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인이신 교회가 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이 부수어질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지 않으시고 헐어버리셨던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도 흥할 때가 있고 쇠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그에 대한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흥하는 교회”를 추구해 나가므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은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교회설립 3주년을 기념하면서 예배드릴 때에 “흥하는 교회”를 향한 큰 결단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복 주심을 허락받는 기쁨이 넘치게 되길 소망합니다.
1. 주의 몸 된 교회에서 으뜸이 되려고 할 때 교회는 쇠해집니다.
요한삼서를 기록한 저자 장로의 눈에 디오드레베라고 하는 자가 보였습니다. 그 자는 가이오가 칭찬받는 주의 사람이었던 것과는 달리 주의 몸 된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 싶은 마음에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교회에 오지 못하게 막았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내쫓았던 자였습니다(9절~10절).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복에 들어오도록 사역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요, 그런 삶의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주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의 당연한 직무일 텐데 교우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교회인 교회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 막다니요. 거기에 인격적인 수치심마저 갖도록 하는 모욕적이며 불쾌하기 그지없는 언사를 내뱉으면서 교우들을 교회에서 내쫓기도 했으니(10절) 그래가지고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찌 흥해질 수 있단 말씀입니까?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심보를 갖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물리력을 사용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꼴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바로 이런 종류의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교회의 참 주인이신 주님을 내쫒고 자기가 으뜸이 되어 주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에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유혹을 당했던 아담 내외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가 말씀을 어기고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하자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사태를 모면하려고 했던 초라하기 그지없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행태를 보일 때 가감 없이 그대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나타내는 변질된 사람이 가부좌 틀고 앉아 머리노릇을 하려는 교회가 어떻게 온전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게도 그런 교회는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주의 몸 된 교회가 아니므로 성령이 떠난 공동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성령이 떠난 공동체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아니므로 쇠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 청년회장 선거로 조직 자체가 사라져버린 청년회
어느 교회에서 청년회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유별나게도 청년회장을 하려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임기 2년인 교회의 청년회장이 되기 위해 청년회장이 인준을 받는 그 순간부터 차기 청년회장 선거운동이 일어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청년회장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위기이고 청년회장은 교회에서 지명되는 형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청년, 청년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특별 은사가 있는 청년, 적어도 부모님 중 한쪽이 권사가 된지 10년 이상인 청년..... 이런 식으로 청년회장에 대한 조건이 암묵적으로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영 그렇지 않았습니다. 청년회장이 인준되었다는 공식발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기 청년회장을 뽑기 위한 선거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특이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부러워하는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그 교회는 주님을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젊음을 드리겠다는 청년들이 많아서 좋겠다는 시각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청년회장 문제 때문에 하도 시끄럽고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부작용이 자꾸 발생해서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실로 기가 막힌 문제가 또아리를 틀고 청년들을 유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청년회장이 되고자 했던 것임이 밝혀졌고 급기야 그런 덕스럽지 못한 사실이 폭로된 후에는 청년회 자체가 급격히 쇠락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청년회 조직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어이없게도 청년회장이 되면 매달 청년회 부흥을 위해 수고한다는 명목으로 교회에서 활동비를 지급받을 뿐만이 아니라 회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교회의 선교용 차량을 개인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으며 청년회장 임기 마지막 해에는 미국의 큰 교회를 견학할 수 있는 특별 연수 기회가 주어진다는 특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소낙비 맞듯이 받고 그에 감사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흥하게 하도록 하는 신성한 주의 일에 부름을 받은 젊음으로서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권에 따른 야심 때문에 교회에서 으뜸이 되고자 했던 젊은이들로 차고 넘쳤던 그 교회는 겉보기에 청년회 부흥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주변 교회의 부러움을 샀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청년회 부흥의 진정한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그 전모가 밝혀졌을 때에 당시의 청년회장은 임기도 마치기 전에 자신이 속했던 청년회 조직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일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44, 마20:27).”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인위적으로, 혹은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헛된 가르침으로 전락시키는 자들이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가 있는 교회는 주님의 영이 떠난 인간 공동체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그런 교회는 당연히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은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나타내는 주님의 신실한 일꾼들이 되어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키워가는 즐거움을 나누는, 참으로 복된 주님의 사역자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2.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때 교회는 흥하여 집니다
요한삼서를 기록한 하나님의 사람, 저자 장로는 왜 가이오라는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요? 1절을 보니 사랑한다는 표현이 강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한다’라고 되어 있군요. 얼마나 사랑하기에 이런 강조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상대방이 주 안에서 복 받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상대방이 잘 되길 바라는 축복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의 저자인 장로는 가이오를 한없이 축복하고 있군요. 그러므로 그가 가이오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강조표현을 하면서 그를 축복하는 것은 그만큼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가이오라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3절에 나타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증언하였습니다. 이 말은 가이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입소문이 났다는 뜻입니다. 가이오라는 사람, 그는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삼서를 기록한 저자 장로는 “형제들이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이오라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바로 그 진리 가운데에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단순히 소유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소유한 진리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삼서를 기록한 저자 장로는 가이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삼서를 기록한 저자 장로는 가이오에 대한 소문에 대해 “내가 심히 기뻐한다(3절b)”고 반응하였고 그에 덧붙여 4절과 같이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점점 더 흥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흥하게 만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로 점점 북적대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시골의 어느 면 단위 이하 지역에 있는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시골 교회도 부흥한다!’ 는 교회부흥의 좋은 예로 회자되던 실례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심한 학대와 그에 더한 시모 및 시누이들의 집단적인 핍박을 받는 중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집안의 평화를 위해 조만간 집을 떠나고자(?) 결심을 하게 된 어느 집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어느 날 옆 동네의 면식이 있는 부인들 네댓 명이 어디론가 가면서 그녀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그녀는 인사를 받으면서 습관적으로 ‘어디들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장소가 궁금해서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 때 그들 중의 한 부인이 그녀에게 밑도 끝도 없이 지금은 누구나 좀 한가할 때니까 우리와 함께 누구네 집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준비나 예고도 없이, 더구나 그 집에 어떤 볼 일도 없이 남의 집에 무리를 지어 간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 그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한 부인이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이대로 같이 가서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은 일이 있을 생길 거에요. 같이 가요.”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겼습니다. 그 때 나머지 부인들도 덩달아 “그래, 그래. 같이 가요. 좋은 일이 있을 생길 거에요. 시어머니에게는 우리가 잘 얘기할게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얼떨결에 같이 가게 된 그 어느 집..... 그 집의 부인도 오고가는 교분은 없었지만 얼굴은 알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던 그 집의 부인은 그녀를 보자 다른 부인들 보다 더욱 더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주 잘 오셨다면서 오늘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조금 전에 다른 부인들에게서 들었던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마루에 둥그렇게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인사치레 형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에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가자며 끌었던 그 부인이 ‘다같이 손을 잡자’면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그녀를 가리키며 ‘앞으로는 이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고 시모와 시누이들 및 남편이 변하여 천국의 가정이 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자’고 하더니 눈을 감고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어색하고 당황스럽고 좌불안석이었지만 양쪽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 바람에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앉아 기도의 분위기에 젖어 숙연한 마음으로 모든 순서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양쪽에서 자기의 손을 잡고 있던 부인들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감동이 손끝에서부터 가슴으로 전달되기 시작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평안함과 감격이 그녀의 온 몸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녀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픔과 서러움이 그녀의 눈물과 콧물에 뒤섞여 밖으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집와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며느리로서 대접받은 것은 고사하고 “저것이 우리 집에 들어 온 이후로 되는 일이 없었다”는 남편의 학대에, 시모와 시누이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며 천대받으면서 오늘까지 살아 온 나날들이 영화처럼 주~욱- 스쳐 지나갔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나머지 부인들의 기도소리가 끝나고 자기의 손을 잡고 끌면서 같이 가자고 했던 부인이 또렷한 목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아무개 엄마를 사랑해 주셔서 그 엄마를 통해 시댁이 변화되고 지금 그 남편은 집사가 되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 자리에 처음 참석한 그녀의 남편도 같은 방식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아무개 엄마에게 주셨던 주님의 사랑의 권세를 그녀에게도 똑같이 주셔서 이 집 남편뿐만이 아니라 시댁식구 모두가 변화되는 복을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그 부인들과 함께 열심히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누구 엄마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자신에게도 주셔서 시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네의 일을 도맡아 하면서 상당히 평들이 좋은 그 부인들이 그녀의 시모와 시누이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시모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그 부인들은 그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마을 일에 앞장서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인들과 자기의 며느리가 어울리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시어머니의 예전 기세는 많이 꺾였고 이미 남의 집 며느리가 되어 있는 시누이들의 태도 역시 영향력 있는 부인들에게 막혀 예전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마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믿음이 좋은 그 부인들의 남편들이 아무개 씨의 부인을 칭찬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교회생활을 통해서 들려오는 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 알게 된 아무개 씨의 부인, 그 부인이 그렇게 성실하고 착하고 똑똑한데... 그 시댁이 그 집에 들어 앉아 있는 보물단지를 아직도 몰라보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동네에서 돌고 있다는 것을 그 집의 남편을 비롯하여 시댁 식구들이 다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동네의 영향력 있는 부인들이 편들어 주는 그녀를 다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자기의 부인, 동네의 영향력 있는 부인들로부터 존귀히 여김받고 있는 새언니, 어느새 그 마을에 없으면 안되는 여인으로 바뀐 며느리의 위치를 대하면서 며느리를 상대하게 시모...
결국 그녀는 믿음이 좋은 그 지역의 부인들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영적인 자매들의 인연을 맺은 결과 그녀보다 앞서서 집안을 변화시켰던 아무개 엄마처럼 그녀도 그녀의 집안을 변화시켜 가고 있었던 겁니다.
주님의 무한사랑 안에서 거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나누어 주었던 그 부인들을 통해 주님의 끝없는 무한사랑을 받으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던 그녀는 이후 주님의 사랑의 권세로 시댁식구들을 향해 가졌던 한 맺힌 아픔을 털어버리고 드디어 시누이들을 시작으로 시댁 식구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하여 그녀가 출석하는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대는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와 같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무한사랑을 주고받으므로 저와 여러분이 속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날마다 흥해가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길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3.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때 교회는 흥하여 집니다
요한삼서를 기록한 저자 장로의 사랑을 받은 가이오라는 사람이 진리 안에서 행한 신실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5절~8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나그네 된 자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란 직업적으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생계형 방랑인생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때이고 먹거리도 오늘날과 같이 풍요하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에 생존문제를 위해 삶의 터를 찾아 나선 사람들을 잘 대접하는 것은 기본 생존권을 서로 부조하는 인륜지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형 방랑자들을 잘 대접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항상 권장되고 있는 덕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 나그네 대접의 중요성
이와 같은 ‘나그네 된 자들의 삶’의 단면에 대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생존문제를 걸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며 살았습니다. 한 때는 이집트까지 내려가서 가정에 큰 불행이 임하기 직전의 상황에까지 치달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많은 세월 그렇게 떠도는 중에 그의 부인 사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요(창23:1). 그 때 그는 잠시 머물러 살던 헤브론이라는 땅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헷 족속에게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매장지를 구하게 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아브라함의 이 말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나그네 처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한 곳에 터를 잡고 자신의 생존문제를 해결했던 사람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생활하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뿌리가 나그네 생활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을 이뤘던 출애굽 당시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22:21)” 또, 출애굽기 23:9에서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고 말씀하므로 저 옛 시대에 나그네 되었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하며 외롭고 힘든 삶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현대 유럽의 나그네 인생-집시(Gypsy) 족
이것은 마치 현대 유럽의 집시(Gypsy) 족에 해당하는 삶의 한 형태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집시 족은 그들만의 삶의 터전인 정착지가 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 방랑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기도 한데 이들은 검정색 머리에 검정 눈, 그리고 황갈색 계통의 피부색을 지닌 코카서스 인종이라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코카서스란 카프카스라는 말의 영어식 발음입니다. 카프카스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유럽지역을 일컫는데 지금의 러시아,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의 여러 나라가 접하여 있는 동서 교통의 요충지이며, 유전 지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지역 출신의 인종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 일부의 지역에서 무리지어 생활하면서 정해진 목적지가 없이 방랑하는 이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주변의 정착지 종족들에게 갖은 수모와 박해와 천대를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저 옛 시대 성경에 나타나는 목자와 같은 생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광야를 떠돌면서 방랑하던 모습과 같고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 이를 때까지 여행하던 삶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방랑하면서 세상을 떠돌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기원하여 집시(Gypsy)라고 하면 정착지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방랑생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존문제를 방랑하면서 하루하루 해결하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계획적인 방랑자들, 얄미운 떠돌이들
어렸을 때에 한 밤중에 어느 모녀가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저의 어머니는 모녀에게 어서 들어오라면서 대뜸 ‘저녁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모녀는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눈치를 챈 어머니는 그 모녀가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식구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조금 남았는데 간식먹는 마음으로 조금 드시라’며 밥상을 차리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모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고 한밤중에 하루밤 재워달라고 부탁했던 그 불쌍한 모녀의 모습을 보면서 자세하게 묻지도 않으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녀들에게 혹, 어떤 아픔이 있다면 잠재워주는 것을 빌미로 말하고 싶지 않은 어떤 아픔을 건드리는 결과만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렸을 때의 일이라 분명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니는 모녀를 위해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누구도 없는 틈을 타서 모녀에게 간단한 요기꺼리를 제공한 후 그녀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와는 달리 어느 날부터인가 주일날만 되면 정기적으로 교회를 방문하여 세금받아 가듯이 얄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디서 들은 가락인지 ‘교회는 자기와 같은 사람한테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노골적으로 물질을 요구하였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참다못한 교인들이 가세하여 그들에게 점잖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그렇게도 싫었던 모양입니다.
갑자기 소리소리를 지르면서 ‘뭐, 이런 교회가 다 있느냐’며,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을 외쳤건만 이 교회는 망할 때가 돼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며 욕설까지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얄미운 사람... 주님의 사랑을 이용해서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얄미운 사람... 어떤 유행가 가사를 빌려 탄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뭐.....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진리 안에서 신실하게 나누는 주님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은 어느새 주님의 일을 같이 하는 동역자가 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과를 확장시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위에서 말씀드린 경우와 같이 주님의 사랑을 이용하려는 어떤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교회가 흥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ㅇ 확실하게도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흥하여 집니다. 그것은 꿀이 있는 꽃에 벌 나비가 모여 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ㅇ 또 교회는 주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흥하여 집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나누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는 주님의 사랑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쁨, 주님의 은혜로 건강이 회복되는 치유의 은총을 체험하는 기쁨,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신비한 만남을 통해 인생이 변화되는 기쁨, 이런 놀라운 기쁨이 허락되는 주님의 은총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무한사랑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기쁨... 이런 기쁨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교회는 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인간적인 이권을 챙기려고 한다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므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인간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집단체로 퇴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나타나고 사랑이 나누어지며 믿음으로 교제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신령한 하나님의 복으로 세상을 이기며 삶을 변화시키는 택한 백성의 복을 풍성히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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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신앙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후배 하나가 전에 못 보던 좋은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 수백 만 원을 호가 한다는 시계이다. 관심을 갖는 나에게 후배가 말한다.
"선배님 다음에 하나 선물할 까요?"
"이렇게 좋은 시계를 말이요."
"네 선배님, 만원이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자세히 설명을 듣고 보니 짝퉁 시계였다. 진품보다 더 좋아 보였고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짝퉁'(fake)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사전에는 없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은어라고 한다. 값비싼 명품을 모방한 가짜, 모조품, 유사품, 이미테이션 등에 해당하는 말이다.
한때 우리나라는 짝퉁 선진 한국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였고 서울 이태원은 짝퉁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요즘은 짝퉁 세계1위 자리를 중국이 따 갔다고 한다. 중국에는 한국 차 티코가 인기가 좋으니 짝퉁 티코 자동차도 있다고 한다. 짝퉁을 자꾸 만들다 보면 진짜 좋은 물건도 만들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다는 짝퉁 예찬론도 있다. 그러나 짝퉁은 짝퉁일 뿐이다.
◇ 신앙도 짝퉁이 있다
* 짝퉁 신앙은 어떤 것인가?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짝퉁이다. 진품보다 색깔도 더 화려하고 세련미도 탁월하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르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도 사단일 뿐이다.
사단이 천사가 될 수는 없다. 길거리에서 기도하고, 십일조, 안식일준수, 금식기도를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가장 잘 믿는 신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셨다. 양의 가죽을 쓴 노략질하는 이리이며, 의, 인, 신을 버린 회칠한 무덤이며, 독사의 독이 가득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다.
* 거듭나지 못한 신앙은 짝퉁이다
신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Born again)나야한다.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볼 수도 갈 수도 없다고 하셨다. 신앙 고백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공회의원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고 하셨다.(요한3:10) 거듭난 신자가 하나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 진가는 드러나게 된다
* 시간이 경과하면 드러난다
짝퉁은 금방은 모르지만 얼마 못가서 기능상의 문제도 생기고 색상도 쉽게 변한다. 짝퉁 신자는 인내가 없다. 바른 신앙의 사람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는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세월이 가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변함이 없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한 결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다.
*지금이 바른 신앙 가질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가 짝퉁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책망, 심판,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나의 신앙을 철저하게 진단해보고 점검하여 바로 세워 가야한다. 지금은 은혜의 날, 구원의 날, 회복 할 수 있는 때이다. 사망하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되고 죽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릴 뿐이다. 순간이 영원을 좌우한다.
짝퉁 물건은 마침내 버려지게 된다. 그러나 짝퉁 신앙은 고칠 수 있다. 우리의 삶의 표준과 정답은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면 성령님이 바르게 세워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