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장 마지막 절을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술을 맡았던 책임자가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었다는 내용의 말입니다. 그가 요셉을 기억하지 않은 것이 도대체 얼마나 중요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 기록을 남겼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음미하면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셉에 대하여 좀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요셉은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입니다. 형들의 시기에 의하여 팔려 노예가 되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하인이 되었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되는 여자가 음탕하여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응하지 않자 요셉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 옥에 넣었습니다. 옥에 있는 요셉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마침 그 옥에 애굽 왕 바로의 떡을 맡았던 관원장과 술을 맡았던 관원장이 들어왔고 요셉이 그들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꿈을 꾸고 답답해하였습니다. 요셉이 물으니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꿈에 세 가지가 있는 포도나무를 보았고 열매를 따서 즙을 만들어 바로에게 드리는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해몽하기를 사흘 후에 풀려나 다시 바로에게 술을 바치는 직책이 복직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몽하면서 14절에서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다시 복직을 하여 힘을 얻게 되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이 길한 것을 보고 떡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꿈에 흰 떡 세 광주리를 이고 가는데 제일 윗 광주리에 있는 것은 바로를 위한 것으로 특별히 구워 만든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들이 광주리의 먹이를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사흘후면 당신의 목이 잘리고 나무에 달리게 되고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먹을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흘이 되는 날은 바로 왕의 생일이었습니다. 요셉이 해몽한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다시 복직이 되어 왕을 섬기게 되었으나 떡 맡은 관원장은 목이 잘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꿈 해몽대로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에게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복직하여 다시 회복되자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술 맡은 관원장만이 유별나게 나빠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합니다. 자신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까이도 하고 멀리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별나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술 맡은 관원장이 나쁘다는 사실을 천하에 공개하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기록하게 하셨다고 보기에는 뭔가 깊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사람이란 다 그런 것인데 이 구절은 기록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며 묵상하던 어느 날 이 말씀을 읽는 제 마음 속에 마치 누군가가 말씀하고 있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그러나 나 여호와는 요셉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더라" 모든 사람이 다 잊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잊지 아니하시고 요셉을 기억하시고 계셨음을 은연중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 사람이 다 잊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되는 순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가슴에 뭉클하게 다가옴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통하여, 예배를 통하여, 찬송을 통하여, 자연을 통하여, 아니면 삶에서 이렇게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자신의 죄인됨과 부족함을 깨닫는 것, 그리고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의 길임을 깨닫는 것,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는 것 등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가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여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내용을 보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라고 하여 먼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하여 아는데 그치지 않고 깨달아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깨닫게 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또 아무리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면 의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충만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는 절대로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듣는 말씀에다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의 경험이나 상식에 맞지 않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고의 권위요 가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비취이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나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진리의 빛을 비추실 때 말씀 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보고 깨닫는 영의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도 이렇게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데서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에서 설명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실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할 만큼 "넓은" 사랑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우주적 사랑입니다. 그것은 또한 "길이"가 있는 사랑입니다. 또한 영원한 사랑입니다(요 13:1절). 그것은 "높이"가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까지 하신(요 13:10절) 숭고한 사랑이며, 하늘의 천사까지 구속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깊이"가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으며(빌 2:8), 음부에 있는 영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빌 2:10; 벧전 3:8).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은 실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풍성하여 몇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몇 가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찾으시는 사랑입니다. 직장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제거 당합니다. 학교에서는 문제 있는 학생이 퇴학을 당합니다. 사회에서는 문제 있는 사람들을 격리시켜 가두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문제 있는 죄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찾으셨습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고 숨어 있어 찾을 수 없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장 17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 또 주시는 풍성한 사랑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넉넉히 주시고 또 주시는 넘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다윗의 고백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작은 그릇으로 감당할 수 없는 넉넉하고 차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느니라"고 하여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언제나 좋은 것을 넉넉하고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하였습니다. 시편 34편 10절에도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 그 중에서도 젊고 패기만만하여 천하를 장악하는 힘이 있는 사자가 먹을 것이 없고 주려 고생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보니 아름다운 집들이 줄을 지어 지어져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집들마다 주인의 이름패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안내하는 천사에게 자신의 이름패가 붙은 집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있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자신의 이름패가 붙은 집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사가 집을 보았으니 그냥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집안까지 들어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마지못하여 집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집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입구에 있는 탁자 위에 장부가 있어 보았습니다. 거기에 오래 전 그가 기도하여 응답 받은 한 번의 기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준비한 것은 많은데 그가 구하지 않아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실 것이 많아 오늘도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시고 또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깨닫고 많이 구하고 많이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중 절정은 역시 아들까지 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고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인간 구원을 위하여 서슴치 않고 내 주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주 오래 전 제 큰 아이가 무릎이 깨어져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병원에서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보호자의 수술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수술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불상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수술하기 위한 절차이기에 동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아들의 손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전에도 수 없이 병든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때로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면서 울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돌아서는데 다리가 굳어진 것 같아 걷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치 제 자신의 무릎이 깨어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여 사랑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은혜요 깊은 진리 안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씀 속에서 모든 사람이 다 잊어도 그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듯이 언제나 버리지 않고, 잊지 않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깨닫는 것이 바로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지금도 잊지 않고 여러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주시고 또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충만함과 감격하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