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강의하다보니 한국교회 전체를 사랑하게 되면서 동역자들이 행복하고 의욕이 넘치는 목회하는 것을 참으로 보기를 원하게 되었다. 정말로 교회가 살아나고 동역자들이 일어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다.
설교연구의 단계
설교를 연구하다 보니 과정이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설교의 내용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라고 외쳤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주신 일이다. 또한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 그래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는 아무리 감동적이라도 복음적인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자나깨나 “복음적설교 복음적설교”를 외치게 되었다. 복음제시가 설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논지였다. 성경주해를 하더라도 거기서 복음을 반드시 발견해 말해야 한다. 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주해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그저 도덕강론이나 수필식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아무리 복음적인 설교라도 청중이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듣게 하자니 설교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했다. 감동적이어야 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건 듣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게 되었다. 설교작성도 그렇고 전달도 그러했다. 이것들이 없이 복음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설교작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논지가 하나여야 한다.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작성하려면 먼저 이 한 문장을 작성한 다음에 그것을 보고 다른 부분을 써야 한다. 그래야 설교가 끝난 다음에도 이 한 문장은 마음 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은 반드시 복음이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반드시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오고 가지가 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듯, 하나의 복음적 논지가 일어나 강한 설교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대지들은 물론이거니와 예화나 권고도 모두가 같은 색깔로 펼쳐져야 한다. 부분적으로는 전달이 잘 안되어도 결국에는 단 한 문장의 복음이 마음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고 살아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발한다.
전달을 위해서 전달의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들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기술이 있다. 타고 났건 습득한 것이건 설교자들은 반드시 전달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의 내용으로는 10%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 나머지 90%이상은 음성과 표정과 분위기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게 중요하다.
쉽게 말해서 말의 내용이 “두려워 마세요”해도 음성이 떨고 있다면 듣는 이들은 음성을 믿지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 듣고 난 뒤에 다른 소리 하는 것은 왜 그럴까? 듣는 이들이 분위기를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로는 다른 내용을 주었다해도 사람들은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분위기가 자기가 들은 내용이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아무리 전달을 잘해도 설교자의 믿음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즉 설교의 내용이 곧 자신이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한다는 확신 속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확신이다. 그것 없이 설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지친 목회자들
목회자들은 마음이 짓눌린 상태이다. 교회는 부흥되지 않은채로 여러 해가 지났다. 장로나 중직들은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한다. 설교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러 가지 한계에 봉착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그러면 습관화된다. 그리하여 아주 고갈된 마음으로 강단에 임하게 된다. 마음의 확신은 다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설교가 나오겠는가.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의욕이 넘치고 자신이 있다. 자연히 목회가 재미있다. 체질에 맞는 것 같다. 미래에 대해서도 핑크빛이다. 이런 분들은 확신을 가지고 설교한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적인 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냥 상황이 좋기에 나오는 기고만장일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확신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다.
만약 교회에 문제가 생긴다치자. 잘 극복이 되면 다행이다. 그러면 교회도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잘 극복이 안되고 시간이 지난다. 은혜스럽지 못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그러면 어느 사이에 마음은 가라앉아 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면 이제 마음이 그렇게 굳어 버린다. 그 목회자의 마음은 멍들고 병이 깊어진다. 패배 의식이 지배한다. 설교도 힘이 없다.
작은 교회로 오래 지내온 목회자들의 거의 대다수가 이런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교인중 누가 나 나가라하지 않을까? 누가 내 욕하고 있지 않은가? 불만을 품고 있지 않나?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생각대로 모든 관점은 움직여 나간다. 교인들이 웃으면 나를 비웃는 것이요, 안웃으면 역시 나를 비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행동강화라고 한다. 사무실 한 구석에서 직원들이 모여 담소한다. 웃으며 난리를 친다. “흠 저 친구들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일단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의 행동은 그 생각을 강화시킨다. 너무도 화가 난다. 참다가 모른척하고 옆으로 지나가며 들어본다. 그러나 전혀 자기 말이 아니다. 그러면 “내 이야기 아니구나”하고는 “내가 괜히 오해했구만”할까?
천만에. “저것들이 어느새 알아차리고 주제를 바꿨구만” 하고는 “다음에는 증거를 잡고말테다”하고 생각한다. 일단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모든 행동을 해석한다는 원리이다. 일단 열등감에 잡힌 사람은 남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자기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시 자신의 열등감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렇게 한없이 진행한다.
목회자도 부정적 사고에 잡히기 쉽다. 예를 들어, “나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가면 큰 문제이다. “저 장로들은 나를 싫어한다. 내 편이 아니다.” “내 설교를 싫어하는 교인들이 제법 있다.” “내 아내가 교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교인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마음에 독을 뿌려서 썩게 만든다. 그래서 어두운 마음으로 목회하게 한다.
이미 20여년전의 일이다. 어떻게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지 간증하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대다수 그러니까 70% 이상 되는 이들의 신학하게 된 이유가 동일하였다. 어느날 주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러다가 다른 길로 나간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주의 채찍이 무서워서 신학의 길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비참한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하나님은 말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무서운 분이다. 이러한 이해는 늘 그러한 하나님을 기대하게 만든다. 목회의 길로 나섰어도 늘 채찍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하나님도 같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다시 말해서 믿는대로 삶이 펼쳐진다. 이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분이다. 교인들은 복음적인 신앙을 접할 기회가 없게 된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아니 자기의 한계보다 훨씬 자신을 약하게 본다. 해보지도 않고 자기는 은사가 없다고 단정한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와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가 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우리 자신 밖에 남을게 무엇인가?
믿음으로 사고해야 한다
신자라면 모든 부정적인 사고는 일단 거부해야 한다. 자신의 몸이 약하다던지 병이 있다던지 말을 잘 못한다던지 성질이 나쁘더던지 의지가 약하다던지 나쁜 습관이 있다던지 그것이 무엇이건 받아들여서는 않된다. 받아들이고 나면 그 굴레 얽매어서 삶을 살아야 한다. 주께서 성령을 부으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지 않으셨던가! 도대체 주의 말씀말고 무엇을 믿을까?
단번에 몸이 건강해진다던지 성질이 바뀐다던지 나쁜 습관이 고쳐지지는 않을지 모른다. 물론 믿음에 따라서는 당장 고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웬만한 좋은 습관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반복함으로 만들어진다. 약한 몸도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씩 운동하면 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은 다시 믿음을 더해주고 믿음은 다시 강한 경험을 일으킨다.
목회자는 스스로가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물론이고 얻은 체험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다시 그 말씀이 미래에 더 나은 체험을 만들 것을 믿어야 한다. 여러해를 하나님과 함께 살아왔으니 거기 해당되는 경험도 대단한 것이 쌓여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설교는 결국 사람의 신앙인격을 보여준다.”
교인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장로나 중직들에게 눌리면 대단히 어려워진다. 아무래도 눈치를 보게 되고 당당함이 사라진다. 이렇게 오래 지나다 보면 지도자로서의 풍모는 사라진다. 아무래도 그들은 목회자들의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 교회를 떠나면 다음 사역지가 막막하지 않은가. 이런 식의 생각이 주의 종으로서의 마음 자세를 버리게 한다.
목회자는 절대로 군림하거나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으시대서도 안된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주의 종의 긍지를 잃으면 큰일이다. 하나님이 뒤에서 종을 밀고 계신다는 생각을 놓치면 안된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뭐가 두려울 것인가? 그래서 결국 목회나 설교나 다 믿음으로 이야기가 결론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 .”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에는 군대도 은행도 다 있다. 도움과 자금이 밖에서 오는게 아니라 우리 속에서 나온다. 왕이고 제상장이라면 지배해야 한다. 지배를 당할 수 없다. 물론 이 지배는 예수처럼 하는 사랑의 지배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꾸는 엄청난 능력이다.
장로나 중직들이나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보자. 사랑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분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졌다고 하지 않는가.(롬5:5) 그러면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 정말로 우리는 세상이 가지지 않는 주의 사랑을 가진 존재이다. 사랑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원수 같은 이들을 무조건 사랑해보라.
주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고 했다. 신자라면 이처럼 해볼 수 있다. 목사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일단 마음을 이렇게 먹으면 참으로 편안해진다. 그러나 다른 여러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은 복잡해 진다. 그러면서 목자의 위치를 벗어나서 품꾼의 위치로 전락한다. 모든게 마음대로 안될 것이다.
설교도 그렇다. 이 설교를 듣고 변해질 사람들을 기대하면서 작성해야 한다. 설교 비판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작성하는 것은 너무 부정적이다. 그들의 비판을 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영감을 막는다. 그래서 인위적 설교를 만들어낼 것이다. 설교 만들기도 대단히 힘든다. 그리고 자신도 없다. 누구건 이 설교로 변해지고 나아지고 하나님 닮아갈 것을 믿으면서 써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설명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엄청난 일이다. 그 일을 통해서 변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도 믿기만 하면 그들처럼 살 수 있음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양들이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능력있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설교요 목회다.
지도력 개발
목회의 힘은 지도력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가 지도력에서 탁월하였다. 이것은 세상적 의미의 지도력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 세상적인 지도력은 타고난 자기 것을 자기의 노력으로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지도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무한한 것이다. 단지 그 지도자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 개발하시도록 맡겨드리면 된다.
그러나 말처럼 그것이 개발되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적 지도자들은 도전이 올 때마다 자기 속에 주어진 그 힘에 의존해서 응전을 한다. 그러다보니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응전이 나올 것이다. 비록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라도 여전히 인간적인 힘과 지혜가 근원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지도자는 절대적으로 그 힘이 하나님에게서 온다.
여기서 앞에서 말한 복음적인 설교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의 지도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공하신 새로운 삶과 그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안다. 만약에 복음적 지식이 없다면 자기가 기도나 선행하는 것만큼만 힘이 주어지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 주어진게 아니라 노력하는 것만큼 올 것이라는 것이다.
중생한 신자는 일단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받았음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없을 때 그 힘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시작해도 세상에서 시달리다 보면 경험을 더 믿게 된다. 그래서 확신이 사라지고 불신자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적인 지도력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계속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지도력은 복음의 말씀을 믿는데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감각적인 세상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자기가 만들어야할 세상을 보아야 한다. 목사는 변화될 교인들의 모습과 교회를 믿음으로 바라 보아야만 한다.
이것을 비젼이라고 한다. 비젼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일단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 꿈이 있다.(요엘2:28) 이것이 성령받은 증거이다. 이 꿈이 자기 삶을 지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여기다가 자기에게 주어진 터전의 현실이 덧붙여진다. 거기서 모든 가능성들은 다 모아지고 발견되어서 성령의 꿈과 합쳐진다. 그러면 아주 현실적인 비젼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이 비젼을 구성원들에게 심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두가 이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게 만들어준다. 목사는 장기와 단기 목회에 대한 비젼이 분명해야 한다. 성령 받으면 다 꿈이 있다. 여기다가 목회 현장에서 나타나는 모든 가능성중 가장 강한 것들이 모아져서 뼈대를 이룬다. 그리고 계속적인 시도를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한 사명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자기의 상황을 바꾼다. 경영을 잘하거나 행정을 잘 한다고 지도자가 아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비젼이 있다. 그것은 현실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구성원 대다수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거기까지는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의 사명이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구성원을 움직여서 그리고 나아가게 한다.
절대로 안되는 이유만을 나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이다. 어떻게 하면 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지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현재 주시며 더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도록 얼마나 간절히 바라시는가!
설교자는 이렇듯 비젼 속에 설교해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가 주의 말씀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고 자기 상황을 끌어일으키는 꿈을 찾아야 한다.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있으니까. 절대로 현실에 짓눌리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바꾸어야할 대상이다. 그것은 영원한 것도 불변의 것도 아니다. 창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우리 일할 터전이다. 이 확신으로 설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