1만3000여회 이상의 설교를 듣고도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답답하다.
풍년에 밥 굶는다는 말이 그들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열량공급을 위해서라면 음식을 맛보는 것으로는 안된다. 먹어야 살이 되고
피가 된다. 수십년 동안 설교를 들어도 변화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먹지 않고 맛만 즐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뒷얘기가 많다.
설교품평회를 하기 마련이고 심사대에 올려놓고 도마질하기 마련이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빠져나가는 태도도 가지가지이다. “은혜로운
예배였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큰 은혜 받았습니다” “말씀이 너무 짧았습니다”라며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술난 사람처럼 째려보고
나가는 사람도 있다. 설교는 듣고 깨닫고 행하라는 데 본뜻이 있다. 결코 군것질이 되어선 안된다. 설교는 전인적 응답으로 반응해야 하며 삶을
통해 올곧게 구현되어야 한다.
/박종순 <충신교회 목사>
설교의 미래 ‘맑음’
한국 교회
설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흐린 후 맑음이다. 호응도가 높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설교는 어떤 유형인가? 그것들은 과연 바람직한가?
첫째는 위인전기형이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무용담,성공담,인간승리를 모델로 제시하는 스타일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인물의 모델링은 역사속에 무진장하다. 성경속의 인물보다 더 많고 다양하며 더 영웅적이고 모범적이다.
둘째는 윤리강화형이다. 문제는
인간의 선행을 강조함으로써 은혜와 믿음을 희석시킨다. 율법주의의 덫에 걸린 유대교의 아류를 경계해야 한다.
셋째는 기복형이다.
이는 구약시대의 패턴이다. 그리스도는 현상적인 복을 신령한 복으로 완성하셨다. 불건전한 기복신앙은 샤머니즘과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와 같은 설교 경향은 산업사회 분위기의 성장신드롬,그리고 성공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그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지식정보사회에 진입하면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속사적 설교’가 제시되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을 통전적으로 석의하고 적용하는 설교로 복음중심 은혜중심의 설교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미 목회현장에서
구속사적 설교의 원형이 복원되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의 시각으로 다윗왕의 이야기를 조명해보자. 다윗의 공적은 화려하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친 무용담,주변 족속 정복과 영토 확장,예루살렘 정복과 언약궤를 옮겨온 것,한 장소에서의 제사,성전건축 준비 등이다. 이런 다윗을
본받자고 하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불의와 폭정 앞에서는 갈등을 갖게 된다.
그는 예루살렘 정복시 여부스족의
비무장한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대량학살하였다. 주변 족속을 무찌를 때도 양민을 학살하고 적의 말은 뒷발의 힘줄을 끊어서 군마로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유부녀를 간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남편을 계획 살인한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하는 데 기회를 제공했고 그후 왕자의 난을 유발시켰다.
장정을 계수한 교만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고 말년에는 우상숭배를 묵인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한 임종 직전 아들 솔로몬에게 군사령관 요압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참으로 잔혹하고 비정하며 불의한 폭군이다.
이런 다윗을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라고
말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용했다. 무엇 때문인가? 바울의 해석은 투명하다. 곧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씨에서 메시아를
세우셨다는 것이다(행 13:22∼23). 이 언약은 다윗의 선정이나 폭정과도 무관하며 그의 후손의 선악간 행위와도 아무 상관없이 성취되었다. 곧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언약인 것이다. 다윗은 성군도 영웅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에서 그분께서 잠시
쓰셨던 소도구일 뿐이다. 구속사의 선한 주인공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조물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구속사
이야기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오라,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자.
/박 종 구 <월간목회
발행인> (mok12@chol.com)
순음(純音)과 역음(逆音)
반갑다고 꼬리를 치는 강아지에게 활짝
웃으면서 "너를 올 여름에 잡아먹을 거야" 하고 말해보십시오. 강아지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웃는 표정만 보고서 계속 꼬리를
흔듭니다.
반대로 아주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면서 "강아지야. 사랑해. 아이 예뻐~" 하고 말해 보세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해도 강아지는 화가 난 표정을 보며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로 그 소리보다는 소리의 감정파장에
의해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짜증을 내게도 하고 졸리게도 합니다.
아무리 명문장으로 된 기가막힌 설교를 유창하고 거침없이
쏟아내도 거기에 '진정성'이 없으면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눌한 언어로 더듬거리며 설교를 해도 거기에 '진정성'이 있으면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심장에서 생산되는 피의 약 ⅓은 두뇌활동에 사용되고 그 중에 반은 언어활동에 사용됩니다. 언어는
1초에 14000개의 신경근육을 움직이게 하고 뇌는 적절한 언어를 표현하기 위하여 호흡, 발성, 공명, 조음, 성대, 횡경막, 폐장, 기관,
후두, 인두, 구강, 비강, 눈, 귀를 종합적으로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듯이 조정합니다.
현상과 머리의 인식이 똑같은 동일한
소리는 뇌가 여러 가지 기능을 잘 조화하여 '순음'을 내니 듣는 사람 귀에 부드럽게 들립니다. 그러나 현상과 머리의 인식이 서로 틀리면 뇌가
깜짝 놀라 적절한 소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역음'을 내게 되니 듣는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파장이 전달됩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하고 설교를 했을 때, 그 설교와 설교자 자신도 똑같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뇌는 금방 '순음'을
냅니다. 하지만, '사랑합시다'하고 설교를 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전혀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뇌는 그 이중성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역음'을 내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똑같은 설교를 해도 어떤 사람의 설교는 감동을 주지만 어떤 사람의 설교는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용우
“설교는 밥을 지어 성도들에 먹이는 것”
목회자에게 설교는 무엇인가? 매일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은 나름대로 확고한 ‘설교관’을 갖고 있다. ‘감자탕교회’로 유명한 서울 광염교회 조현삼 목사는 ‘설교는 밥’이라고
말한다. 설교자는 맛있는 밥을 지어서 성도들에게 먹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교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준비’라고 말하는 조 목사에게
설교와 목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많은 사람이 조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그대로 행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로서는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말은 없을 듯합니다. 설교란 과연 무엇입니까.
△ 나는 설교는 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밥을 짓는 주부의 입장에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할 때마다 밥을 짓습니다. 지식으로 설교를 하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게
설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밥입니다. 설교는 ‘산 떡’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먹으면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설교를 통해 예수라는 밥을 성도들에게 나눠줍니다. 그 밥은 우리가 먹는 밥과 똑 같은 밥입니다. 밥의 속성은 계속 먹는
것입니다. 예수를 지식으로 즉,조직신학적으로 6번 정도만 먹으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밥입니다. 매번 먹을 때마다 힘이
되는 것이지요.
- ‘설교가 밥’이라는 개념이 매우 신선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밥이라고 할 때 너무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지
않을까요. 소위 ‘한 말’을 또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 나는 한 말을 하고 또 합니다(웃음). 목사라면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단어가 바로 설교에서 ‘한 말’을 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편안하게 합니다. 성도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매번 한 말을 또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달라’고요.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지루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들을 때마다 힘이 납니다.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힘이 느껴집니다. 예수를 전할 때면 같은 말이라도 매 번 새롭습니다.
-그같은 깨달음은 언제 찾아왔습니까.
목사님도 과거에는 ‘한 말’ 또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 언젠가 잠언을 강해하다가 15장까지 하고 그만 둔
적이 있습니다. 강해를 중단했습니다. 장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
강해를 중단하고 성경의 다른 부분을 강해하다가 머리카락이 쭈뼛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성경은 ‘한 말을 하고,또 하고’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한 말을 마가복음에서 또 하고, 또 누가복음에서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한 말 또 안한다는 말을 들으려고 몸부림쳤는데 성경에는 계속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어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목회자로서 율법에서 해방된
듯한 환희가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연상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설교는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예수는 스스로를 ‘산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밥이다. 사람은 일반적인 떡이 아니라 산 떡이신 예수를 먹어야 한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 이후 나는 성도들에게 평생을 ‘한 말’ 또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요.
- 동일한 질문이지만 그렇게 하면 성도들이 질리지 않습니까?
△ 놀라운 비밀은 사람의 이야기는 아무리 훌륭해도 세
번만 들으면 질립니다. 아무리 멋있는 말이라도 다섯 차례 들으면 짜증납니다. 목사가 설교 중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이야기를 다섯 차례 이상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솔직히 짜증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 비밀을 알고나니까
예수님을 매주일 전하는 것에 대해 부담이 전혀 없어졌습니다. 사실 나는 설교가 어렵지 않습니다. 쉽습니다. 할 이야기가 없으면 가서
‘예수,예수’ 외치고 내려오면 됩니다. 그 예수의 이름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힘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설교중에 ‘미국의 저명한
누가 말하기를…’ 등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궁금하면 우리 교회 홈페이지(www.sls.or.kr)를 한번 방문해서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외부 설교 때는 ‘감자탕교회’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저를 초청하시는
분은 ‘감자탕을 끓이라고’ 주문합니다(웃음). 그러나 주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교회에 관심을 갖게 허락하신 것은 감자탕을 끓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를 전하게 하려 함입니다. 나는 예수가 너무 좋습니다. 의지로 된 것은 아닙니다. 내 인생의 좋은 것은 모두 예수로 말미암아
이뤄진 것입니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강력한 역사와 힘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놀랍게도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예수만을 전하고 나면 설교를 통해서 답을 얻었다는 고백들이 나옵니다. 설교에서 나는 인생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제 설교를
몇 차례 듣다보면 ‘그 설교가 그 설교’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있는 예수가 힘을 줍니다. 예수를 한번 먹고 세상에 나가면 소화가 되어 다시
배가 고파집니다. 주부는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면 됩니다. 목사는 밥 짓는 주부입니다.
-그러면 맛있는 밥을 짓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설교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준비입니다. 그릇이 설교자라면 그 안에 담기는 음식이 바로
설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라는 그릇에 담겨서 전해집니다. 설교는 쉽습니다. 그릇만 준비하고 있으면 됩니다. 음식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온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용물이 아무리 좋아도 그릇이 더러워져 있으면 음식이 오염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분을 품은채 강단에 올라가면 그 말씀에 독이 섞여 나옵니다. 설교자는 강단에 올라가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분노를
정리해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하십니까. 또한 말씀을 전달할 때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 사실 삶 전체가 설교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에는 설교자의 말만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는 것이 설교입니다. 마음은 전달됩니다. 아무리 ‘사랑해요’라고 말해도 마음이 없으면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 본문을 보는 가운데 설교자가 먼저 은혜를 받은 것들이 전해집니다. 설교자가 본문에서 은혜 받은 것만큼만 전달됩니다.
설교를 잘해야겠다고 힘을 주면 감동을 놓치고 설교가 건조해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받은 감동이 설교자의 그릇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감동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 본문만을 묵상합니다. 관련된 다른 설교집은 읽지 않습니다. 주석은 점검 차원에서 주일아침 설교 전에 봅니다. 성경만
보면서 깨달을 때는 ‘아하,이거구나’라는 탄성이 나오지만 주석을 먼저 보면 그같은 ‘아하!’의 경험이 없어집니다.
- 많은
목사님이 풍성한 독서를 통해서 정보를 얻습니다. 독서를 많이 하시는 편입니까.
△ 저는 독서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책은 지루해서
잘 읽지 못합니다. 저는 대신 신문을 열심히 읽습니다. 3∼4개의 신문을 매일 정독합니다. 가장 비싼 글을 싸게 읽는 방법은 신문을 보는
것입니다. 그 안에 대부분의 정보와 대답들이 있습니다. 저는 신문의 좋은 칼럼 하나가 수백만∼수천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는 무엇입니까.
△ 목회는 사랑입니다. 저는 설교시간마다 첫번째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양떼를 향한 사랑 없이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가 쉽듯 목회 역시 쉽습니다. 즐겁습니다. 목회의 노하우는
이미 매뉴얼인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속이 예수로 꽉 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종일 예수 이름이 세상에서 따뜻하게 전해지는 일만 생각하고 삽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는 삶입니다.
-광염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다양한 나눔과 섬김의 사역을 하고 있는데요.
△ 광염교회는 한국 여러 교회 가운데 한 교회 입니다.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광염교회는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내가 더 이상 원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분이 하시고 싶은 교회를 한번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 지난해 교회 예산이 32억원 정도라고 들었는데요. 교회
재정을 100만원만 남기고 이웃 섬김을 위해 집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 쉬운 일
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저희는 소비자입니다. 그분의 것을 아름답게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태형 국민일보 전문기자
이창안 교수 “설교가 어렵나요 이렇게 해보세요”
“설교는 단순한 강연이나 웅변이 아닙니다. 연설도 아닙니다.
훌륭한 설교는 청중과의 밀도 깊은 대화입니다. ”
설교 때문에 고민하는 목회자들을 위한 ‘설교 클리닉’을 개설,인기리에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 부산 동아대 사회교육원 웅변수사학과 이창안(49·부산 영도 횃불교회 집사)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25년간 스피치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 교수가 진행하는 설교 프로그램은 설교 때문에 말 못할 애로를 겪은 목회자들에게 명쾌한 설교의 비법과 노하우를 제공하고 있다.
“청중인 성도의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그런 설교는 하나님의 영적 말씀을 간구하고 염원하는 성도들의 영혼을
오히려 메마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 교수가 이처럼 목회자들을 위한 스피치 강연에 나서게 된 것은 10여년전 목회자인
6촌형이 개척교회를 설립했으나 설교 미숙으로 교인이 감소돼 고민을 많이 하는 바람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전국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설교 클리닉’을 개설해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청중접근법,효과적인 표현전달법,음성의 강약조절법,적절한
제스처,올바른 표정관리법 등을 전하고 있다.
이 교수는 ‘설교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설교는 악보처럼
한 단어 한 단어,문장과 문장 사이에 강약이 있어야 한다. 또 발음(발성법)이 좋아야 하고 수사적(웅변적)이어야 한다. 설교에는 수사와 논리적
사고가 있어야 하고 설득력과 호소력,그리고 간청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
(사)한국목회자스피치연구원 원장이기도 한 이 교수는 특히
‘기도의 힘’을 강조한다. 자신을 살피는 예리한 통찰력이 담긴 기도야말로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도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힘이라는 것이다.
“깊은 기도가 뒷받침돼야만 영적 파워가 넘치는 목회자로 변모할 수 있으며 감동적인 설교,세상을 향해 호소력을 가진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자가 말하는 한국의 대표 설교가
한국조직신학회, ‘복음과 설교’ 논총 발간
국내 조직신학자들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설교가들의 설교를 분석했다.
한국조직신학회(회장 이정배 교수)는 최근 발간한
조직신학논총 제15집에서 ‘복음과 설교’란 주제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 소망교회 김삼환 목사,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 등 대표적 설교가들의 설교를 분석했다. 조직신학자들이 유명
목회자들의 설교를 분석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설교분석 집필자로는 장신대 김명용, 이형기, 김도훈 교수, 감신대 서창원
이원재 교수, 침신대 박홍규 교수, 서울신대 황덕형 교수, 한세대 배현성 교수, 감신대 김정숙 강사 등이 참여했다.
조용기
목사의 설교 분석
한세대 배현성 교수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청중의 눈 높이에 맞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함>, <삶의 자리의 필요를 채움> 등의 목회학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성들 중의 하나는 바로 청중과 하나되는 데 있다. 조용기 목사는 설교에 있어 여덟 가지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1)정확한
표현, 2)간결하고 쉬운 말, 3)감각적(시청각적) 표현, 4)다각적인 수식어, 5)극적인 대조법, 6)열거법을 통한 반복, 7)현재 진행형적
표현 8)대화식 표현 등이다. 조용기 목사가 지향하는 ‘눈높이’ 신학은 바로 청중의 상황을 읽고 그들과 더불어 동화되는데 있다.
또한 조용기 목사의 목회철학과 신학사상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희망’이다. 그의 설교 속에 용해되어 있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좋으신 하나님’ 사상, ‘하나님의 나라’ 이해 등에는 모두 희망이라는 주제가 저변에 깔려 있다. 배현성 교수는 조직신학논총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의 단일 교회로 만들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로 바로 ‘희망의 메세지’를 뽑았다.
마지막으로
조용기 목사는 47년간 설교를 통해 현실적 삶의 자리에서 겪는 사람들의 문제들에 관해 답을 제시하려는 목회자적 자세를 강조했다. 조용기 목사는
삶의 자리에서 낙심하고 좌절한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다.
배 교수는 “조용기 목사는 복음을 단순히 종교적 범주에서
해석하기를 원치 않는다”며 “오히려 복음을 현실 삶의 상황에서 해석하여 사람들의 삶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한다”고 밝혔다.
김선도 목사의 설교 분석
감신대 서창원 교수는 장천 김선도 목사의 설교와 신학을 분석했다. 장천 김선도 목사
설교의 형식을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주제 설교, 3대지 설교, 이야기체 설교이다.
김선도 목사의 설교는 상담 설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주로 주제 설교의 형식을 지닌다. 김선도 목사는 헤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을 현대 설교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포스딕은 설교 자체를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목회상담이라고 본다. 개인적 필요들과 그것을 채워주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연결하는 설교이다.
두 번째로 김선도 목사는 설교에서 3대지(3 points) 전개 방법을 선호하고 있다. 서론에서는 주제의
설명과 그와 연결되어 있는 성서적 소개 등을 곁들여 설교의 도입을 시도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본론 부분이다.
세 가지 요점이 전개되는 방법은 설교 주제 항목의 내용적 구조를 세 요점으로 정리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강연과
차별화되는 방법으로 신앙적 결단과 지금까지 설교 내용이 상황에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이유와 방향을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김선도
목사의 설교는 예화적 설교이다. 김선도 목사는 예화를 건물에 있어서 창문처럼 생각한다. 건물에 창문이 없거나 적다면 그 건물은 어둡고 환기가 잘
안되는 것처럼, 예화가 부족한 설교는 답답한 설교이다.
그래서 김선도 목사는 설교와 연결시킬 예화를 관심하며 크게 배려한다. 그
예화를 택할 때 몇 가지 선호의 기준이 있다. 그 예화가 구체적인 삶의 정황과 연계되는 그리고 생활의 정황 가운데서 형성된 예화를 좋아한다.
그는 예화를 발굴하는데 교인 가정심방에서 얻은 예화를 자주 든다. 가정심방은 목회자와 교인 간의 구체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실질적이며 사실적인
예화이기 때문이다.
김선도 목사의 이러한 예화적 설교의 형식은 점차 확대되어 이야기적 설교(story telling)로 발전되어
나가고 이미지 활용의 이야기로 이어져 김선도 목사의 탁월한 설교의 특징으로 연결된다. 그의 설교는 수많은 이야기의 소재로 가득 차 있다.
서창원 교수는 “서울 강남에서 8만 5천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교회로 광림교회를 성장시킨 김선도 목사의 설교는 치유적 설교이며
상담적 설교였다”고 분석하며 “이러한 설교는 현대인의 자아 정체성의 위기극복과 정신적인 문제에 도움을 줬다”고 판단했다.
김삼환 목사 설교에 나타난 신학 분석
장신대 김도훈 교수는 김삼환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신학을 분석했다.
김도훈 교수는 첫 번째로 김삼환 목사의 설교를 삶의 경험(체험)의 신학으로 특징지었다. 김삼환 목사의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체험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에는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던 덕환이란 이름의 머슴이 많이
등장한다. 김삼환 목사에게 머슴 덕환은 머슴목회와 머슴신학을 깨우쳐준 중요한 인물이다. 김삼환 목사는 늘 설교에서 머슴 목회를 강조한다.
머슴신학의 핵심은 종처럼 낮아짐과 겸손, 순종의 신학이다.
또한 김삼환 목사는 설교에서 나눔과 봉사를 강조한다. 김삼환 목사가
디아코니아의 신학을 설교하고 또 실천하고 있는 이유는 어린시절과 초기 목회시절의 가난과 관련되어 있다. 김삼환 목사는 고난이 오히려 위로이며,
더 큰 복을 위한 시련이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그의 설교에는 삶의 경험들이 녹아져 나오고 있다.
두 번째로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
신학의 특징은 신본주의이다. 김삼환 목사는 인간의 영적 위기는 바로 문예부흥으로 인하여 나타난 인본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삼환 목사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공산주의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으로도 연결되어 진다.
김삼환
목사는 구원관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과 생각과 가치에 있어서도 오직 믿음이요, 오직 그리스도요, 오직 은혜이다. 김삼환 목사는 교회의 목회
표어를 '오직 주님'으로 정하고, 또 설교집의 제목을 “주님보다 귀한 것은 없네”라고 붙이고 있다. 그의 메세지의 주요 줄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로부터 오는 전적인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삼환 목사는 보수적 복음주의적 신학을 고수한다. 그는 우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한다. 자유주의를 이단과 신비주의, 세속주의와 함께 교회의 장애물로 생각한다. 또한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김도훈 교수는 “김삼환 목사는 철저히 복음적이고 성경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자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또한 그가 지향하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deus dicit)’란 명제가 지금의 한국 신학계에 큰 도전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옥한흠 목사의 설교 분석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가 옥한흠 목사의 설교 분석을
맡았다. 이승구 교수는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1)복음주의적 설교, 2)열정을 지닌 설교, 3)때때로 나타나는 좋은 주해적
통찰을 가진 설교, 4)연구하는 설교, 5)현대적 문제에 적절히 반응하는 설교, 6)고난 문제에 과감히 설교하는 설교로 분석했다.
특별히 옥 목사는 복음주의적 설교에서 성경과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를 잘 드러내는 설교, 복음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성도에게
자연스럽게 적용하도록 하는 설교, 복음에 근거한 소명감을 강조하는 설교, 복음 전도적인 설교 등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이승구 교수는 옥 목사가 영문학과 출신답게 좋은 외국 문학 작품들을 적절히 인용하며 설교하고 있다고 밝혔다. 옥 목사가
인용한 작품으로 홉킨스의 <수녀원>이라는 시, 테니슨의 시집 <용광로>, 웨일즈의 <대주교의 죽음>, 벤디에르의
<요새의 함락>,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베니스의 상인>, <오델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다.
이정익 목사의 설교 분석
서울신대 황덕형
교수는 이정익 목사의 설교를 평가했다. 황 교수는 이정익 목사의 설교를 편안함으로 지칭했다. 이정익 목사는 본인 스스로 청중의 기호에 맞추어,
말재주와 미사여구로 꾸며진 설교를 비판한다. 설교자가 현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에 설교에 남다른 테크닉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이정익 목사는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설교 특징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이 세상의 평범함 속에서 찾도록 한다. 그는 설교에서 대단하게 다른 것은 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동감하면서 찾을 수 있는 것 가운데, 바른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고 한다.
또한 이정익 목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이해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닌 어두운 면보다는 그것이 이 세상의 생명을 가지고 온 삶의 씨앗이라고 설교한다.
대속이라는 법률적 이해보다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에 접근한다.
이와 함께 그의 신학이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이 종교적 범주라고 생각되는 특별한 경험으로 예외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목사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사건은 거의 상식적인 질서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이 세계는 이
목사에게는 너무나 완벽한 코스모스이며, 그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이미 예부터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인식과도 동일하다.
황덕형
교수는 “이정익 목사의 설교는 삶의 지평 안에서 삶을 이해하면서 삶을 인도할 수 있는 능력으로 다가온다”며 “무엇보다 평범한 생활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다른 말로 찾는 것은 이정익 목사의 강점”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한국조직신학회는 “한국의 교회를
지도하는 목사들의 신학을 이해,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함으로써 교회를 섬기기 위한 실천적인 신학의 한 모형을 찾아보기 원한다”고 이번 논총의
의의를 밝히며, “논총에 실린 목사님들로 하여금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의 메세지를 더욱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진다”고 밝혔다.
설교 듣고 효과 볼 수 있는 방법
설교는 한번만 잘 들어도 큰 효과를 본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지만
체험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심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의 치료도
범사의 문제도
듣는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현실화 됨을 알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사왕은..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우상들을 치울 힘을 얻었다(대하15:8)
믿음은 상상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이런 믿음은..
내 안에서 나오는 신념같은
각오에서 나오지 않는다.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말씀의 효과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첫째는..
말씀 내용을 의심 없이 잘 들으라.
말씀을 검색하지 말고 물을 마시듯 흡수하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은
의심없이 잘 먹으면서
설교는 왜?
까다롭게 마음 한쪽을 닫아 놓고 들을까 생각해라.
사이비 종파에
노이로제가 걸린 이시대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먹지 않을 것인가 이치를 생각해보라.
두 번째는..
잘들은 설교가 과연 성경에 기록된 말씀인가 확인하고
성경을 상고해 보라.
셋째는..
설교를 듣고는 반드시 말을 하라.
말하거나 댓 글을 써본다거나 하는 것은
자기 속에서 역사할 준비를
선언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말씀을 물을 마시듯 잘 듣고..
과연 그런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고..
들은 말씀을 내가 말하거나
설교자 앞에 글이나 말로 고백을 해본다면
내 안에 내가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라
그러면 기도 응답을 쉽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