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스바냐서는 많은 성도들에게 그다지 익숙한 성경이 아닙
니다.
스바냐는 12소선지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 퀴즈대회나, 신학생들 구약시험,
준회원 교역자들 진급시험을 칠 때, 장로님들도 장로로 선출되면 일정 기간 교
육을 받고 매년 시험을 쳐야하는데 '열두 소선지자의 이름을 말하시오' 하는
문제가 많이 나옵니다. '아모스, 호세아, 요나…' 잘 나가다가 이상하게 두세 명,
또는 한두 명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점수가 깎이는 일이 많습니다. 그 때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아 골탕을 먹게 하는 소선지자 가운데 하나가 스바냐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이 비슷한 소선지자가 있어서 더 그렇게 되
는 것 같습니다.
반갑지 않은 단골손님입니다.
그런데 스바냐서를 첫 장부터 읽으면 '아 참으로 강한 메시지를 당당하게 선포
하는 예언자로구나!' 하며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환경오염이 심해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이상기후 현상이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스바냐서 1장 2절과 3절에서 하나님께서 땅 위에서 모든 것, 사람·짐승·공중
의 새·바다의 고기를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범죄가 점점 교묘해지고 흉악해지는 것도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창1:26)
요즘은 출산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아 인구성장률이 저하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염려스럽고, 자기들끼리 안
락한 생활을 하기 위해 출산을 하려하지 않으려는 풍조도 염려됩니다.
최근에는 세계경제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것도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 동안 큰 전쟁을 여러 번 겪었고 자연재해도 많았습니다. 대공황 같
은 경제적인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결정적인 파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우
리에게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안락하고 편안하고 풍요합니다. 그러나 그 바닥에
는 이런 불안이 깔려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입니까?
스바냐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 날'이 있고,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또 선포해
야 합니다.
스바냐서에는 '그 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부분 가
운데 16절에도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스바냐서의 중심단어가 '그 날'이라고 해
도 좋습니다.
'그 날'을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습1:7), "여호와의 희생의 날"(습1:8) "여호와
의 큰 날"(습1:14)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그 날'은 두 가지 반대되는 모습을 가지고 잇습니다.
먼저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스바냐서 1장 15절과 16절은 심판의 날로서 '그 날'이 어떤 날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이런 날은 없다, 오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은 '없었으면 좋겠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바냐서 1장 12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
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빈틈없이 살피시며, 판단하시고 보응 하시는 분
입니다. 복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복을 내리고 화를 내려야 할 사
람에게는 정확하게 화를 내리시는 분입니다.
한 역사학자는 '하나님이 돌리시는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대단히
정교해서 갈고자 하는 것을 빠짐없이 갈아주는 것이 역사의 원리 가운데 하나
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라
고 말하는 사람들을 벌하신다고 스바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바냐는 '그 날'이 어떤 날인지를 알리며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단호하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어떤 예언자는 예언을 듣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예언을
하고 있고, 어떤 예언자는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예언하는 것과 같은 느낌
을 주는데 스바냐는 사람들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
다.
그런 예언자를 한 사람 더 들라면 예레미야이지요. 동족이 겪는 일들을 같이
겪으면서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예언을 선포하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입니다.
스바냐는 왕족입니다. 1장 1절에 스바냐의 족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 제일 긴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바냐는 왕궁을 출입하며 귀족들을 향해 이 메시지를 선포했을 것입니다. 야
당 노릇을 매섭게 한 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살펴보면 정말 바람직한 야당이었
습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성도들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하는데 종말론적인 삶이란 '그 날'이 있고, '그
날'이 임박해 오고 있음을 알고 대비하는 삶을 말합니다.
정치가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정권을 내놓아야 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날에 대비하면서 정치를 한다면 훨씬 성실하게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정을 하지 않을 것이고, 인사를 공정하게 할 것입니다. 뒷날 다른 사람들이
들춰보아도 먼지가 나지 않는 행정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다가 그 날이 가까워오면 당황하게 되고 무리를 하고 심지어는
해외로 도피도 하게 됩니다.
그 날이 있음을 알았으면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선포해야합니다.
앞장서서 이것을 선포한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예언 가운데 예언, 예언의 핵심은 바로 '그 날이 있다. 그 날이 다가온다. 그 날
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모두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성도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사명감이 없는
성도입니다. 이기적인 성도입니다.
스바냐서 3장4절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
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 알기 쉽게 말해서 심판의 날이 분명히 있을 확실히 알고 그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 날'에 우리는 노래를 부르는 쪽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 날'은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먼저 심판의 날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날'은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행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 날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날에 오히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날'에 오히려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스가랴는14절에서 '시
온의 딸'이라고 불렀고 그 앞 절인 13절에서는 '남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13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
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는 마지막 시대에 영적으로 살려고 힘쓰는 소수의 무리인데 악을 행하
지 않습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기에 힘써서 남은 자의 반열에 드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이렇게 노래부르는 사람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진실한 신앙
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정한 부흥을 이뤄야합니다.
스바냐서 1장 1절은 스바냐가 요시야 왕 때 예언활동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
다. '아니 요시야는 경건한 왕인데,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인데 그 때 이같이 사
람들의 범죄와 신앙의 타락을 꾸짖는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
호와께로 돌이킨 왕이었고 '그 같은 왕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는 칭찬
을 듣는 왕입니다(왕하23:35).
요시야는 우상을 헐고 거짓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심판하였으며 성전을 재건
하여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외관상으로 나타난 일들을 보아서는 요시아 왕 때는 신앙적인 갱신과 부흥이
이뤄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표면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사람
들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적인 열성이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은 가정에서 우상을 제거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우상들은 제거하
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불순종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은 온갖 사
악함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이 죽자 개혁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들이 매우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늘어나
고 모임이 많고 행사가 많습니다.
요시아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종교개혁'인데 시월이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개혁을 외치는 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바냐의 눈을 가지고 이것이 진정한 부흥인가, 진정한 개혁인가, 우리
의 신앙은 진실한 신앙인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는 더러운 귀신과 수리된 집의 비유가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
이 사람에게서 나갑니다.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하고서 돌아가 보니까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습
니다. '이거 잘 되었다' 하고서 자기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돌아와서 거
합니다. 형편이 이전보다 더 나빠졌지요.
우리가 형식적으로 개혁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러시아를 방문하면 곳곳에 러시아정교회의 건물을 수리하거나 새로 짓는 모습
을 볼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 안팎에는 정교회 건물이 여럿 있
습니다. 그 가운데 양파 모양을 한 비숄리 성당 같은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입니다. 이런 성전들도 최근에 수리를 했습니다. 시골의 정교회 건물들도
보수를 하고 단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러시아정교회가 부흥을 하고 있네. 정교회는 기독교와 다른 면이
많지만 십자가 밑에서 모이는 종교인데 반갑네'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해 잘 아는 분들은 '아닙니다. 저것은 교회의 부흥이 아닙니
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을 중심으로 한 나라입니다. 지금 러시아에 슬라브 민
족주의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과거에 슬라브 민족은 대부분 정교회를
믿어서 정교회가 슬라브를 대표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슬라브 민족주의를 강
조하기 위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런 현상을 오히려 염려하고 있습
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 나라의 교회가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 받고, 영생 얻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내 삶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신앙현상이 왕성하게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남은 자들,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진정한 부흥을 이룬 교회는 '그 날'에
여기 14절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구속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시편 47편 1절에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
지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슬픈 노래를 참 좋아합니다. 흘러간 옛 노래들 가운데서 우리 나
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고 합니다. 슬픈 노
래이지요.
남과 북이 이번 아시안게임 같은 곳에서 만났을 때 함께 부를 수 있는 대표적
인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요즘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부르고 '고향의 봄'도
부르는데 전에는 아리랑 말고는 부를 노래가 없었습니다. 아리랑, 내용도 슬프
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도 슬픈 내용입니다. 남과 북이 만나는 것은 기쁜 일
인데 부르는 노래는 슬픈 노래입니다.
독일이 통일을 이루기 전에 올림픽에서 공동입장을 할 때는 베토벤의 교향곡 9
번에 나오는 합창곡 가운데 환희의 송가를 국가 대신 연주했습니다. 찬송가 13
장 "기뻐하며 경배하세"와 결혼축하 찬송 287장이 그 곡조에 가사를 부쳤는데
참 힘찬 곡조입니다.
우리 민족이 선한 민족, 믿음의 민족이 되어 기쁨과 구원과 승리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는 남은 자들, 진실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되고 우리
교회는 진정한 부흥을 이루고 새로워지는 교회가 되어 '그 날'에 이와 같은 노
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셋째, 그 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
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
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서의 요절입니다. 너무 좋은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 그대로에 곡조를
부친 복음성가도 있습니다. 그 복음성가를 아는 분들은 '아. 그것이 바로 스바
냐서에 나오는 말씀이로구나!'하는 것도 아시기 바랍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성도 여러분 마음 가운데 계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내주(內住)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내주하시는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전능자이십니다.
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가 못할 것이 없습니다.
17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기뻐하신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중요
한 말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
니다.
자녀들이 여럿 있는데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속이 상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
데 하나가 말을 잘 듣습니다. 기쁘지요. 더 사랑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그 하나만 너무 사랑하자 마세요. 요셉과 같이 됩니다. 말 안 듣는 자
녀도 사랑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자녀와 같은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
다.
여기 교직에 계신 성도들이 여러분 계신데 한 학기 열심히 가르칩니다. 학기말
이 되어서 시험을 칩니다. 채점을 하는데 답안지에 엉뚱한 소리들을 적어놓았
습니다. 백지를 낸 학생도 있습니다.
한 학기 헛수고를 한 것 같아 속이 상하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 몇 학생은 가
르친 대로, 아니 가르친 것 이상으로 잘 써 놓았습니다. 기쁩니다. 점수를 더
주게 됩니다.
신학교 강사 생활을 하면서 채점을 하는데 어떤 학생이 답안지에 '교수님은 이
렇게 강의하셨는데 거기 대해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자기 의견을 적어
놓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점수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교사를 기쁘게 해 드리는 학생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합니
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밭
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내용입니다(마14:44).
우리는 하나님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지금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면 그 날에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합니
다.
평소에 은퇴를 잘 준비한 사람들이 은퇴 이후에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합
니다. '내가 은퇴를 하면 독서를 많이 하리라' '내가 은퇴를 하면 여행을 많이
하리라'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지금부터 틈을 내어 독서도 하고, 지금부터 여
행도 하고 해야 은퇴 이후에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이 그 날에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17절의 뒷부분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라고 되어 있는 사본도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슬퍼하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이 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말인가?'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스바냐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면 여러분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
습니까?
이 질문에는 상반된 대답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경 주석들도 이렇게 정반대의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두려운 것이 있는 분들은 심판이라고 대답하고, 그 날에 하나님을 기
쁘게 해 드릴 자신이 있는 분들은 구원이라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스바냐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나는 그 날에 구원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바냐서의 끝 절인 3장 20절의 뒷부분은 '그 날'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
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
라
목양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명성과 칭찬을 얻
게 되기 바랍니다.
'아무개는 참 성도다워!'
목양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어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목양교회는 교회 가운데 교회야!'
'그 날'에, 아니 지금 이와 같은 축복을 받는 성도와 교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