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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 의식이 분명한 설교를 하라
    2003-04-11 17:58:23   read : 559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를 할 때마다 목적 의식이 뚜렷해야 한다. 설교를 오래 하다보면 매 설교마다 어떤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지에 별 관심이 없어지게 된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의 말씀 전한다고 생각할뿐이다. 그래서 설교하면서 청중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게되고 습관적으로 하게된다. 설교는 매번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1. 목적의식이 분명한 설교

    왜 설교하는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어보겠다. 이 특정한 한 편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넓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금 하려는 설교의 목적 말이다. 물론 논지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설교하는 사람은 그 논지만큼이나 명확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멋진 설교라도 그 설교가 이루고자하는 분명한 목표가 없다면 힘이 떨어진다. 내용에는 좋은 것이 다 들어있다. 그리고 예화도 훌륭한 것들이다. 설교자는 아주 달변으로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그러나 설교가 그저 하나님 잘 믿으라는 식의 막연한 내용으로 흘러간다면 청중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갈게 없다.

    설교자들에게 지금하는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냥 막연히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한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해서" 또는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식의 목적은 너무도 애매하다. 그러므로 설교의 내용도 두루뭉스리이다.

    월드컵 축구의 목적은 무엇인가? 팀워크, 절묘한 패스, 골득실, 감독의 지휘, 열광하는 관중, 중개방송등 여러가지 내용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여기의 목적은 아주 분명하다. 이기는 것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생각이 없다면 경기도 재미없고 거기 들어가는 모든 것들도 싱겁기 짝이 없을 것이다.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감동을 주는 것인가? 어떤 목사는 감동주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많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을 듣고 감동해야지 분위기나 감동적인 이야기 그 자체 때문에 감동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설교를 듣고 나면 흐믓하지만 아무 것도 기억에 남는게 없다.

    뒤에 더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설교가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영혼부터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비참한 사람이다. 설교는 교리를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다. 설교는 교회생활을 설명하고 하나님 섬기는 법을 지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설교는 영혼을 움직이는 무엇이어야 한다.

    토우저의 말이다. "성경의 교리를 그 자체 때문에 가르치는 것만큼 답답하고 무의미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삶과 관련 없는 진리는 전혀 성경적인 의미에서 진리가 아니다....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사실을 안다고 나아지는 사람은 없다. 마귀도 아합도 가룟 유다도 다 그 사실을 알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을 안다고 사람이 더 좋아지는건 아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수백만이나 지옥에 있다." 그러면 어쩌라는 말인가? "신학적 진리는 복종하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즉 모든 교리의 목적은 도덕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도덕적인 행동을 목표로 할 때 교리 강의는 불이 튀는 것처럼 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그냥 성경의 내용을 말하는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선 감동을 주고 그 내용이 기억되고 행동에 옮겨지도록 가르칠 것이다. 마찬가지의 일은 어디나 다 일어나지만 특별히 설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개개의 설교 목적은 무엇인가? 지도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과 실제로 여행을 해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논지가 복음의 내용을 말하고 있지만 설교의 목적은 그것을 통해 성취되는 삶을 알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총으로 새를 쏘는 사람처럼 사냥의 목표가 맞고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목사는 목회현장의 신자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한다던지, 이신칭의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삶에 적용시킨다던지, 자신의 영적인 은사를 발견하고 봉사하게 한다던지, 가정생활을 신앙적으로 하게 한다던지,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야 한다.
    2.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

    세상의 모든 일을 말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과 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율법적인 것과 복음적인 것이라 이름해 보자. 왜냐하면 이 두 방법은 삶 속에서 언제든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제만 지적할게 아니라 해결책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이 막힌다. 여기 대해서 교통대책이 시급하다고 문제를 지적하는 논문이 있다고 치자. 얼마나 막히는지, 신호등이 얼마나 많고 차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질서가 얼마나 없는지 자세히 말한다. 그러나 해결방안은 말하지 않고 단지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결론을 말한다. 이게 율법적인 방법이다.

    다른 쪽을 보자면 한 가지라도 실제적인 도움을 제시한다. 이면 도로의 효과적인 사용 방법이라든지, 손쉽게 고칠 수 있는 신호주기라든지, 시간별로 다른 출근이라든지 한 가지 집중해서 실제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적인 논문이다. 문제점만 들추는게 아니라 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다.

    설교는 더욱 더 이것이 요구된다. 신앙생활에서 어려운 점을 지적하면서 해결방안을 주어야 한다. 단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공부 하라든지, 하나님을 잘 섬기라든지, 성령에게 복종하라는 식은 너무 모호하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성령에게 복종하는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지난 번 어느 결혼식에 참석했다. 주례자가 신혼부부에게 말씀을 주었다. 장수와 부귀와 행복의 축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한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 일에 충성하라. 둘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척에게 잘하라. 셋째, 이웃에게 잘 해주라. 그러면 축복을 받는다.

    흔히 듣는 설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게 바로 율법적인 설교이다. 분명한 것은 아직 복을 받은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받으리라는 약속만을 가지고 있을뿐이다. 율법적인 축복은 다 그러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앞으로 받으리라는 약속뿐이지 지금 받았다는 말은 없다. 아무리 축복해도 현재시제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서 그 복을 받을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가지만해도 절대로 온전히 할 수 없는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축복의 상급을 받을 정도로 온전한 행위를 인간은 절대로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큰 오해이다.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게 인간 아닌가.

    하나님이 죄로 오염된 인간의 노력을 받고 복을 주리라는 생각과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다. 칼빈이 지적한대로 하나님도 모르고 인간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은 기원전(B.C.)신앙을 주는 설교이다. 지금은 복을 못받았고 장차 받을 복을 목표로 나가라는 식이다. 그러나 그 목표는 인간으로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이 그 목표를 성취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여기서부터 기원 후(A.D.)의 신앙이 나타난다. 앞의 결혼식 설교를 다시 해보자. 장수와 부귀와 행복의 축복을 선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다. 이미 받은 복을 어떻게 누릴지 이야기 해준다. 우선 이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할 것이요, 감사하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적용을 말해준다.

    그러면 믿음을 가지고 새출발을 시작할 것이다. 앞으로 받을 축복과 구원이 아니다. 이미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세상에 대한 관점부터 시작해서 언어행동의 차원이 변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설교는 받은 것의 내용을 듣는 것이다.

    목표를 향한 율법적인 접근과 복음적인 접근방법을 말했다. 율법은 신앙을 인간의 노력으로 하도록 한다. 하나님 앞에서 복받기 위해서 할 일은 단 한 가지이다. 오직 믿음뿐이다. 믿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행이다. 그외 것은 아무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두 다 기준에 엄청나게 미달이기 때문이다.
    3. 근본적인 목적: 구원

    자 이제 그러면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해보자. 영혼의 구원이다. 이 궁극적인 목표를 벗어난 것은 전혀 설교라 할 수 없다. 물론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설교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영혼에 유익이 되고 구원에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영원한 것이 된다. 반드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설교들이 신앙적인 단어를 나열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령충만, 하나님의 말씀, 기도, 은혜, 교회등 분명히 신앙적인 말들이다. 하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단어들이라도 그것으로 영혼이 일어나서 힘을 얻고 구원의 생활을 하게 하지 않으면 겉도는 설교일뿐이다.

    또한 목적은 분명해도 영혼을 위하지 않는 설교는 얼마든지 있다. 거의 매일 교회에 와서 머물며 봉사만 만들거나 목사를 잘 섬기게 할 수 있다. 구복적인 이유에서 헌금을 많이 내게 할수도 있다. 그래서 이상한 헌금 이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전혀 영혼에 도움이 안되는 목적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해보아도 마음은 언제나 차가울 것이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뚫고 영혼에 영향을 주는 양식을 주리라 결심해야 한다. 그래서 속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설교해야 한다. 구원의 능력이 삶 속에 나타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한다.

    영혼이 이미 받은 구원을 누리게 하려면 신앙을 주어야 한다. 모든 설교는 반드시 신앙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신앙을 주지 못하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 받고 축복 받으려는 율법적인 시도만 일어나게 된다. 신앙만이 하나님의 도움을 얻게 하고 위대한 삶의 힘을 공급한다.

    신앙은 세상에 흔한 믿음과는 다르다. 세상의 그 무엇을 의지하고 믿을 수 있다. 가족을 믿고, 친구를 믿을 수 있다. 돈을 믿을 수도 있고 자기의 능력을 믿을 수도 있다. 그것도 분명히 믿음이다. 세상 것에 대한 믿음도 어느 정도의 보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그리고 사랑이 영원한 행복을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슨 수를 내서라도 그것들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의지하는 믿음이 영원한 행복은 절대로 주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도 못하고 죄를 없애주지도 못한다.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하지도 못한다. 물론 천국도 못준다.

    그러므로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도움을 얻게 한다. 신앙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을 얻게 한다. 영원한 나라를 얻고 구원을 받게 한다. 물론 세상을 사는데도 꼭 필요한 힘을 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려면 절대로 신앙이 있어야 한다. 그외에는 길이 없다.

    신앙을 가지게 하려면 반드시 믿을 내용이 주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들을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사실을 듣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복음의 내용만이 신앙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구원을 얻게 만든다. 그래서 회개, 중생, 성령충만, 성화,신유등의 일들이 벌어지게 만든다. 만약 이러한 구원의 여러 면들이 눈 앞에 펼쳐지게 하려면 복음의 내용을 주라. 그러면 목표한 바가 이루어질 것이다. 구원의 현상들이 듣는 이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구원은 신앙으로만 얻기 때문이다.

    구원의 여러 면과 여러 과정중 하나를 설교의 목적으로 잡을 수 있다. 그들은 구원이라는 큰 목적에 달린 가지들이다. 구원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이루는데 여러 도움되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있게 하려면 신앙을 주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하늘의 신앙은 반드시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만 얻게 될 것이다.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의 구원이다. 이것은 목회 자체의 목적이기도 하다. 이 목표를 향해서 나가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한다. 설교가 그 궁극적인 목표를 구원에 두지 않을 때 하나님이 주신 설교의 사명은 절대로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확인하라. 내 설교가 구원의 말씀을 주는지.

    4. 목적을 분명히 해 본 설교요약

    설교자가 복음의 내용을 논지로 잡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적용시킬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효과를 이끌어낼 것인가 결정한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이 될 것이다.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성취하는 무엇을 목적으로 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게 해야 한다.

    설교 요약은 한눈으로 설교의 논지와 대지의 관계를 보게 한다. 그래서 통일성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영혼을 새롭게 하려는 어떤 목적을 이루도록 요약을 사용해야 한다. 그냥 진행하는데만 신경을 쓰지말고 내가 어떤 목적으로 이 한 편의 설교를 하는지 분명히 인식하면서 해야 한다.

    다음은 해돈 로빈슨의 [성경적 설교]에서 뽑은 에베소서 1장의 강해설교 요약이다.(129면) 아주 잘 만들어진 요약이다. 그러나 이 내용이 설교의 목적에 따라서 조금 달라질 것이다.

    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기에 찬양해야 한다.(1:4-6)
    2. 하나님이 자기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우리를 대하셨기에 찬양해야한다.(1:7-12)
    3.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유업을 완전히 소유하기까지 성령으로 인치셨기에 찬양해야 한다.(1:13-14)

    이것에 제목을 붙이고 논지를 세워 보라. 같은 요약이라도 설교의 목적에 따라서 다른 제목과 논지가 나올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확신하게 하는게 목적이라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제목: 은혜의 확신
    논지: 은혜의 확신은 하나님이 해주신 일들이 엄청난 것임을 알 때 온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2. 하나님은 자기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우리를 대하셨다.
    3.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유업을 완전히 소유할 때까지 성령으로 인치셨다.

    결론: 이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확신 속에 거하자.

    다음에는 찬양에 목적을 두어보자. 왜 찬양하는지 그래서 참으로 기쁨과 확신 속에 그것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제목: 찬양의 이유
    논지: 찬양의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엄청남 때문이다.

    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2. 하나님이 자기 은혜의 풍성하심을 따라 우리를 대하셨기 때문에
    3. 하나님이 우리가 받은 유업을 완전히 소유할 때까지 성령으로 인치셨기 때문에

    결론: 주신 은혜를 확인할 때 참된 찬양은 나온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다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거룩한 긍지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설교의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얼마든지 목적을 만들어서 설교할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설교자의 이기적인 목적으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목: 믿는자의 긍지
    논지: 믿는자의 긍지는 하나님이 베푸신 일을 알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2. 자기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를 대하셨다.
    3. 우리가 받은 유업을 완전히 누리기까지 성령으로 인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긍지를 가지고 살자.

    이제 설교 목적의 중요성을 알았다. 항상 거룩한 목표를 세우도록 하자. 그 목적은 언제나 영혼의 유익이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은 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될 것이다. 어떠한 목적이든 목적을 세우고 설교하면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기에 더욱 영혼을 사랑하면서 설교해야 한다. 그것이 설교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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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는 복음이 기준이다


    "복음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라." 말하기는 쉽다.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천은 쉬운게 아니다. 설교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예배시간에 신자들이 재미있게 듣고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깨닫게 해야한다. 듣고 중생해서 그 내용대로 살게 만드는 엄청난 책임을 가진다.

    그렇게만 한다면 삶의 모든 분야는 변화를 볼 것이다.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힘이 없게 보일지 모른다. 율법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게 훨씬 쉽고 강력할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음의 능력은 근본을 변화시킨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힘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가 사해지고 그로 인한 모든 저주가 그쳤음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과 능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이 둘은 날마다 시간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삶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의식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분명히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하나님 자녀의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작은 예수의 삶이 된다.


    1. 개혁과 변화의 기준

    개혁과 회개를 부르짖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이다. 신랄하고 적나라해서 얼굴이 뜨거운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교회의 일원이란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목사가 호화생활을 한다. 큰 차를 타고 다닌다. 월급이 너무 많은데 세금은 안낸다. 권위주의니 교권주의니 명예주의자니 합리주의자니 무섭게 비판된다.

    개혁과 회개를 외칠때마다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가? "교회는 청빈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독재와 싸워야 한다. 민중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있어야 한다. 헐벗을 사람을 도와야 한다. 굶주린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빛이 되어야 한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 내용도 끝이 없을 정도이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가지 요구사항들이 난무한다. 제직회를 열면 너도나도 일어나서 한 마디씩 한다. 당회를 열면 또 자기 의견을 다 말하고 그대로 않되면 기분이 잡쳐지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각 부서마다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교회에 문제점이 많다느니 개혁이 되어야 한다느니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외침과 함께 나오는게 성직자 신화이다. 죽을 때까지 단칸방에 온 식구가 살면서 교회에서 마련해준 사택을 거부했다느니, 봉급을 받으면 모두 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느니하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과연 이것이 훌륭한 목사의 기준인가? 이렇게 가족에게 무책임한 이가 목사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과연 개혁과 회개의 기준이 무엇인가? 교회는 무조건 가난하면 되는가? 대형교회는 무조건 나쁘고 작은 교회만 좋은가? 목사가 봉고를 타면 훌륭하고 그랜져를 타면 삯군 목사인가? 아파트가 작고 월급을 조금 받으면 존경받을 목사인가? 재정의 대부분을 구제비로 쓰면 좋은 교회인가? 각자마다 주장하는게 다르다.

    중세의 프란시스는 단 한 벌 옷만 입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 곧 프란시스칸들도 그랬다. 그래서 그들이 있는 곳에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은 가난과 결혼한 것이다. 프란시스는 죽는 순간에 자기의 한 벌 옷을 벗겨달라고 부탁했다. 완전히 벌거벗은 거지의 모습으로 주 앞에 서려했던 것이다.

    그의 신화는 어디서나 그를 성직자의 모델로 표현한다. 그가 평생 외치고 가르친 교훈은 가난이었다. "가난, 나의 신부." 그리스도가 그의 신부가 아니었다. 그것이 구원을 주는 덕인가? 인간의 덕을 하나님의 복음을 대치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죄사함과 자녀됨보다 더 앞서는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검소하게 살고 덕을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조건 가난하고 무조건 남 좋게 하는 식이 아니다. 가난과 선행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중히 여기고 모든 것 앞에 두면 않된다. 그러면 인간의 덕이 스스로 의가 되어서 하나님의 의를 대항한다. 설교자도 인간적인 덕을 복음의 내용보다 더 열심히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사실이 복음에서 들어난다.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 이 한 말씀은 다른 종교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준다. 이처럼 강하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점이 다른 신들과는 다르다.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선언이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훌륭한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청렴한 목사, 역사관이 있는 목사, 철학이 있는 목사인가? 아니, 복음을 외치고 그대로 사는 사람이다. 유능한 목사는 누구인가? 복음을 잘 전하고 그대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복음이 훌륭한 목사의 기준을 준다. 복음 전하는 일을 잘 해야 제대로 된 목사이다.

    교회가 대형이건 소형이건 그게 가장 중요한게 아니다. 그 교회가 복음을 잘 증거하고 신자들이 복음대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목사가 큰 차를 타건 택시를 타건 그것은 건덕의 문제이다.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큰 차를 타건 택시를 타건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구원하는데 유리하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

    적어도 신자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얼마나 삶의 기준과 능력으로 삼느냐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을 날마다 연구하여 그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인간적인 그 무엇을 기준으로 설교하고 가르친다면 절대로 영혼의 변화를 볼 수 없을 것이다.

    2. 복음의 요소

    자 그러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복음을 한 번 더 살펴보자. 이미 여러번 앞에서 말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말한다. 그 내용이 곧 복음이다. 그것을 들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대로 해야하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된다.

    설교자는 그 내용을 늘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 속에서 사용하고 적용해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뒤에 성화는 자기 힘으로 하는게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사랑도 희생도 당당한 삶도 아름다운 삶도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을 때 나온다.

    칼빈은 구원을 세 요소로 나누었다. 택하심과 사죄 그리고 회개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고 죄의 댓가를 지불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를 통해 성령으로 중생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선택 되었음을 믿음으로 구원은 반석 위에 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택함 받았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힘있게 부르짖는다. 유대인은 외형적인 선민의식 하나로 수천년동안 민족적 동일성을 유지했다. 선택의 교리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더욱 큰 힘을 공급한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죄 속에 그냥 두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래서 그의 보혈로 구속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죄를 얻게 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로 인해 심판과 저주를 면할 수 없게 되었었는데!

    선택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 신자라 하더라도 회개와 중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에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는가!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심판을 면하는 일이요 세상에서도 죄의식을 극복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신자들도 자칫 세상 일만 크게 보고 하나님께 관련된 이 구원의 일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택하신자를 그의 음성으로 부르시고 부르신자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입혀서 실제로 그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죄를 사해주심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녀 삼으심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둘은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로 삼으심은 더 높은 차원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기 위해 예수의 보혈로 죄를 속해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수치를 덮고 저주를 제거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다시 낳아주셔서 본성을 바꾸신다. 옛사람이 죽고 회개한 새사람이 다시 나서 하나님이 주신 새 삶의 능력을 조금씩 맛보며 자라가게 하신다.

    복음은 이 일을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도록 돕고 계심을 알려준다. 신자의 삶은 자기 힘으로 살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택함은 물론, 속죄함도 그렇다. 하나님이 다 행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신자로서의 권능의 삶은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도우신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복된 소식의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 소식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돌이킬 수 밖에 없다. 너무도 비참한 자신에게 너무도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듣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게 만든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게 임무이다.

    3. 복음적 말씀 사역의 중요성

    이 엄청난 구원사업의 핵심을 설교자가 맡은 것이다.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바른 교회의 특성으로 설파했다. 그리고 권징 곧 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목사는 이 일의 중심에 서서 이끌어 나가는 직책이다. 그리고 온 교회는 목사의 이 일을 도와야 한다.

    교회의 사역을 사람들은 이것 저것 많이 말한다. 개혁, 구제, 연합, 사회정의, 선교등등 다 중요한 사역임에 틀림없다. 이것들은 속죄와 자녀됨의 여러 요소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안그러면 인간의 냄새만 풍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 교회에는 집회 때마다 참석하며 기도하고 말씀 읽는 일을 게을리하는 신자가 너무 많다. 그래서는 않된다. 교회는 서로 권면하며 이 거룩한 일에 열심을 내도록 서로 권면해야 한다.

    집회에 빈번히 빠지는 사람, 신앙의 발전을 위해 교인들에게 주는 과제를 도무지 안하는 사람, 세상적으로는 부한데도 헌금에 인색한 사람, 지옥에 떨어지는 인생이 허다한데 전도할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 도덕적으로 거리낌이 되는 일을 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져 있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

    또한 정상적인 교회생활에는 거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이상한 자극을 찾아서 헤매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감정적인 부흥회를 따라다니고 자신은 은혜를 많이 받은 것으로 착각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칼빈은 분명히 지적한다. 자녀됨의 증거는 순종이요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치 않은 일을 하나씩 고침으로 자녀로 자라간다. 성령은 그 일을 위해서 힘을 공급한다.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들은 즉각적으로 사과하고 돌이키기에 힘씀으로 구원이 이루어져 간다. 서로 죄를 용서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실천한다. 모든 시비와 원망을 없애고 감사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가 보여야 한다. 그래서 하늘나라와 신자 본인들의 기쁨이 되는 일로 차고 넘치는 것이다. 외형적인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중요한게 아니고 행해야 할 선을 행치 않는 것도 죄를 범하는 것이다. 봉사하고 헌금, 구제, 전도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억지로 상받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자신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을 앎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아직 남은 육의 생각이 자꾸만 그것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을 행할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말씀 사역은 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힘으로 이행하게 만든다. 그저 예배에서 설교 잘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않된다. 말씀 사역은 교회의 전체방향, 신자의 훈련을 포함한다. 교회생활 전체를 복음의 힘으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적인 말씀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4. 복음적 논지훈련

    설교를 작성하다 보면 하나님의 복음보다는 다른 것들을 논지로 삼는 경우가많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복된 소식을 기준으로 삼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회개, 개혁, 선교, 사회정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신자라면 정치, 경제, 사회등 삶의 제 분야가 다 하나님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논지를 보자.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자." "어려울 때 일수록 힘을 내자." "가난한 이웃을 돕자." "기도해서 능력을 받자."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자." 얼마든지 복음과는 거리가 먼 논지를 볼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해도 예수가 해 주신 일을 힘입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여기 몇 개의 학생들의 논지를 살펴보자.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예수믿고 건강하게 살자."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이 정도라도 논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편이다. 앞에 것들보다 복음에 많이 접근한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논지이다. 예수의 이름도 들어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내용이 삶에 적용되려면 그 사이에 들어갈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다. 그것이 없이 그냥 막연히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 도와주시니 된다는 식으로 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하나님이나 예수대신 부처님이나 조상신의 이름을 넣어보라. "부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부처님을 믿고 건강하게 살자." "부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부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절에서 이 설교를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의 설교인가?

    절에서 이 설교를 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수양과 덕과 노력에 의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자신의 힘으로 하는데에는 부처나 예수나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복을 누리려면 절대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완성하신 일들을 선물로 받아야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안식, 치료, 능력등은 반드시 예수가 이미 행하셨음을 알고 믿음으로 얻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복된 소식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그 내용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것으로 앞의 논지를 손질해 보자.

    "평안 자체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계심을 아는 자는 항상 안식한다." "예수께서 채찍을 맞아 병을 담당했으니 병의 억압에서 자유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그의 능력도 받은 자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도 누리자." 여기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우리의 할 일이 나타난다. 믿고 일어나는 것이다.

    얼핏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힘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계속 그렇게 듣게 된다면 점점 주의 힘으로 살고 자기 자랑은 줄어들어갈 것이다. 앞의 학생들의 논지들이 잘못된게 아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여 그리스도가 해주신 일을 누리게 만들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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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설교하라


    어느날 강단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인가 막힌 것 같다. 청중들은 저 멀리 석고처럼 앉아있다. 막막한 느낌이다. 목이 타고 자꾸만 그만 하고 싶다.

    그러면 생각한다. "거 보아라! 기도가 부족하니까 그렇지. 설교준비가 않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날 설교는 확실히 망치고 만다. 준비가 부족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괴로워한다고 좋은 설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설교시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는가. 준비가 완전해야만 아니라 항상 어느 시기에나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무슨 설교를 하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말하자. "하나님은 설교시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내 속에 계시다. 단지 나는 워밍업이 필요할뿐이다. 이제 마음을 잘 가다듬고 성령에게 자신을 맡기자." 대개는 이 정도로 해결된다.

    이것은 설교 도중의 처하는 믿음의 자세이다. 믿음으로 대처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다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시작할 때만 아니라 설교를 구상하고 작성할 때도 같은 믿음으로 해야 한다.

    1. 설교의 능력

    능력있는 설교자! 설교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 이적이 일어난다. 병자가 낫고 문제가 해결된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참된 신자로 만들어진다. 이렇게만 된다면 목회보다도 더 재미있는 직업도 설교보다 더 신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은 그 자체가 구원의 능력을 준다. 본래 구원의 능력은 인간에게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다. 그래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난다. 이것이 복음 전하는 사역의 핵심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눈으로 보고 만지지 못해도 느끼고 감화를 받고 그래서 힘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실제로 이러한 경험을 매 주일마다 하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받고 나갈 것인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예배를 통해서 일어나야 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 경험을 하겠지만 특별히 예배는 그러한 경험이 집약된 것이다. 찬양과 기도와 헌금 그리고 축도 어느 하나도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항은 없다. 특별히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는 가장 중심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먼저 이 능력과 만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느끼는 것은 너무도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전도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한다. 그렇다해도 너무도 연약한 지혜나 말솜씨 그리고 무엇보다 영감에 빈약한게 설교자임을 느낀다.

    목회자들은 자주 고통스런 가정을 방문한다. 너무도 착한 신자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무슨 말을 위로로 할 것인가? 늘 하는 말로 얼머무리고 말가? "참 않됬습니다. 너무도 좋은 분이었는데. 자 이제 천국 가셨으니까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남은 분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너무도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후에 목사의 설교를 들은 그 가족이 말한다. "그 설교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목사는 어리둥절해 진다. "아니,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일 하신 것이다.

    하지만 설교자들은 믿음을 가지라. 하나님은 분명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물론 감동을 못받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할 때 일하신다. 설교자는 단지 도구이다. 도구가 유능하면 말씀도 잘 전해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도구라면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말이 졸해도, 지혜가 부족하고, 성경지식과 기도와 열정에 한참 연약해도 일단 설교자로 나섰으면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항상 훌륭한 설교를 위해 준비하고 연습하고 열정을 다해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능력이 공급된다는 믿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설교하라 - 2. 준비단계에서부터 주어지는 능력

    목회자들은 언제나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 상담할 때나 심방할 때나 아니면 운동을 하면서도 언제나 설교를 준비한다. 교인들의 문제를 들으면서 전혀 배우지 않았던 대답이 나온다. 또한 성경을 읽으면서 전혀 모르던 새로운 감동이 나온다. 참으로 신기하다. 분명히 성령이 주신 것이다.

    설교자는 느껴진 감동을 적어놓을 수첩이 언제나 필요하다. 성령이 주신 도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성령이 주신 논지가 가장 훌륭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신자들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이것이 영감있는 설교를 만들어 준다. 또한 설교자는 이러한 영감에 민감해지는 훈련을 해야 한다.

    바울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성령이 주신 복음의 내용만을 말한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그리고 그것만이 사람의 깊은 곳까지 변화를 줄 것이다.

    하지만 이 영감을 항상 믿어서는 않된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판단해 보아야 한다. 사탄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기발한 것이라고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믿어선 않된다. 이단들도 같은 방법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이 옳건 틀리건 영적인 것은 틀림없다.

    과연 이것이 복음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감동을 주더라도 완전한 율법일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완전한 이단의 주장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반드시 복음적인 논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신학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나 다 감동이 있다고 설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성령이 감동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목을 쓸 때까지 또는 토요일 밤까지 심지어는 주일 아침까지도 아무 생각이 안떠오를 수 있다. 모든 힘이 고갈된 느낌이다. 때로는 감동적인 논지가 생각나도 이번 주 행사와 다를 수도 있다. 절기 설교와 맞추어서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설교자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한다. 어떠한 절차를 거치든간에 계속 기도하면서 해야 한다. 비록 주일 아침까지 영감이 안 일어나도 설교자는 계속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한다. 그냥 보통 설교 준비하는 식으로라도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기도는 쉴 수 없다.

    비록 일상적인 설교준비라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한다면 상당한 영적 수준을 유지할 것이다.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금방 주실지 모르지만 안그러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은 준비하느라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설교자를 도우신다. 그래서 옆길로 나가지 않도록 힘을 제공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주신 약속은 언제나 유효하다. 적어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말이다.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 13:11)"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그러므로 비록 부족한 것 같아도 꾸준히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작성하자. 그리고 매 순간에 성령이 도우신다고 믿자. 많은 경우에 준비한 내용이 너무도 평범한 것 같다. 그러나 거기서 용기를 잃어서는 않된다.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는 청중들이 감동하는 모습을 믿음으로 그려보라.

    설교자는 자기 삶의 모든 상황을 믿음을 통해 보는 지혜를 얻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지혜보다 더 큰 하늘의 지혜를 쌓는다. 또한 그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다 설교를 통해서 나오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설교작성에 임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설교하라

    3. 설교도중에 주어지는 능력

    설교하기 전에 원고를 들여다 본다. 때때로 자신이 없어진다. 너무도 내용이 뻔한 것 같다. 사람들이 재미 없어 할 것 같다. 늘 듣던 상투적인 설교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되면 설교할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갈등은 설교에 영향을 준다. 표정과 말에 자신도 힘도 다 없어진다.

    이러한 상태로 나가다 보면 점점 설교가 힘이 약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말한다. "아마도 나는 설교의 은사를 받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지혜도 없고 말도 잘하지 못한다." 절대로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 않된다. 느낌만 믿고 하나님의 약속은 믿지 않는 설교자는 이미 자격이 없다.

    시카고의 한 교회의 강단으로 올라는 문에 카드가 하나 붙어 있었다고 한다. 거기 적힌 귀절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약속과 모세의 대답이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4, 15)

    이 말씀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지라. 자신의 설교에 감동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라. 자신의 설교가 기막히게 잘 선포되는 것을 떠올리라. 그러한 생각으로 가슴을 뜨겁고 벅차게 하라. 심리전인가? 그렇다. 그러나 하나도 잘못된게 없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청중들의 입장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에 오늘의 말씀은 큰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설교에서 감동을 자신이 받을 준비를 하라. 청중들가 같이 느끼라. 하나님의 영감이 말씀하는 동안 흐르고 있음을 믿으라. 하나님은 나를 설교자로 지명하셨다!

    정말로 자신의 설교를 진지하게 생각하라.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서 남을 감동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설교를 느끼라. 또한 비록 부족한 내용이라도 하나님은 감동시킴을 믿어야 한다. 성경 말씀도 그렇지 않은가! 부족한 인간들의 말이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무오하게 그리고 능력있게 하신다.

    자신이 하는 설교를 재미 있어 하라. 내가 재미 없으면 물론 청중도 재미 없다. 단에 올라가면서부터 재미 없게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이면 않된다. 기쁨과 확신이 넘쳐서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했다. 감동과 확신으로 나아가자."

    이러한 믿음의 자세는 설교의 전달에 필수적이다. 청중에게 감화를 주기 전에 자신부터 감화시키라. 그러면 하나님은 설교 도중에 반드시 일하신다. 사람들은 설교자의 열정에 의해서 압도된다. 열심히 듣고 감동한다. 그들은 밝은 낯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설교자를 사랑한다.

    4. 설교의 주제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반드시 도우신다.

    차를 파는 사람은 오로지 팔기 위해서 모든 지식을 상황을 거기 맞춘다.그래서 사람들이 흥미와 매력을 느끼게 만든다. 설교자는 그 정도가 아니다. 최상의 것을 사라고 호소한다. 차 파는 사람은 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사실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존경심을 갖는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도 특별한 권위를 인정한다.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하는 이는 스스로 자신에게서 기대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신비한 삶에 자신을 던질 생각은 없는가?

    잘못된 동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가 있다. 심지어는 악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말하기도 한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말했다. 하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 하지만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빌 1:15,18)라는 것이다. 위선자라도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이용하시기도 한다.

    그렇다고 거짓말하는 설교가 용납된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부흥사는 말한다. "거짓말과 공갈을 하더라도 은혜만 받으면 되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경우로 일반화 해서는 않된다. 순수한 복음이 전파되도록 진실한 강사를 초빙해야 한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하는 동안에는 더욱 크게 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설교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믿어야 한다. 가능하면 그의 임재를 느끼도록 하라. 그 분이 나와 내 논리를 통해서 말하시게 하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설교하라

    5. 하나님의 능력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청중들의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 본다면 놀라지 않을 설교자가 없다. 그들은 절대로 설교자를 그대로 다 따르지 않는다. 또한 설교의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각자가 자기 삶 속에서 설교를 든는다. 각자가 자기의 배경과 전제와 현재 생각이 있다.

    아무리 집중해도 설교자의 말이 모두가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다. 말의 뉴앙스나 뜻도 다 다르다. 자기의 입장에 맞추어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기 생각하다가 설교를 듣다가 하면서 따라온다. 이것은 일반 생활 속에서도 알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도 자기 생각과 맞추어 대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성령은 듣는 사람 속에서 일하신다. 설교의 내용이 각자의 사정에 맞도록 말이다. 청중은 내용이 좀 관계가 없어도 설교자의 말을 가능하면 자기와 관련 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화를 내건, 감동을 하건 성령은 듣는 사람이 설교에 대해서 반응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선교사로 계시던 마펫 박사의 말이다. 유명한 미국 신학교 교수가 조정이 잘못되어 한 시골 교회로 설교하러 갔다. 이 교수의 말은 어려웠다. 그는 설교를 시작했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귀납법과 연역법의 두 카테고리가 있습니다." 난해한 내용이 막 펼쳐지고 있었다.

    통역자는 놀랐다. 자기가 듣기에도 너무 어려웠다. 그는 앉아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일에 찌든 아낙네, 코흘리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리고 통역을 시작했다. "이 시간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말하겠습니다." 그렇게 설교는 진행되었다. 설교자는 자기 설교, 통역자는 자기 통역을 했다.

    이것이 매 주일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지나친 말이다. 설교자의 말은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는 청중들의 말이다. 그리고 누가 들어도 말의 내용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에 맞추어서 들으려고 한다. 이때 성령이 설교자의 말을 해석해 적응시켜주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가 발견한 복음을 말한다. 성령은 동시에 듣는 사람들에게 맞추어 이해시켜 주신다. 설교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여전히 땅의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성령이 통역해서 심어준다. 설교가 아주 실패했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때 가장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웬일일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설교하라

    6.설교가 마쳐진 뒤에도 하나님의 능력은 들은 사람 속에 남아있다.

    설교자들이 지칠 때가 있다.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 전이나 후나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일이 생기면 옛날 기질이 모두다 그냥 들어나서 야단이다. 그럴 때 생각한다. "내가 도대체 무얼하고 있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강한 힘이 있습니다.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20년 30년 전 설교가 삶의 위기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변하면 확실한 주의 제자로 여생을 살게 된다.

    영국의 프레드릭 로버트슨이 설교에 대해 오랫동안 회의를 느꼈었다. 그때 한 친구가 와서 그에게 보고를 하였다. 한 가게 주인이 가게 뒷방에 그 목사의 사진을 붙여놓았다고 한다. 장사를 통해서 속이려는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사진 앞에 가서 마음을 돌렸다는 것이다. 설교는 반드시 영향을 준다.

    만약 설교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이 사실이 아니라면 설교는 이미 존재를 감추었을 것이다. 그것이 2천년이나 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모든 사람을 다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람의 영혼에서부터 변화를 주는 것으로 설교와 비교할 것이 있으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평범한 설교가 주어진다. 대부흥사들의 화려한 설교는 절대로 아니다. 보통 설교자들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청중들보다 지적으로 많이 떨어지기도 한다. 학력이나 경력이나 모두 청중보다 못하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범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설교하라

    7. 위대한 능력

    "복음의 설교가 위대한 능력으로 주어지려면 특별한(extraordinary) 설교자에 의해 들려지든지, 아니면 특별한 능력을 입은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들려져야 한다." 윌리엄 아더의 [불의 혀]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 말하는 특별한 설교자란 누구인가? 유명한 부흥사가 아니다. 모세나 바울 정도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세상에 살아 있는가? 그러므로 이제 보통 사람들이 능력을 받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그렇게 오랜 동안 설교를 통해 진행된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 밖에 믿을 것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특별한 능력을 받을 것인가? 우선 설교자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설교의 준비과정에 설교하는 동안 설교 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지해야 한다. 자신은 절대로 혼자 자기의 일을 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을 하되 그분과 함께 하고 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않된다.

    그렇다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준비도 전달도 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라. 또한 능률있게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성령이 하신다고 전혀 또는 거의 준비를 안하는 목회자도 있다. 메모도 안한다. 이건 아주 잘못된 것이다. 격언도 있지 않은가! "영감은 90%가 피나는 노력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다. 비참한 마음으로 억지로 하지 말라. 같은 값이면 긍지와 감사로 하라. 청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 자기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면서 하라. 교인들이 변화하는 것을 그리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강단에 올라서면 불처럼 외치라.

    하나님의 도움을 요구하라. 언제나 기쁘게 기도하면서 일하라. 잊지말라. 설교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고뇌의 떡을 조잡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은 그것을 먹을만한 것으로 바꾸신다. 그래서 은혜의 기적으로 주신다. 영원한 축복의 샘물로 부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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