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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일도 목사 아내 김연수 10년 넘는 수녀원 생활 정리… 신혼의 행복 시작
    2020-05-16 03:16:09   read : 43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순탄치 않은 결혼, 결연한 의지로 감행… 좁고 낡은 단칸방 신혼집이지만 행복

    1982년 9월 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김연수 사모와 최일도 목사가 기념 사진을 찍으며 미소 짓고 있다.

    나는 매사가 낯설고 서툴렀다. 10년 넘는 수녀원 생활 동안 대중문화를 접한 일이 없었다. 누가 가수 조용필씨 얘기를 하기에 그가 시인이냐, 소설가냐 물었던 적도 있다. 내게 더욱 낯선 것은 개신교 예배와 신앙의 표현이었다. 되도록 홀로 기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던 나는 선언하듯 크게 드러내는 신앙표현을 따라 하기 힘들었다.

    최일도 전도사는 내가 적응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여러 교회들로 인도했다. 우리는 그중 서울 광화문의 새문안교회에 정착했다. 예배 분위기도 잘 맞았고 고 김동익 목사님의 설교도 큰 은혜로 다가왔다. 적응에 시간은 걸렸지만, 우리는 남들처럼 데이트도 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첫 데이트 때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다 그가 선물이라고 건넨 주부생활 잡지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전도사가 내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지금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5~7년 후에 목사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학력고사를 보고 장로회신학대에 들어가는 건데 목사가 되려면 9~10년은 걸려요.”

    나는 무엇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선택이 먼 훗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두 번째 길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찬성했다. 머릿속으로 앞날을 그려봤다. 10년 동안 학생과 살아갈 일이 막막했지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계성여중 교사로 있을 때 다른 교사들을 보니 혼자 벌어 애 셋도 키우고 하더라. 내가 벌면 되지’하는 생각이었다.

    그날 나는 수녀 시절 품어왔던 ‘모든 이의 모든 것’이란 모토 대신 ‘오직 당신의 행복을 위해’를 내 생의 캐치프레이즈로 선택했다. 최 전도사는 한 번에 장로회신학대에 합격했다. 얼마 후 나도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취직했다. 얼마 뒤인 1982년 9월 4일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이 쉽지는 않았다. 시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목사나 장로의 딸을 배우자로 맞길 원했다. 수녀 출신에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은 나와의 결혼은 용납이 안 된다고 하셨다. 내가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수녀원에 들어갔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결연한 의지로 우리는 결혼을 감행했다.

    혼수도, 많은 사람의 축복과 격려라는 장식도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의 모든 것이 됐다. 신혼집은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 월계동의 낡은 문간방 하나를 전세 150만원에 빌렸다. 화장실도 없는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대의 선물이고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때의 마음을 담아 썼던 시 ‘그대 약속 별빛 되어’ 중 일부를 소개한다.

    “두렵지 않습니다./ 그대 손잡고 가는/이 길/ 안내장도 지도도 없이/ 고향 떠나 찾아나선/ 낯선 길도/ 그대의 약속 별빛 되어/ 달빛 숨은 어둠조차 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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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사랑의 세레나데’ 부르며 첫 눈에 반했다 고백

    장미 꽃다발 들고 찾아오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자주 전화하다 급기야 민박집 스캔들까지 생겨



    김연수 사모가 수녀였던 시절 최일도 전도사와 함께 찍은 사진. 수녀원을 개방하던 날 최 전도사가 찾아와 사진을 찍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최일도 전도사라는 청년이 세상에 나와 있는 수많은 시 중에서 내가 발표한 시를 찾아들고 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나는 얼른 그 시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웃기만 하고 돌아섰다.

    그날 이후 최 전도사는 하루는 장미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고 또 하루는 새벽기도 후 곧장 왔다며 출근길의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인솔하는 계성여중 학생들 틈에 끼여 따라다니기도 했고, 어느 날부터는 달빛이 너무 밝다는 둥 밤하늘이 너무 맑다는 둥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내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난 학생들 여름수련회 책임자였는데 레크리에이션을 맡은 생물 선생님이 논문 관계로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대체 인력을 구해야 했다. 그때 최 전도사가 떠올라 그를 여름수련회에 합류시켰다. 누구보다 애써주는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수련회를 마칠 때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시골에 가서 휴양할 것을 권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그에게 우리 고향에라도 가서 민박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
    조용하고 맑은 동네니 쉬기 적당할 것 같아 건넨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찾아가 민박을 소개받겠다던 그가 다른 집으로 가지 않고 그냥 우리 집에 눌러앉았다. 황당하면서도 ‘최일도답다’는 생각을 했다.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던 이 일이 수녀원에 알려지면서 스캔들로 번졌다. 휴양을 다녀온 그가 아는 수녀님께 무심코 한 얘기가 교장수녀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길로 교장수녀님께 불려갔다. 수녀가 친정집에 남자를 가라고 해도 되느냐는 책망과 함께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간 전화를 받기만 했지 걸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난 그에게 누구에게도 내 얘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소문은 발이 달린 듯 삽시간에 퍼졌다. 한참이 지났을까. 교무실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다. 최 전도사였다. 목소리가 안 좋았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 했다. 지난번 전화 이후 음식을 먹지도,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고 했다. 만성 간염이라는 말에 딱한 마음이 들어 통닭 한 마리를 사 들고 병문안을 갔다. 그는 반가워하며 자신이 직접 썼다는 시를 들려줬다. 병원에 머문 시간은 10분도 안 됐지만, 그가 쓴 시는 병원을 나서서도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최 전도사는 퇴원 후 날 찾아왔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자신의 반려자로 정했다는 말과 그 이후로도 계속 연모해 왔다는 말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내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갑자기 그가 노래를 불렀다. 김동명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수선화’였다. 노래를 마치자마자 그는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번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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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7) ‘수도생활’이냐 ‘사랑’이냐… 번민 갈수록 깊어져

    “난 다섯 살 연상에 수녀다” 강조해도 연상연하 커플 줄줄이 대며 막무가내



    최일도 목사가 전도사 시절 수녀였던 김연수 사모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최일도 전도사의 행동은 늘 내 예상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그가 처음으로 결혼하자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신분상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과 내 나이를 밝혔다. 내가 수녀가 아니더라도 결혼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 전도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저보다 다섯 살 많으시군요. 오히려 제겐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세상의 연상연하 커플의 이름을 줄줄이 댔다. 그리고 이 말도 덧붙였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부인 캐더린이 수녀였다는 것도 아시죠.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안 돼요.”

    내 번민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해 10년 세월을 살아온 수도생활도 중요했다. 더욱이 난 종신서원을 했다. 수녀원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내게 결혼을 하자는 청년은 개신교 전도사였다. 그럼에도 나는 점점 그에게 빠져들었다. 내 머리는 수도생활을 주장했지만, 내 가슴은 그의 말에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선택은 고통이었다. 어느 한쪽이 현격히 차이가 있을 땐 비교적 고통이 적겠지만 양쪽이 동량의 가치로 팽팽하게 맞서니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수도원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의 순수한 사랑의 열정 때문에 (최 전도사가) 상처를 입겠지만 사랑의 상처는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사랑은 뿌리가 튼튼해서 한 싹이 잘리면 또 다른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그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새싹을 틔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난 생각도 떨칠 겸 수원 ‘말씀의 집’으로 피정을 갔다.

    수련 이틀째였다. 창세기 12장 1~5절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을 묵상하는 가운데 뜻밖의 음성을 들었다. ‘네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이미 고향을 떠나 수녀원에 들어왔잖아요?” 이어서 들려온 음성은 ‘이곳은 이미 너의 고향이 됐다’라는 말씀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난 이날 묵상 속에 들은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내 속마음인지 식별하기 위해 계성여중 교사직을 그만두고 몇 개월 동안 소임지를 떠나 기도에 전념했다. 한 달간 침묵하는 수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기간 최 전도사는 나를 찾기 위해 애를 쓰며 돌아다녔다. 침묵 수련이 끝났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날 찾아왔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최 전도사님을 사랑한다”며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결론 내렸다”고 선을 그었다. 그가 떠나고 나 역시 말씀의 집을 떠나 충남 홍성 광천읍의 작은 성당으로 갔다.

    최 전도사는 이번에도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는 이유로 나는 다시 내 모교인 쌘뽈여고로 소임지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내 또 나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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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그를 살려주세요, 그에게로 가겠습니다’

    가사도로 가겠다는 마지막 전화통화에 살아만 있게 해달라 기도…마음 돌린 그와 통화 후 수녀원 떠날 준비

    실연의 아픔에 모든 걸 던지려고 떠난 최일도 목사가 가사도에서 찍힌 사진. 가사도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인연을 맺은 이장이 최 목사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저녁 기도시간 15분 전 전화벨이 울렸다. 한 수녀가 받더니 말없이 날 바꿔줬다. 수화기 저편에서 웬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깐 사이에 남자 목소리로 바뀌었다. “저, 최일도입니다.” 자기 이름으로는 아무도 나를 바꿔주지 않자 학교 근처 제과점 주인아주머니를 통해 전화한 것이다.

    일부러 냉정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곤 황급히 전화를 놓으려는데 귓등으로 다급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녀님, 정말 이러시면 이 세상에서 다시는 제 목소리 못 듣게 될 겁니다. 이대로 가사도(加沙島)로 갈 테니까요.” 전화는 ‘탁’ 소리를 남기고 끊겼다.

    기분이 석연찮았지만, 그렇게라도 단념하고 돌아섰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지 사방에 장애물뿐이에요. 내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답니다. 내 사랑은 이제 자취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나 봅니다. 가사도 앞바다에 모든 추억을 던졌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이리저리 뜯어 맞춰봐도 그의 마지막 말이 섬에 틀어박혀 낙도 선교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날 밤 기도를 어떻게 끝냈는지 기억에 없다. 곧바로 수녀원에 있는 작은 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울며불며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하나님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끝없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부턴가 마음에 하나의 결심이 자리 잡으며 점차 평정을 찾았다. 기도는 차분해졌고, 일관성 있게 오직 한 가지만을 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그를 살려주세요. 만일 그를 살려 보내시면 제가 이 삶에서 죽고, 그에게로 가겠습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저희를 통해 이루고 싶은 일에 협력하는 길이라 여기겠습니다.’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로 해일처럼 부풀고 뒤집히던 내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리고 지난여름 수원 말씀의 집에서 받은 ‘네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1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기도하다가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미치면 저절로 눈이 떠졌고, 길을 걷다가도 그만 다리에 기운이 쑥 빠지면서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을 길이 없어 그저 애꿎은 전화기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그였다. 실제 가사도까지 갔던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마음을 돌려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목이 멨다. 그의 말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제가 서울로 갈게요. 그대로 기다리세요. 가서 말할게요.”

    그와의 통화 후 난 수녀원을 떠날 준비를 했다. 종신서원을 풀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수녀원에서 얽히고설킨 관계의 뿌리가 잘리면서 이별의 출혈이 낭자했다. 그러나 용기를 냈다. 1981년 7월 24일 나는 수녀원의 문을 열고 바깥세상으로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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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5) 나는 가톨릭 수녀였고 그는 개신교 전도사였다

    첫 서원 후 복학, 공부 정진해 시인 등단… 같이 수업 받게 된 남편과 운명적 만남



    김연수 사모(왼쪽에서 두 번째)가 1977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졸업식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학사모 대신 베일을 썼다.
    수녀원에서 나는 김연수라는 이름 대신 김 아네스 로즈로 불렸다. 아네스는 어린양이라는 의미였고, 로즈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꽃송이란 뜻을 담고 있다. 나는 ‘수녀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도생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3년의 수련을 거친 후 나는 첫 서원을 했다.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기 위해 세상의 사랑을 포기하는 정결을 서원했다. 세상의 재물은 물론 내 의지까지도 주님 앞에 봉헌했다. 그런 내게 수녀원에서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라는 소임을 줬다.

    나는 자퇴했던 수도사대 국어국문학과에 3학년으로 복학했다. 3년 전 학교를 떠날 당시 학교 측에서 자퇴 후 복학을 권했던 만큼 다시 돌아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학교로 돌아온 난 오탁번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시문학 공부에 정진했다. 성과도 있었다. 졸업하던 해인 1977년 3월 ‘시문학’을 통해 문단에서 1차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 10월 추천이 완료되면서 명실공히 시인이 됐다.

    등단과는 별개로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계성여중 국어교사로 임용됐다. 여기서 난 담임교사, 학교신문 담당, 시화반 지도교사 등을 겸직했다. 교사 4년 차 때는 종교주임을 맡았다. 10년 가까운 수도생활에 종신서원까지 한 나였지만, 막상 학생들을 지도하려니 성경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교육관에서 유 데레사쟌 수녀님이 지도하는 ‘베델성서반’이 진행 중이라기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날의 그 선택이 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로 들어서는 걸음임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유 수녀님이 계신 교육관으로 갔다.

    “유 수녀님,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도 베델성서 공부하려고 왔어요.” 갑작스런 방문에 양해를 구하며 문을 열었다. 유 수녀님은 어떤 젊은 남자와 대화중이었다. “로즈 수녀님, 잠시만요.” 유 수녀님은 나를 그 청년에게 소개했다. “두 분 서로 인사해도 좋을 것 같네요. 이분은 최일도 전도사님, 그리고 이분은 김 아네스 로즈 수녀님이세요.”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은 그때 나를 보고 하얀 프리지어 꽃이 웃는 듯, 코스모스가 인사하는 듯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그런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깐 인사만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수녀였고 그는 개신교 전도사였다. 그가 천주교 성서 모임에 있는 것 자체가 뜻밖이라 별 관심을 안 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매주 화요일 베델성서를 공부했다. 최 전도사라는 청년도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몇 주가 지났을까. 성경공부가 끝나자 그가 시문학이라는 월간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시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시 한 편을 펼쳐 들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짚고 있는 시는 내가 김연수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시였다. 그가 내 본명을 알 리 만무했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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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3) “나를 밟고 가라” 부모 만류에도 수녀 되려 서울로

    천주교 미션스쿨 다니며 수녀 동경… 식구들 공주교대 가기 원했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수도사대 입학키로



    김연수 사모(왼쪽)가 쌘뽈여고 2학년 시절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함께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어울렸던 이 친구와 같은 날 세례도 받았다.
    내가 다닌 쌘뽈여고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주교 미션스쿨이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소속으로 당시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최신식 학교였다. 입학 축하 미사부터 전혀 생소한 종교의식에 어리둥절했지만, 까만 원피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머리에는 검은 베일을 쓴 수녀님의 모습에 왠지 모를 동경과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여고 생활은 인생의 또 다른 길에 눈을 뜨게 했다.

    그 무렵 나는 사색에 빠져있었다. 큰오빠 집에는 책이 많았는데 하교 후 3살이던 조카랑 놀아주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을 제외하면 늘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특히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 당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문장이었다. “한 자밖에 안 되는 촛불 같은 인생, 캄캄한 밤에 켠다면 많은 사람에게 빛이 될 텐데.” 나는 수도 생활이야말로 한밤중에 켜는 초와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개교기념일인 성바오로 축일에 큰오빠와 함께 세례를 받으면서 그 마음은 더 커졌다. 1년 뒤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70년 1월 대학입학 시험을 이틀 앞둔 날 오후였다. 쌘뽈여고 교장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큰오빠가 날 찾는 전화였다. 쌘뽈여고 국어교사였던 큰오빠는 내가 고3 되던 해 공주사대부고로 전출 갔다. “공주 오빤데, 바꿔줄까” 물으시는 교장수녀님께 나는 “그냥 모른다고 해주세요. 지금 전화 받으면 서울로 시험 보러 못가요. 조금 전에 여기서 떠난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부모님께 공주로 가겠다고 인사드리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목적지를 서울로 바꿨다. 아침 일찍 공주로 가겠다고 떠난 내가 저녁이 다 돼도 도착하지 않자 큰오빠가 급히 전화를 건 것이다. 집에선 내가 공주교대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학교에서 원하는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으로 향해 있었다. 당시 학교는 4회 졸업생인 내가 서울로 진학하길 바랐다.

    “연수야, 너 들르면 꼭 공주로 연락하라고 하신다. 연락 안 하면 형제 인연을 끊겠다고 하시는데….” 교장수녀님의 걱정스런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소서.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부모님과 오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주님의 은혜로 합격한다면 저를 수도 생활로 부르시는 것으로 알고 따르겠습니다.’

    그해 2월 “서울 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는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나는 뒷문을 열고 수도사대 입학을 위해 집을 나섰다. 언제 따라왔는지 동생이 손을 내밀었다. “언니, 이거라도 갖고 가.” 도망치듯 나선 언니가 안쓰러웠는지 꼬깃꼬깃 접힌 1000원짜리 지폐 2장을 내 손에 꼭 쥐여줬다.

    ‘세상 모든 출가자가 너나없이 한 번은 가족과 아프게 이별했을 거야.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지금 떠나자. 한 번은 겪을 일이야.’ 눈에 고인 눈물을 털어내며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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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 미안, 작년부터 ‘밥퍼’ 시작했어” 남편 통보에…

    “이미 당신이 내 결정에 동의했다고 믿어”



    다일영성수련원장 김연수 사모가 남편 최일도 목사와 함께 2015년 캄보디아 시엠립에서 찍은 사진. 다일천사병원에서 척추측만증 치료를 받은 뽀안(가운데)도 함께했다.
    1989년 7월, 그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조용히 얘기 좀 하자던 남편이 그간의 일들을 털어놨다.

    “여보, 미안해. 당신하고 먼저 의논해야 했는데, 나 작년 가을에 다일공동체를 시작했어. 할아버지들과 행려자들에게 라면 끓여주는 일로 시작된 거야. 물론 당신과 함께.”

    나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했다. ‘내가 언제?’ 턱밑까지 올라온 질문을 꿀꺽 삼켰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의 말은 계속됐다. “당신은 한 번도 내 결정에 안 따른 일이 없으니 이미 당신이 내 결정에 동의했다고 믿어.” 기가 막혔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결정이 하나 있는데, 이것도 무조건 따라 줘야 해. 나 교회 개척할 거야. 청량리에서.”

    내 남편은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다. 그동안 남편이 하는 일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빈민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던데, 설마 계속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사인을 남편에게 수없이 보냈다.

    그러나 끝내 남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남편의 음성이 확고부동한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잘됐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명색이 10년 넘게 수도했는데 가난하고 병든 사람 돌보는 일을 극구 반대했으니 마음 한구석에는 자책과 죄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밥퍼 사역은 이렇게 당황스러움과 자책감 사이에서 시작됐다. 내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징집돼 이 길을 걸은 지도 햇수로 벌써 32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걸어온 길이 꽃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걸었던 것 같다.

    “먹는 사람이 일한다. 먹다 망한 집은 없다.” 요즘 들어 어머니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모두 인심이 좋았다. 손님들이 돌아갈 때면 고추 한 근, 찹쌀 한 되, 마늘 한 접이라도 싸 주셨다. 어떤 이는 아침부터 와서 점심까지 먹고 갔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왜 우리는 남들에게 먹는 걸 주고 그래야 해?”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문전성시 이룬 집이 성공하는 거지, 집에 손님 한 명 없으면 그 집은 망한 집이야”라며 “그런 말 마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연습을 시킨 것 같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어머니께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부창부수라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 아버지는 동네 이웃이 이사갈 때면 전날 들러 “내일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가게”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 시절엔 이사를 가려면 전날 짐을 다 싸 놨다. 아침밥을 짓기위해 싸놓은 짐에서 식기를 다시 꺼내고 넣는 일이 번잡스러우니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오라는 얘기였다. 이렇게 밥 먹고 떠난 이웃은 1~2년 뒤 고향을 찾을 때 꼭 우리 집을 다시 찾았다.

    아버지는 딱한 사정이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한 번은 늦은 밤 젊은 여자를 데리고 와 우리 가족을 당황시켰다.

    김연수 다일영성수련원장 약력=수도여자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 서강대 신학대학원 신학과 졸업. 1978년 '시문학'으로 등단. 다일복지재단 상임이사·상임대표 역임. 현 다일영성수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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