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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2009-02-17 10:42:15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약성서에는 세 분 하나님의 모습 등장...그러나 삼신이 아니라 공재를 통한 한 하나님

    김명용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가운데 성도들을 가장 당혹케 하는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이 되고 한 분 하나님이 세 분이 되는 이 이상한 교리는 많은 사람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기도 하고 또 세 분 하나님을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양태, 곧 양태론적 방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어떤 신비일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떠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일까?

    I. 삼위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이해할 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삼위라는 말의 뜻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이다. 한국 내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빨리 버려야 할 사고이다. 많은 경우에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초대 교회가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사벨리우스 이단, 곧 양태론 이단으로 흐르는 사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세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꿰고 있는 사람들이다.

    20세기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세운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거의 폐기된 삼위일체론을 재건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참 모습임을 밝혀내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세 분되심을 바르게 밝히는 데에는 유감스럽게 실패하고 말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세 가지 ‘존재양태’라고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독자적 인격체로서의 세 분 하나님을 바르게 표현해 내지 못했다. 바르트의 ‘존재양태’라는 표현은 양태론 이단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빨리 시정되어야 할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르트의 이 ‘존재양태’는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대가인 칼 라너가 이어받아 하나님의 삼위되심을 하나님의 세 가지 존립양태로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바르트의 잘못된 길을 반복하고 말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르트와 라너를 이어받는 신구교의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이 오류는 계속되고 있다.

    1.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신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할 때 그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구약성서에 기술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 6:4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에서 표현되고 있는“하나”라는 표현은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이 “하나”라는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고 참 신이라는 뜻이다. 중동 지방에 수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모든 신들은 거짓 신들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참 신이시고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 때문에 하나님의 세 분 되심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발생해서는 안된다.

    신약성서에는 세 분 하나님의 모습 등장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세 분되심을 뚜렷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책장을 열게 되면 세 분 되신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장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서에 계시된 대표적 장면 중 하나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성령이 강림하고 있고,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이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예수 위에 강림하신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 하나님의 모습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

    신약성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세 분 하나님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신약성서는 아버지 하나님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이 마태의 가르침에 따라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바로 이 세례를 베푼 자리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삶의 자리였다.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던 세 분 하나님의 모습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복음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술이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의 사도들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사도들은 성부 하나님 외에 다른 두 하나님을 명백하게 경험하고 있었고, 다른 두 분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기술했고, 사도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의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라고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했다.

    2. 성부와 성령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흔히 발생하는 큰 오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14:16~17)

    이 본문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보혜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른 분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께 구하겠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자와 성부 역시 다른 분이시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서 밝히 볼 수 있듯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는 다른 분이셨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하다면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도할 때는 자신 곧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이 본문에서도 밝히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분이시다. 성부와 성령이 같은 분이시라면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성부께 기도한다는 이 본문의 내용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는 성부와 성자가 다른 분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잘 나타내 준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는 비장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과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성자는 같은 분이 아니라 다른 분이셨다. 마침내 성자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는 부르짖음을 남기시고 운명하셨다.

    이 성자의 부르짖음은 성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성자 예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운명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부 수난설은 고대 교회에서 처음부터 이단이었다. 삼위일체론을 잘못 이해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이는 정교하게 가다듬어 다시 표현해야 하는 잘못된 표현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성자이시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 나타난 제2위 성자의 죽음이었다. 몰트만(J.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이를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죽음으로 바로 표현했다. 즉, 십자가는 성부와 성령의 가슴 한 가운데에서 죽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었다.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성부께서 성자를 버리신 사건이었다면 부활은 성부께서 성령을 통해 성자를 살리신 사건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죽었다면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겠는가! 성부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죽으신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다시 사신 성자께서는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셨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이 아니시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성자 하나님이다. 그런 까닭에 사도신경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은 물론 행7:55의 스데반이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사도신경이 예수를 성부 하나님과 다른 분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셨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성령의 시대가 태동하게 되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니라”(요14:26)

    그러므로 성령을 또 다른 형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이와 같은 잘못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 하나님이 각각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기인된 크나큰 오류이다.

    3. 세 분 하나님의 동격성을 강조한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들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들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신조는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이 두 개의 신조는 동서교회가 공히 정통 신조로 고백하고 있는 유일한 신조인데 이 둘을 합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도 한다. 이 두 개의 신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조도 모든 교회에서 공인 받을 수 있는 정통성을 가진 신조는 없다.

    이 신조에 필적할만한 서방 교회의 신조로는 사도 신조를 들 수 있다. 이 사도 신조의 현재의 형태는 6~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후 215년 경에 쓰여진 히폴리투스의 ‘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에 질문형식의 신조에 사도 신조의 원시형태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도 신조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신조로서 오늘날 예배 때에 암송되고, 중요한 신조로 추앙받고 있는 사도 신조는 삼위일체론 연구에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신조는 삼위일체론 연구에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이라는 것과 둘째는 이 분이 부활하고 승천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고백이다. 사도 신조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조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물론 사도들의 이해이기도 했다. 사도 신조는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둘째는 부활하고 승천하고 다시 오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고 셋째는 성령과 교회와 죄용서와 몸의 부활에 대한 고백이다.

    사도 신조는 성령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각각의 항목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 분 하나님을 거의 분명하게 드러내는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신조 속에는 이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언급이나 그 가능성을 비추는 표현은 전혀 없다.

    325년에 확정된 니케아 신조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정통 신조이다.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임을 강조하는 신조이다. 이 신조는 아리우스(Arius)파의 주장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고, 성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일종의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었고 따라서 한 때 그가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는 내용에 대항해서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호모우시아’(동일본질)를 밝힌 신조였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며…”

    위의 니케아 신조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니케아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는 결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혼동하지 않았고 이 두 분이 같은 분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 하늘에 오르사 성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라고 사도 신조와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다. 니케아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과 위엄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을 천명한 신조이지, 성부와 성자가 괴상한 방식으로 같은 분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의 발전된 형태인데 특히 성령에 대해 자세한 고백이 들어있다. “…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그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되셨으며…” 이 성령에 관한 항목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주(主)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성과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고대 교회의 전통신조들은 유일하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조들이다. 즉,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들은 하나님이 세 분이심을 고백하는 신조들이다. 그 어떤 고대 교회의 정통 신조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는 고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 분 하나님이 동일한 권위와 신성을 가지신 분들로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Ⅱ. 일체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상호침투와 함께 거하심

    요 10:30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는 이 말씀은 이미 삼신론이 잘못임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성서에 입각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역사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서를 떠나서 사변으로 치달으면 안 된다. 사변으로 치닫게 되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의 계시에 철저하게 입각된 교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론이기 때문이다.

    요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의 ‘하나’를 이해할 때도 사변을 하면 안 된다. 이 ‘하나’라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 이 ‘하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즉, 성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떠나 괴상한 구조를 끌어들여 사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도요한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을 스스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본문을 유념해서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7~11)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라는 사실은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말이다. 성부께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께서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 행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은 요한은 어느 곳에서도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한 분이라고 말하지 않다는 점이다. 요한의 말씀의 핵심은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다라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인 동시에 성부의 사역이다.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서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언제나 성부와 함께 계셨다. 성자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부는 어디 계셨을까? 성부께서는 성자와 함께 성자 안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성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성자는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셨고, 성부는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고난을 겪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고난인 동시에 성부의 고난이었다.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는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잉태하신 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출생하셨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동안 그 분 안에 계셨고 그 분과 함께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기괴한 사실을 설명하는 교리가 아니다. 그런 것은 기괴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한 하나님을 보면 그분과 더불어 다른 두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함께 보게 되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론은 세 분 하나님의 존재만 설명할 뿐 이 하나님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일체성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이론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삼위일체론은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만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골 1:15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요한복음 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골2:9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히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후 5:19)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바울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는 말씀과 요 14:10의 요한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그 의미가 완전히 동일하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사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고, 하나님 자신의 사건임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고 깊은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가슴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는 교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한 가운데 있는 십자가이다. 또한 바로 이런 시각에서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기술했다.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온전히 거하셨던 역사는 오순절 이후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온전히 거하시는 역사로 변천된다. 이것은 성령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또 다른 형태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롬8:9)이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롬8:9)이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따라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3. 하나의 신성(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서에 기초해야 되는 교리이다. 그것은 또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 상호 간에 일어나는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교리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삼위일체론은 점차 사변적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 사변적 형태로의 잘못된 발전의 핵심은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 되는 3=1의 괴상한 논리로의 발전이다.

    한 분이 세 분이 되고 세 분이 한 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라는 괴상한 논리로 무장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은 주로 서방 교회에서 발전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의 기본 도식은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였다. 이 도식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곧 세 분이신데 같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325년의 니케아신조가 성부와 성자와 신성의 동일성을 언급했고,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의 동일성을 천명한 것이다. 이 정신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영향을 미쳐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세 분 하나님의 신성의 동등성이 공식적으로 천명된 것이다.

    325년의 니케아회의의 주역이었던 아타나시우(Athanasius)는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성부의 신성에 비해 성자의 신성의 열등성을 주장했던 아리우스(Arius)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싸움에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분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상식적인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는 두 분이신 신이지만 태양에서 빛이 나올 때 그 빛은 태양의 빛과 속성이 동일한 것처럼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신성은 같은 하나의 신성이고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샘에서 물이 흘러 하천을 이룰 때 샘물의 속성과 하천물의 속성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고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런 까닭에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과 동일하다고 했다.

    삼위일체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동방 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은 서방 교회 일각에 나타나고 있었던 삼위일체론의 양태론적 경향을 언제나 비판했다. 고대 교회에서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역동적 단일신론이든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든지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다.

    몰트만(J.Moltmann)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정통 신조를 만들어낸 동방 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하나님이 상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뜻한다. 이 사귐의 삼위일체론 가운데 독특한 것 중 하나는 나치안스의 그레고리(Gregory)가 언급한 가족형 삼위일체론이다. 나치안스의 그레고리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상적 유비는 아담-하와-셋의 가족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갑파도키아 교부들의 맏형격인 가이샤라의 바실(Basil)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갑파도기아 교부들은 세 분이 한 분이 되고 한 분이 세 분이 되는 괴상한 논리는 상상할 수 없었다. 원래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인 하나님의 한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는 세 분 하나님을 명백히 전제하면서 이 세 하나님이 한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있다. 즉 세 하나님의 신성에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고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 신성의 교류를 통한 하나됨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세 분 하나님은 하나이시지 한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본질(우시아)을 실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 된다.

    4. 한 하나님(One God)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과 세 하나님들(3 Gods)이 있다는 말을 같은 말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은 세 인격체(3 Persons)를 지칭하는 말이지 삼신론을 의미하는 세 신들(3 gods) 혹은 세 하나님들(3 Gods)로 생각하면 안된다.

    삼위일체론을 형성시킨 신학의 교부들은 하나님이 세 분(3 hypostasis)이라고 언급했지만 세 하나님들이 있다고는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타나시우스와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하나님들이 있다는 표현에 대해 한결같이 반대하면서 오히려 한 하나님(One God)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 한 하나님이란 말의 뜻이 무엇일까?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과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역사는 언제나 하나이다.

    그리고 한 분의 삶과 역사 안에 언제나 세 분의 삶과 역사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인 동시에 성자의 영광이고 성령의 영광이다. 즉, 하나의 하나님이란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신 전체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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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본질과 위장

    위장을 걷어내야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
    황규학

    키치의 정의

    미술용어에서 키치라는 말이 있다. 키치는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이다.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현대 대중문화·소비문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술사가 조중걸씨는 그의 책,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 에서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키치는 19세기 독일에서 특정 예술 형식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서 부르주아들의 속물적 허위의식에 기대어 번식했던, 순수 예술을 가장한 기만적인 통속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키치는 사이비 예술, 주관성에 사로잡혀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 Arnold Houser는 "키치가 내세우는 요구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예술이고,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키치는 의미를 가장하고 주관성을 띠고 있다. 즉 대상으로서의 가치보다는 대상을 감상하는 자기 자신에 관심한다. 따라서 키치는 순수 예술의 형식을 빌리지만, 순수 예술이 감상자를 밀어내고 스스로의 진리를 구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하게 감상자의 기호를 따른다. 대상에 대한 예술적 가치보다, 대상을 보고 있는 자기자신에 관심하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파리 국립예술관에서 밀레의 만종이나 고호의 그림을 보면서 작품의 예술성에 감동되는 것보다, 그림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감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키치는 통속예술과는 또 다르다.

    일상의 힘든 노동에 지친 대중들에게는 순수 예술을 즐긴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은 예술적 동물로서 힘든 일상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여흥으로서의 예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속 예술이다. 통속 예술에는 진리보다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통속 예술은 스스로에게 고급예술이라거나 쾌락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가장하지는 않고 삶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통속 예술은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차라리 순수하고 솔직하다.

    키치는 고급예술을 가장하는 통속예술

    그러나 키치는 주관성이 가미되어 고급예술을 가장하는 통속예술이다. 감상자는 키치를 통해 손쉽게 자신이 고상한 예술행위를 감상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키치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소비하는 태도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감상자는 연극 작품을 보면서 작품 속에 담긴 슬픔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커피광고는 커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꾸며진 분위기있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광경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오래 전에 커피광고로 이름을 낸 연극인 윤석화는 『알고 보면 나도 부드러운 여자예요』라고 광고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시청자들은 커피맛보다 당시 학벌파문이 일어나기 전 한창 잘 나갔을 때의 윤석화의 모습에 더 매료되었다.

    소비자의 관심을 상품 그 자체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관능적이거나 호사스럽거나 아늑한 분위기일 것이다. 사용가치는 이렇게 잉여가치로 전락을 하고 사물의 의미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키치는 이처럼 원래의 본질보다는 이차적인 곳으로 방향을 전환시킨다. 본질과 실체, 대상이 사라진다. 고급예술을 추구하고자 하는 허위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사물을 지향하고 있다. 즉 대상의 객관성보다는 보는 이의 주관성에 관심한다.

    예술작품은 작품에 대한 객관적 가치보다도 단지 자기 감상을 위한 주관적 가치로 전락한다. 아무리 심오한 깊이를 담은 예술 작품도 키치적 태도에 사로잡힌 감상자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거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 나쁜 것은, 이런 감상자들이 많을수록 그들에게 거짓 예술을 팔아먹는 키치 장사꾼들 역시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점점 키치들이 범람하게 된다.

    키치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키치가 무서운 것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철저히 이중적인 데 있다. 대상을 주관화하고, 부정직한 것을 숨긴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죄악을 통해 번성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영혼을 거짓된 베일로 가리고 있다. 우리를 기만 속에서 살고 거짓 속에서 죽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키치의 특징은 기만적이라는 것인데 이는 남을 속인다는 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기독교내 침투해 있는 키치는 상당히 위험한 요소로서 자리잡고 있는 허위의식이라 말할 수 있다. 실제의 신앙내용은 삼류이거나 통속성을 면치 못하면서 마치 고귀하고 고결한 것처럼 위장을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 처럼 말이다. 이러한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는 그들의 키치적 신앙을 알아채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철두철미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키치적 개신교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를 한 번 들여다보자. 개신교인수가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년 만에 인구의 1/4 이 넘었는데 기독교가 상식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론에서 연일 비판을 해대고 있다. 목회적으로 성공한 대형교회 목사들이 단골메뉴로서 언론에 등장하여 뭇매를 맞고 있으며, 가는 곳마다 교회 분규가 끊이지 않아 개신교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고귀한 신앙이라고 위장을 해왔다.

    선교를 하든지, 후임자를 결정하든지, 선거를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대형집회를 하든지 뭐하나 상식적인 것이 없고 기독교가 사회와 언론의 조롱거리로 남게 된 것은 이를 잘 반영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키치가 범람하기 때문이다. 키치가 범람하면서 그것은 단지 예술에 대한 태도나 예술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스며들었다. 종교생활에도 스며들었다. 그러다 보니 거짓복음을 팔아먹는 복음장사꾼들이 늘어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사이비들이 판을 치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오늘날 정상적인 개신교들에게까지 퍼져있다.

    첫 번째 교회를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한국개신교 신도들은 교회라는 원래의 공동체보다 가시적인 교회당을 더 좋아한다. 교회분규의 대부분은 '교회(당) 차지하기' 이다.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무형의 에클레시아보다 한 평에 수백만원, 수천만원씩 하는 가시적인 교회(당)만을 교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키치적 신앙이다. 교회의 가치와 본질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 더 관심하며, 이것을 차지하는 것이 곧 교회를 지키는 것이며,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십자가 군사로 자리매김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신의 모습에 뿌듯해 한다. 건축후유증으로 무형의 교회가 다 파괴되어도 관심 없으면서 수십억씩 은행대출을 받아 매달 수백만원씩 이자를 내면서도 아름답게 건축한 유형의 교회를 보면서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는 것이다. 본질을 도외시 한 키치적 신앙이다.

    두 번째는 설교를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읽거나 연구하는데는 별관심 없으면서 유머와 예화, 주관적 간증이 많은 목회자의 설교에 더 감동하며 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대신 목사의 유머러스한 설교에 매료되어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펑펑 흘린다.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에 만족하며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목회자도 차라리 성경을 읽어주면 더 나을성 싶은데 성경을 해석한다고 설교를 하는데 논리성도 없고, 지나친 예화, 자기 이야기 등이 판을 쳐 오히려 성경의 감동을 반감시킨다. 키치적 설교이다.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를 하는 것을 즐겨하고 있다. 설교를 하는 자신이 주의 종으로서 대견스러운 것이다. 키치적 목사이다.

    키치적 신앙인들은 교회에 가면 성경말씀보다도 특정목사의 설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어쩌면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이 불렀다는 신앙인이라는데 더 감동을 한다. 그러다 보면 특정목사의 윤리문제나 교주적 리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신도는 설교자나 설교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 것 보다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에 감동을 한다. 성경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것이다. 특히 모태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내용보다 모태신앙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만족해 한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바른 의미와 해석보다, 대중의 취향이나 교회성장주의에 휩쓸려 기복과 성장에 포커스를 둔 설교를 주로 한다. 설교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 계시인 성경의 내용보다, 주관적 계시를 받고 설교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관심을 갖고, 대견스러워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스스로 교주화하는데 만족해 한다.

    세번째 목사를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한국개신교도들은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생각한다. 교단헌법에도 목사는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종' 또는 '사자'이며 '하나님의 도를 맡은 청지기'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과 버금과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를 비난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교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대형교회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는 온 데 간 데 없고 대형교회 목사만이 남는다. 그들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기 때문에 이미 카리스마틱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말에 죽고 살기까지 한다. 방송국을 때려 부수라고 하면 부수어야 한다. 그들은 감히 자신들을 십자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십자군이 된 자신의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시는 교주가 불륜을 하는 것은 로맨스이고, 재정을 사용하는 것은 천국은행에 저축하는 것이고, 골프를 치는 것은 마귀 때리기 연습이고,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은 엘리아의 불병거를 타는 것으로 보인다. 부패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자체보다는 허위의식을 갖고 그들을 하나님의 대행자로 보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게 보는 자신이 주의 종을 잘 섬겨 복을 받는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며 자신이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키치적 신앙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시적인 모습을 금송아지로 만들었듯이,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하나님의 가시적인 모습을 목회자로 본다. 그래서 가시적인 하나님의 형상, 목회자 옆에 있는 자신들이 한 없이 즐거운 것이다. 그를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의 가방을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키치는 본질보다 이차적인 면에 만족하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야 할 자리에 목회자들이 앉아있다. 개척해서 100여명 이상만 되어도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영적인 리더 등의 명목으로 교주로서 군림하고 있다. 재정, 재산, 당회, 교회 행정과 법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맡은 소임을 다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된 것에 흐뭇해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키치적 목사이다.

    네 번째 직분을 통한 키치적 신앙이다.

    교회에서 신도들이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 전도사, 구역장이 된 것에 대해 매우 흐뭇해한다. 사실 직분이라는 것은 섬기고 봉사하기 위한 것인데 섬김과 봉사는 온데 간 데 없고 장로가 된 것 자체에 대해서 만족해 한다. 그래서 장로가 되면 그날부터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직분자가 해야 할 내용보다 직분자체에 대해서 흐뭇해하며 만족하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교회에서 직분을 수여받을 때 수십만원, 수백만원의 기부금까지 내고 있다. 직분자체에 만족해 하기 때문에 직분수여를 위하여 기념비조로 헌금을 내어도 아깝지가 않은 것이다. 목회자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학위의 과정이나 논문의 내용보다 학위를 받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한다. 자신이 박사까운을 입고 졸업을 하고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도들에게는 교회, 설교, 목사, 직분을 통해서 키치가 침투되어 있다. 본질보다는 표상에 관심을 두고, 표상의 객체보다는 목회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기주체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즉 소명에 대해 실천하는 것보다 자신이 소명을 받아 주의 종이 되고, 신앙이 된 것에 대해 즐거움을 갖고 감동을 받는 것이다.

    결국 고급예술보다 고급예술을 감상하는 자가 자신이 대견스러운 것으로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듯이, 개신교도들이 실체나 본질에 관심이 없고 성경의 내용보다 성경을 들고 교회에 가는 것을 만족해하고, 설교에 대한 결단보다 설교를 하거나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고,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보이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그림자로 생각하여 그 옆에 있는 것을 즐기고, 실제적인 공동체보다는 가시적인 교회를 보면서 좋아하고, 직분의 실행보다는 직분자체를 부여받은 것에 감동을 받는 키치적 신앙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몰상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키치적 신앙은 사상누각으로서 질보다는 양에 관계된 것이고, 일차적 본질이나 객관적 대상보다는 이차적 요소와 주관적 감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들이 일차적 본질에 사로잡힌 것처럼 허위의식과 기만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까지 위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본질적인 키치신앙이 실체나 본질보다 이차적 대상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한국개신교는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키치는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기만적이며 그 감상이 용이하고 무엇보다도 피상적이며 사이비예술이다. 그리고 감상자에게 아첨하고 거짓된 예술인 것은 통속예술과 같다. 그러나 키치는 자기 분수를 알아채지 못하고 고급예술 혹은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기 환상과 감상을 토대로 한 예술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주관적이며 자기 환상적인 키치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인과 목회자들은 키치적 교인, 키치적 목회자로부터 벗어나서 가시적인 교회보다는 공동체라는 무형의 교회, 설교보다는 성경, 목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는 직분의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키치적 모습은 물러나고, 본질적인 신앙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 아닐까?

    움베르트에코는 "어차피 근원이 부족하다면 표층의 흘러넘침을 축복하자 겹겹이 둘러싼 환상의 차원을 충실히 재현하자"라고 말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표층의 흘러넘침보다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즉 키치적 신앙에서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키치적 신앙을 거두어 낼 때, 한국교회는 상식을 넘어 초상식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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