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는 2002-10-16 09:57:41 read : 428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일4:7-9 // 02.10.6
칼바르트는 어떤 책에서 다음의 문장을 남겼습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너무 너무 귀한 말
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
신다. 여러분, 사랑 받을만해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을 받을만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랑
받을만한 자가 못되는 것을 사랑해서 사랑 받을만한 자로 창조하는 것
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로 사랑을 믿는 자로 사랑을 하는 자로 하나
님께서 재창조하시는 것이 구원이요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게도 믿고 따랐던 스승 예수님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십자가
에서 죽어갈 때, 제자들의 꿈은 마치 유리병이 깨지듯이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허탈과 좌
절과 실의에 빠진 그들은 이제 다시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하게 느껴졌고, 결국 그들은 자신의 잔뼈가 굵은 갈릴리 바
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3년 이상이나 손놓았던
그물을 다시 손에 잡게 되었을 때에, 그물이 손에 제대로 잡힐 리가
없었습니다. 그 날 따라 갈릴리 바다의 고기들마저도 베드로의 실패
를 비웃고 조롱이라도 하는 듯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를 않았습니
다. 그런데 이렇게 깊은 실의와 탄식 가운데 빠져 있는 바로 그 자리
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지쳐있는 베드로
와 다른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을 지피시고 고기를 구워서 초대를 하셨
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말씀, “바
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실 베
드로는 그 동안 여러 번에 걸쳐서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
다. 또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
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다 주
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
을 하며, 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원수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
을 때, 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내리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
는 다른 제자들이 다 무서워 도망쳤을 때에도 홀로 가야바의 법정까
지 따라 들어갔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갈릴리 바닷가에 있었
습니다. 사랑함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현실이 그의 믿음
을 가로막았고, 그의 사랑을 빼앗아가버린지도 모릅니다.
월남전에 두 다리를 잃은 보브 위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
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위에까지 다 잘려졌는데도 미국을 손으로 걸
어서 횡단하였습니다. 미국의 동-서의 길이가 4454km입니다. 부산까
지 420km인데 그 길이의 10배입니다. 그건 동-서만 그렇죠. 텍사스에
서 알래스카까지 가려고 하면 비행기로 8시간을 가야 합니다. 하와이
까지 오려면 8시간, 괌까지 오려면 12시간 와야 합니다. 미국이란 나
라가 얼마나 큽니까? 그냥 이쪽에서 저쪽만 해도 4454km입니다. 그런
데 이 보브라고 하는 이 청년은 다리도 없는데 두 팔로만 거꾸로 걸어
서 3년 8개월 6일만에 LA에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걸어서 가는 것 만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도 한 주
일 걸리는데, 걸어서 가도 대단한데 3년 8개월을 쉬지 않고 손으로 걸
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환영하며 기자들이 가서 물었어요. 얼마나 힘
들었느냐고, 얼마나 어려웠느냐고. 그럴 때에 이 분이 대답한 게 뭔
지 아세요. '내게는 권태로운 날이 하루도 없었다' 왜 그래요? 하나님
의 사랑이 비취니까. 많은 사람들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차 타는 사람
보고 욕하고, 차 타는 사람은 더 좋은 차 타고 간다고 빵빵거리고 욕
하기도 하고. 자기보다 조금만 더 좋은 사람 보면 속상해 합니다. 그
런데 이 보브 청년은 아무 것도 없이 팔로 거꾸로 걸어가는데도 주님
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할 때에 감사하며 행복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의 결론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
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
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다면 주님의 양들을,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
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가리킵니까? 오
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일천만 기독교인들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일천
만 불자들은 자비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 실제로 사랑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사랑이 있다고 대답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
니다. 사랑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제패하려했던 나플레옹의 유언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나
의 유골이 세느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한가운데 안
식 취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나플레옹이 프랑스 국민을 사랑한
다고 했는데 그가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프랑스 청년들을 죽였으며, 남의 귀한 집 자식들을 모스
크바로 데려가서 얼어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당시에 50만이 가서 40
만 명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의 정복욕을 위해서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죽이고서도 승리의 영광은 자기 가족에게 돌렸으
며, 아들과 누이들의 남편들에게 정복한 나라 왕의 자리를 다 내주었
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철저하게 그의 정복욕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
로 사용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프랑스
를 사랑했다고 했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렇게 믿습니다.
히틀러가 살았을 때 연설 중간 중간마다 독일을 사랑하고 게르만
민족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유대인을 비롯
한 다른 민족을 죽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게르만 민족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정말 사랑입니까? 우리의 사랑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의 사
랑도 보면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이 부딪치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 인간들이 입버릇처럼 내어놓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
많습니다. 그러면 참사랑은 어떤 것인가? 참사랑의 실체가 무엇입니
까? 여러분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사랑을 언제 얼마나 느껴보셨습니
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
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가 서로 사랑하자" 여러분은 사랑하십니까? 서로 사랑하자고 했습니
다. 왜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체는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든가 믿는다든가 할 때에 진실한 믿
음, 바른 앎은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
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무엇입니
까?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의 사랑의 표현은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이 곧 사랑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님을 이 땅에 보내심의 목적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던 우리를 건져내어 영생으로 인도하
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랑은 찾아가는 것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
을 찾아가는 것이 사랑합니다. 비천하고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이
나 월등하게 수준이 높은 사람이나 상관없이 찾아가는 것이 사랑입니
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덕을 끼친 사람이나 상관없이 찾아가
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가장 비천한 우
리를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한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
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
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서 당신을 배신하
고 십자가 앞에 보이지 않았던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존
심도 없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락방에 두 번, 갈릴리에
한 번 배신한 제자들을 찾아가 주셨습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을, 내
게 등을 돌린 사람을, 어떻게 웃는 얼굴로 찾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사랑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기 때문입니
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힘이 없는 사
람이 힘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굴종이거나 아부일 가능성이 높습
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람이라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정말 못
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많이 배신을 했습니까? 그런
데도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을 믿습니까?
내가 믿는 사랑의 하나님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계심을 느낍니까?
당신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 때문이라고 믿습니
까?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 누구를 찾아가시겠습니까? 사랑은 찾아가는 것
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의 교회 한 집사가 감옥에 있는 사형수를
찾아감으로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영상을 통해
서 보았습니다. 그 사형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손
가락질을 보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찾아간 사람이 누구입니
까?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였습니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간 거기에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비록 육신의 생명을 하나의 가느다란 밧줄이 그를 죽였
지만 그는 오히려 구원의 밧줄을 통해서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자
가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은 구원의 밧줄을 들고 당신이 가서 구출하
지 않으면 안 되는 곳으로 찾아가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디에 사
십니까?
바로 그분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9월에 있었던 87회 총회에서 '전도상'을 받은 분이 일산 한소망
교회 문형순 권사님입니다. 친청 어머니와 그리고 딸과 친구가 간절
히 기도하여 1985년에 예수 믿기로 작정했고 3년이 지난 1988년부터
지금까지 전도한 사람이 1,700여명이라고 합니다. 1999년 4월 한달 동
안은 양로원과 소년소녀가장 군인등 970여명을 전도해서 본인도 놀랄
일을 했다고 합니다. 기하철역, 할인마트, 공장, 길거리로 한국사람
뿐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들 등 장소와 대상에 구애됨이 없이 찾아 나
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오늘 새생명초청잔치 선포식을 해야
만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이 죽어 가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금
년에도 여러분의 전도로 예수 믿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는 역사
가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