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6:19-22,마6:33-34/ 새해에 밝은 눈/ 한경직 목사 2014-08-22 23:24:01 read : 114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인간의 오관 중 가장 보배인 것은 눈입니다. 보면 제일 분명히 압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에 와서는 특별히 시각 교육에 치중합니다. 또 누구나 라디오보다는 TV를 더 좋아합니다.
한국말에는 다른 감각에도 본다고 하는 말을 덧붙여서 씁니다. 가령, 맛보다, 만져본다, 맡아본다, 들어본다 등 보아야 더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귀합니다. 눈은 밝아야 합니다.
옛 시인은「내 눈을 열어 주옵소서」(시 一一九․十八)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엡 二․十八) 그러므로 이 새해 첫 주일에「밝은 눈」혹은「밝은 비전」이란 제목으로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 생활은 그 시력 여하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볼 줄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는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도 해서 따먹었다고 했습니다. 외양만 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창세기 十三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는 요단들을 보니 물이 많고 푸른 들이 많으므로 그리로 갔다고 했습니다. 푸른 풀만 보고 소돔사람들의 죄악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큰 낭패를 본 것입니다. 에서는 붉은 팥죽만 보고 장자의 명분의 가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은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가보니까 흑인들이 조개를 까먹으면서 구술 같은 것을 휙휙 집어 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주였습니다. 그는 장난감 하나를 주고 진주를 한 주머니 얻어다가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의복과 금은을 감추었다가 자신과 온 가족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의복만 보고 금은만 보고 죄의 값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 역시 은 삼십 량만 보고 만민의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못 보는 것, 눈이 흐리고 밝은 것은 일생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밝아야 합니다. 신령한 눈이 밝아야 합니다. 영혼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의 말씀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四장 十八절에는『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건은 영원한 것이니라.』라는 의미 심장한 교훈이 있습니다.
물질 중에도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물 한 잔을 거저 보면 아주 맑습니다. 깨끗해 보입니다. 그 물 한 방울을 현미경으로 보면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세균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안 보이는 것을 보기 시작한 때부터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많은 병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많이 듣는 원자니, 핵이니, 양자니, 전자니 하는 것들은 다 우리 육신의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인간이 보기 시작한 때부터 원자력을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전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게된 때부터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까운데 있는 것은 보이나 먼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먼 곳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발 뿌리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남한만 보면 안 됩니다. 북한도 보아야 합니다. 멀리 미국도 보고 영국도 보아야 합니다. 지구만 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주 시대인 지금은 달도 볼 줄 알고, 해도 볼 줄 알고, 멀리 있는 별들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원군은 이조 말엽의 한 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멀리 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시의 세계대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쇄국주의로만 정치를 하다가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미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도오죠오(東條)는 미국 구경을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망했습니다.
국내만 보면 안 됩니다. 먼 곳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온 세계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겉은 보이나 속은 안 보입니다. 그러나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빛 좋은 개살구」란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독사 알을 새 알로 잘못 알고 가져다가 아랫목에 두었더니 며칠 후에 독사 새끼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겉만 보아서는 모릅니다.
사람을 보는데도 겉만 보면 안 됩니다. 매국노 이완용은 아주 잘 생긴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결혼할 때에도 겉만 보지 마십시오 영어 속담에「미인은 가죽만큼 두텁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만 보고 결혼했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는 보이나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를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갈릴리 어부에게서 장차 삶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한 천한 여자에게서 장차 경건한 하나님의 딸 막달라 마리아를 보셨습니다.
한 탐관 오리, 부정 부패한 관리에게서 귀한 그리스도의 제자 삭개오를 미리 보셨습니다. 사람을 볼 때, 특히 청년들을 볼 때 그의 미래를 볼 줄 아는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사회 정세를 볼 때에도 미래를 앞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二차 대전 때에 일본이 필리핀까지 점령하게 되자 한국인들 중에는 이젠 일본 천하가 다 되었다고 일본말만 하고 일본 옷만 입고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현재만 보고 미래를 못 본 이들입니다.
자유당 말기에 三․一五부정 선거로 승리를 거둔 이들이 크게 개가를 불렀습니다. 한 달 후에 올 四․一九를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선거에 있어서는 항상 현재보다 장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정치가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장래의 역사가가 어떻게 볼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적 존재는 보이지만 영적 존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존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도 겉 사람은 보이나 속 사람 곧 그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기억하게 됩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보이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통치자인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도탄성에 있을 때 아랍 군대가 와서 포위를 했습니다. 그의 종이 아침에 일어나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엘리사는 그 종의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눈이 열리자 불 말과 불 수레가 도탄 성을 에워싼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권세만 보지 말고 진리의 세계의 권세가 얼마나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현세는 보이나 내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을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 심판도 미리 보아야 합니다.「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이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주 여호와 나를 도와주시네.」
산을 볼 때에 나무와 돌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천지를 지으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내가 보니…」「내가 보니…」라는 말이 많습니다. 에스겔서를 보아도 역시 그런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 신령한 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서 신령한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남의 허물만 보고 내 허물을 보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책임을 감당치 않는 것은 잘 보면서도 내가 맡은 책임을 내가 잘 감당치 않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각각 내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 책임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 자신의 성찰에 대한 눈이 밝아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는 각각 내 책임을 바로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눈이 밝아질까? 혹은 흐린 눈을 밝힐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면입니다. 먼저 눈을 가리우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눈을 가리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욕심이 그것입니다. 정욕, 물욕, 권세욕, 명예욕 등 온갖 욕심은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게 될 때에 우리는 올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때로는 친구도 못 봅니다. 친척도 못 봅니다. 민족도 못 봅니다. 나라도 못 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못 봅니다. 이리하여 죄를 짓습니다.
둘째로 편견, 선입(先入)주견(主見) 따위로 언제나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커스의 지동설을 주장할 때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문화인들의 편견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임스 심슨이라는 분이 크로로포름을 마취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당시 의학계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는 이야기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편견이 당시의 의학자들의 눈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사실이나 진리에 당면할 때 내가 그것을 무슨 이유로 반대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진리에 입각해서 반대하는가 아니면 편견 때문에 반대하는가 말입니다.
셋째로 시기나 미움 같은 감정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요한 一서 二장 十一절에는『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시기나 미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바른 판단을 못합니다.
넷째로 자만심 혹은 교만이 언제나 눈을 가립니다. 바리세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바로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교만이 그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기나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면 아무도 바로 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반대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눈을 밝힐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복음 三장 三절에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심으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 새 세계, 새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五장 八절에 주님께서 팔 복을 말씀하실 때『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새 마음을 가져야만 하나님을 봅니다.
다시 말하면 참 회개를 통하여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五장 十七절에는『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것이 참으로 주안에 있을 때에는 새로워집니다. 그 때에는 눈까지 밝아집니다.
그리고 바른 위치에서 보아야 바로 봅니다. 이사야 四十장 九절에『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야 시야가 넓어져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새가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눈으로 그린 것을 조감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어야 바른 시야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상한 영적 수준에서라야 곧 그리스도의 높은 인격적인 도덕적인 수준에서라야 만사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보훈 결론에서『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견지에서 볼 때에만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결(聖潔), 의, 진리, 양심, 광명 정대(正大)의 견지에서 만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직과 양심보다는 돈의 견지에서 무엇을 보게 되면 그의 눈은 벌써 어두워진 것입니다. 결과 고상한 인격의 견지에서보다도 정욕의 견지에서 무엇을 보게 되면 그의 눈은 벌써 어두워진 것입니다. 의리와 신의와 절개보다는 어떤 지위와 권리를 얻는 견지에서 무엇을 보게 되면 벌써 그의 눈은 어두워진 것입니다.
셋째로 영적 망원경을 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 十一장 一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보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고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참아 이겼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보이지 않는 가나안 복지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믿음으로라야 멀리 천국과 내세를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라야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멀리 보고 깊이 보고 밝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시이불견(視而不見) 즉,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이 七十년대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대는 물질만 보고 영원한 세계는 보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이 가장 많은 때입니다. 기계와 이익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상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눈이 어두웠습니다. 이런 시대일 수록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인간의 가치를 밝히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결론을 말씀 드린다면 우선 나의 책임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고, 직장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고, 교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고, 나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내 책임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교회 적으로 분명히 볼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전도의 큰문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북에 대해서는 전도의 문이 좁습니다. 그러나 이북 전도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보아야 할 때가 온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언제나 후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교육을 위해 교육관 건축을 하여 경영하고 있습니다. 일반 교육을 위해서 영락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습니다. 신학 교육을 위해서 성림여자신학교를 건축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을 분명히 교회로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봉사에 있어서도 우리가 분명히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보린 원과 경로 원과 모자원을 이미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 없고 가난한 이들이 병날 때에 우리가 좀더 잘 치료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의료를 통한 봉사에 대한 책임을 좀더 분명히 볼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적으로도 우리가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년은 문자 그대로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는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선거가 있습니다. 금년의 선거는 꼭 공명 선거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는지 추측 할 수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미리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또 우리 나라는 경제적으로 발전 도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소외된 계층이 있습니다. 노동자 농민들의 처지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시책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는 남북통일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각 방면으로 우리 한국을 잘 건설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분명히 볼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핵 시대에 처해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더 기억할 것은 자유가 있는 평화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자유뿐이 아닙니다. 사회 정의가 있는 평화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인류애가 움직이는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평화, 자유, 정의, 사랑의 세계에 대한 공헌을 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한 소경이 예수 님께 와서 무엇을 청했습니다. 예수 님은『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소경은『주여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