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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설교하기는 설교의 신학적 이해에 달려있다1)
    2015-12-17 10:49:12   read : 1681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 설교학)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옛말에 “마음이 살아있으면 삼라만상이 다 살아있지만 마음이 죽어있으면 해골과 다를 바 없다”(必生則種種法生 生滅則不二)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인생사 모든 것이 마음 자세에 달려있다. 겨울을 살아도 봄날처럼 활기차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사한 봄날을 살아도 황량한 겨울을 사는 듯 음울한 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마음 자세가 바로 되어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수 있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마음 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생명력이 말라버린 해골과 같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도 불평하고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사소한 일을 하고 있어도 감사하면서 감당한다면 소중한 일이 될 수 있다.

    성경도 이러한 마음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고, “너희 중에 있는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벧전 5:2)하라고 하셨다. 설교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마음 자세이다.

    그럼 사람의 마음 자세를 결정 짓는 것은 무엇인가? 몇 년 전 뉴욕 북쪽에 있는 브롱스(Bronx) 동물원에 들렸다가 그 입구에 서있는 입석에 새겨진 바바 디움(Baba Dioum)의 말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아마도 동물, 혹은 자연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뜻에서 그곳에 그 말을 세운 것이었지만 필자에게는 설교사역과 관련하여 강력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결국에 우리는 오직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며

    오직 우리가 이해한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오직 우리가 가르침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n the end, we will conserve onl  y what we love

    we will love onl  y what we understand

    we will understand onl  y what we are taught).

    우리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즉 어떤 사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그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마음 자세가 어떠한가에 따라 어떤 것을 보존할 수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을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은 언제나 그것에 대한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는데 많은 것을 결정 짓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갖느냐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설교 사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준비된 설교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오늘의 삶의 정황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하며, 오늘을 사는 청중들의 필요가 무엇인가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바로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마음 자세이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마음 자세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설교에 대한 이해에 대한 바른 이해, 즉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관계된다.

    자신의 설교사역을 점검하면서 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그것을 새롭게 감당하려는 마음 자세를 갖게 하는 것은 설교에 대한 어떠한 신학적 이해를 갖느냐와 깊이 관련되어있다. 그 설교 사역을 성실하게 보존하려는 마음 자세와 생명을 걸고 감당하려는 마음 자세도 결국에는 그것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가능해진다.

    이렇게 설교자의 마음 자세를 결정 짓은 것은 ‘바른 가르침’과 그로 인한 ‘바른 이해,’ 그리고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오늘의 시대 가운데서도 설교를 보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설교에 대한 어떠한 신학적 이해를 갖느냐는 설교 사역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너희는 설교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그러므로 설교의 기교를 배우고, 오늘의 현장과 문화 사회적인 특성을 분석하고 거기에 적합한 설교 방법론을 강구하기 전에 설교자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의 신학적 이해이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되어 있을 때 설교 사역은 바로 감당될 수 있으며, 그 사역을 새롭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무엇인가?” 수년간 설교를 계속해 온 설교자들에게는 새삼스럽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우문(愚問)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설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면 그는 바른 자세로 감당할 수도 없고, 새롭게 해갈 수도 없기에 반드시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을 대신하여 교회를 이끌고 복음 사역을 감당하게 될 베드로가 주님이 누구이신 지에 대해서 명확한 신학적인 고백을 가져야 했던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는 설교자들도 설교에 대한 그러한 신학적 고백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해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한 것을 바로 감당할 수 있고 보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오늘의 시대에서 설교할 수 있는 능력과 이유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질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서와 같이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제공한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설교--계속되는 하나님의 계시사건

    칼 바르트는 설교를 정의하기를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말씀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한다. 설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설교는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만 이것이 오늘의 시대에 들려지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와 설교자를 사용하시는데, “성경 본문을 현대인과 연관하여 해석하라는 봉사의 요청 하에 그 자신에게 맡겨진 위탁에 복종하는 교회에 의해, 그리고 이 일로 부름 받은 자들에 의해 자유로운 언어로 행해지는” 사역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말로 행해지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은 설교자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기 보다는 성령님의 역사 하심으로 가능해진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가 먼저 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찾을 수 없도록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어떤 형체도 보여주지 않으셨으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을 만드는 것까지도 철저하게 금지하셨다.

    어쩌면 그분은 인간의 이해 너머 저편에 계신 분이시며,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서는 그분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분이시다. 결국 인간의 힘으로는 그분을 알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행하셔야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시는 분이셨지만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켜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은폐하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시면서 또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이시라고 했다.
    이렇게 거룩한 신비 속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사건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를 계속해 오셨으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친히 강림하셨던 시내산 사건은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 사건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나타내셨다.

    그것은 기록된 율법과 구약성경으로 문자화되었다. 그렇게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오던 하나님의 계시는 히 1:1-2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계시의 최종적인 형태인 “성육신 사건”으로 나타난다. “옛적에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과거에 여러 모양으로 말씀해 오신 하나님의 계시사건이,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말씀 그 자체가 되신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 책을 쓰시지 않으신 것은 그 분 자신이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행동하셨고 또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의 완성이다. 성육신 되어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증언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선포하시는 유일한 설교자이다.

    그는 친히 자신을 증언하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를 그의 말씀에 봉사하는 자로 세우신다. 이 과제는 교회 전체에 주어지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그 복음을 세상 속에서 설교하고 증언하도록 설교자들을 보내신다. 우리가 설교하는 이유,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렇게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고 선포한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선상에 놓인다. 계속해서 자신을 증언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설교자들을 파송하시며 교회에 이 직무를 위임하신다. 이 점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며, 그 바탕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육신이라는 방식을 통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사건”이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을 걸어오신 하나님, 가장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육신 하심으로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설교자들을 통해서 말을 걸어오고 계신다.

    이렇게 설교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사건인 설교는 성령의 생생한 임재를 통해 오늘도 삶과 역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들음과 참여

    이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ns)이시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대답은 설교를 통해서 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who speaks)이시라는 고백으로부터 설교 사역은 시작된다.

    설교자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고백할 때, 그는 온전한 설교자가 되어질 수 있고, 늘 새롭게 설교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른 설교자는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에 사로잡혀 있게 되며,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청중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허하게 무릎을 꿇게 할 것인지에 깊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들을 통해서 과거에도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하나님께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 말씀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이 말씀이 바로 들려질 수 있기 위하여 시대와 삶의 자리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아니할 것이다.

    문화 사회적인 변화를 포함해서 청중들의 의식과 삶의 정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설교자는 말씀의 역동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청중들의 삶과의 관련성(relevance)이 없는 설교는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말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그들의 삶의 연관성이 없고 의미를 주지 못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들은 청중들의 삶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며(relevant),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는 말씀이었고(meaningful), 또한 흥미를 유발시켜주는 말씀(interesting)이었다.

    그렇다면 설교를 위임받아 행하는 설교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하는 설교를 우리가 행할 때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여기에서 디트리히 리츨(Dietrich Ritschl)이 말하는 소위 “주체와 객체의 분열”의 문제가 야기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우리는 누구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또 누가 말하는 것이며 ‘빈약한 설교’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왜 그리스도가 말하신다면 우리는 설교를 배워야 하고, 설교 전달의 기술적인 면을 고려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형식인 설교는 “성령의 고유의 활동”이며 이 성령에 의하여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또한 설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정신이나 사상, 혹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개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증언의 역사적 주체이신 분에게 순종하며 그분에게 시선을 돌릴 때만이 말씀의 내용과 함께 그 형식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증언으로서의 설교를 감당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증언을 들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증언의 형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는 말씀의 형식들--“선포된 말씀의 형식인 설교, 기록된 말씀의 형식인 성경, 성육신화된 말씀의 형식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체적으로 들음에 의해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렇게 설교는 사람의 말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준비에 결코 등한히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 말씀 연구를 등한히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준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이 놀라운 신비 앞에서 그는 성령님을 깊이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말씀 사역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을 주관하시며, 그 성패와 효율성(effectiveness)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마치 일상의 식사를 드시고 축사하실 때 성찬이 되게 했던 엠마오 어느 집에서의 기적을 늘 가슴속에 열망하는 존재들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에 현존하신다는 자유로운 선물”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사실은 그에게 그 직무를 맡겨주신 분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귀를 기울인다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형식인 “말씀”에로의 들음과 참여를 전제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에 먼저 참여함으로서 설교는 세상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설교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을 이 땅에 제공한다.

    하나님의 계시 사건인 설교가 행해질 때 하나님은 스스로 은폐하심을 버리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비의(秘意)는 드러나며, 하나님의 세계는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설교자가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에 참여함으로 세상은 오늘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게 된다.

    설교자는 이 땅에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에 참여한다. 설교는 힘을 다하는 것이나 무엇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설교란 힘을 받는 것이고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설교의 객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설교의 주체가 되신다. 우리의 설교가 행해질 때 그분은 주석과 같은 발로 거니시며, 불꽃과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며 행동하고 계신다.
    설교자인 우리는 사용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의 말씀의 객체가 된다. 설교자가 이 들음과 참여함이 없다면 우리는 결단코 “설교의 영광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들음과 참여는 설교가 성서적인 설교가 되어야 함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설교가 성서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설교에 있어서 규범적인 사실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경을 근거하여 가장 최종적인 메시지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직접 드러내시며 증언하는 성경의 증언에 근거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의 살아있는 소리가 설교자의 증언을 통해 살아나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렇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기 위해 철저하게 성경 중심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이요, 선포라고 이해할 때, 본문이 중심이 되고, 본문이 말씀하도록 하는 설교여야 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설교는 너무나 인위적인 요소로 가득 찼고, 성경이 말하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가 말하고 성경은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proof-text)로 삼는 누를 자주 범하고는 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의 본문이 설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설교를, 또한 성경 본문까지 지배하는 경향으로 치닫게 된다. 그것은 중세교회가 범했던 오류였고, 그러한 오류 가운데 사로잡혀 있던 교회는 긴 말씀의 암흑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드러나심

    그렇다면 설교를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설교 사역을 통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은 설교라는 형식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기계시를 위해 설교를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의 가장 중심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드러나심(the disclosure of God)이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갖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가 바로 행해질 때 오늘의 회중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느끼게 되며, 현재 일로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transmit)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experience)이다. 이러한 점에서 폴 스캇 윌슨(Paul Scott Wilson)은 설교를 “회중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

    우리가 바로 행하는 설교 사역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하나님의 세계는 펼쳐지게 되고, 흑암과 혼동 가운데 있던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질서의 세계로 창조되었던 것처럼 심령들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가 계속되게 된다.

    또한 설교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대하며 경험하게 된다. 설교의 사역을 위임하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들의 사역의 현장에 임재를 약속하셨다. 그들이 주님의 위임을 받고 나아가 설교하였을 때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고, 그 따르는 표적을 통해 말씀을 확증(confirm)하셨다고 말씀하신다(막 16:20).

    그러므로 설교 사역이 행해지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예견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은혜의 선물이며, 약속의 성취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비록 그것을 어떤 공식으로 서술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와 시간 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의라는 비의(秘意)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임재는 일어난다.

    설교자의 마음 자세에 달렸다

    하버드 대학의 테오도르 레빗 교수는 그의 책, ??마케팅 근시??(Marketing Myopia)에 성장하는 산업이 쇠퇴하게 되는 원인을 그렇게 분석한다: "지금 강력한 위치에 있는 산업 치고 왕년에 한때 성장산업이라는 명성을 지니지 않았던 산업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의 정점에서 이미 어두운 쇠퇴의 그림자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또 우리가 성장의 절정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산업들도 실제로는 성장을 멈추고 있다. 이것은 시장이 포화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경영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실패의 원인은 조직의 상층부에 있다.

    최근의 분석에 따르면 회사의 모든 목표와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경영자에게 실패의 책임이 있음이 분명해 졌다." 한 회사의 성장과 쇠퇴의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 경영자(CEO)가 어떤 마음자세를 가지고 경영해 가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한 회사의 부침(浮沈)이 최고 경영자의 생각에 달렸다면 오늘의 설교 사역도 설교자들에 달렸다. 이것은 설교자가 주체여서가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객체로 서야하는 설교자가 바로 그것을 감당하느냐에 달린 설교자의 마음자세, 즉 신학적 이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설교 사역을 지탱시켜주시고,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하나님의 공동체로 형성해 가는 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그들 속에 화해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오늘 설교자들의 말과 생각들을 사용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 설교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을 증언하며,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즉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을 강화하도록(enhance) 세워주셨다. 이러한 사역을 위해 세움 받은 설교자는 명확한 설교에 대한 설교 신학적 이해를 가져야 한다.

    즉 설교자의 마음 자세가 바로 되어 있을 때 바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설교자를 세우시고, 설교를 사용하심을 아는 설교자라면 어떻게 설교 사역을 아무렇게나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점에서 설교는 설교자의 모든 것이 동원되어야 할 정교한 행동(delicate act)일 수밖에 없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생명과 죽음, 지옥과 천국이 설교에 달려있고, 그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주장한다. 설교가 이렇게 중요한 것은 설교를 통해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계시하시기 때문이며, 생명을 가져오는 믿음은 언제나 말씀을 들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롬 10:17).

    설교자는 하나님의 본성이나 뜻, 그분의 길에 대한 자신의 묵상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친히 자신에 관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는 언제나 그러한 고백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합니다.”

    설교에 대한 그러한 근본적인 확신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과 설교의 받침점이 되었다. 유한적이고 연약하며, 결점 투성이인 인간 존재가 설교를 통해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언제나 사역에 대해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서있는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이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세움 받았고,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아는 존재들이다. 결국 오늘의 설교사역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설교자가 설교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를 갖느냐로부터 시작된다.

    작년 9월 미국의 뉴욕의 무역센터 건물이 공격을 받아 붕괴하였을 때 수많은 소방대원들이 희생되었다. 납치된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돌진하여 폭발했을 때 순식간에 두 건물은 화염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때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건물이 곧 무너져 내릴 줄 알았지만 그곳에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비상 계단을 통해 올라가던 그들은 무너지는 건물과 함께 잔해에 깔리고 말았다. 건물이 무너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기 사람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을 구해내는 것은 자신들의 사명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뛰어들 수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를 정확하게 잘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역시 작년에 서울 홍제동 주택 화재 사건에 투입되었다가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깔려 유명을 달리한 한 젊은 소방수의 책상 앞에는 “소방관의 기도”가 부착되어 있었다.

    제가 업무의 부름을 받을 때는 주여

    아무리 강한 화염 속에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저에게도 언제나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고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어

    신속하고 효과적인 화제를 진압하게 하소서.

    저의 업무를 충실하게 하시고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

    저의 모든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지키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당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그는 소방관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가졌고, 그 일에 대한 바른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그러한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려고 했고, 그렇게 살다가 간 사람이었다. 우리는 감당해야 할 설교 사역에 대해 바른 이해, 바른 마음 자세를 가지고 그것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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