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2:10-13/ 예수를 바라보자 / 한경직 목사 2014-08-23 08:37:41 read : 96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十二․二)
이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을 이사야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仰望)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앙망하라고 하는 말은 바라보라고 하는 뜻입니다.『땅 끝의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입니다. 누구나 볼 수는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든지, 사업에 성공을 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누구나 구원 얻기가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만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느 때에 주를 바라보지 아니하리오마는 지금은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렌트 기간을 맞이해서 주님을 바라볼 만한 시기입니다.
먼저 안 볼 것 몇 가지를 생각하십시다.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맙시다. 나 자신은 약하고 죄가 많고 유혹과 시험에 들기 쉬운 자신입니다. 나 자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 자신의 과거의 실패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하기만 쉽습니다. 과거에 혹 성공했을지라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교만의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다른 이들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역시 약합니다. 허물이 많고 실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허물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다가는 낙심하기 쉽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가는 잘못 하면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아서 내가 또한 시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볼 필요도 없는 줄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자세히 살펴서 알 것이지마는, 전에 베드로와 같이 물결만 바라보고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기 쉬운 것입니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노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 발하시면 천하에 있는 것 망하겠네.』아무리 세계가 요란하다고 하지마는 그것을 바라보고 놀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제 잠깐 동안 우리 주님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간단하게 나마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님의 일생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베들레헴을 바라보게 됩니다. 마구간이 보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우리는 봅니다. 주님께서는 마구간에 나시고 누운 첫 자리가 구유였습니다. 실로 스산한 산실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나는 한미(寒微)하고 구차한 가정에서 났다. 그래서 지금까지 빈궁한 살림 가운데서 고생만 한다. 이렇게 탄식하는 이가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이 구유를 바라보시고 그다지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생을 시작할 때에 아마 우리 주님보다는 다소나마 낫게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주님께서 아직 어릴 때에 어머님의 품에 안겨서 멀리 애굽으로 피난을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북한에서 남한에 오는 유가 아닙니다. 넓은 광야, 물 없는 사막을 오래 걸어가고 혹은 나귀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자마자 피난생활을 맛보았습니다.
우리 교우가운데 六․二五 바로 전날에 아기를 낳아서 그 날로 피난 갔다고 하는 말씀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활이 이와 비슷했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는 북한에서 남한에 피난 온 이가 많습니다.
우리가 六․二五 때 누구나 여러 곳에서 혹은 제주도까지 가서 피난생활을 맛보았습니다. 아직까지 피난생활의 때는 벗지 못한 이들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가 피난에 지칩니까? 예수 님의 피난생활을 바라보십시다.
그 다음에 나사렛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사렛 적은 동네, 마리아의 집에서 어렸을 때에 양부 되는 요셉에게서 목수 일을 배우는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은 입학시기라서 자녀를 입학시키지 못해서 애 타는 부모도 많고 애 타는 어린 학생들도 많은 것을 볼 때 민망합니다.
그러나 그다지 낙심하지 마십시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어려서 목수 일을 배웠습니다.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요셉은 얼마 안되어서 세상을 떠나고 맏아들이었던 예수 님께서 목수 일을 해서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매일 매일 노동을 해서 겨우 연명을 하는 이들도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피곤한 가운데 이와 같은 신세를 탄식하는 분도 없지 않아 있기 쉬운 줄 압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나사렛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을 흘리며 목수 일을 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다.
아마 우리 교우 중에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셋방살이를 하는 줄 압니다. 셋방살이는 사실 괴롭습니다. 우선 자유가 없습니다. 언제 집을 내라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리해서 어떤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이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종종 우리는 이 셋방살이로 지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십시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이 있으되 머리 둘 곳이 없이』생활한 우리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가운데 큰 유혹과 시험으로 말미암아 남 모르는 고민을 갖고 이 자리에 오신 이가 계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는 광야에서 四十일 동안 금식하는 동안에 심히 주리었습니다. 배가 고플 대에 시험하는 자가 왔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했습니다. 나에게 절만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했습니다. 선전에서 뛰어내리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명예를 얻게 하겠다고 시험했습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갖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 하나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어 나간 예수 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다.
몸이 약하고 항상 병으로 고생하시는 이들도 우리 가운데 많은 줄 압니다. 우리의 약한 것을 아시고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지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전능하신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이 거칠고 죄 많고 무정한 세상 가운데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이 자리에 나온 분들도 아마 여러분 계실 줄 생각합니다.
상할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지난주간에도 우리 교우 중에 슬픔을 당한 가정이 여럿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혹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이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슬픔 가운데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혹 우리 중에 이 악한 세상에서 모략을 당하고 중상을 당하고 억울할 비난으로써 상한 마음을 가지고 이 가운데 오신 이들도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은 죄가 하나도 없건마는 당시 사람들에게 바알세불의 힘을 얻어서 사귀(邪鬼)를 내어쫓는다.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이다. 모세의 율법(律法)을 범하는 사람이다.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이다라고 갖은 모략과 중상을 당하면서도 모든 것을 참고 이기신 것입니다.
혹은 우리 중에 어떤 사람에게 냉대와 천시를 받은 경험을 가진 이가 계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사마리아 동리에 가서 하루 저녁을 지내려고 했지마는 유대사람이라고 해서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배척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분해서 하늘로 불을 내려서 이런 동리는 멸하게 하자고 말했습니다. 예수 님은 오리려 그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아무 말씀이 없이 다른 동리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이 세상은 본래 흐린 세상이요. 죄악의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 맑고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생각이 아예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그저 형편대로 바람 부는 대로 부정과 불의라고 이로우면 타협해서 살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유혹을 받는 이가 계십니까? 말할 수 없는 역경 가운데서도 오직 의로운 생활을 꾸준히 해 나가며 모든 불의를 배척하고 부패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정의에 불타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혹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어떤 형제와 피차에 오해가 있어서『저이가 나에게 인사를 안 하는데 내가 먼저 인사할 필요가 있나?』하는 토라진 기분 가운데 잠긴 이가 계십니까?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친히 자기의 손으로 씻겨 주시는 예수 님을 바라보십시다.
혹 우리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어려운 문제를 당한 이가 있습니까? 십자가를 내일 아침에 맞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혹 여러분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길이 없는 어려운 문제를 당한 이가 있습니까? 십자가를 내일 아침에 맞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혹 여러분 가운데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이가 있습니까? 배은망덕할뿐더러 선을 악으로 갚아주는 사람을 만난 이가 혹 있습니까? 예수 님도 꼭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三년이나 가르쳐 주었던 가룟 유다 가 환도와 뭉치를 가진 무리를 데리고 선두에 서서 예수를 잡으려 왔습니다.
거짓으로 입을 맞췄습니다. 그 때까지도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의 칼에 배여 떨어진 말고의 귀를 도로 찾아서 고쳐주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여러분, 혹 거짓 증거로써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받는다든지 또는 법정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그는 대제사장의 법정에서 거짓 증거로 판결을 받았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거짓 증거로 불의하고 억울할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으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여러분, 혹은 억울하게 남에게 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해 본 일이 있습니까?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구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였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였습니다.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우리 가운데 혹 남의 짐을 지고 수고하여 애쓰며 허덕이며 쓰러지는 이가 있습니까? 자기 십자가가 아인 인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향해서 몇 번이나 쓰러지면서 올라가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혹 우리 가운데 형제가 내게 지은 죄를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까? 분한 마음을 암만해도 풀 수 없는 북이 계십니까? 십자가상에 달리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향해서『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이런 일을 행하오니 이 죄를 그들 머리 위에 돌리시지 마시고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고민을 받습니까? 내 죄는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 내게야 무슨 소망이 있는가?』낙심하는 이가 있습니까?
살인강도질을 하고 예수 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어도 회개하니까『오늘 네가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사람도 구원해 주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변화산상에서 빛나는 주님의 얼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을 헤치시고 나오시는 영광스러운 얼굴, 온 세상을 초월해서 승천하시는 귀하신 우리 주님의 얼굴,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만국 만민을 다스리시는 저능하신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바라보십시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습니다.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난데없는 불 뱀이 많이 나와서 백성들을 물어 죽입니다. 이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달아서 그것을 바라보게 하라』
이와 같이 해서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들어서 놋 뱀을 볼 때에 불 뱀에 물린 사람이라도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죄로 삼아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게 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누구든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가령 우리가 이 불빛을 본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저 전등이 내 속에 들어와서 안벽에 비치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눈에 이미 보는 대상이 들어와 그것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령한 눈으로 항상 바라보게 된다면 주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가운데 계시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항상 바라보고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고 주님과 동행하게 되면 자연히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우리의 심령은 장성합니다.
봄 동산의 풀이 어떻게 자랍니까?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랍니다. 어떻게 꽃이 아름답게 핍니까? 햇빛을 보는 가운데서 아름다워집니다. 어떻게 과실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습니까? 햇빛을 보는 가운데서 열매가 맺히고 익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심령이 장성합니다. 우리 심령에 꽃이 핍니다. 우리 심령에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전에 성 프랜시스도 젊었을 때에 성다미안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홀로 십자가상 앞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라비아 교회를 창설한 진젠돌프 백장 같은 사람도 젊었을 때 어떤 미술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얼굴을 보다가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十九세기 영국의 제일 유명하던 스펄죤 목사도 소년시대에『땅 끝에 있는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
고 하는 말을 듣고 다른 것을 하라면 못하겠지마는 예수를 바라보는 거야 못할 것 있나 하고 언제나 예수를 바라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새 사람이 되어서 유명한 설교가 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튼튼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시험에 안 듭니다. 병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낙심하지 마십시다. 기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슬플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성공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실패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학교에 입학을 못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언제나 예수를 바라봅시다. 살 때도 예수를 바라보고 죽을 때도 예수를 바라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