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시간을 줄곧 내달아 도달한 남도 끝자락 고흥반도. 그럼에도 예내교회가 있는 외나로도까지는 어림잡아 한 시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직접 찾아가겠다는 필자를 박병도(40세) 전도사는 한사코 만류했다. 찾을 수 없으니 면사무소가 있는 축정까지만 오란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내리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확인했고 한갓진 시골에서 교회 찾기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가 옳았다. 예내교회에 도착했을 때 동구 밖 혹은 언덕 위의 하얀 예배당이리라는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예배 처소라고 부르기에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예내교회는 일견 볼품없는 교회다.
황무한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
산비탈 이편저편에 자리한 스물세 가구 중 가장 초라한 촌집에 십자가를 세웠다. 한 귀퉁이를 태풍으로 쓰러진 느티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 당제를 지냈다는 나무가 이젠 교회 울타리가 되어 있는 셈이다. 느티나무 건너 동쪽으로 다도해의 그윽한 바다가 보이는 게 그나마 안심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관심일 뿐, 바다를 지척에 놓고 사는 이들에게 어디 눈에 새겨둘 만한 광경이겠는가.
촌집 안방을 이리 한 뼘 저리 한 뼘씩 넓혀 예배당을 꾸몄단다. 낮은 천장과 한지를 입힌 격자 창문, 노오란 때깔의 비닐 장판…. 촌로들이 모여 한담이나 나눌 사랑방으로 쓰임직하다. 휘장은 물론 그 흔한 장의자 하나 없다. 자그마한 강대상이 덩그마니 놓인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예배를 드린다.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에 익숙한 눈에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곳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듯하다. 겉모습이 아닌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잠시 접어두고라도 말이다.
“고흥에 있는 제법 큰 교회에서 사역할 때입니다. 이곳에 교회는 있는데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마음 걸림은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계획이었을까. 일단 살펴보기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길을 나선 그였다. 지붕에선 비가 줄줄 새고 처마는 주저앉고, 예배가 드려져야 할 곳에는 고추가 가득 널려 있었단다.
“황무하게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던 옛 선지자들의 참담한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고흥으로 돌아와 안타까움으로 몇 날 며칠 잠을 이루기 힘겨웠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굳이 예내교회를 저에게 보이신 뜻을 새겨보았습니다. 그리고 대형교회든 예내교회든 당신께서 세우셨다는 그 자체로 이미 깊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지요.”
고난이 결국 유익이라 해도 고난을 자초할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는 사모와 어린 두 아이를 이끌고 예내로 들어왔다. 2000년 8월이었다. 등 떠미는 이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 하길 원하셨고, 무너진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를 인도한 바였다.
산비탈의 나무들이, 들판의 돌들이
지붕을 수리하고 처마를 세우고 예배당을 정리했다. 헛간을 손봐 사택으로 삼았다. 그 홀로였다. 마을의 불신자들은 그를 배척했으며, 산 너머 10여 리 떨어진 교회에 출석하던 몇 안 되는 신자들은 냉담했다.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첫 주일예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 외에 아무도 없는 쓸쓸한 예배였죠. 외면하던 이들의 비아냥거림이 귓전에 쟁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문을 열어제친 채 마을을 굽어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외치지 않는다면 산비탈의 저 나무들이, 들판의 저 돌들이 일어나 외칠 것이다. 내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도 그 감격이, 지치고 힘겨울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흘렀다. 현재 장년 17명에 주일학교 4명. 스물세가구가 전부인 마을 규모와 대부분이 독거 노인인 점을 주목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결을 물었다. 그는 한동안 웃기만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 선물에 이편의 공로가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우문현답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필자는 아둔한 물음에 계속 매달렸다.
“교회가 무너진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신 듯합니다. 그리고 교회 성장이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 움직이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또 원론적인 이야기다. 손에 쥐어줘야 알아차리는 필자의 어리석음이 다시 발동하자, 곁에 있던 조순애(72세) 집사가 거들었다.
“그간 무진 애를 쓰셨지요. 처음에는 문전 박대도 수없이 당했지만 이젠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전도사님을 찾아요. 훌쩍 왔다가 어느 날 훌쩍 가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갈 양반이라는 걸 안 게죠. 그래서 교회에 일이 있으면 마을 전체가 발벗고 나서요.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모두 다요.”
나이 일흔에도 청년처럼
그 신뢰가 교회에 대한 벽을 허문 계기였다. 복음의 씨가 된 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먼저 발상을 전환하기로 했단다. 강단에서 내려와 그들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고,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전기 배선 기술자로 나섰다. 보일러 배관공을, 마을의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김지민(36세) 사모는 독거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쌀이 떨어져 수제비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행한 까마귀의 역사처럼 지금껏 지내왔다. 그러면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복음은 그의 진심을 따라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가슴을 적셨다.
“우리 교회의 일꾼들이십니다”라고 그는 곁의 두 할머니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김방심(77세) 집사와 조순애 집사. 일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에게 일꾼이라니….
“저희 교회에서 제일 젊으신 분이 예순일곱, 최고령이 아흔이십니다. 칠, 팔십의 노인들이지만 저는 언제 어디서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내교회야말로 청년 혈기로 깨어 있는 교회라고요.”
그리 믿고 싶은 게 아니냐는 반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열한 시 주일예배에 아홉 시부터 찬송을 하며 준비하십니다. 열 시만 넘으면 빨리 하자고 성화십니다. 또 예배가 끝나면 조금 더 하자고 그러십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열심입니다. 예내리 좌측은 예당이고, 우측은 우주기지가 들어설 하반입니다. 저희 성도님들은 올해의 전도지를 예당과 하반까지 확장해 놓고 있어요. 청년의 혈기보다 더 기운차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든 주일예배든 예외 없이 전원 출석이란다. 교회 공사를 할라치면 꼬부랑 할머니까지 벽돌 한 장, 모래 한 줌씩 들고 비탈길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 은혜가 넘쳐서 그런다니 만류할 수도 없을 지경이란다.
오래오래, 평생이 될지라도
“저희는 주보가 없습니다. 열일곱 분 중 두 분만이 글을 아시기 때문에 찬송가 몇 장이라고 해도 그 페이지를 찾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찬송가를 펴놓고 찬양을 하고 싶어하시죠. 고심 끝에 궁리해 낸 게 파란색과 빨간색 책갈피입니다. 예배 전에 찬송가에 꽂아놓습니다. 그리고 첫 찬양 때는, 자 파란색입니다….”
불현듯 가슴이 저려왔다. 그가 감당해야 할 사역 현실의 어려움을 실감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필자를 오지 선교 현장으로 보내 글을 쓰게 하신 까닭을 새삼 떠올린 탓이었다. 필자와 이 글을 읽은 독자 모두를 겨냥하신 그분의 뜻이 있지 않을까. 오지 선교 현장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시려는 그 이상의 것. 우리가 혹은 잊었거나, 혹은 뒷전으로 밀어두었거나, 또 혹은 낯설어진 그분과의 첫사랑에 대한 회복 말이다. 문맹의 노인이 볼 수도 없는 찬송가지만 굳이 펴놓고 그분을 찬송하려는 그 간절함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는가.
교회 내에 잠자리가 없어 조순애 집사를 따라 나섰다. 밤길을 짚어가다 슬그머니 그에 대해 물었다.
“고맙고도 죄송하죠. 사례비라고 이십만 원 드려요. 그걸로는 양식도 안될 테니, 염치없는 노릇이죠. 성도들이 늘고 있지만 힘없는 노인네들뿐이라서…. 에고, 딴말은 안 할랍니다. 조금 더 일찍 오시지. 늦게 온 벌로, 우리 모두 죽어 예 묻어놓고 떠나랑께.”
말해놓고 조 집사가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김지민 사모의 말이 떠올랐다.
“환경으로 따지면 힘들지 않을 수 없지요. 친구도 없이 외톨박이로 자라야 하는 아들들의 교육 문제가 특히 그렇지요. 하지만 이곳이기에 맛볼 수 있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일흔 넘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할머니들입니다. 예배드릴 때 발갛게 상기된 그분들의 얼굴을 보면 열아홉 살 처녀처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그 모습이 감사이며 기쁨이고 또한 이런저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이튿날 아침, 예내교회를 떠나며 그에게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 것인가. 오지 선교의 어려움을 익히 보아온지라 은근히 조바심이 난 까닭이었다.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이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기도합니다. 오래오래 그것이 평생이 될지라도 이곳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와 마지막 악수를 나눴다. 소망을 아는 자만이 인내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의 인내는 소망 안에서 열아홉 살 처녀처럼, 그분 보시기에 언제든 아름답기를 기원했다.
누군가 외지고 고단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은 눈물날 정도로 감격스럽다.
필자는 멀어지는 예내교회와 박 전도사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산모퉁이를 돌아 텅 빈 바다만 남았을 때 훗날 취재가 아닌 가벼운 차림으로 이곳을 되찾고 싶어졌다. 번다한 세상살이가 오늘의 감격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손쉽게 망각하게 만드는지 익히 알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